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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천국 시민권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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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국민이 해외로 여행을 하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여권(Passport)입니다. 법적으로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정부가 여권을 발급합니다. 여권을 보시면 “대한민국 국민인 이 여권 소지인이 아무 지장없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여주시고 필요한 모든 편의 및 보호를 베풀어 주실 것을 관계자 여러분께 요청합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권은 소지한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이기에 해당 국가에서 모든 편의 및 보호를 베풀어 줄 것을 요청하는 정부의 공식 증명서입니다.
그러나 여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아무 나라나 갈 수는 없습니다. 비자 면제 협정을 맺은 국가끼리는 가능하지만 아직도 많은 나라에서는 비자를 발급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비자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해당 국가에서 당신은 우리나라에 와도 좋다 라고 허락하는 증명서입니다. 우리가 직접 그 나라에 가서 허락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상주하는 대사관이 있습니다. 따라서 비자를 받으려면 해당 국가의 대사관에 가서 신청을 하고, 인터뷰를 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제일 비자를 받기 힘든 나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미국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미국 비자발급을 위해서 고생을 한번쯤은 한줄로 압니다.
저는 97년도에 미국 비자를 발급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부목사 신분에, 재산도 없고, 세금을 낸 증명서도 없었습니다. 비자 대행을 하는 교회 집사님이 미리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 발급을 꺼리 분들 중에 하나가 목사님들입니다. 여행 비자로 미국에 들어갔다가 눌러 앉아 있는 목사님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점은 아시고, 혹시 나오지 않더라도 섭섭해 하지 마십시오. 속으로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미국 대사관에 가서 일찍부터 줄을 서 있는 것부터가 속상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다짐을 했습니다. 가진 것은 없지만 당당하게 인터뷰를 하리라. 대사관 직원이 이것 저것을 묻더니 마지막으로 왜 미국에 가려고 하느냐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솔직히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여호와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복 받은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내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니 맘대로 하세요. ” 당당하게 말했더니 OK, 온 가족이 어렵지 않게 비자를 받았습니다.
왜 한국 사람들이 미국에 가서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가지려고 애를 씁니까 그만큼 사회 복지나 교육 제도가 좋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 사람도 65세가 넘으면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얻습니다. 그러면 매월 한 사람당 600불씩 나옵니다. 아프면 공짜로 치료해 주고, 아파트도 마련해 주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까 기를 쓰고 미국에 가려고 하고,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얻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합니다.
몇 달전에 해외 원정출산 이란 웃지 못할 해프닝을 보지 않았습니까 미국은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간에 미국에서 아이를 낳으면 자동으로 시민권이 주어집니다. 이점을 이용해서 한국의 열성 부모들이 수천만원의 돈을 들여 미국에 가서 애를 낳는다는 보도였습니다. 그 만큼 미국의 시민권이 가치가 있다는 반증입니다. 이 땅에서 힘있고 잘사는 나라의 시민권을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0절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시민권은 땅에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천국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 당시에는 로마 시민권이 대단했습니다. 로마 사람 가운데 절반은 자유인이었고, 절반은 노예였습니다. 자유인 가운데 절반 즉 로마 사람의 1/4만이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이 없는 자유인들 중에서 세금을 많이 내면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고, 돈을 많이 주고 이 시민권을 살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만일 군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려면 21년 이상 군인으로 근무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이미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7절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여기서 ‘생활하라’ ‘politueste’ 라는 단어는 ‘시민답게 살라’는 의미임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당시 빌립보 사람들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 것을 염두에 두고 한 표현입니다. 빌립보에는 특별히 로마의 군인 가운데 퇴역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이들은 로마를 위해서 싸웠고, 그 대가로 시민권을 가지고 있기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에 사는 교포들 가운데 미국 시민권을 액자에 넣어 걸어 놓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시민권 얻기가 힘들었으면 그것을 가보처럼 소중히 여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너희들이 로마 시민권에 대해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것처럼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천국 백성답게 살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한 국가가 이루어 지려면 반드시 3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먼저 영토가 있어야 하고, 국민이 있어야 하고, 주권이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라도 빠지면 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 천국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천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뜻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자녀요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2: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
여러분은 60억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이 지명하여 불러 주신 왕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아름다운 천국의 상속자임을 확신하십니까
천국 시민이 되는 것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결과입니다. 대한민국에 태어나면 대한민국의 백성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고, 백성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가집니다. 자기가 태어날 나라를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내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내가 아멘으로 받아들일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힘쓰고 애를 써서 얻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시민권을 얻으려면 얼마나 수고를 해야만 합니까 그러나 천국의 시민권은 예수를 나의 구주 나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고백하면 됩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자녀의 권세를 얻고, 천국의 상속자가 됩니다.
여기서 천국 백성의 의무가 나옵니다. 내가 수고해서 내가 얻었으면 내 맘대로 살면 됩니다. 그 영광을 내가 받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시민권은 내 수고로 얻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내게 축복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투자해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천국 백성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을 품고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했던 바울의 마음 속에 항상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로마의 시민권은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천국 백성의 시민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은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 백성답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17절)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귀한 것으로 알고, 자기가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님을 위해 살고 있는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본으로 삼고 따르고 있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믿음의 동역자들의 모습을 내게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얼마나 바울의 요청이 애절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러번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
자기가 수차례 천국 시민답게 살 것을 눈물로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19절에 나와 있습니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
배를 신으로 삼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배를 즐겁게 하는 것을 최고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당시 로마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먹고, 마시고, 쾌락을 즐기는 잔치였습니다. 그들은 매일같이 연회를 베풀고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성적인 향락을 즐겼습니다. 새벽까지 즐기고 오전에는 잠을 자고 오후에는 목욕탕에서 몸을 풀고, 밤이면 다시 향락을 일삼았습니다. 얼마나 먹었든지 당시 기록에 의하면 연회장에는 토하는 단지를 가져다 놓았다고 합니다. 먹을 것은 많은데 배는 한정되어 있으니 실컷 먹고 토하고 그리고 나서 또 다시 먹습니다. 이것이 배를 신으로 삼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식당은 평균 인구 200명당 하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인구 80명당 식당이 하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먹는 장사는 망하지 않는다. 그렇게 식당이 많은데도 다 장사를 하는 것을 보면 우리들이 얼마나 먹는데 열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산이고 강이고 바다고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식당과 술집과 러브호텔이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온통 향락으로 가득합니다. 너무 먹어서 병이나고, 너무 먹어서 비만이 됩니다. 그리고 살을 뺀다고 아우성입니다. 찜질방에서 땀을 빼고, 헬쓰 클럽에 가서 뛰고 야단이 났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모양만 다르지 로마 시대의 사람들이나 오늘 우리의 모습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지구촌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2초당 1명꼴로 사람이 죽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저 북한만 해도 먹을 것이 부족해서 어린 아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의 풍요로움 속에서도 세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는 노인들이나 소년 소녀 가장들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이들의 배고픔의 소리를 왜면한다면 그것은 범죄입니다.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왜면한다면 그것은 분명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작지만 그들을 향해서 관심과 사랑을 가지기 원합니다. 물론 그들의 필요를 우리가 다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은 감당해야 할 줄로 압니다. 우리 주변에는 구룡마을과 달터마을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가난과 질병 속에 어렵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소년 소녀 가장 및 독거 노인들을 돕고자 합니다. 이런 작은 사랑의 나눔에 여러분 모두 적극적으로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배를 신으로 삼는다는 것은 탐욕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지나친 욕심이 곧 죄임을 강조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에 이르니니라” 죄와 죽음의 원인은 곧 욕심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탐욕은 가장 무서운 독소입니다. 인간의 죄는 바로 탐욕의 노예로부터 출발합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사탄의 유혹으로 인해 욕심이 생깁니다. “눈이 밝아져서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선악과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인지라” 욕심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비정상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3장 5절에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탐심과 우상숭배를 동일시합니다. 지나친 욕심을 갖고 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어리석은 행동임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욕심은 더 큰 욕심을 낳습니다. 욕심은 자기 이기심의 노예로 빠뜨립니다. 죄는 곧 이기적인 욕망입니다. Selfish Desire! 우리가 경계해야 할 최고의 적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좇기다가 급기야 우물 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다행히 박넝쿨 같은 것이 있어서 붙잡게 되었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위를 쳐다보니 달콤한 것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벌집에서 꿀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꿀 맛에 취해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생쥐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이 붙잡고 있는 넝쿨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사람은 꿀맛에 취해 그것도 모른체 매달려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인지 모릅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세상의 달콤한 유혹과 탐욕에 노예가 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배를 신으로 삼는 자의 결국은 타락이요 마침내 멸망임을 오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지 못하고, 세상 것에 취해 배를 신으로 삼는 자의 비극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한해가 저물어 가는 시점에서 나는 과연 배를 신으로 섬기고 살지는 않았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에 취해 있다면 돌이켜야 합니다. 아직도 탐욕에 사로잡혀 이기심의 노예로 살고 있다면 돌아서야 합니다. 욕심을 줄여야 합니다. 이미 내게 주신 것을 감사하며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을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끊임 없이 베풀고 나누는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영적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바로 천국을 소유하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천국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성지가족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하늘 시민권자는 누구를 기다립니까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마지막 재림의 때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약속은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아직 성취되지 않은 한가지가 바로 재림입니다. 우리나라는 워낙 급박한 종말론을 강조한 이단 사이비들이 많다보니 재림 신앙이 많이 약화되어 있습니다. 오신다고 하면서 오시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멀었구나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오심은 도적같이 오십니다. 왜 하필이면 왕이신 주님이 도적같이 오십니까 그것은 깨어서 준비하는 자에게 영광스런 주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련한 다섯처녀와 같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지 못하고, 등불을 밝히지 못하면 주님의 잔치 자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 주님이 오셔도 맞이할 수 있는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행한데로 보응하시기 위합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산 자들에게는 영원한 천국의 잔치에 참여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벌이 주어집니다. 또한 신앙인들에게는 어떻게 이 땅에서 천국의 집을 예비했느냐에 따라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을 얻는 자리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의 삶은 천국 시민권을 가진자나 그렇지 못한 자나 별로 다른 것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가난하고 힘들고 어려워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는 날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영광스런 자리에게 서게 됩니다.
우리가 들어가게 될 천국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아름다운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눈물과 고통과 슬픔이 없는 곳입니다. 만왕의 왕되신 주님께 면류관을 던지며 찬양하는 곳입니다. 주님이 친히 함께 하시고 영원히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곳입니다.
누가 이 천국의 주인공입니까 바로 어린 양 예수의 생명록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재림의 날에 우리의 영광스런 신분이 드러납니다.
저는 주님 오시는 날 영광스런 자리에 설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봅니다.
춘향전에 나오는 이도령의 모습입니다. 이도령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 땅에 내려옵니다. 겉모습은 거지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산천초목이 벌벌 떠는 암행어사입니다. 비록 그는 거지행세는 하고 있지만 거지는 아닙니다. 거지의 즐거움이 그의 즐거움이 될 수 없고, 거지가 추구하는 것이 그의 인생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가 구박을 받고, 천대를 받아도 그의 마음 속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는 때를 기다립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허리에 찬 마패를 꺼내 보이며 암행어사 출두요. 마패를 꺼내면 그의 신분이 드러납니다. 그 앞에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습니다. 그를 괴롭혔던 자들이 다 벌벌 떨게 됩니다. 그의 모든 삶은 암행어사 출두하는 그날에 맞추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마패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는 자는 가장 확실한 천국의 마패를 가진자입니다. 비록 내 삶이 힘들고 곤고할 지라도 만왕의 왕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나의 신분이 확실히 드러나고,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왜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까 천국의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왕노릇 하시는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영광스런 모습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과 소망이 있기에 로마의 핍박과 고통 속에서도 카타콤으로 숨어 들었던 것입니다.
저는 카타콤 속에서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아름다운 신앙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햇빛도 들지 않는 차디찬 굴 속에서 평생을 살다 죽어간 유골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습니다. 무려 250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 지하 토굴 속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의 고백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무엇이 이토록 그들을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어갔읍니까 바로 영광스런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의 천하를 호령하던 권세도, 찬란했던 로마의 영광도 장차 오실 천국과 비교될 수 없었기에 이들은 카타콤 속에서 주님의 오심을 찬양하며 기쁨으로 죽어갔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믿음이 로마를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시키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아무리 좋아도 천국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분당이 좋아도 천당만 하겠습니까 아무리 수지가 수지 맞는 곳이라 할지라도 천국가는 것보다 수지 맞는 곳이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안타까움은 바로 재림에 대한 신앙이 점점 약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삶에 취해서 주님의 다시오심을 순간 순간 망각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아버님이 즐겨 부르시던 찬송이 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먼 하늘에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주님이 오시는가
가실 때에 다시 오마 약속한 주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재림의 신앙이 희미해 지는 것은 교회가 생명력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재림의 신앙을 다시 한번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현실을 무시하거나 등한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국 시민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날을 잡아 놓고 기다리는 어리석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언제 주님이 오시더라도 맞이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희망과 소망은 다릅니다. 희망은 그저 내가 이루어 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루어진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망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소망은 언제나 현재를 이기는 능력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였지만 영원한 본향을 소망했기에 세상에서 장막에 사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하늘의 상급을 소망했기에 바로의 왕자로서의 영광을 버리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기뻐했습니다.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을 보십시오. 돌에 맞아 죽는 고난의 자리에서도 오히려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능력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영광스런 보좌 우편에 서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많은 것을 가진 자였지만 모든 것을 예수를 위해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환란과 핍박과 죽음의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뻐했습니다. 끝까지 승리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가 받는 고난은 주님의 나라에서 받을 영광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올 한해 동안 무엇을 바라보며 달려 오셨습니까 내가 아무리 바쁘게 달려왔다 할지라도 십자가의 원수로 살았다면 그것은 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거룩하신 주님 앞에 세워주셨습니다. 영광스런 주님의 자리에 오게하셨습니다. 지금부터는 땅을 보지 마시고 하늘을 보시기 바랍니다. 천국의 소망으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패를 가진 자는 현실 앞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환경과 조건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빼앗길 수 없는 천국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하늘 영광 가득한 축복이 놓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천국 시민으로 합당한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축복의 그날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믿음의 고백으로 한해를 마무리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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