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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함께 죽고 함께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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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한해의 끝을 맞이하였습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우리가 원하든지 원치 않던지 또 새해를 받게 될것입니다.
지난 1년의 삶이 어떻습니까! 자랑스럽습니까! 부끄럽습니까! 자랑보다는 후회가 많으신 것은 아닙니까!
1년을 돌아 볼 때 괴로움과 위로가 교차한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자랑스러운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본문에 배경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기도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하였던 바울에게
악의가 가득찬 거짓 교사들에 의해 바울은 불의를 행한 사람이요, 다른 사람에게 해롭게 한 사람이요, 또 속이는 자의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모금을 하라고 하자,
이를 기회 삼아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돈을 탐하는 자이며 고린도 교인들이 헌금한 것중에 얼마를 불의하게 착복하였다고 중상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헌금한 돈을 운반하기 위하여 그가 신임하는 디도와 다른 두 사람을 보내었는데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로 트집을 잡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2절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고 말합니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당부합니다.
6장 13절에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고 권고한 것에 대한 반복입니다.
진정으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우리를 받아들일 여지(room)를 마련하라는 것입니다. 형식적 화해의 제스처(gesture)만 하는 것이 아니라 허심탄회하게 속으로부터 받아들이라고 청합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그들이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사역할 때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고 밝힙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고리도교회를 향하여 심한 책망의 편지를 써서 보냅었습니다.
"교회안에서 나는 아볼로 파다 나는 바울파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교회안에서는 있을수도 없는 일이다. 아볼 로는 무엇이며,바울은 무엇이냐!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준것 뿐이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시냐!... 너희가 정신을 차리지 아니하면 내가 가만히 두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무섭게 책망하는 편지를 써서 디도의 편에 보냈 습니다.
그러나 편지를 보내고 나니까 바울은 너무 심했나 해서 근심이 되었습니다.
드로아에서 할일도 많은데 다 접어두고 마게도냐로 가서 거기서 디도가 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디도로부터 소식을 가지고 왔는데 교회에 불화가 없어지고 모든것이 잘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기쁨이 넘쳐있는 바울이 오늘 본문에 비쳐지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책망을 좋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권면해도 고치지 않고 정신을 차리지 못할때는 책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책망을 합니까!
오늘 고후7:3절을 보세 요!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저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딤후3:16-17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익하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고,책망을 받고 받아드리면 살고 복이 되고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보낸 교훈과 책망하는 말씀을 듣고 마음을 돌이키고 회개하고 고쳤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도 살고 더욱 사도 바울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사실 교회 공동체라고 하는것은 여러 지체들이 모여서 이루어 진 단체입니다.
그래서 모인 사람들이 모두 생긴것이 다르고 성품이 다르고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교회 공동체가 평화롭게 은혜롭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내뜻을 버리고 포기할줄도 알아야 합니다.
나 하나로 인하여 아름다운 공동체에 손해를 주어서는 안될것입니다.
교회가 평안할때는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도 은혜가 되고 기쁨이 있고 평안하고 가정의 범사가 잘 됩니다.
한 교회의 지도자가 바로 되고, 한 사회의 지도자가 바로 되고, 한 국가의 지도자가 바로 되어 모든 것에서 떳떳할 때 그 교회, 사회와 국가는 건강하고 밝게 될 것입니다.
3절에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고 말씀합니다.
한 공동체로서 "함께 죽고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기" 위하여 비난의 말, 원망의 말과 정죄의 말은 접어 두기를 원합니다.
한국 정치인들이 요즘 좋아하는 언어 가운데 '상생(相生)의 정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살게 하는 정치를 하자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중상함으로 서로 죽이는 '상살(相殺)의 정치'를 지양(止揚)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존중하되 합리적이고 국가발전을 위한 것일 때에는 받아들임으로 서로 살게 하는 정치를 하자는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하기를 원하는 이러한 정치를 하지 못하고 늘상 파행적이고 서로 죽이는 국면만 초래합니까
그것은 서로 믿지 못하고 남이 제안하고 주장하는 것은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으면서 내 것만 주장하고 나만 사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상생(相生)의 정치를 하자고 외치면서 속으로는 남은 죽이고 혼자만 사는 '독생(獨生)의 정치'를 하고자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여야(與野)가 서로 자기 주장만 되풀이 하고 있고 그 틈바구니에서 국민만 죽어 납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더불어 사는 삶입니다.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만이 배부르고, 상대방이 죽게 되든 말든 상관치 않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보조를 맞추고 협력하는 삶입니다.
더 깊은 의미는 '세상에 대하여 함께 죽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함께 사는' 삶입니다.
불의와 죄에 대하여 함께 죽고 의와 진리에 대하여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에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진리가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성도들의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은 서로 연합하고 서로 위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와 함께 사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4절에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비난하고 중상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바울은 그들을 향한 신뢰의 마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을 여전히 자랑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말썽 많고 말 많고 그를 욕하는 고린도 교인들이 어떻게 바울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까
그들의 비난과 중상의 말이 바울을 괴롭게 하고 섭섭하게 한 것이 사실이지만,
바울은 주님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한 시간들을 생각하기를 원하고, 여러 가지 괴로움 가운데서도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여전히 머물러 있음으로 위로를 얻고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성도들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을 추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함께"란 연합의 공동체적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마음을 열고, 마음을 넓혀서 다른 사람들을 우리 안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의 죄에 대하여 함께 죽고 여호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함께 사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마음으로 서로를 용납하고 어려움 가운데서 서로 위로하고 기쁨을 주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우리를 살리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6절에 보니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위로 하십니까!
 첫째는 사람을 통해서 위로하십니다.
외롭고 초조하고 근심에 찬 바울 곁에 디도가 왔습니다.
힘이 들 때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그 괴롬이 절반으로 줄어 들 것입니다.
그리고 위로가 될 것입니다.
전4:9에 보니
"두사람이 한사람 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으니 ... 한사람이면 능히 패하겠거니와 두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힘이 들 때에 사람을 통해서 위로해 주십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있을 때에 괴로울 때에 위로자를 많이 얻기 위해서는 평소에 덕을 쌓고 많은 위로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두가지 근심 고후7:10절 말씀을 읽는다
후회는 이전에 잘못을 뒤에 깨닫고 뉘우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연약하기 때문에 실수를 하게 되며,뒤에는 후회도 많이 합니다.
아무리 최선을 다 한다고 해도 여전히 미흡한 부분이 있고 아쉬운 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일에 대한 걱정을 하는 것은 아주 아무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은 떠나버린 차입니다. 과거지사는 울어도 안되고 힘써도 안되고 아무리 몸부림해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거지사를 가지고 이 지나버린 이 일을 가지고 끊임없이 걱정하며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근심 걱정을 기우(杞憂)라고 하는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중국 기(杞) 나라 사람들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살고 있는데 누군가가 하늘이 무너진다는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는 소문이 기나라에 돌자 이 나라 사람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이 하늘이 무너진다며 먹고 마시며 방종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기나라는 망했고 기우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서 망한 것이 아니라 근심 때문에 망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걱정은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걱정합니다.
이것은 사실 굉장히 이기적이고 교만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형벌이기도 합니다.
내 마음 내 뜻대로 고집하고 그렇게 안되면 그것 때문에 안달을 합니다.
이런 걱정은 자아가 강하고 고집이 강한 사람에게 있는데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도 상하고 그 고집으로 남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완전무결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최고의 기도라는 겟세마의 기도는 뭐였습니까
아버지여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여호와 하나님 뜻대로 해주시옵소서란 기도였습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뜻대로 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믿지 못해서 오는 걱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만은 못삽니다. 남의 힘도 빌려 살아야됩니다.
사람의 관계는 혼자 살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지만 마음에 안 맞는 불신의 사람들과 살면 큰 불행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걱정 근심을 했습니다.
바울은 그 사랑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책망을 했는데 오히려 역효과 나면 어떨까 걱정 했습니다.
너무 직설적으로 책망을 하면서 바울은 무척이나 가슴이 아프고 또 바울 자신도 걱정을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랑으로 책망을 했기 때문에 자기가 마음이 아픕것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는데 교인들이 말을 듣지 않으니까 설교할 때 항상 매를 때리는 설교를 했습니다.
교인들이 주일 성수도 제대로 안하고 십일조 생활도 헌금생활도 안하고 봉사생활도 전혀 없으니까 이것을 본 목사님이 항상 설교할 때마다 여러분 그렇게 예수 믿으면 지옥 갑니다. 그 설교를 들은 교인들이 그 목사님 앞에 거부반응을 나타내고 결국 목사님을 반대해서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후임 목사님이 오셨는데 후임 목사님도 교인들의 상태를 보니까 똑같은 설교를 하셨어요. 주일 성수도 안하고, 믿음의 삶도 살지 않고, 봉사생활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교인들에게 그렇게 미지근하면 지옥 간다고 설교했어요.
그런데 전임 목사님은 쫓아내고, 후임 목사님은 환영을 받았습니다.
왜 전에 목사님은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것이 마치 고소한 것처럼 이야기를 했었는데, 지금의 목사님은 안타깝고 자신이 지옥에 갈 것처럼 자신이 정말로 괴로워서 설교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식들 매를 때려도 여러분 무조건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로 때리고 내 종아리를 때리는 마음으로 때리면서 자식을 훈계한 자식은 절대 삐뚤어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정에 따라서 화가 나서 분해서 욕심에 따라서 매를 때리면 자식 버립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편지를 받고 그들이 애통하고 회개하고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 다시 경건해 지고 서로 화해했어요.
이것을 본 바울의 마음은 참 기뻤다고 그랬습니다.
바울은 근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세상적인 근심과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식 사놓은 사람들은 얼마나 편하지 못할까 생각을 해요.
날마다 근심해야 할 것 같아요. 마음 병들지 않을까
세상에 속한 근심은 우리에게 해가 되고 결국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죄 자체를 부끄러워하고 아파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를 부끄러워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회개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한다.
구원이라는 것은 지옥으로부터 천당으로 가는 것도 말씀하지만,
히브리어로 말은 구원이란 쇼저라는 말은 병든 것에서 낳게 되고 망한 것에서 일으키게 되는 총체적인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는 근심은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근심해야 됩니다. 하되 여호와 하나님 뜻에 따른 근심해야 됩니다.
십자가를, 더 큰 것을 지지 못한 것을 근심해야 됩니다.
더 충성하지 못한 것은 우리는 근심해야 됩니다.
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 것을 근심해야 됩니다.
내 자아가 더 깨지지 않는 것을 근심해야 합니다.
이런 근심은 축복된 것입니다.
이런 근심은 겸손으로 이어지고 회개로 이어져서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어서 이전보다 더 좋은 자리로 여호와 하나님이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은 주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주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위로를 기대해서느 안됩니다
사람의 위로도 한계가 있습니다. 오직 주님 뿐입니다.
선다싱은 인도의 시크교도의 가문에서 출생하였는데 처음에는 기독교를 반대하고 비판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신비적인 체험을 통하여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인도와 티베트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전도자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는 특히 힌두교도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선다싱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한 신학교수가 그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힌두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는데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다싱이 대답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학교수는 그의 간단한 대답에 만족할 수가 없어서 다시 질문합니다.
"힌두교에는 없는 특별한 가르침이나 교리가 기독교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특별한 가르침이나 교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크리스천으로 개종시킨 것은 바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어떤 사람으로 크리스천이 되게 하는 것은 기독교에 다른 종교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고매하고 독특한 가르침이나 교리나 사상이나 철학이 있는 까닭이 아니란 것입니다.
옛사람을 변하여 새사람 되게 하는 것은 교리나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은 요한 1서 5장 12절에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 그분 만이 우리의 생병이요 구원이요 위로자이십니다
우리는 세상 근심을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뜻대로 근심을 하는 것입니다.
자아를 이루기 위해서 근심하기보다는 내 자아를 깨뜨리기 위해서 근심해야 합니다.
체면을 차리기 위한 근심이 아니라 진실하기 위한 근심을 우리는 해야 합니다.
잘 살기 위한 근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정말로 근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해 주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길을 인도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근심하지 않고 근심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세상 근심은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근심은 우리가 더 높은 사람 더 깨끗한 사람 더 거룩한, 값있는 사람으로 바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바울처럼 근심하여서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입는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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