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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1)

본문

이제 전도서 끝 부분으로 가면서 솔로몬은 적극적인 삶의 양태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적극적인 방법의 첫 번째 방법이 베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움켜쥐고 스스로를 강하게 하는 것이 가장 적극적인 것 같지만, 그건 사실은 나약한 것이고, 용서하고, 베풀고, 주는 그것을 결심할 때 정말로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귀한 말씀을 했습니다.
두 번째는 즐거워 하는 거라고 했어요. 인생고민 혼자 다 지고 다닐 필요 없고, 그 때 그때 따라서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며 살라. 이것이 적극적인 삶의 두 번째 방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방법인데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는 삶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적극적인 삶의 극치가 바로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너의 창조자 이 말 속에는 네가 누구냐 하는 의미가 들어있는 거에요. 너는 어떻게 만들어진 존재냐 너는 창조주에게서부터 나온 피조물이다. 이게 인간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너는 창조주에게서부터 나와서 그가 허락한 만큼 살다가 그에게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더 쉽게 말하면 너는 피조물임을 기억해라. 그런 얘기에요. 왜 피조물에게 있어서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이 가장 적극적인 삶이 되는 고 하니, 피조물의 존재가치와 목적과 의미가 창조주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피조물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그를 만드신 창조주를 거부하고, 그와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이 피조물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불행이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불행의 한 싸인으로써 무의미와 허무가 그 창조주를 거역하는 피조물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 피조물은 거기 붙들리게 된다. 그런 얘기입니다.
피조물에게 있어서는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행복의 길이 된다. 그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피조된 존재는 창조주 속에서 그 목적과 가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가장 피조물에게 있어서는 적극적인 삶의 방법은 창조주를 기억하는 삶이라는 거에요.
그렇다면 여기서 기억한다는 말의 의미를 해석을 해야 될 겁니다. 우리는 remember,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깜빡 잊었다가 아이쿠 생각이 났다. 이걸 기억한다고 그러잖아요 달력에다가 약속 날짜를 체크 해놓았다가 깜빡 잊었는데, 아이쿠 내가 잊어버렸구만, 그렇게 하는 것을 기억이라고 생각하는데, 히부리인들에게 있어서의 기억이란 그런 의미가 아니고, 아주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그 예가 수도 없이 많아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 속에서 힘들어서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기억했다 그랬어요. 그럼 그 전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는 줄도 몰랐다가 하도 시끄럽게 소리가 땅에서 들리니까, 아이쿠 참 쟤들이 있었구만, 그렇게 기억 한거냐 아니라는 거에요.
여기서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인 행동을 기억하는 겁니다. 여러분도 알지만, 사무엘서 보면 왜 아들이 없는 한나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잖아요 눈물 어린 기도를 합니다. 그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한나를 기억하노라 그랬어요. 한나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 remind 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한나를 위하여 무엇인가 구체적인 단호한 행동을 취했다 그러한 의미가 되는 겁니다. 때로 우리 인생들이 모르고 곁길로 갈 때,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을 기억 나게 해주기 위해서 엄청난 일을 일으키시기도 해요. 여기서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행동적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으로 일한다. 그런 뜻이에요.
기억한다는 말의 근본 의미는, 그러니까 너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 석자를 잊어버리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내 삶을 전환하고, 그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그렇게 뜨거운 마음으로 그를 향해 충성하는 그러한 자세로 살아가라 그러한 의미의 기억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그를 생각하고, 그에게 뜨거운 마음을 갖고, 그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뜨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자로 살아가라.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헌신의 삶을 살아라 그러한 의미라는 것을 여러분이 꼭 기억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왜 이것을 기억하라고 하느냐 하면 피조물 된 인생의 궁극적 행복이 여기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에게 있어서의 참 불행은 창조주로부터 독립하는 거에요. 다시 말하면 창조주를 기억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 그게 가장 불행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데이비 필립스라는 사람이 good news 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서 현대판 팔 복이 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판 팔 복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강하게 추진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이 세상에서 쟁취할 것 임이요
무 감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상처받을 일이 없을 것 임이요
불평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기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요
향락에 빠진 자는 복이 있나니, 죄를 인정하지 아니 함이요
남을 찍어누르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기가 높아지는 길을 알기 때문이요
말썽꾸러기들은 복이 있나니, 사람의 이목을 끌 것 임이라
성경에 말하는 팔 복과는 완전히 전도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인데 그들은 이것을 복인 줄 알고 있다 그런 얘깁니다. 이 현대판 팔 복을 종합하자면 이런 얘깁니다. 그저 강한 의지를 가지고 밀어부치고, 남이야 어찌 되든 관심도 없고, 내 계획대로 잘 안되면 핑계 데고, 성공하면 향락을 중심으로 해서 살아가고, 높아지면 찍어 누르고,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인기를 얻으면, 그것이 최고의 복인 줄 알고 살아간다는 거에요.
정말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인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분에 넘치는 희생도 각오합니다. 아마 신문에 한번 내 준다고 하면 별일을 시켜도 할 사람이 아마 많을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끄는 데에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느냐 하는 거에요. 구제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은밀하게 하라고 하면 잘 안 하는데, 신문에 이름 내 준다고 그래 보세요 줄줄이 사탕 아닙니까 줄을 기다리고 서 있잖아요 그게 뭡니까 여기에 깊은 심리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이목을 받으면서 자기자신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 비행 청소년들의 심리 분석을 아주 깊이 해 놓은 것을 보면 참 이해가 갑니다. 아이들이 말썽을 피웁니다. 아이들 깡패끼리 말썽을 피우는데 때려도 좋고 쫒겨 나도 좋다는 것이에요. 그러나 그 마음 속에는 그래도 날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마음이요. 얻어맞아도 좋다는 거에요. 쫒겨 나도 좋다는 거에요. 그래도 날 무시할 수 없을 걸 그게 뭐에요 이목집중을 통하여 자기 존재를 드러내려고 하는 시도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자기의 가치를 찾기 위해서 비행이라도 저질러서 많은 사람의 욕을 먹더라도 잊혀지지 않는 무시 받지 않는 더 많은 사람이 그래도 인정해 주는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거에요. 그러나 여기에 행복은 없는 것이지요.
그럼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어디에 있느냐 피조물을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 그 여호와 하나님께 아는 바가 되고, 그에게 기억된 바 된 존재 여기에 인생의 참 가치는 나타나게 된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너희들은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는 삶을 살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잘 모르지요.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는 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게 될 것이고, 고백하게 될 것이에요. 문제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중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부정하고 살다가 나중에라도 깨닫겠죠. 지옥 가서라도 깨닫겠지만, 그 때는 이미 늦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모든 인간은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피조물 치고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없어요. 문제는 그 때가 언제냐 하는 것이에요. 언제 창조주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뜻에 맞는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과제가 아니겠어요 좀더 일찍 깨닫고 하루라도 빨리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 그리고 그 분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서 살면서 그 분께서 나를 세상 보내신 그 사명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야 될 텐데 그것이 가장 적극적인 삶이고 보람 있는 삶이 아니겠느냐 그런 얘깁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 중에서도 하루라도 빨리 주님 앞에 자신을 결단하고 내 놓기 보다는 하루라도 늦게 주님께 나가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에요. 내가 중학생 때라고 생각이 드는데 한 부흥사 목사님이 그런 말을 해서 제가 잊혀지지 않는 게 있어요. 자기가 부흥회 때마다 하는 말이 십자가 옆의 강도사건을 놓고 이야기 하면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데, 그 때마다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본답니다. 특별히 장로님들 이런 사람들 보면 십자가 강도가 마지막에 주여! 당신께서 낙원에 계실 때 나를 기억하옵소서 그 말 한마디 가지고 구원 받았다고 하면 그 얼굴이 어떠냐면 아이고 부러워라 그 마음이 얼굴에 역력히 나타나는 거에요.
한 평생 고생하지 말고 그 말 한마디만 하고 가면 얼마나 좋겠나 그런 표정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노라. 그런 얘기를 한 것을 기억하는데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내가 죽으면서 주 앞에 나를 기억해달라고 하는 그 한마디를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그런 말을 죽으면서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평소에 그가 얼마나 많은 가책과 갈등을 겪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거에요. 절대로 마음 편하게 도적질 하다가 죽을 때 그 말이 나오는 게 아니랍니다.
여러분 절대로 그러니까 하루라도 늦게 믿는 것이 이익이다 라고 하는 생각은 아예 머리 속에서 싹 지울 것이에요.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창조주를 기억하는 삶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제 젊은 좋은 시절 지혜와 권세가 가장 극치였던 그 많은 세월동안 방황을 했지요. 그리고 이제 늙고 나서 그 인생이 너무도 후회스러워서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는 것 그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전체 내용을 보면 인간의 몸을 집에 비유하고 있어요.
고대 왕실 높은 집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이제 세월을 가면서 점점 퇴락해 가는 커다란 집 그 개념을 놓고 인간의 늙어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수없이 인생을 장막에다가 비유하잖아요. 집에다 비유해요. 사람이 늙는 것과 집이 퇴락해가는 것을 어떻게 일치시키는 가를 오늘 본문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조자를 기억해야 할 때가 언제냐 빨리 해야 된다 왜 인간은 이렇게 늙어가기 때문에 그러한 논지입니다. 3절 말씀 함께 봉독하지요.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집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보초들이 부들부들 떤다 그런 얘긴데, 여기서 집지키는 자들이 누구냐 하는 것이에요. 팔과 다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몸에 갑자기 위험이 닥치면 손으로 탁 막잖아요 그 다음에 손으로 막다 안되면 어떻게 해요 도망가는 거지요. 뛰어가는 거지요. 집지키는 자 들이란 뭐냐 손과 발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집지키는 자들이 어떻게 된데요. 늙으면 덜덜 떨린다는 거에요. 허리는 굽어지고, 손과 발은 떨리는 것이 늙을 때의 모습이 된다. 젊을 때는 안 다녀본 곳이 없이 다 다녔지만, 이제는 어디든지 다니기가 귀찮은 것이 늙음의 현상이지요.
저는 그런 이야기도 들어보았어요. 운동 잘하던 사람이었는데 늙어 가지고 다리를 삐었어요. 어디에 걸려 넘어졌느냐 하면 문지방에 넘어졌답니다. 문지방이 얼마 됩니까 여기에도 넘어지는 겁니다. 운동 잘 하던 사람도 늙으면 그러니까 몸 건강하다고 자랑할 것 하나 없어요. 여러분 아이들하고 놀아보면 날 잡아보세요 하고 뛰어다녀요. 다리에 힘이 넘치니까 그냥 뛰어다니면서 잡아보라고 하는 건데, 노인네들 따라가 잡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몸을 지키는 자들,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리기 때문이에요. 떨립니다. 문지방에도 걸려 넘어지게 된다는 거에요.
맷돌질하는 자들이 누굽니까 치아를 의미하는 겁니다. 두개의 돌들이 잘 굴러가면서 그 속에 있는 음식물을 갈아 주는 것이 맷돌이에요. 윗니와 아랫니가 사이에 있는 음식물을 곱게 갈아 가지고 넘겨주는 것이 치아의 역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맷돌질하는 자들이 어떻게 된답니까 적어지므로 이빨이 빠지고 점점 적어지고, 이가 몇 개 남아있지 않고, 점점 부실해지기 시작한다는 거에요. 원래 언제 가장 맛이 있느냐 하면 딱딱한 음식을 오도독 씹어먹을 그 때 그 맛에 기가 막힌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씹어먹지 못하게 되면 맛은 이미 물 건너 간 거에요. 이젠 부드러운 것만 먹는단 말입니다. 여러분 사과를 먹어도 와 작 하고 씹어 먹는 거하고 숟갈로 긁어 먹는 거하고, 같을 수가 없는 거에요. 긁어먹죠 이가 없는데 어떻게 씹어 먹어요 긁어먹어야지. 좋은 맛은 씹는 맛이래요. 씹는 맛. 어쩔 수 없는 거에요. 늙어가면 맷돌이 부실해지는데 쉬운 말로 뭐냐 이빨 다 빠지기 전에 정신 차려! 지금 그 얘기 하고 싶은 거에요. 창 밖이 어두워질 것이며, 눈이 어두워져서 잘 안보입니다. 자꾸 눈을 이래 보지만, 침침하기는 매 일반이지요. 4절을 봅시다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 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힐 것이며, 청력이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이 먹으면 뭐라고 뭐라고 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 하고 자꾸 묻게 됩니다. 그러면 몰라도 되요 그러면 안 됩니다. 또 한번 얘기를 해드려야 됩니다. 그래서 말이 많아지는 거죠. 자꾸 자꾸 묻게 된다. 왜 청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 다음 어떻게 된답니까 맷돌 소리가 적어지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새소리, 늙으면 깊이 잠이 들지 못해서 새 소리만 나도 바짝 하고 깬답니다. 여러분 아이들 잠자는 것 보면 예쁘죠 참 부러울 때가 많아요. 쾅쾅 거리고 불 켜 놓고 아무리 떠들어도 그냥 자니까요. 들고 왔다 갔다 춤을 추어도 잘 거에요. 어린아이들은 그런데 어른들은 그렇지 못해요. 그저 바시락 하면 깹니다. 그렇게 깊이 잠을 못 자는 대신에 조는 건 기가 막히게 졸아요 앉았다 하면 졸아요. 깊은 잠은 못자고 조는 건 선수요. 그게 바로 나이 먹는 증거입니다.
그 다음 보세요 음악 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이게 뭐겠어요 목소리 목소리가 어떻게 된답니까 쇠하여서 축 늘어져요. 목소리가 그래서 소리가 늘어진다 구요. 고음이 안 나와요. 여러분 한번 잘 보세요. 노인네들 보면 한 박자 늦잖아요. 꼭 한 박자 늦게 나온다니까. 아무리 잘 하려해도 안돼요 이게 그래서 한 단계 더 나가면요. 곡도 필요 없어요. 다 똑 같은걸 뭐. 그래서 뭐가 되냐 노래가 타령으로 변하는 거에요. 3부 예배 때와 4부 예배 때 신앙 고백을 들어보면 성가대가 다르다니까요. 3부는 천천히 해요. 3부가 젊잖아요. 그래도. 그런데 4부는 대학생들이에요. 신앙고백이 얼마나 빠른지 말을 따라 할 수가 없어요. 저도요. 이게 뭐에요. 음악 하는 여자들이 쇠하여 지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거에요. 그렇게 탄력 있고 좋을 때 찬송 안 부르고 젓가락 두들기다가 나이 들어 찬송하려 하니 될게 뭐냔 말이에요. 그러니까 목소리 늘어지기 전에 찬송 많이 해! 그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5절 봅시다.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弔問者)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높은 곳을 두려워합니다. 나이 먹은 징조입니다. 아이들 가만 놔둬보세요. 가만 놔두어도 올라가지요. 어른은 자꾸 내려와요. 엘리베이터도 싫어하고 에스컬레이터도 싫어해요. 노인네들은 올라가는 거라면 아무튼 싫어해요. 땅바닥이 좋아 자꾸 파고 들어가려 한단 말이죠 그 다음에 머리에는 살구 꽃이 피어요. 머리가 허옇게 된다는 것이에요. 지금 아마 염색 해놓았으니까 그렇지 살구꽃 핀 사람 많을 겁니다 어쩔 수가 없지요. 자기 딴에는 반백의 머리 히끗 히끗 한 게 보기 좋다고 하지만, 위에서 보면 살구꽃 핀 사람 많아요. 살구꽃 피고, 그 다음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메뚜기가 무거운 짐승이 아니잖아요. 아주 가볍게 날아다니는 곤충인데 그것도 무거워요. 제가 양복 하는 분한테 들었어요 나이 드신 분들이 옷을 맞추시고 나서 하는 말이 좀 가벼운 옷 좀 없어요 한답니다. 왜 옷이 무거워서, 젊을 때는 아마 멋만 있다면 아마 쇠 덩어리도 메고 다닐 것입니다. 나이 들면 옷도 무거워. 다 이게 뭡니까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니, 원욕이 그치리니, 원욕이 뭡니까 성적인 욕망 그런데 반대로 노욕은 생겨나요. 노인의 욕망이라는 것이 있어요. 원욕이 그치리니,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이런 현상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느냐 영원한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된 줄로 알아라 그런 얘기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조문자들의 걸음이 바빠지게 될 거다 그런 얘깁니다. 우리 6절 죽음에 대한 상징적 표현인데 함께 읽읍시다.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이 말은 아주 고대 왕실 높은 곳에 달려있는 등잔을 의미합니다. 금 등잔에 은 고리로 해 가지고, 집안 한 가운데 거실에 걸려 있었어요 그래서 그 줄이 메 달려 있는 동안에 찬란하게 그 금 등잔은 빛을 발했지요. 그런데 이제 그 은 줄이 툭 풀어지면서 등잔은 바닥에 깨지면서 쨍그랑 하고, 깨지고 불은 꺼지고 만다. 이게 죽음을 시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 다음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그게 무슨 말인고 하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어요. 항아리로 깊은 우물을 길어 올립니다. 도르레를 통해서 길어 올리는데 바퀴가 깨지고, 항아리가 깨졌다 더 이상의 우물물을 기를 수가 없다. 우물물이란 삶의 모든 기쁨과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걸 기를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끝이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인생이라는 거에요. 육체의 늙어가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예외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미안 하지만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보약을 먹어 봤자 잠시동안. 이 과정은 생략할 길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이건 신체적인 부분이고 심리적인 부분은 2절에 나옵니다. 노인들의 어두워진 마음을 2절에 묘사하고 있지요. 2절 말씀 한번 읽으시겠어요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희망이 사라지고 기대할 게 없어요. 왜 변화의 가능성이 없어지잖아요 그 다음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비 뒤에는 찬란한 햇빛이 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마는 하나가 지나가고 나면 또 더 큰 어두움이 계속 물밀듯이 밀려오는 것이 늙은 사람들의 마음이지요. 예를 들면, 신경통이 낫는가 했더니만, 요통이 오고, 계속 오육십대가 되면 피곤이 안 풀린다는 말이 있잖아요 바로 이런 얘기에요 심리적인 문제를 신체적인 문제를 2절에서 5절까지 죽 설명을 해 놓고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이 걸어가는 길이다. 그런 얘깁니다. 그렇다면 인생은 이것으로 끝이냐 어차피 이렇게 될텐데 아니요. 이 캄캄한 상황 속에 줄기 빛이 있다는 겁니다. 그 빛의 내용이 7절입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흙된 육신은 땅으로 돌아가겠어요. 그러나 문제는 그 신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거에요. 이 땅의 허무함을 넘어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에 육신은 늙어 후패하여 지지마는 우리의 영혼은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간다. 죽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에 거기에 한 줄기 밝은 빛이 비춰지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이제 신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자에게서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지요. 주께로 가는 한 과정에 불과 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 신은 주 앞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그것을 아는 자 만이 참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롭다는 개념은 무어냐 하면 종말을 앞에 놓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새롭다 의 개념이 없는 것이에요. 여러분! 철학적으로는 굉장히 의미 있는 말입니다. 끝을 생각하고 살아야만 새롭게 살 수 있는 것이고요. 신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너는 인생이 변해가고 있고 네 자신의 몸이 늙어가고 있는 것을 느끼느냐 그리고 계속 해 아래서의 삶에 집착하려느냐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후회 없는 삶을 살아라 그것은 바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하루라도 빨리 기억하고 그 분이 원하시는 합당한 삶으로 내 삶을 전향시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적극적인 삶의 길이다. 그것이 많이 남지 안았다는 것이지요. 바꿀 때는 바로 지금이다. 여러분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늙고 죽잖아요 안 죽을 사람이 어디 있어요 죽음에는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다 늙어가고 죽는 것이에요. 그리고 주름살이 늘어가는 것이고요. 신데렐라 화장품 발라봐야 하루밖에 안 간데, 어차피 늙는 거에요.
늙는다는 말, 늙는다는 현상이 우리에게 주는 강한 메시지가 무어냐 인간은 시간의 지배자가 아니라는 거에요. 아니 인간이 시간의 지배자라면 어떤 사람이 자원해서 늙겠습니까 없는 겁니다 이건, 인간은 시간의 지배자가 아니요. 더 깊은 말로 하면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늙을 거요. 누가 생명을 버리고 떠날 것이냐 말이요.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손아래서 우리의 생은 영위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 없는 인생은 헛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를 바로 하고, 그분이 피조물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그 근본 목적 그 일을 감당할 때 나는 가장 성공한 사람이 되고, 후회 없는 인생을 살게 되는 거랍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지금이 가장 젊을 때이거든요.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앞으로 지금보다 더 젊을 때는 결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후회는 그만두고 두려움도 접어놓고 지금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그게 가장 빠른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의 신학적인 의미는 뭐냐하면 가장 빠른 때에요 가장 귀한 때이고, 그러므로 지금보다 더 좋은 때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에요. 그러므로 이제 오늘부터 지금부터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가장 적극적이고 후회 없는 인생을 향하여 발 걸음을 내 딛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게 될 때에 이러한 인생의 늙어가는 것들 이것이 초라하고 멸망해 가는 길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기다리시는 고향으로 가는 아름다운 여정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늙었을 때가 그 신앙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돌아갈 고향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가 노인들의 마음에 근본 자세가 되는 거에요. 여러분 아이들이 낮에 나와 놀잖아요. 나와서 놀 때야 쟤가 부자집 아들인지 부모가 있는지 없는지 알게 뭐에요. 그런데 이제 날이 어두워지고 집집마다 불이 하나 둘 켜지 며는 그 때는 아이들이 쫙 갈라지는 거에요. 부모가 있는 집 아이들은 아무개야 들어와라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모든 장난하던 것들을 다 내려 놓습니다. 인생의 모든 장난 땅 따먹기, 집 따먹기 이게 장난 아니겠어요 이제 저녁이 되고 돌아올 때 다 두고 오는 거에요.
문제는 돌아갈 집이 있고, 그러한 아이들은 행복한 얼굴로 갈 거에요. 가서 사랑하는 분을 만나고, 쉬고 기쁨의 시간을 가질 것이고, 그러나 갈 곳이 없는 사람은 가장 비참한 인간이 되는 거에요. 그런 삶이 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 날에 하루라도 빨리 너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 분에게 충성하고 봉사하고 어차피 늙어서 썩을 몸인데, 나를 의의 병기로 드리기로 힘쓰라. 여기에 가장 큰 보람이 있고 만약 이렇게 살지 않는다면, 인생은 어떻게 될거냐 8절 함께 봉독 합시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지 못한 인생은 이 한마디 외에는 아무 할 말이 없는 거에요. 정말 인생 헛되다 이렇게 살래 아니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다시 방향을 바꿀래 이것이 오늘 말씀의결론입니다. 하루라도 젊은 시간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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