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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경축과 변화(마 28:1-10)

본문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사망권세 다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아침,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기 위해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를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부활절입니다. 기독교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초대교회가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모인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매주일이 부활절이었습니다. 매주일을 주님의 날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 교우들은 주님의 부활을 되새기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주일 하루를 주님의 날로, 부활절로 지키면,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헌데, 금방이라도 다시 오실 것 같았지만 주님의 재림은 유보되었습니다. 더 긴 주기의 교회력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좋지만, 주님의 다양한 가르침들과 주님의 치유사역을 음미하는 것도 경건생활에 큰 유익이 되는 까닭입니다. 부활절과 성탄절을 중심으로, 그리고 주님의 생애를 토대로 한 해 주기의 교회력이 만들어졌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리듬을 맞추어 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매주일을 부활절로 지켰다는 것은 기억해봄직 합니다. 매주일을 작은 부활절로 지켰던 전통은 소중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언제 닥칠지 모르니 늘 깨어서 기도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또한 주변의 박해는 좀처럼 그치지 않는 위태로운 나날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곧 종말론적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날선 긴장감 속에서,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냈습니다. 안온한 분위기 속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가는 저로서는 감히 그들의 신앙을 흉내낼 재간이 없습니다.

오늘날 1년에 단 한번 지키는 부활절, 우리 신앙의 근간을 점검해봅시다. 부활절은 다시 사신 주님을 축하하며 즐거워하는 절기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생명을 위협 당할지라도 부활의 기쁨을 증언했던 선배 신앙인들을 떠올려봅시다. 특히, 제자들의 변화에 주목해봅시다. 혹여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해코지당할까 도망가거나 자기 목숨 하나 건지려고 꼭꼭 숨었습니다. 그토록 비겁하고 연약한 제자들이 변했습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주님을 증언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부활신앙이란 그런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를 담대하게 합니다.

부활절,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봅시다. 예수님의 부활과 전혀 동떨어진 채 살아가고 있는지 않은지, 주님을 만난 성경 속 인물들은 모두 변했는데 우리는 어떤 변화를 체험했는지.

최근에 <수영하는 여자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영국 런던 브릭스턴의 한 공공시설, 작은 야외수영장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인데요. 우리나라에는 야외수영장이 적습니다. 4계절 내내 이용할 수 있는 실내수영장을 선호하는 까닭일까요. 영국은 야외풀장이 곳곳에 있다고 합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여러 사진들이 나오는데, 상당히 자연친화적입니다. 수영장에서 몇 걸음만 내딛으면 바로 잔디와 나무들이 있는, 숲과 연결된 야외수영장 사진도 발견했습니다. 천연 그 자체의 호수를 수영장으로 쓰는 데도 있고, 바닷가 한쪽에 야외풀장을 작게 만들어놓기도 했더군요.

소설 <수영하는 여자들>은 위기에 처한 야외수영장을 구하기 위해 시민들이 똘똘 뭉치는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그 야외풀장은 오래전부터 지역주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곳이었습니다. 특히, 로즈메리라는 이름의 할머니, 그는 전 인생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10대 때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서 데이트를 한 곳도 거기였고, 사별의 아픔을 견딜 수 있게 도와준 곳도 거기였습니다. 또한 지역공동체로 함께 이웃들과 어울릴 수 있는 절묘한 공간이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야외풀장을 소유한 지자체가 재정난에 시달리자, 한 대기업이 제안을 해옵니다. 인근 아파트도 짓고 있으니, 야외수영장을 매각하라고, 그러면 기존의 허름한 야외수영장을 헐고 아파트주민만을 위한 회원제 스포츠센터를 건립하겠다고. 시 입장에서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로즈메리 할머니 외에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은 케이트라는 신문기자였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외지인이었습니다. 타지에서 자랐고 취직 차 브릭스턴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반려동물과 관련된 기사를 주로 담당했었는데, 어느 날 편집장이 야외수영장에 대한 연속기사를 써보라 지시합니다. 그런 계기로, 야외수영장에서 로즈메리와 만나고 그를 인터뷰하면서 케이트의 삶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소설 속 로즈메리는 정서적으로 매우 건강한 인물입니다. 88세의 나이로 신체능력은 약해졌지만 눈빛만큼은 푸르게 빛났고, 웃지 않아도 그 눈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고 합니다. 반면, 케이트는 공황발작에 시달리는 등 무기력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디를 가든 머리 위에 구름이 끼어있다는 표현도 있더군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고립된 채 일만 하면서 생활하니, 정신적으로 더 피폐해져가고 있었습니다. 자기연민과 자기혐오에 빠져서 말입니다. 그랬던 케이트가 로즈메리를 비롯해 야외수영장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또한 공동의 과제, 야외수영장을 지키기 위해 연대하면서, 케이트의 망가졌던 내면이 치유되는 서사는 소설의 또 다른 큰 줄기입니다. 자기 자신을 좀처럼 사랑하지 못했던 케이트가, 자기와의 화해,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긍정하고 사랑하게 되는 변화 말입니다.

결국, 소설 <수영하는 여자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자산과 가치를 지키는 일, 동네사람들과 정을 나누면서 사는 것, 또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 그런 것들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음을 흥겹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누군가의 존재만으로도 인생은 변할 수 있습니다. 이웃들과의 건강한 인간관계는 삶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물며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어떠하겠습니까. 주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하는 사람은 어떠하겠습니까. 충만한 인생을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부활절, 주님의 부활을 증언한다는 것은 말로만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더 거룩해지는 변화가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목격과 증언 _무서움과 기쁨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마태복음 28장 전반부입니다. 당시 참정권은커녕 인간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여성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매사에 배제당하고 소외당하기 일쑤였던 여성들을 재조명하는데 성경은 주저함이 없습니다.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여성들의 모습을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비참한 십자가형이 끝나고, 예수님의 시신을 염습하기 위해서 마리아 일행이 무덤을 방문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에게 시신을 수습하는 일만큼 소중한 일도 없습니다. 산 사람은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하니, 죽은 사람과의 작별, 애도와 비탄의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 속에 묻는 상징적인 의식, 그 장례절차는 숭고해야 마땅합니다. 마리아 일행은 그렇게 한껏 고양된 감정으로 주님의 시신이 안치된 무덤을 찾았습니다.

모호한 상실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하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실종사고 등으로 사랑하는 이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더구나 그 시신을 장례치를 수조차 없게 된 상황, 그래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 그것을 모호한 상실이라고 합니다. 마리아 일행은 어쩌면 이 모호한 상실에 직면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의 시신을 향유를 부으며 정성껏 닦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한두 사람 인력으로 열 수 없는 거대한 무덤 문은 열려있었고, 시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빈 무덤이었습니다.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혹여 나쁜 마음을 먹은 누군가가 주님의 시신을 훼손한 것은 아닐까, 죽은 이를 치장해둔 값비싼 세마포 등을 훔치려고 시신까지 도적질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입니다.

다행히 그런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천사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리아 일행에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285절부터 7절까지입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천사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에게 자초지종을 밝힙니다. 주님은 다시 살아나셨고,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과 재회하기를 원하신다고, 이 소식들을 널리 전파해달라고 청합니다. 마리아 일행은 양가감정에 사로잡힙니다. 8절을 보니, ‘무서움기쁨이 공존했다고 합니다. 날쌘 걸음을 재촉하다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기재되어 있지는 않지만 어딘가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조우합니다. 주님은 평안하냐, 인사말을 건네고, 마리아 일행은 주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합니다. 이윽고 주님은 무서워하지 말라고,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렇게 오늘 본문은 마감됩니다.

신비와 고백 _기록과 기억

성경은 신앙의 눈으로 읽어야 합니다. 부활사건은, 믿음이 없는 이들이 볼 때는 허탄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2, 큰 지진이 나며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이야기는 얼마나 허무맹랑합니까. 3절을 보니, 천사의 형상이 번개 같고 옷은 눈과 같이 하얗다는데, 어찌나 허황된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신앙이란 본디 신비입니다. 무서움과 기쁨, 우리의 태도는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식 너머,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계시하십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를 깨달을 때, 역설적으로 자유해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초자연적인 현상들은 대개 하나님의 현현하심theophany,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문학적 수사입니다. 신앙의 언어라고 할 수도 있겠죠. 다시 말해, 인간의 언어로 어찌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신기한 자연현상들로 대신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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