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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너도 돌아갈찌어다

본문

벌써 또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한해를 어떻게 정리하고 있습니까 한해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단순히 반추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 생애에서 1년이 또 줄어들었습니다. 이렇게 몇 번인가 연말을 맞이하다가 우리의 인생은 끝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해동안 얼마나 벌었느냐, 얼마큼 내 지위가 상승했느냐, 혹은 얼마나 건강하게 지내 왔느냐 이러한 업적 중심의 평가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나의 나 됨에 대한 진실한 결산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연말이 되면 다른 어느 때보다도 시간에 대하여 많이 생각을 합니다. 특별히 새해를 알리는 밤12시가 되면 모든 사람의 시선은 시계에 집중이 되고 이 때 들려 오는 시계 소리는 일년 중에 가장 큰 소리로 우리의 가슴을 때립니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 우리가 시간에 대하여 예민해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면 바로 그 순간, 시간에 대한 이해가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사람들은 시간을 원형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침이 동일한 시계판을 반복하여 돌 듯이 오늘 같은 날이 내일도 오고 모레도 올 것이다. 어제의 사건이 내일도 반복될 것이고 오늘 주어진 기회가 내일 또 올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마디에 이르러서 사람들은 시간이란 결코 반복되지 않으며 끝을 향하여 직선적으로 나가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는 이 시간이 내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사실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내가 시간의 주체가 아닌 객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연말에 이르러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의 시간은 심판을 당하고 있나이다.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이 시간을 있게 한 영원을 알지 못하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알 수 없나이다. "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초월적인 영원과 내게 주어진 시간이 만나는 순간을 가리켜 철학적으로는 "eternal now"라고 부릅니다. "영원한 지금"입니다. 다른 말로는 "현존하는 영원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현존하는 영원성 앞에 시간적인 존재가 부딪치게 되면 인간은 자기가 보내 왔던 시간에 대한 심판 의식을 느끼면서 그 마음에 두려움이 싹트게 됩니다. 용기가 없는 사람은 이 두려움에 직면하지 못하고 무언가 바쁜 일을 찾아서 그 순간을 회피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망년회입니다. 그러므로 한해의 바뀜이라고 하는 것은 바쁘게 뛰고 있는 우리를 정지시켜서 시간에 대한 의식을 새롭게 하고 "너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묻는 하나의 표시가 됩니다.
캘리포니아의 심리학자인 브라이언 킹 박사는 거짓말을 연구하면서 "우리 사람들은 책임회피를 위한 거짓말을 많이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쁘다"고 하는 말이 그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바쁘다고 하는 핑계 때문에 나의 삶을 반성하지 않고 생각 없이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의 생활이야말로 그 생활 전체가 다 고도의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도 바쁘다는 거짓말 집어치우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내 인생을 결산하는 마음으로 서야합니다.
오늘 본문은 생의 마지막 지점에 서 있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지도해 온 모세는 이제 요단강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요단강가에서 이제 강 건너편에 있는 가나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에게 주어집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모세야! 약속한 땅을 바라보아라. 그러나 그 땅에 네가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 이 말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은 실망합니다. 그리고 질문합니다. "왜 모세가 못 들어가나 다른 사람은 못 들어가도 모세만은 들어가야지. " 이렇게 생각합니다. 모세의 마음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이 가르쳐 주는 바 요점은 그게 아닙니다. 모세는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세라 할지라도 자기 평생의 소원을 다 이루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바라보다가 생을 끝내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인생 속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물질도 명예도 신앙도 기회도 원하는 만큼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일생도 그러하기에 한해를 보내면서 후회가 많은 겁니다. "올해는 꼭 이루었어야 했는데!" 그 일을 못 이루었다고 낙심하십니까 원래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미완성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큼만 이루고 가는 것입니다. 이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제한적 인간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13절을 봅시다.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의 돌아간 것같이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너도 돌아가라"는 이 말씀을 따라서 모세는 이 세상을 하직하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그냥 죽는 것이라고, 기운이 진하면 그냥 죽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닙니다. 사람은 말씀을 따라 죽는 것입니다. "이리 오너라"고 부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는 인생을 정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사고가 나서 죽을 수도 있고 병들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마는 그 심층 깊은 곳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 그 부르심에 따라서 인생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죽음만 그렇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사건 혹은 전체가 다 그러합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고 사람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아도 그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 명령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라 하시면 오고 가라 하시면 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관속으로 아니면 땅 속으로 들어 가는가 아닙니다. 이리 오라고 부르시는 여호와 하나님께로 우리 인생은 부르심을 받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며칠 전에 시간을 내서 어머님을 찾아가 뵈었습니다. 집에 들어갔더니만 앨범을 정리하고 계셨습니다. 이상해서 여쭈어 봤습니다. "평소에 그런 일이 없었는데 어째서 낡은 앨범을 정리하고 계십니까"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에게 죽기 전에 맑은 정신을 주신다고 하시는데 요즘 내가 건강하고 머리가 맑으니 흐려지기 전에 준비를 좀 해야 되겠다. 죽을 준비를 하게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하냐. "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친구의 장례식에서 보았던 얘기를 저에게 해주셨습니다.
6남매를 두신 할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엿새 동안 자기 자식들을 하루씩 다 방문하고 토요일에 돌아와서 주일 예배를 드린 다음에 돌아가셨습니다. 죽고 나서 그분이 누워 있던 베개를 들추고 이불을 걷어 보니 그 속에 편지가 있었는데 6남매 각각에게 모두 편지를 써 놓았더랍니다. 고마웠던 일들, 부탁하고 싶은 일들을 다 쓰고 그 편지의 마지막에 우리 집에 큰 선산이 있지만 무덤 때문에 이 나라가 걱정한다고 하니 나를 화장해라 이렇게 써놓았답니다. 그런데 한 사람에게만 써 놓으면 다른 자손이 반대할까봐 여섯 자녀 모두의 편지 맨 끝에 이렇게 써 놓았답니다. 그 다음 옷장을 열어 보았더니 수의를 한 벌 깨끗이 준비해 놓았고, 가방을 열어 봤더니 지금까지 자녀에게 받아서 쓰던 용돈의 남은 것을 모아 놓았는데 편지가 쓰여 있기에 보니 "이 돈을 가지고 내 장례식 때 오시는 손님을 접대하거라"고 써 있더랍니다. 그리고 유난히 깨끗한 봉투가 있어서 보았더니 뭐라고 써 있었는가 하면 "목사님께서 내 장례식을 집전하실 때에 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 드리는 정성이니 이 수고비를 꼭 전달해 다오" 그렇게 쓰여 있더랍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치밀한 죽음의 준비를 보고 모든 자녀들과 일가 친척들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도 저렇게 죽고 싶다. 죽음을 준비하다가 깨끗이 가고 싶다"고 모두들 고백했답니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닙니다. 매우 복된 일입니다. 모세의 죽음은 저주가 아닙니다. 5절에 "네 형 아론처럼 너도 열조에게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로 말하면 가장 편안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죽음을 예고 해주는 것이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죽을 준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은총 속에서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속에는 더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모세가 이제 수명을 다하고 죽을 때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신학적으로 설명합니다. 14절을 봅시다.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제 너희가 내 명을 거역하고 그 물가에서 나의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
38년 전 가데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마르고 먹을 것이 없자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모세를 향하여 데모를 일으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모세에 대하여 분노하고 돌을 들어 치려고 합니다.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얼른 반석을 쳐 물을 내어 백성에게 먹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원망하는 그들을 보고 너무도 분하고 지쳐 버린 모세는 못할 말을 했습니다. "이 패역한 사람들아!" 그랬습니다. 직역하면 "이 망할 것들! 물을 줄 테니 쳐먹어라!" 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화를 내며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14절은 말씀합니다. "네가 나의 명을 어겼느니라. "
행동으로 보자면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 없습니다.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 마음 깊은 곳에 불순종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보면서 "얘야, 어디 좀 갔다오너라" 그럴 때 "네!" 그러면 순종입니다. 그러나 "가요. 가!" 이렇게 말하며 갔습니다. 이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행동적으로는 순종했습니다만 마음으로는 거역한 것입니다. 모세의 행위가 그러했단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지도자를 향하여 원망하는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알아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다만 모세는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에 따라 정성을 다해 감당해야 했는데 여기서 실패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직무유기 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기쁨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충심으로 복종해야 되었는데 억지로 따라왔단 말입니다. 거룩하게 맡겨 주신 성직을 마음속으로 짓밟아 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특권을 상실합니다. 어떤 특권입니까 생이 연장되어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특권이었습니다. 그는 한 인생으로서 자기의 누릴 것을 다 누리고 평안히 갑니다마는 생이 연장되어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복은 박탈당합니다.
성경에 보면 비록 죽을 사람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위해서는 생명이 연장되기도 합니다. 그 하나가 히스기야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시몬이라고 하는 분은 그 마음속 깊은 곳에서 메시야 보기를 간절히 소망하여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소원을 들으셔서 약속하시기를 네가 메시야를 만나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의 생명은 약속 받은 바 된 생명입니다. 그의 건강이 아무리 나빠져도 그의 나이가 아무리 먹어도 메시야가 오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마침내 메시야가 오신 다음에 그는 평안하게 눈을 감게 됩니다. 이러한 생명이란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주시는 은총입니다. 모세는 이 특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수명대로 살다가 갑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크든 작든 사명을 받아서 일하게 됩니다. 그 받은 바 된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되면 그 사명을 통한 축복이 주어집니다. 예를 들면 집사 직분을 잘 감당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디모데전서 3장에 말씀합니다. 집사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은 아름다운 지위와 믿음의 담력을 얻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어진 직분을 감당하면 물질이든 믿음이든 수명이든지 정상적인 것 위에 부어 주시는 plus α의 은혜가 약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시는 직분은 기대해야 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이 없어서 우리를 쓰십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내가 안한다고 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 실패하는 것이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여호와 하나님은 그 구원 역사를 면면히 이어오셨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귀하게 여겨 직분을 준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은총입니다. 또한 일할 기회가 항상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절대로 보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이 주어졌을 때 그 작은 일에 기쁨과 감사와 충성으로 응답할 것입니다. 써 주신다는 사실 자체를 은혜로 알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마음속으로 직분을 소홀히 여겨 복을 차서는 안 됩니다. 모세를 부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결정에 대하여 모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16절과 17절을 봅시다.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육체의 생명의 여호와 하나님, 우리 인생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 아무 원망 없이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온유한 마음으로 수용합니다. 다만 한 가지 소원이 남아 있습니다. 후계자를 보내어 주옵소서.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 이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 구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이 마음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자기는 떠나가지만 뒷일을 걱정하는 마음, 이스라엘이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18절에 명령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를 안수하고" 그랬습니다. 모세는 이 말에 기쁘게 순종합니다. 모세는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없다고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잠시 왔다가 떠나는 인생일 뿐입니다.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의 일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나보다 더 소중한 것, 내 명예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실 때에 그 때는 최선을 다해서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떠날 때는 말없이 조용하게 물러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은 그 반대입니다. 일 하라고 직분 주면 억지로 하고, 불평하며 하고 마지못해 게으르게 하다가 일을 놓게 될 때에는 서운해 합니다. 안색이 안 좋아집니다. "나 없으면 되겠나. 그 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 줄 알아" 이런 마음을 갖는단 말입니다.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에 내년 한해 동안 봉사해야 할 제직과 직분자를 임명하는 날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을 보면 그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 위탁하사 맡겨 주신 것이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직분을 받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게 위탁하신 바임을 알고 기쁨과 감사로 영접하는 마음으로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 직분을 내려놓는 사람들에게는 기쁘게 뒤의 사람이 더 잘할 수 있기를 바라는 그러한 마음으로 깨끗하게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셔서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 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갈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일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명령이나 환경의 변화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세는 위대하지만 그의 사명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40년 동안 광야를 행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저 가나안의 정복이라는 위대한 사명은 여호수아의 사명입니다. 두 사람의 사명이 서로 다릅니다. 우리 각자도 사명이 다릅니다. 다만 내게 주신 사명을 허락하신 만큼 허락하신 기회에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명과 직분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일에 힘스는 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인생의 길입니다. 여기에 겸손이 있고, 평안이 있고, 행복의 길이 있습니다. 올 한해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떤 자세로 일해 왔는가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진실히 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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