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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침상의 경배

본문

고려의 충숙왕 때 우탁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늙어 가는 인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하였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그렇습니다. 막을 수 없는 것이 세월입니다.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세월은 순식간에 흘러 1월은 12월이 되고, 아이가 노인이 됩니다. 2003년도를 시작한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오늘 벌써 송년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시는 여러분의 감회는 어떠하십니까
참 세월은 빠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한 노인은 세월의 짧음을 원망하면서 좀 더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만 해도 충분할 정도로 힘들고 길었습니다. 저에게 더 오래 살라고 해도 더 살 힘이 없고, 이젠 사양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 사람은 믿음의 족장 가운데 한 분인 야곱입니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 이 정도 산 것도 충분합니다. 이제 더 많은 세월은 저에게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문의 맨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니라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또 다른 이름입니다.
이 때 야곱은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침상의 경배란 달리 말하면 야곱의 생애 마지막 경배 였습니다. 침상 머리에서 경배했다는 것은 기력이 다했음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11장 21절은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했는데, 노쇠한 탓에 침상에서 경배할 때도 지팡이를 의지했음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그는 지팡이도 짚고, 자녀들의 부축도 받아서 간신히 생애 마지막 경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이 침상의 경배를 드리는 야곱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야곱의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을 맞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임종의 순간일 것입니다. 길고 긴 인생의 여정을 끝맺는 때가 오면 야곱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시간 우리는 비록 임종의 시간은 아니지만, 그 어떤 때보다 야곱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지금 이 해의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도 마지막 예배이기에, 그 마지막이 주는 느낌을 야곱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침상의 경배는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옵니까 이 침상의 경배는 야곱의 마음 속에 가득한 감사를 보여줍니다.
감사 가운데 최고의 감사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죽을 위기에서 건짐을 받아 살게 되면 감사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더 이상 살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의 경배를 드렸습니다. 또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손에 쥐게 되면 감사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손에 있던 모든 것을 놓게 되는 순간에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이 경건한 침상의 경배에서 추호의 원망이나 불평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 살아야겠다는 몸부림도 찾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충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저의 마지막 경배를 받으시옵소서라는 고백만 읽을 뿐입니다. 이런 감사는 정말로 어려운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을 통하여 배우는 사람이요, 참으로 강한 자는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이요, 참으로 부자는 가진 것에 만족하는 자요, 참으로 멋있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학교에서 시험치는 학생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학생은 침착하고 성실하게 답안을 써넣고 나갑니다. 그런데 어떤 학생은 종이 울릴 때까지 시험지를 붙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앉아 있다고 해서 시험지를 채운 것은 아닙니다. 답을 써넣지 못한 빈자리가 많습니다. 빈칸은 많고, 시간은 흘러갑니다. 그러다가 종이 울려 어쩔 수 없이 시험지를 내고 나가는 학생의 얼굴은 흥분으로 붉어져 있습니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입니다.
지금 우리들도 그런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해 동안 시험지를 붙잡고 살아온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답안지에 별로 정답을 써넣지 못한 채로 한 해가 흘렀습니다. 이젠 답안지를 제출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러나 아직 빈칸이 너무 많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허송세월만 했어. 왜 제대로 한 게 이렇게 없을까 정말 헛살았어. 벌어놓은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고, 몸만 축나고, 세월만 까먹었어 이런 가슴저린 후회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탈무드의 구절은 참으로 강한 자는 자신을 다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우리 마음의 불만과 원망을 가라앉힐 시간입니다.
또 지금 우리는 손에 쥔 게 별로 없는 데 대하여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한 해 동안 직장과 가정에서 열심히 살았지만,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많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번 것도 아니고, 크게 발전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한 해를 정리하는 마음이 허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 탈무드의 구절은 참으로 부자는 가진 것에 만족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디모데전서 6장 6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들에 만족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환하게 웃어주는 가족들, 이웃들, 먹고 입고 살아가는 현실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렇게 한 해가 허무하게 가고 있지만, 붙잡아 둘 수 없음에 대하여 원망할 수 있습니다. 끝내야 한다는 데 대한 불만이 가득합니다. 우세한 경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1대 0으로 지고 있는 축구 선수들이 경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심판의 호각 소리에 화가 난 표정으로 볼을 걷어차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판의 호각 소리에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운동장에서 나와야 한다는 데 대한 감사도 배워야 합니다. 이런 감사의 훈련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은 한 해를 끝내고 있지만, 언젠가 1년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끝내야 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생의 그라운드에서 우리를 불러낼 때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불만이 가득한 모습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나는 아직 퇴장할 준비가 되지 못했습니다. 난 좀 더 살아야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소리소리 지르겠습니까 아니면 충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 동안 먹이시고 입히시고, 좋은 사람들을 주셔서 참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나오시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퇴장에 대한 감사도 배워야 합니다.
저는 이 시간 침상 머리에서 인생의 마지막 경배를 드리던 야곱의 그 감사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야곱이 인생의 마지막 경배를 드리면서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는 아직 마음을 다 비운 게 아닙니다. 그 순간까지도 그의 마음을 붙잡는 게 있었습니다. 이것을 야곱의 인생 최후의 집념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까지 매달렸던 그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야곱은 임종의 때가 다가옴을 알고 아들 요셉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죽거든 나를 이 애굽에 묻지 말고, 조상들이 묻혀있는 선영에 장사하라 야곱에게는 가족 무덤이 있었습니다. 그 무덤은 일찍이 그의 조부인 아브라함이 마련한 막벨라 굴을 말합니다. 그 무덤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라헬이 묻혀 있었고, 야곱도 아내 레아를 이미 그 곳에 묻었습니다. 야곱은 자신도 그 곳에 묻히길 원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에 대하여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라고 맹세했습니다. 야곱은 아들의 맹세를 들은 후에 침상에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경배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침상의 경배는 조상들이 묻혀있는 선영에 묻힐 수 있게 된 데 대한 감사입니다.
선영에 묻히겠다는 야곱의 마지막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는 것은 그가 요셉에게 환도뼈 아래 손을 넣고 맹세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일명 환도뼈 맹세라고 불리던 고대 근동의 엄숙한 서약 의식입니다. 환도뼈는 생명의 근원과 권위를 상징하는데, 여기에 손을 얹고 맹세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맹세를 지키겠다는 표시였습니다.
사실 야곱이 임종을 맞는 애굽 땅과 그의 가족 무덤이 있는 가나안은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그 옛날에 시신을 거기까지 운구하여 장례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랬기에 야곱은 아들로 하여금 아무리 힘들어도 꼭 그렇게 하겠다는 맹세를 받아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는 마당에 묻히는 장소가 뭘 그리 중요하다고 그렇게까지 집념을 가진 것일까요 이것은 그가 자신의 고향을 생각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거기서 자랐습니다. 한 때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살기도 했고, 흉년을 피해 아들 요셉이 총리대신이 된 애굽에 와서 17년의 세월을 살았지만, 이젠 돌아갈 때임을 알았습니다. 돌아가야 했습니다. 왔던 곳으로. 몸뚱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마치 집을 나갔던 아이가 엄마 품으로 돌아오듯, 야곱은 돌아가길 원했습니다. 길고도 긴, 그리고 멀고도 먼 여정을 끝내고 돌아가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면 좋을까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엄마 품에서 출발했습니다. 엄마 없이 출생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엄마의 따스한 가슴이 우리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기는 더 이상 엄마 품에 머물지 않게 되었습니다. 조금 자라자 엄마 품에서 뛰어내려 아장아장 마당을 걷더니, 학교에 들어갔고, 청년이 된 후에는 넓은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활개치며 다녔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여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엄마 품을 잊었습니다. 자신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엄마 품을 잊는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안식처를 상실했습니다.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고, 반드시 돌아가야 할 그 품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좋아하던 세상이 자신을 박대할 때, 길거리를 비틀거리다가 쓰러집니다. 왜 그럴 때 언제든지 대문 열고 기다리는 엄마 품으로 가지 않는 것일까요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품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나온 존재들입니다. 우리 생명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시작되어 세상에 보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건 너무도 중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품이야말로 우리가 돌아가 안겨야 할 고향입니다.
예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가족의 품에서 눈을 감지 못하고 객사하는 사람을 가장 불쌍하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은 가족의 품에서 맞이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지막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서 맞이해야 합니다. 비록 중간에는 다른 곳을 쏘다녔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엔 아버지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2003년도의 이 마지막 주일에 우리는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길 기원합니다.
엄마 품을 떠나 세상을 돌아다니던 그 아들,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고, 많은 설움을 당하던 그 아들이 어린 아이처럼 통곡하면서 엄마 품에 안겨 울 듯이, 지난 1년 동안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고 힘들게 살던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겨 울어야 합니다. 이토록 따스한 가슴이 있음을 잊고, 세상에서 방황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집념을 가져야 합니다.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리라! 이것이 마지막 주일에 가질 집념입니다. 또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저를 받아주옵소서 이것이 마지막 주일 우리의 기도입니다.
19세기 미국에 포리라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부도 많이 하고, 저서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가장 사랑하던 딸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슬픔 가운데서 고백했습니다. 딸을 보내면서 저는 머리로만 배우던 신학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신학을 배웠습니다 그의 아내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비록 나 자신이 죽음과 임종에 대해 전문가이기는 하지만 딸이 떠나는 순간 모든 정답들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눈물뿐이었습니다 그 슬픈 순간에 필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따스한 품뿐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마지막 주일에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그 동안 바쁜 생활 속에서 어머니를 잊고 살 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품을 잊지는 않으셨습니까 거기가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입니다. 이젠 그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모든 피곤한 짐을 내려놓고, 사연을 벗어버리고, 그 넓은 사랑의 가슴으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이 시간 우리가 고쳐 부를 단어가 있습니다. 신선동 산복도로에 가면 버스 종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노선 버스들이 돌아가는 마지막 장소를 종점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곳은 종점이라고만 불러서는 안됩니다. 달리 생각하면 거기서 버스들이 출발하기 때문에 그 곳은 종점인 동시에 시발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곳이 우리 인생의 종점일 뿐만 아니라, 시발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는 사람만이 영원한 새 세상의 삶을 출발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품에서 임종을 맞는 사람은 이 세상이 아닌, 저 천국의 새로운 삶을 출발합니다. 그래서 종점은 출발점으로 바뀝니다.
우리가 이 마지막 주일에 여호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품은 우리에게 2004년도를 시작하는 출발점이 되실 것입니다. 버스 기사들이 그 종점에서 쉬면서 차 한 잔을 마시고 다시 출발하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품은 우리를 쉬게 하고, 필요한 것은 공급하여 출발할 힘을 줄 것입니다.
길을 잃으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라! 이것이 등산의 원리입니다. 일년을 살면서 혹시 길을 잃었다면, 그래서 방황했다면 이제 출발점이었던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우리 모두 오늘 여호와 하나님의 품을 생각합시다. 그리고 그 가슴을 떠나 방황했던 삶을 회개합시다. 그리고 그 품에서 충분히 쉬고, 다시 2004년도를 출발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의 품이 언제든지 우리가 쉴 종점이자 출발점이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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