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주님께 돌아온다는 것: 경탄하는 마음(눅 24: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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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돌아온다는 것: 경탄하는 마음(눅 24:36-48)
참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예배당에 나온 여러분들에게 함께 기원합니다.
부활의 계절, 의미부여: 무엇을 성스럽게 여기든 그런 문화를 비웃을 수 없다.(니체)
완연한 봄입니다. 연록의 계절입니다. 부활절, 축제의 절기를 보내는 우리에게 딱 걸맞게, 각양각색의 꽃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고요. 그 덕분에 지구별 위를 거니는 게 참 즐거워졌습니다. 어떤 시인은 지옥이란 경이를 잃어버린 상태, 즉 감탄할 줄 모르는 것, 따뜻한 가슴이 아니라 돌가슴이 되어버린 것, 그것이 지옥이라고 탄식하더군요. 그 반대로 천국이란 무엇일까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내 삶을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았다는 감사하는 태도로 사는 것, 성스러워하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아닐까요. 뭇 생물들이 자신의 생명력을 강하게 발산하는 시절입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피조세계를 감상하며, 늘 경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되기를 소원합니다.
교회력과 신앙, 그리고 가치관
오늘은 부활절 세 번째 주일인데요. 부활절부터 성령강림절 이전까지 7주간 부활절 축제의 기간을 보내게 됩니다. 기실, 매주일이 ‘작은 부활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일요일이었고,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유대-기독교인들은 토요일에 지키던 안식일을 일요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또 당시는 주님의 재림이 금방 일어날 것이라고, 본인들 세대에 이뤄질 거라 믿었던 터라, 매주일을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였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죠. 하지만 점차 주님의 오심이 연기/유보되자, 신앙인들은 1년을 주기로 절기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먼저 부활절을 기점으로 사순절과 성령강림절이 만들었고요. 그 후, 성탄절을 중심으로 강림절과 주현절이 확립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이렇게 고정된 후, ‘년-주기the annual cycle’의 갱신, 첫날은 강림절로 전환되죠.)
우리가 이 1년 주기, 그리스도의 생애를 토대로 한 이 리듬을 지키는 이유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닮아가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교회 밖 사람들은 전혀 관심이 없겠지만,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를 소중하다고, 성스럽다고 여깁니다. 가치 있게 여깁니다.
가치관이라는 게 있죠. 저마다 가치관들이 조금씩 상이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최고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간/친구/가족관계를 돈보다 더 중요히 여기는 사람도 있고요. 수입/수익이 많이 않지 않아도 자신이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업무를 감당하고 있다며 만족하는 사람도 있죠. 한편, 워라밸, work and life balance라고 하나요. 적당히 돈 벌고, 적당히 취미생활-삶의 질-을 하면서 사는 이들도 있죠.
돈은 생활에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돈만을 숭앙하게 된다면, 인간의 영혼은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돈 외에도 소중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거듭 상기해야 합니다. 돈 중독에서 해독되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신앙, 주님의 삶을 본받는 것, 여기에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비끄러매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육의 부활: 지옥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신도들을 통제하는 나쁜 목회
오늘도 지지난주와 지난주에 이어서 주님의 부활사건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에 대해 강조합니다. 육체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부각시킵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요? 이게 잘 믿어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제자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부활하신 주님을 재회한 제자들이 공포에 휩싸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유령을 보고 있다고, 어떤 환각증세에 시달리는 건 아닌가 하며 겁에 질려있습니다. 37절입니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느낀 당혹감, 두려움을 단번에 간파하시고, 말씀하십니다. 38절부터 40절까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이윽고 주님은 뜬금없이 제자들에게 먹을 것이 있는지 질문하고요. 생선 한토막을 드십니다. 41절부터 43절입니다.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어째서 본문은 주님께서 무언가를 먹는 장면까지 세세히 보도하는가, 이런 물음이 생기는데요. 유대문헌 중에 “천사는 먹지 않는다”는 문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자신이 천사가 아님을,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는 육적/물질적인 존재로 부활했음을 드러냅니다. (일부 학자는 그리 괘념치 않지만, 어떤 학자들은 가현설/영지주의에 대치된다는 데에 방점을 찍습니다.)
육체의 부활이 그냥 믿어지면 좋겠는데, 잘 안 믿어질 수도 있는데, 조바심 갖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 육의 부활 사건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이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기 때문인데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요.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 역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바울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지 않았습니까.(고전3:17)
헌데, 자칫 우리는 내세, 사후생, 천국을 강조하다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천대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은 귀한 것이고, 육은 하찮은 것이라고, 이원론적인 틀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흔합니다. 더 나아가, 극단적인 사례가 종종 발생합니다. (천국-지옥 패러다임을 근거로,) 지옥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며 목사인 자신에게 복종하라며 신도들을 죄인 혹은 종놈 취급하는 무례하고 포악한 목회자가 극소수이지만, 그 폐해/영향력은 지대합니다. 매스컴은 잘 걸렸다고 덤벼들고요. ‘개독’, ‘먹사’라며 교회를 질타하는 여론이 한차례 전국을 휩쓸죠. 교회의 공신력은 또다시 바닥을 찍고, 선교의 길은 막히고, 교회를 등지는 사람들이 더 늘어납니다.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것 같아 너무 속상합니다.
지옥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지옥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는 재고해보아야 합니다. 3년 전, 어떤 학생이 “하느님은 모든 이를 용서하시는데, 지옥은 왜 있는 건가요?”라고 어느 유명한 성직자/목회자(프란체스코 교황)에게 묻었답니다. 이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질투하는 교만한 천사가 있었어요. 하느님의 자리를 원했죠. 그럼에도 하느님은 그를 용서해 주시려고 했는데, 천사가 ‘됐어요. 용서 같은 건 필요 없어요. 나 혼자로도 충분하니까’라고 말했어요. 바로 그것이 지옥입니다. -나 아닌 다른 이가-하느님이 지옥에 보내는 게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겁니다. 지옥이란,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지 않고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지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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