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또 다른 기회
본문
어느 유명한 부흥목사님이 자신의 설교가 은혜롭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된다는 생각을 하셨더랍니다.
그도 그런 것이 그 목사님이 설교만 하면, 사모님께서 제일 먼저 우신다는 것입니다. “아, 내 설교가 얼마나 은혜로우면 아내가 저렇게 우나” 자랑스럽더랍니다. 사실 목사가 아내가 울 정도로 감동적인 설교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자랑할 만하지요.
하루는 목사님께서 사모님께 물었답니다. “여보 오늘 말씀이 어땠어” 이렇게 묻는 목사님의 의도는 아내로부터 “참 은혜로왔어요” 하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모님의 대답이 “너무 교만하진 마세요” 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기분이 좀 상했습니다.
“아니 그저 내 설교가 어땠냐고 묻는 것 뿐인데 교만은 무슨 교만이야. 아까 보니 당신 막 울던데, 은혜가 되니까 운 것 아니야” 하고 목사님께서 물으시니 사모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꼭 은혜가 되어야 우나요”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가 안되는데도 울어”하고 물었더니,
사모님 대답이 이랬답니다. 사모님께서 목사님 설교 때마다 우는 이유가 두가지인데, 첫 번째는 집사나 되어야 딴 교회가서 다른 목사님 설교도 들어 볼 것 아닌가, 그러니 남편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못 받으면 나는 끝이다 생각하니, 무조건 은혜로 받아 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 되거나 안되거나 은혜로 받아 들이다 보니 울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목사님께서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갈 때 목사님의 뒷모습이 그렇게 측은해 보이고, 불쌍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는 것입니다.
사모님의 말 때문에 설교 잘한다는 목사님의 환상이 깨졌지만, 오히려 더 큰 은혜를 깨닫게 되었답니다. “오늘 내가 이만큼 목회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유능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보셨기 때문이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괘씸하게 보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미워하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지금 우리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 1년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격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고, 인도하시고,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2002년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먼저 감사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물론, 올 해 있었던 원치 않는 사건과 사고로, 2002년을 잊고자 하는 원망스러운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보시고, 감사로 1년을 마무리 할 수 있기를 축원 드립니다.
나이가 들어서 세월을 보는 관점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생명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삶이 점점 종점을 향해 가는 것을 느낍니다.
“어느 새 일 년이 다 지났다. 죽을 날이 그만큼 가까웠다. ”
그러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다시 느껴봅니다. 불신자들은 거의가 그렇습니다. 불신자뿐이 아닙니다. 신자들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쓸쓸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허무합니다. 의욕이 사라집니다. 빨리 늙어버립니다. 몸의 면역도 약해집니다. 그것은 해가 계속될수록 더 심해집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후회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런 사람의 죽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지옥을 보는 느낌일 것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살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정말로 불행한 삶이지요.
볼테르라고 하면 18세기 프랑스가 낳은 천재 중에 천재였습니다. 얼마나 머리가 좋고 해학의 명수였던지 그와 말싸움을 해서 이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의 책과 강의가 얼마나 인기가 좋았던지 일찍이 명성과 부의 절정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주님을 믿는 신앙이 없었습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이나 교회 다니고, 예수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100년 후에는 지구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미신가들이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이렇게 욕을 퍼붓는 나를 가만 두겠습니까”
결국 볼테르도, 화살 같은 세월을 막을 수 없었고, 마침내 나이가 들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몸을 떨며 의사에게 6개월만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한 말은 유명해 졌습니다. “오, 이제 나는 지옥 불에 들어가는구나”
여러분! 불신자들에게 죽음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서쪽으로 지는 해는 그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것이 죽음의 징조이기 때문이지요. 그 너머 오는 영원한 지옥을 느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다 있어도 불안한 것입니다. 망년회에가고 파티에 가서 술마시고 노래합니다. 술깨면 다시 죽음의 얼굴을 봅니다. 그러니 또 술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관점은 전혀 다릅니다. 성경적인 관점입니다. 1년을 마무리하며, 내 생명이 그만큼 풍성해졌다고 믿고, 감사하는 관점입니다.
머리가 허연 그리스도인이 병상에 앉아있습니다. 그는 지상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삶이었다. 어려움도 슬픔도 모두가 아름다운 것이었다. ”
그러면서 다가올 다음 세상을 마음 설래면서 바라봅니다. 주와 만나서 포옹할 것을 생각합니다.
아까 부른 찬송가 459장 가사가 그래요. 특별히 3절을 보십시오.
바울 사도도 그랬습니다.
딤후 4:7-8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이것이 믿는 사람의 대단원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은 다음에 오는 더 밝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일뿐입니다. 한 해가 끝나는 것은 그 연습입니다.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다 긍정적입니다.
하루를 마치고 자는 것도, 한 주일이 끝나는 것도, 한 계절 마쳐지는 것도, 모두가 그렇습니다. 죽음의 연습이요 동시에 더 나은 삶의 관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고백합니다.
“오늘도 주와 함께 아름다웠다. 그러나 내일은 더 아름다운 것이다. ”
육신적으로 보면 지난날이 후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주님의 섭리가 깃들어 있기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못 살아도 우리 주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을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해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기회를 더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이 그 내용입니다.
한 과원지기가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주인이 그 열매를 기대하고 1년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2년을 기다려 보았습니다. 그런데 또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주인이 고민하다가 3년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화가 났습니다. “찍어버려라!” 말합니다. 그런데, 과원지기는 한해만 더 참아달라며 ‘자신이 거름주고, 잘 가꾼 후에 그래도 열매맺지 않으면 찍어버리겠다’ 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먼저 무익함은 재난을 불러들인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무익함으로 인해. 찍어 던져버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무익이라는 것은, 때때로 동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변명이나 책임 전가의 구실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무익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원인이 됩니다.
성경에서 ‘무익함’을 왜 그렇게 심각하게 취급하느냐 하면, 무익이란 가면 뒤에는 극단의 이기심, 완고함, 무감각, 게으름이라는 것들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익함이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존재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물론 공동체에서도 걸림돌이 됩니다.
사람이나 물건이 그 본래의 가치를 발휘해서 본래의 목적에 잘 쓰이면 매우 값진 것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결국 재난을 불러오게 됩니다.
성경 달란트 비유에서 무익한 종은 어떤 심판을 받게 됩니까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 ”
이러한 표현은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무익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두번째 교훈은, 열매 맺지 못하는 이 무화과나무는 포도원에서 일을 하는데 방해물이 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3년이 되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잎만 무성한 채로 남아있는 모습은 상상 해 보십시오.
아마 열매는 없어도, 잎이 풍성하여 아름답고 싱그럽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풍성함이 포도원에서 일을 하는데, 걸리적거리는 방해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무화과나무는, 3년 동안 주인과 포도원지기의 극진한 보살핌 가운데 있었습니다. 주인이 그것에 열매를 요구하게 된 것은, 그 때까지 그러한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무화과나무에 주인의 돌봄이 없었다면 주인은 무화과나무에 대해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학자 윌리엄 버클레이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묻기를, “당신은 다른 사람을 얼마나 괴롭혔습니까”라고 묻지 않고, “당신은 얼마나 선한 일을 하였습니까”를 묻는다. 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였느냐” 입니다.
오래 전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던 영화 ‘로베레 장군’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나치에 저항했던 많은 저항운동가들이 감옥에서 처형당할 때, 저항운동에 참여한 적이 없으면서 잡혀온 한 사나이가 처형을 앞두고 대단히 억울해 하는 모습입니다. “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단 말이요. 나는 독립운동가가 아니란 말입니다. ”
이때 순순히 처형을 기다리고 있던 한 저항운동가가 그 사나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바로 당신이 죽어 마땅한 점이오. 전쟁은 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소. 수백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무참히 피를 흘렸고 수많은 도시들이 파괴당했소. 조국과 민족은 멸망 직전에 놓여 있소. 그런데도 도대체 당신은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단 말이오!”
여러분! 본문의 주인은 무화과나무에게 ‘얼마나 자랐느냐’를 묻지 않았습니다. 열매를 요구했습니다.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는 오히려 방해물이 되었습니다.
3번째 교훈은 이 무화과나무에서, 기회를 놓쳐버린 한 인간의 모습을 연상해 보게 됩니다.
무화과나무에게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선 제대로 자랄 수 있는 좋은 땅, 포도원에 심겨졌습니다. 그리고 잘 자랄 수 있는 충분한 보살핌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다 놓쳤습니다.
활을 쏘는 궁수에게 충분한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과녁을 제대로 겨냥하지 않았기 때문에 엉뚱한 곳으로 빗나가게 쏘아버린 화살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궁수는 우승의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기회라는 과녁을 놓쳐버리는 것이 죄입니다. 주어진 기회에 엉뚱한 곳을 겨냥해서 화살을 날려 버리는 것이 죄입니다. 늘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의 시간, 재능, 재물을 헛된데 다 써버린 사람에게 있어서, 나중에 그가 서게 되는 자리는 어두운데서 이를 갈며 슬피 우는 곳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절망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원 지기의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라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한해만 더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다고 했습니다.
포도원지기는 무화과나무의 운명을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가능성은 무화과나무 자체보다 포도원지기에게 있었습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다. ”고 했습니다. 포도원지기는 무화과나무의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주인에게 금년이라는 1번의 기회를 더 요청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변화 시키십니다.
무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오히려 방해물이 되고, 주어진 기회를 놓쳐 버린 사람들을, 포도원지기인 우리 주님께서 변화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말씀 하십니다.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긴장시키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금년’이라는 제한된 시간입니다.
이 말씀은, 일 년 후에도 열매가 없으면 찍어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마지막 1년을 무익하게 지난다면, 여전히 방해물로 남아있는다면,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면 그 때에는 별 수 없습니다. 찍어 버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씀하시는 ‘금년’ 이라는 것은 시간적인 1년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 시간까지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이 심판 받는 그 날까지 우리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여러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 때문에, 가정환경 때문에, 마음의 상처 때문에, 친구 때문에, 사회 환경 때문에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은 그래서 “내가 내 아들, 너희를 위해 기회를 달라는 포도원지기 예수를 너에게 보내지 않았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너를 위해 두루 파고, 거름을 줄 것이다. 내 아들 그리스도가 너의 생의 문제에 대한 마지막 해답이다.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열쇠입니다.
국민일보에 간증으로 연재되고, 인터넷을 뜨겁게 만드는 아름다운 자매가 있습니다. 저는 그 사이트에 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목사인 저도, 저의 신앙이 한없이 나약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만약 만 22세의 나이에 음주 운전자에 의한 6중 추돌 사고로, 뒤통수는 온통 찢겨지고, / 얼굴은 새까맣게 타 누군지도 알아 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유난히 낙천적인 성격이 만화에 등장하는 즐거운 공주를 연상시켜 ‘살랄라 공주’ 라 불렸으며, 어린 아이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여대생 이지선자매는 지난 2000년 그와 같은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불타는 차 틈에 끼여있던 지선 씨를 팔에 화상을 입으면서까지 구한 오빠의 품에 안겨 지선 씨가 비몽사몽간에 내뱉은 말은 “오빠, 나 이렇게 어떻게 살아. 나 죽여줘. ” 였다고 합니다. 의사들도 전신의 55%에 3도 화상을 입은 그녀를 보며, 살지 못하리라고, 혹 살게 되더라도 ‘사람 꼴’ 은 되지 않으리라고들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고 후 계속된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들에도 불구하고, 지선 씨는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살아남았고’, 오히려 투병 생활 가운데 자신이 체험한 흔들어 차고 넘치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은 이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선자매는 “온몸에 남은 상처, 짧아진 여덟 개의 손가락. 이 모든 것은 주님이 날 사랑하신 증거, 여호와 하나님이 다녀가신 흔적임에 감사합니다. ” 라고 간증합니다.
또 이렇게도 간증합니다.
“손가락 끝이 모두 바싹 타버려서 절단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손들고 찬양해야 하는데, 이 손 부끄러운 손 되지 않게 해주세요. 마음을 다친 가여운 아이들 치료하며 살고 싶은데,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부끄러운 손 되지 않게 해주세요. ’…
저는 요즘 교회에서 이 부끄러운 손을 높이 들고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이 손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악수도 하고, 손 흔들며 인사도 합니다. 그리고 이 손으로 이렇게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전하는 글을 씁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불쌍한 손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제게 이 손이 부끄럽지 않은 마음을 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지선자매의 글을 읽고, 어떤 분의 고백입니다.
“지선 자매의 이야기를 보면서 계속 눈물이 흐르고 지금 이 글을 쓰는데도 눈물이 그치질 않는군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 주시는지 항상 죄만 짓는 저를 얼마나 사랑해 주시는지.... ”
장래희망이 ‘희망을 전하는 선교사’ 라는 지선자매는, “처음엔 지선이를 구해낸 것이 실수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실수가 아니었음을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속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미 지선이 안에 시작하신 일을 끝까지 나타내실 것으로 믿습니다. ”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 안에 있으면 절대 절망은 없습니다. 어떤 일을 당한다 해도 말입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는 절대 희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송구영신이 지난 1년을 돌이키면, 송구스럽지만, 영~ 신난는 새해를 맞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이 베푸시는 사랑과 희망으로 2003년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찬양하십니다. 찬양집 36번입니다. 우리 가사를 먼저 천천히 읽어 보시고, 찬양 하십시다.
그도 그런 것이 그 목사님이 설교만 하면, 사모님께서 제일 먼저 우신다는 것입니다. “아, 내 설교가 얼마나 은혜로우면 아내가 저렇게 우나” 자랑스럽더랍니다. 사실 목사가 아내가 울 정도로 감동적인 설교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자랑할 만하지요.
하루는 목사님께서 사모님께 물었답니다. “여보 오늘 말씀이 어땠어” 이렇게 묻는 목사님의 의도는 아내로부터 “참 은혜로왔어요” 하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모님의 대답이 “너무 교만하진 마세요” 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기분이 좀 상했습니다.
“아니 그저 내 설교가 어땠냐고 묻는 것 뿐인데 교만은 무슨 교만이야. 아까 보니 당신 막 울던데, 은혜가 되니까 운 것 아니야” 하고 목사님께서 물으시니 사모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꼭 은혜가 되어야 우나요”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가 안되는데도 울어”하고 물었더니,
사모님 대답이 이랬답니다. 사모님께서 목사님 설교 때마다 우는 이유가 두가지인데, 첫 번째는 집사나 되어야 딴 교회가서 다른 목사님 설교도 들어 볼 것 아닌가, 그러니 남편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못 받으면 나는 끝이다 생각하니, 무조건 은혜로 받아 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 되거나 안되거나 은혜로 받아 들이다 보니 울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목사님께서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갈 때 목사님의 뒷모습이 그렇게 측은해 보이고, 불쌍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는 것입니다.
사모님의 말 때문에 설교 잘한다는 목사님의 환상이 깨졌지만, 오히려 더 큰 은혜를 깨닫게 되었답니다. “오늘 내가 이만큼 목회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유능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보셨기 때문이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괘씸하게 보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미워하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지금 우리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 1년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격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고, 인도하시고,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2002년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먼저 감사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물론, 올 해 있었던 원치 않는 사건과 사고로, 2002년을 잊고자 하는 원망스러운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보시고, 감사로 1년을 마무리 할 수 있기를 축원 드립니다.
나이가 들어서 세월을 보는 관점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생명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삶이 점점 종점을 향해 가는 것을 느낍니다.
“어느 새 일 년이 다 지났다. 죽을 날이 그만큼 가까웠다. ”
그러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다시 느껴봅니다. 불신자들은 거의가 그렇습니다. 불신자뿐이 아닙니다. 신자들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쓸쓸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허무합니다. 의욕이 사라집니다. 빨리 늙어버립니다. 몸의 면역도 약해집니다. 그것은 해가 계속될수록 더 심해집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후회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런 사람의 죽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지옥을 보는 느낌일 것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살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정말로 불행한 삶이지요.
볼테르라고 하면 18세기 프랑스가 낳은 천재 중에 천재였습니다. 얼마나 머리가 좋고 해학의 명수였던지 그와 말싸움을 해서 이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의 책과 강의가 얼마나 인기가 좋았던지 일찍이 명성과 부의 절정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주님을 믿는 신앙이 없었습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이나 교회 다니고, 예수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100년 후에는 지구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미신가들이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이렇게 욕을 퍼붓는 나를 가만 두겠습니까”
결국 볼테르도, 화살 같은 세월을 막을 수 없었고, 마침내 나이가 들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몸을 떨며 의사에게 6개월만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한 말은 유명해 졌습니다. “오, 이제 나는 지옥 불에 들어가는구나”
여러분! 불신자들에게 죽음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서쪽으로 지는 해는 그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것이 죽음의 징조이기 때문이지요. 그 너머 오는 영원한 지옥을 느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다 있어도 불안한 것입니다. 망년회에가고 파티에 가서 술마시고 노래합니다. 술깨면 다시 죽음의 얼굴을 봅니다. 그러니 또 술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관점은 전혀 다릅니다. 성경적인 관점입니다. 1년을 마무리하며, 내 생명이 그만큼 풍성해졌다고 믿고, 감사하는 관점입니다.
머리가 허연 그리스도인이 병상에 앉아있습니다. 그는 지상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삶이었다. 어려움도 슬픔도 모두가 아름다운 것이었다. ”
그러면서 다가올 다음 세상을 마음 설래면서 바라봅니다. 주와 만나서 포옹할 것을 생각합니다.
아까 부른 찬송가 459장 가사가 그래요. 특별히 3절을 보십시오.
바울 사도도 그랬습니다.
딤후 4:7-8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이것이 믿는 사람의 대단원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은 다음에 오는 더 밝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일뿐입니다. 한 해가 끝나는 것은 그 연습입니다.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다 긍정적입니다.
하루를 마치고 자는 것도, 한 주일이 끝나는 것도, 한 계절 마쳐지는 것도, 모두가 그렇습니다. 죽음의 연습이요 동시에 더 나은 삶의 관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고백합니다.
“오늘도 주와 함께 아름다웠다. 그러나 내일은 더 아름다운 것이다. ”
육신적으로 보면 지난날이 후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주님의 섭리가 깃들어 있기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못 살아도 우리 주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을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해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기회를 더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이 그 내용입니다.
한 과원지기가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주인이 그 열매를 기대하고 1년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2년을 기다려 보았습니다. 그런데 또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주인이 고민하다가 3년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화가 났습니다. “찍어버려라!” 말합니다. 그런데, 과원지기는 한해만 더 참아달라며 ‘자신이 거름주고, 잘 가꾼 후에 그래도 열매맺지 않으면 찍어버리겠다’ 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먼저 무익함은 재난을 불러들인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무익함으로 인해. 찍어 던져버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무익이라는 것은, 때때로 동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변명이나 책임 전가의 구실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무익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원인이 됩니다.
성경에서 ‘무익함’을 왜 그렇게 심각하게 취급하느냐 하면, 무익이란 가면 뒤에는 극단의 이기심, 완고함, 무감각, 게으름이라는 것들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익함이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존재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물론 공동체에서도 걸림돌이 됩니다.
사람이나 물건이 그 본래의 가치를 발휘해서 본래의 목적에 잘 쓰이면 매우 값진 것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결국 재난을 불러오게 됩니다.
성경 달란트 비유에서 무익한 종은 어떤 심판을 받게 됩니까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 ”
이러한 표현은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무익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두번째 교훈은, 열매 맺지 못하는 이 무화과나무는 포도원에서 일을 하는데 방해물이 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3년이 되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잎만 무성한 채로 남아있는 모습은 상상 해 보십시오.
아마 열매는 없어도, 잎이 풍성하여 아름답고 싱그럽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풍성함이 포도원에서 일을 하는데, 걸리적거리는 방해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무화과나무는, 3년 동안 주인과 포도원지기의 극진한 보살핌 가운데 있었습니다. 주인이 그것에 열매를 요구하게 된 것은, 그 때까지 그러한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무화과나무에 주인의 돌봄이 없었다면 주인은 무화과나무에 대해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학자 윌리엄 버클레이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묻기를, “당신은 다른 사람을 얼마나 괴롭혔습니까”라고 묻지 않고, “당신은 얼마나 선한 일을 하였습니까”를 묻는다. 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였느냐” 입니다.
오래 전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던 영화 ‘로베레 장군’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나치에 저항했던 많은 저항운동가들이 감옥에서 처형당할 때, 저항운동에 참여한 적이 없으면서 잡혀온 한 사나이가 처형을 앞두고 대단히 억울해 하는 모습입니다. “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단 말이요. 나는 독립운동가가 아니란 말입니다. ”
이때 순순히 처형을 기다리고 있던 한 저항운동가가 그 사나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바로 당신이 죽어 마땅한 점이오. 전쟁은 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소. 수백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무참히 피를 흘렸고 수많은 도시들이 파괴당했소. 조국과 민족은 멸망 직전에 놓여 있소. 그런데도 도대체 당신은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단 말이오!”
여러분! 본문의 주인은 무화과나무에게 ‘얼마나 자랐느냐’를 묻지 않았습니다. 열매를 요구했습니다.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는 오히려 방해물이 되었습니다.
3번째 교훈은 이 무화과나무에서, 기회를 놓쳐버린 한 인간의 모습을 연상해 보게 됩니다.
무화과나무에게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선 제대로 자랄 수 있는 좋은 땅, 포도원에 심겨졌습니다. 그리고 잘 자랄 수 있는 충분한 보살핌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다 놓쳤습니다.
활을 쏘는 궁수에게 충분한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과녁을 제대로 겨냥하지 않았기 때문에 엉뚱한 곳으로 빗나가게 쏘아버린 화살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궁수는 우승의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기회라는 과녁을 놓쳐버리는 것이 죄입니다. 주어진 기회에 엉뚱한 곳을 겨냥해서 화살을 날려 버리는 것이 죄입니다. 늘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의 시간, 재능, 재물을 헛된데 다 써버린 사람에게 있어서, 나중에 그가 서게 되는 자리는 어두운데서 이를 갈며 슬피 우는 곳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절망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원 지기의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라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한해만 더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다고 했습니다.
포도원지기는 무화과나무의 운명을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가능성은 무화과나무 자체보다 포도원지기에게 있었습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다. ”고 했습니다. 포도원지기는 무화과나무의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주인에게 금년이라는 1번의 기회를 더 요청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변화 시키십니다.
무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오히려 방해물이 되고, 주어진 기회를 놓쳐 버린 사람들을, 포도원지기인 우리 주님께서 변화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말씀 하십니다.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긴장시키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금년’이라는 제한된 시간입니다.
이 말씀은, 일 년 후에도 열매가 없으면 찍어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마지막 1년을 무익하게 지난다면, 여전히 방해물로 남아있는다면,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면 그 때에는 별 수 없습니다. 찍어 버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씀하시는 ‘금년’ 이라는 것은 시간적인 1년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 시간까지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이 심판 받는 그 날까지 우리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여러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 때문에, 가정환경 때문에, 마음의 상처 때문에, 친구 때문에, 사회 환경 때문에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은 그래서 “내가 내 아들, 너희를 위해 기회를 달라는 포도원지기 예수를 너에게 보내지 않았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너를 위해 두루 파고, 거름을 줄 것이다. 내 아들 그리스도가 너의 생의 문제에 대한 마지막 해답이다.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열쇠입니다.
국민일보에 간증으로 연재되고, 인터넷을 뜨겁게 만드는 아름다운 자매가 있습니다. 저는 그 사이트에 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목사인 저도, 저의 신앙이 한없이 나약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만약 만 22세의 나이에 음주 운전자에 의한 6중 추돌 사고로, 뒤통수는 온통 찢겨지고, / 얼굴은 새까맣게 타 누군지도 알아 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유난히 낙천적인 성격이 만화에 등장하는 즐거운 공주를 연상시켜 ‘살랄라 공주’ 라 불렸으며, 어린 아이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여대생 이지선자매는 지난 2000년 그와 같은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불타는 차 틈에 끼여있던 지선 씨를 팔에 화상을 입으면서까지 구한 오빠의 품에 안겨 지선 씨가 비몽사몽간에 내뱉은 말은 “오빠, 나 이렇게 어떻게 살아. 나 죽여줘. ” 였다고 합니다. 의사들도 전신의 55%에 3도 화상을 입은 그녀를 보며, 살지 못하리라고, 혹 살게 되더라도 ‘사람 꼴’ 은 되지 않으리라고들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고 후 계속된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들에도 불구하고, 지선 씨는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살아남았고’, 오히려 투병 생활 가운데 자신이 체험한 흔들어 차고 넘치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은 이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선자매는 “온몸에 남은 상처, 짧아진 여덟 개의 손가락. 이 모든 것은 주님이 날 사랑하신 증거, 여호와 하나님이 다녀가신 흔적임에 감사합니다. ” 라고 간증합니다.
또 이렇게도 간증합니다.
“손가락 끝이 모두 바싹 타버려서 절단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손들고 찬양해야 하는데, 이 손 부끄러운 손 되지 않게 해주세요. 마음을 다친 가여운 아이들 치료하며 살고 싶은데,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부끄러운 손 되지 않게 해주세요. ’…
저는 요즘 교회에서 이 부끄러운 손을 높이 들고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이 손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악수도 하고, 손 흔들며 인사도 합니다. 그리고 이 손으로 이렇게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전하는 글을 씁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불쌍한 손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제게 이 손이 부끄럽지 않은 마음을 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지선자매의 글을 읽고, 어떤 분의 고백입니다.
“지선 자매의 이야기를 보면서 계속 눈물이 흐르고 지금 이 글을 쓰는데도 눈물이 그치질 않는군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 주시는지 항상 죄만 짓는 저를 얼마나 사랑해 주시는지.... ”
장래희망이 ‘희망을 전하는 선교사’ 라는 지선자매는, “처음엔 지선이를 구해낸 것이 실수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실수가 아니었음을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속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미 지선이 안에 시작하신 일을 끝까지 나타내실 것으로 믿습니다. ”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 안에 있으면 절대 절망은 없습니다. 어떤 일을 당한다 해도 말입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는 절대 희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송구영신이 지난 1년을 돌이키면, 송구스럽지만, 영~ 신난는 새해를 맞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이 베푸시는 사랑과 희망으로 2003년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찬양하십니다. 찬양집 36번입니다. 우리 가사를 먼저 천천히 읽어 보시고, 찬양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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