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고난 속에 찾아온 부활절(요 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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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속에 찾아온 부활절(요 20:1-18)
요한복음에 의하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장사되었습니다. 당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4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데, 부자, 존경받는 공회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 선하고 의로운 자 등으로 소개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가 실은 예수님의 숨은 제자였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높은 지위에 있었던 그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따를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는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을 매장할 수 있도록 시체를 요구했습니다.
역시 유대 공회원인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만 두 번 등장합니다. 한 번은 일찍이 예수님을 밤에 찾아간 적이 있었고, 두 번째가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인데, 그가 예수님 장례에 쓸 몰약과 침향을 일백 리트라나 가져왔습니다. 일백 리트라는 약 40Kg인데, 왕의 장례식에나 사용할 만큼의 많은 양이라고 해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은 그들의 왕이 가이사라고 말했지만, 니고데모에게는 예수님이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식을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닌 전혀 뜻밖의 인물들이 지켰던 것입니다. 그렇게 성금요일 오후, 예수님의 장례식이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에 의해 치러졌습니다.
이 장면을 그림으로 남긴 사람이 카라바조입니다. 로마 바티칸 피나코텍 관에 보관되어 있는 카라바조의 작품 <예수 그리스도의 매장 / The Entombment of Christ, 1604>에는 무덤에 내려지기 직전, 축 쳐진 예수님 시신의 머리와 가슴 부분을 아리마대 요셉이, 무릎과 다리 부분을 니고데모가 힘겹게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들 뒤에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또 다른 마리아가 각각 다른 슬픈 표정으로 있습니다. 그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 위치를 확인하고 다음날인 안식일을 지낸 후, 제 3일째인 주일 새벽, 아직 어두울 때 예수님의 무덤을 다시 찾아갑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이 옮겨져 있고 그 안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 사실을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요한)에게 알렸습니다. 장례에 사용된 많은 양의 몰약과 침향을 노린 도둑들의 소행일까요? 아니면 유대 당국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간 후, 그가 살아났다는 소문을 내고, 제자들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속셈일 지도 모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즉시 무덤으로 달려가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무덤 안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만 가지런히 놓여있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도 원래대로 놓여 있었구요.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그들은 두려움 속에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예수님이 누누이 말씀하셨음에도 부활하실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그렇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단지 시신이 사라졌다는 사실만 알려줄 뿐이지요.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긴 합니다. 만약 시신이 도둑맞았다면, 굳이 세마포와 수건을 풀어서 원래 자리에 잘 정돈해 두고 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베드로와 요한은 집에 돌아와서도 문을 꼭꼭 걸어 잠가두었습니다(19절). 언제 당국으로부터 시체 도난범으로 몰려 체포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이야기는 빈 무덤 사건만 있는 게 아닙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현현 사건이 있지요. 현현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주인공이 막달라 마리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두려움 속에 무덤을 떠났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남아 있었습니다. 무엇이 한 여성을 그토록 담대하게 만들었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그녀가 슬피 울면서 무덤 안을 들여다보자, 놀랍게도 그 안에 흰 옷 입은 두 사람, 실은 두 천사가 있었습니다. “마리아여 어찌하여 우느냐?” 천사들이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내가 알 수 없습니다.”
마리아가 이 말을 한 후 뒤를 돌아보니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동산지기로 착각합니다. “혹시 당신이 예수님의 시신을 옮겼다면 내가 가져갈 수 있게 해 주세요” 부탁하자,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익숙한 그 음성에 비로소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선생님!” 하고 외쳤습니다. 그녀는 왜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자신이 생각했던 예수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생각 속에 있는 예수님은 무덤에 누워있어야 하지요. 그분은 그녀가 준비해 간 향품을 발라주어야 하는 수동적 대상이었지,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깨지지 않는 프레임이 있습니다. 그 프레임을 벗어나서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프레임이 자신을 보호해 주는 역할도 하지만, 자신을 가두는 감옥의 기능도 합니다. 종북 프레임에 갇힌 사람들은 지금 정권이 공산당 정권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공산당으로부터 나라 지키기 위해 순국결사대를 조직하는 것이지요. 80년대 민주화 프레임에 갇힌 사람들은 지금도 그 때처럼 검찰이 죄 없는 사람들을 붙잡아 대역 죄인으로 조작한다고 믿습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동성애자들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 프레임이 있어요. 거의 깨지지 않는 강철 프레임입니다.
부활신앙도 그러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다. 없다기보다는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부활하셨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는 세종대왕도 부활한 것이고, 이순신 장군도 부활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부활했고, 오드리 햅번이 부활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몸의 부활은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눅 24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과연 평강 속에서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지요.
그들은 눈앞에 나타난 예수님을 영이나 귀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너희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꾸짖으셨어요. 이것이 최초의 부활절 저녁 때,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이 “내 손과 내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말씀하십니다. 그 제서야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100%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기이하고 놀랍게 여겼을 뿐이지요.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믿는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언제 온전히 믿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가져오라 하신 후 그들 앞에서 드시고 나서입니다. 나중에 베드로가 자신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임을 선포할 때 이렇게 말하지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가 부활의 증인이다”(행 10:41). 예수님의 부활이 단지 마음속의 부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엘리야가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갔다고 말합니다(왕하 2:11).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이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어요. 동시에 성경 어디에도 이를 의심하지 말고 그대로 믿으라고 강조하는 구절도 없어요. 문학적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달라요. 성경에 계속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고(제자들조차), 동시에 계속 의심하지 말 것을 성경이 누누이 강조합니다.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성경 자체가 처음부터 상상의 산물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그리스신화나 단군신화와 같은 허구의 장르라는데 할 말이 없습니다. 그냥 마음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해야지요. 그나마 안 믿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의 확신에 갇혀 있을 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눈앞에 나타나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익숙한 그분의 음성을 듣고서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마라아의 이름을 불러주실 때 그녀의 프레임이 깨진 것이지요. 마리아는 너무나 반가워, “선생님!”하며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곧 아버지께 올라가야 한다”며, 붙잡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도마에게는 당신을 만져보라고 하신 예수님이 왜 마리아에게는 붙잡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성경의 난제입니다. 아마 계속 “나를 붙들고 있지만 말고,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하나님 곧 너희 아버지께 올라간다고 전하라!” 즉, 속히 가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는 동시에 오늘날 우리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보좌 옆에 앉아,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 - 하나님 나라 복음 - 을 전하는 것 말입니다.
부활절은 기독교의 가장 큰 명절이자 교회의 가장 기쁜 절기입니다. 그러나 올해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습니다. 사순절의 마지막 고난주간이 끝나면 밝은 부활절의 햇빛이 비쳐야 하는데, 캄캄한 코로나19 터널은 그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올해 사순절이 시작될 때만 해도 부활절을 이렇게 맞이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절에 결코 나쁜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한다. 또 그 전에 나쁜 일이 생겼다 해도, 부활절이 되면 다 해결되어야 한다는 어떤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활절은 그런 날이 아닙니다. 부활절에도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고, 그 전에 발생한 일들이 부활절 이후 더 악화될 수 있지요.
지난 2014년에도 부활절 4일 전, 세월호가 침몰하는 바람에 우리가 패닉상태에서 부활절을 맞이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절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부활절은 우리의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날이라기보다, 고난으로 피폐해진 우리 삶이 마치 무덤 속에 들어간 것과 같은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희망을 품도록 하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희망을 무너뜨리는 한계선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산산이 부서졌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없는 것처럼, 희망 없는 그리스도인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평상시 절망 속에 살 때가 많지요. 불신앙은 늘 절망이라는 말 등 위에 올라타고 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절망은 죄입니다. 부활절은 매년 우리를 그 악한 죄에서 건져 올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부활절은 그렇게 절망에 빠진 막달라 마리아를 구원하고, 소망 없던 제자들을 되살렸습니다. 그 결과 죽은 뼈와 같았던 옛 이스라엘이 새 이스라엘,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이 된 온 세상 사람들로 다시 태어났지요. 오늘 우리가 비록 큰 절망 가운데 부활절을 맞이했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 절망, 곧 죽은 희망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고난 속에 찾아온 부활절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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