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송구영신 예배는 성경적인가?
본문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서 우리 현대의 형편과 비추어서, 연말 연시가 되어져서 송구영신의 예배를 드리고 더한 교회는 신년 축복 성회라고 해서 특별한 집회를 어제, 오늘 이어서 계속해서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고 교회 운전을 하시는 분은 밤샘을 하고 교회는 평소와는 달리 생기가 넘쳐나는 것 같고 목사들은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생기가 넘치고 할 때는 목사들이 생각하기에는 ‘야 뭔가 되는 것 같다. ’라고 하니깐 흐뭇해하게 되어집니다.
이 신정 연휴를 기회를 삼아서 들뜬 사람들에게 신앙교육을 하는 기회를 삼는 것은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행위들이 단순히 신앙교육의 기회라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의 연말연시 교회의 행사로써 정착을 한다는것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더구나우리가 묵은 것을 보내고 묵은 죄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씻어내고 새것을 새롭게 해보자. 또 새것을 환영을 하고 이렇게 해서 새해에는 좀더 나아지고 새해부터 말씀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아서 한해동안 하는 일이라도 잘되는 이런 소원을 가지과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신년축복 성회라는 명목을 가지고 시작을 합니다.
어떤 교회는 심지어 신년 축복 심방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저런 행사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과연 이런 발상들이 성경에서 허용하고 있은 발상인가 성경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점검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런 발상들, 행동들을 할 때에 행동을 하기 이전에 성경의 원리가 어떤것인가를 생각해 봐야할텐데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어떤 세상이 돌아가고 사람들이 요구를 하니깐 그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따라가는 그런 현상들이 현 교회의 상황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현재 행해지고 있는 교회의 상황을 생각해볼때에 이것은 성경적인 어떤 발상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이방종교적인 발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를 오늘 좀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저는 송구영신 예배라는 말이 말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송구영신은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받아들인다는 말인데 이 말에다가 예배라는 말은 왜 붙이는가 송구영신이라는 말은 한해의 어떤 희로애락을 영원히 오지 않을 과거로 돌려 버리고 새해에는 새롭고 어떤 복된 시간이 되기를 소원하는 그러한 인간의 정서. 다시 말하면 종교적인 측면에서 생각할수 있고 당연히 해야하고 이것을 종교성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런 종교성에서 비롯된 것인데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앞에 드리는 예배에다가 붙여서 종교성 + 여호와 하나님앞에 드리는 예배 이렇게 해서 말을 붙여서 송구영신 예배, 말을 만들어서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 자체가 사실은 성경적으로 안맞는 말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치 우리 인간이 버듯하고 그래서 새해에는 우리가 더 허전해지지 말아야 겠다는 사람들의 염원 때문에 행사를 준비해놓고 여호와 하나님이 가만히 앉아 계시는데 그 여호와 하나님을 억지로 초청해서 여호와 하나님 우리가 제사 드리고 여호와 하나님앞에 예물을 드리니깐 받으시고 우리 염원을 채워주십시오라는 발상입니다. 그러니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 계획하고는 별 상관없는 인간의 정서를 중심으로한 그러한 발상이 바로 송구영신 예배라는것입니다. 이렇게 볼때에 이것은 우스운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마치 인간의 정서를 메꾸어주고 인간의 소원을 풀어주기위해서 부름을 받아온 무당식의 여호와 하나님을 만드는 것이 이러한 행사들입니다.
더구나 인간의 이러한 정서와 소원들은 여지없이 인간들이 죄인임을 보여주는것입니다. 잘못을 잊고 좀더 새해가 되기를 원하다는 자체가 인간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사람들이 죄를짓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잘못은 예수님안에서 없어진 것인데 그것을 확신하지 못해서 거기에 또 와서 새로운 시간을 가지고 기회를 삼아서 앉아있고 허전함과 새로운 좋은 것을 갈구하고 있다는 자체는 예수님으로 만족하고 예수님이 제일 좋은 분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것입니다.
신자라고 하면 당연히 예수님안에서 사죄와 용서를 확인해야하고 예수님안에서 채워짐과 만족함으로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하고 또 예수님을 바라보는것 때문에 세월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더나아가서 이것이 즐거운 일이어야하는 것이 당연한것입니다. 즉 늙어가는 것이 즐거운일이라는것입니다. 왜냐하면 천당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는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라고 하면 적어도 이것은 당연한것이어야 하고 좀더 낫게 생각하면 ‘아 내가 천당과 가까워 지는구나. ’라고 생각한다면 늙어간다는 것은 사실 즐거운 일입니다. 즐거우면서 마음은 더 헌신된 마음 즉 ‘아 내가 좀더 주님을 사랑해야지 좀더 주님을 가까이 해야지’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이 정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자기 마음대로 살아왔고 또 예배한다는 그 시간에도 역시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채워지는 것을 하지 못하고 있고 그러면서 ‘여호와 하나님 날 채워주십시오. 복을 주십시오. ’라고 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죄악, 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사실 이것은 예수님의 하신 모든 사역, 예수님의 인격을 거부하고 있는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죄입니다. 신자에게 예수님만큼 새로운 것이 있습니까 새것이 또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신자에게는 예수님만큼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땅에서 죄악 때문에 허덕이고 신음하는 자에게 하늘의 것 만큼 예수님이 가져오신 것 만큼 새로운 것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새로운 것을 보았고 얻었다는 말인데 무슨 새것이 필요합니까 여기에 새것을 원한다고 하면 하늘의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것이고 예수님의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하늘의 것 말고 땅의 것을 새것으로 바라는 인간의 마음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이들은 사람의 영광을 취하기를 원하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그 영광이신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를 못하는것입니다.
이세상 사랑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요구하는 것은 세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은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습니다.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구해서 그 표적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먹고 배부르기 때문에 찾아 왔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실 사람의 영광, 땅의 영광을 구하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영광이 실제로 왔고 그 영광이 나타났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드러내 보여주었는데도 그것 좋은 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밖의 새것을 구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실정이고 믿는다는 사람들의 실정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안에서 만족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것으로 말할수 있습니다. 또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외에 이 세상것에게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송구영신, 신년 축복이라는 것은 이세상의 시간에, 즉 태양력에 의해 지배를 받는것이지 예수님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은 항상 예수님의 지배를 받고 우리 일상 생활에서 항상 예수님안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 생활이 예수님안에 사는것이고 호흡하는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지배를 받는것입니다. 이것은 일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특별한 때가 필요합니까 신자들에게는 특별한 때가 필요가 없습니다. 기독신자는 영원을 사는 사람입니다. 영원을 한날 같이 사는 사람이 기독신자이고 한날을 영원같이 사는 사람이 기독신자입니다. 이것이 기독신자의 시간관입니다. 그래서 잘못이 있고 씻을 것이 있으면 그때 즉시 예수님앞에 내어놓고 씻고 또 주님이 희미해 져서 마음이 허전해 지고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 싶으면 잠시 불신앙임을 회개하고 다시 살아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새로움을 얻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믿는 신자들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이세상 뿐만 아니라 주님이 오신 이후에도 우리가 계속해서 할것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면서 영원히 사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러한 생활이 예수님을 믿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생활을 천국이라고 하고 천국생활, 영원의 생활이라고 합니다. 사죄도 채워짐도 항상 주님으로부터 즉시즉시 받고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이 연말연시에만 사죄와 채워주심을 베푸는 듯이 연말연시만 되면 평소에 안하던 행사를 하느냐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행사들의 초점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의 그 말씀에 맞추어져 있지 않고 자연의 주기에 맞추어져 있음을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신자는 자연의 세상에 대해서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사는 사람, 천국에 대해서 사는 사람이 기독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왜 자연의 주기에 자신의 행동의 초점을 맞추고 있느냐는것입니다. 주님께 초점을 맞추어야할 사람이 왜 자연의 주기를 따라 살아갑니까 이것은 천국의 사람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늘 새해요 늘 새로운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이 신자이고 또 그렇게 살아야할 사람들이 신자인데 이 자연주기를 삶의 기점을 삼아서 이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교회행사를 하고 한다면 이것은 주님대신에 자연신, 태양신을 섬기는 행위와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양을 섬긴다고 하든지 안섬긴다고 말하든지 간에 그들의 행동을 야기 시키는 것은 주님도 아니고 주님의 성령도 아닙니다. 또 자기 자신이 주님의 인격에 응답해서 하는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태양의 주기라는 것입니다. 태양의 주기가 그 사람을 행동하게 만들고 있고 사람들의 인격에 태양시간(비 인격)이라는 것이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는 사실 범신론적인 상태입니다. 비 인격적이고 막연한 종교심의 자연 주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지 여호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신앙의 움직임은 아니라는것입니다. 이상태는 우리가 흔히 볼 때 아름다운 저녁놀을 보며 사람들이 마음을 푸근하게 가지는것과 마찬가지이고 또 높은 산에 올라가면 산의 웅장함을 보고 마음이 숙연해지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종교적인 성향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이라고 하면 이러한 것에게 숙연함을 느끼기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에게서 경외의 모습을 찾지 아니하고 마음을 새로 가다듬거나 새롭게하는 어떤 모티브로써 생각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물에서 자극을 받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입니다. 종교심과 신앙은 다릅니다. 신앙은 철저하게 참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인격적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인격적인 응답입니다. 이것에 응해서 움직여지고 의도되어지는 행동이 신앙적인 행동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아니한것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 어떻게 신앙적인 행동입니까 그러니 요즘 행해지고 있는 것들은 자연에 의해서 자극을 받은 사람들이 종교성을 발휘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와서 사죄와 새로움을, 은혜와 복을 달라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앞으로 밀어내는 것이 자기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도 아닙니다. 단순한 자연의 모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만든 자연의 웅장함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의해서 그들이 감정의 채움을 받습니다. 결국은 이러한 사람들을 여호와 하나님앞으로 인도하는 것은 성령도 아니고 자기 능력도 아니고 자기 순종도 아니고 자연의 주기라는 반복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앞으로 가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자연의 반복성은 그들을 여호와 하나님앞으로 인도하는 성령역할을 하는것이고 중보자 예수님의 역할을하는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에 의해서 감정의 채움을 받습니다. 그러니 결국은 이것은 이 반복성이 그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어떤 새로운 것을 느끼게해주는 구세주 노릇을 해주는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태양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의 우상이고 자연의 주기성이 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고 메시야이고 중보자입니다. 성령도 인격도 아니고 이것을 성령처럼 인격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과 성령이 아닌 이러한 자연종교에 침투를 받았고 이것에 의해서 교회가 좌지 우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이 소위 뉴에이지 운동입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이방종교들의 정신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이러한 자연적인, 종교적인 정신을 가지고 겉으로 드러날때는 반대를 하지만 실제로 공공연히 드러나지 않고 숨겨지고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이 자체를 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도 똑같이 분별할수 없는 소경상태에 빠져 있다는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들 책임입니다. 교인들은 이세상의 복과 형통에 집착해 있고 욕망을 깨우쳐 주어야할 목사들은 반대로 그것을 부추기고 만족시킬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을 안하면 교인들을 놓칠까봐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들뜨고 자극받은 교인들이 자기 교회가 행사를 하지 않으면 남의 교회라도 가기 때문에 그만큼 기독교가 이교화되어 있고 이방정신이 되어 있는 것이 오늘 한국 교회의 신자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참으로 인격적인 신앙이 되어 있지 않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형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꿔말하면 천국 백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천국 백성 된다는 것은 이런 모든 것에서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속에 있고 천국 속에 있기 때문에 항상 주님과 교제하고 항상 주님안에 있고 잘되도 주님, 못되도 주님안에, 주님안에서 우리가 늘 새로워지고 채움을 받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기가 필요하고 일정한 반복되는 자연의 시간속에서 움직여 진다면 신앙이 아니고 자연종교속에 있는 하나의 종교성으로 전락해 버리는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 오늘 한국 교회입니다. 우리들 자신도 고칠것이 있어도 내년부터 잘하지 라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하지뭐 기다립니까 주님과 함께 하는데 뭐 내년이 필요합니까 영원속에 있는 사람들아닙니까 이런 의식들이 별것아닌 것 같아도 얼마나 이교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는가를 직시를 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이 어떤것인가를 바로 보고 바른 믿음가운데서 살아가도록 해야합니다. 우리 신자들이 이러한 것을 벗어나야합니다.
이러한 이교적인 것을 자꾸 벗어나야합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무시로 인격적으로 교통하고 함께 우리가 살고 있고 예수님안에서 만족하는 사람들이 우리 신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정해진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특별한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늘 영원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에대한 단순한 이야기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영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영원입니다. 시작도 없는 것은 머리에 상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학에서 말하는 영원입니다.
영원은 다른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영원입니다. 이 영원속에는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속에는 시간이 있고 흐름도 있고 현재도 미래도 과거도 있지만 항상 여호와 하나님앞에 사는 시간이기 때문에 특별한 시간은 없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항상 특별한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더불어 항상 특별한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이원리를 확인해야합니다. ‘아 내가 영원속에 있는 사람이고 예수님앞에 있는 사람이구나.
그러니 넘어져도 예수님앞에서 새롭게 일어나고 범죄해도 예수님바라보고 새로워지고 우리가 늘 예수님앞에서 새로운 체험을 받고 그 예수님이 내 만족이고 충만함이고 전부로구나. ’라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새로워 지는 그러한 사람이 바로 영원을 사는 백성이고 천국 백성입니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것이고 복입니다. 여기에 제사장들이 두손을 들고 복을 빌었습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이 복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져 있는데 이복을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데 또 누릴수 있도록 얼마든지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져 있는 사람인데 내가 언제든지 이복을 누리면서 살아야 겠구나 그래서 내가 이 세상때문에 어두워지지 말고 이세상 현실 때문에 놓치지 말고 살아야 겠구나라는 생각을 갖고 붙잡고 사는 생활이 신앙의 생활이고 믿음의 생활입니다.
이것이 복이구나 이것에 대해서 놓치지 말아야 겠구나가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확인하면서 이 생각을 붙들고 사는 것이 믿음의 생활이고 성령의 생활입니다.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 이런 생활을 계속 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함께 사는 생활입니다. 이러면서 여러분 마음 속에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가까이 있고 싶어하면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모든 일을 행해야 합니다. 어떤일을 하든지 간에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하십시오. 그래서 특별한 것을 생각하지 말고 특별한 것은 예수님이니간 예수님앞에서 항상 특별한 생각을 하면서 사는 의식이 우리 믿음의 의식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생활하십시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생활하면 하루하루가 귀하게 생활할 수밖에 없다. 오늘, 오늘, 하루 하루가 여호와 하나님보시는 날이다. 이런 자세가 안갖추어져 있으면 이교적인 정신 상태에 빠져있는것입니다. 중간상태는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안되있으면 ‘내가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있구나. ’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여호와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렇게 살수 있다는 사실이 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이 시대에 기독신앙인이 세상과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말씀을 잘 기억하면서 항상 예수님앞에서 항상 새로운 생활을 살아가도록 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신정 연휴를 기회를 삼아서 들뜬 사람들에게 신앙교육을 하는 기회를 삼는 것은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행위들이 단순히 신앙교육의 기회라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의 연말연시 교회의 행사로써 정착을 한다는것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더구나우리가 묵은 것을 보내고 묵은 죄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씻어내고 새것을 새롭게 해보자. 또 새것을 환영을 하고 이렇게 해서 새해에는 좀더 나아지고 새해부터 말씀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아서 한해동안 하는 일이라도 잘되는 이런 소원을 가지과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신년축복 성회라는 명목을 가지고 시작을 합니다.
어떤 교회는 심지어 신년 축복 심방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저런 행사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과연 이런 발상들이 성경에서 허용하고 있은 발상인가 성경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점검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런 발상들, 행동들을 할 때에 행동을 하기 이전에 성경의 원리가 어떤것인가를 생각해 봐야할텐데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어떤 세상이 돌아가고 사람들이 요구를 하니깐 그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따라가는 그런 현상들이 현 교회의 상황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현재 행해지고 있는 교회의 상황을 생각해볼때에 이것은 성경적인 어떤 발상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이방종교적인 발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를 오늘 좀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저는 송구영신 예배라는 말이 말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송구영신은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받아들인다는 말인데 이 말에다가 예배라는 말은 왜 붙이는가 송구영신이라는 말은 한해의 어떤 희로애락을 영원히 오지 않을 과거로 돌려 버리고 새해에는 새롭고 어떤 복된 시간이 되기를 소원하는 그러한 인간의 정서. 다시 말하면 종교적인 측면에서 생각할수 있고 당연히 해야하고 이것을 종교성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런 종교성에서 비롯된 것인데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앞에 드리는 예배에다가 붙여서 종교성 + 여호와 하나님앞에 드리는 예배 이렇게 해서 말을 붙여서 송구영신 예배, 말을 만들어서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 자체가 사실은 성경적으로 안맞는 말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치 우리 인간이 버듯하고 그래서 새해에는 우리가 더 허전해지지 말아야 겠다는 사람들의 염원 때문에 행사를 준비해놓고 여호와 하나님이 가만히 앉아 계시는데 그 여호와 하나님을 억지로 초청해서 여호와 하나님 우리가 제사 드리고 여호와 하나님앞에 예물을 드리니깐 받으시고 우리 염원을 채워주십시오라는 발상입니다. 그러니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 계획하고는 별 상관없는 인간의 정서를 중심으로한 그러한 발상이 바로 송구영신 예배라는것입니다. 이렇게 볼때에 이것은 우스운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마치 인간의 정서를 메꾸어주고 인간의 소원을 풀어주기위해서 부름을 받아온 무당식의 여호와 하나님을 만드는 것이 이러한 행사들입니다.
더구나 인간의 이러한 정서와 소원들은 여지없이 인간들이 죄인임을 보여주는것입니다. 잘못을 잊고 좀더 새해가 되기를 원하다는 자체가 인간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사람들이 죄를짓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잘못은 예수님안에서 없어진 것인데 그것을 확신하지 못해서 거기에 또 와서 새로운 시간을 가지고 기회를 삼아서 앉아있고 허전함과 새로운 좋은 것을 갈구하고 있다는 자체는 예수님으로 만족하고 예수님이 제일 좋은 분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것입니다.
신자라고 하면 당연히 예수님안에서 사죄와 용서를 확인해야하고 예수님안에서 채워짐과 만족함으로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하고 또 예수님을 바라보는것 때문에 세월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더나아가서 이것이 즐거운 일이어야하는 것이 당연한것입니다. 즉 늙어가는 것이 즐거운일이라는것입니다. 왜냐하면 천당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는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라고 하면 적어도 이것은 당연한것이어야 하고 좀더 낫게 생각하면 ‘아 내가 천당과 가까워 지는구나. ’라고 생각한다면 늙어간다는 것은 사실 즐거운 일입니다. 즐거우면서 마음은 더 헌신된 마음 즉 ‘아 내가 좀더 주님을 사랑해야지 좀더 주님을 가까이 해야지’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이 정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자기 마음대로 살아왔고 또 예배한다는 그 시간에도 역시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채워지는 것을 하지 못하고 있고 그러면서 ‘여호와 하나님 날 채워주십시오. 복을 주십시오. ’라고 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죄악, 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사실 이것은 예수님의 하신 모든 사역, 예수님의 인격을 거부하고 있는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죄입니다. 신자에게 예수님만큼 새로운 것이 있습니까 새것이 또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신자에게는 예수님만큼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땅에서 죄악 때문에 허덕이고 신음하는 자에게 하늘의 것 만큼 예수님이 가져오신 것 만큼 새로운 것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새로운 것을 보았고 얻었다는 말인데 무슨 새것이 필요합니까 여기에 새것을 원한다고 하면 하늘의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것이고 예수님의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하늘의 것 말고 땅의 것을 새것으로 바라는 인간의 마음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이들은 사람의 영광을 취하기를 원하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그 영광이신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를 못하는것입니다.
이세상 사랑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요구하는 것은 세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은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습니다.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구해서 그 표적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먹고 배부르기 때문에 찾아 왔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실 사람의 영광, 땅의 영광을 구하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영광이 실제로 왔고 그 영광이 나타났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드러내 보여주었는데도 그것 좋은 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밖의 새것을 구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실정이고 믿는다는 사람들의 실정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안에서 만족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것으로 말할수 있습니다. 또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외에 이 세상것에게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송구영신, 신년 축복이라는 것은 이세상의 시간에, 즉 태양력에 의해 지배를 받는것이지 예수님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은 항상 예수님의 지배를 받고 우리 일상 생활에서 항상 예수님안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 생활이 예수님안에 사는것이고 호흡하는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지배를 받는것입니다. 이것은 일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특별한 때가 필요합니까 신자들에게는 특별한 때가 필요가 없습니다. 기독신자는 영원을 사는 사람입니다. 영원을 한날 같이 사는 사람이 기독신자이고 한날을 영원같이 사는 사람이 기독신자입니다. 이것이 기독신자의 시간관입니다. 그래서 잘못이 있고 씻을 것이 있으면 그때 즉시 예수님앞에 내어놓고 씻고 또 주님이 희미해 져서 마음이 허전해 지고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 싶으면 잠시 불신앙임을 회개하고 다시 살아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새로움을 얻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믿는 신자들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이세상 뿐만 아니라 주님이 오신 이후에도 우리가 계속해서 할것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면서 영원히 사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러한 생활이 예수님을 믿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생활을 천국이라고 하고 천국생활, 영원의 생활이라고 합니다. 사죄도 채워짐도 항상 주님으로부터 즉시즉시 받고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이 연말연시에만 사죄와 채워주심을 베푸는 듯이 연말연시만 되면 평소에 안하던 행사를 하느냐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행사들의 초점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의 그 말씀에 맞추어져 있지 않고 자연의 주기에 맞추어져 있음을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신자는 자연의 세상에 대해서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사는 사람, 천국에 대해서 사는 사람이 기독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왜 자연의 주기에 자신의 행동의 초점을 맞추고 있느냐는것입니다. 주님께 초점을 맞추어야할 사람이 왜 자연의 주기를 따라 살아갑니까 이것은 천국의 사람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늘 새해요 늘 새로운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이 신자이고 또 그렇게 살아야할 사람들이 신자인데 이 자연주기를 삶의 기점을 삼아서 이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교회행사를 하고 한다면 이것은 주님대신에 자연신, 태양신을 섬기는 행위와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양을 섬긴다고 하든지 안섬긴다고 말하든지 간에 그들의 행동을 야기 시키는 것은 주님도 아니고 주님의 성령도 아닙니다. 또 자기 자신이 주님의 인격에 응답해서 하는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태양의 주기라는 것입니다. 태양의 주기가 그 사람을 행동하게 만들고 있고 사람들의 인격에 태양시간(비 인격)이라는 것이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는 사실 범신론적인 상태입니다. 비 인격적이고 막연한 종교심의 자연 주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지 여호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신앙의 움직임은 아니라는것입니다. 이상태는 우리가 흔히 볼 때 아름다운 저녁놀을 보며 사람들이 마음을 푸근하게 가지는것과 마찬가지이고 또 높은 산에 올라가면 산의 웅장함을 보고 마음이 숙연해지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종교적인 성향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이라고 하면 이러한 것에게 숙연함을 느끼기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에게서 경외의 모습을 찾지 아니하고 마음을 새로 가다듬거나 새롭게하는 어떤 모티브로써 생각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물에서 자극을 받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입니다. 종교심과 신앙은 다릅니다. 신앙은 철저하게 참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인격적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인격적인 응답입니다. 이것에 응해서 움직여지고 의도되어지는 행동이 신앙적인 행동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아니한것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 어떻게 신앙적인 행동입니까 그러니 요즘 행해지고 있는 것들은 자연에 의해서 자극을 받은 사람들이 종교성을 발휘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와서 사죄와 새로움을, 은혜와 복을 달라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앞으로 밀어내는 것이 자기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도 아닙니다. 단순한 자연의 모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만든 자연의 웅장함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의해서 그들이 감정의 채움을 받습니다. 결국은 이러한 사람들을 여호와 하나님앞으로 인도하는 것은 성령도 아니고 자기 능력도 아니고 자기 순종도 아니고 자연의 주기라는 반복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앞으로 가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자연의 반복성은 그들을 여호와 하나님앞으로 인도하는 성령역할을 하는것이고 중보자 예수님의 역할을하는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에 의해서 감정의 채움을 받습니다. 그러니 결국은 이것은 이 반복성이 그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어떤 새로운 것을 느끼게해주는 구세주 노릇을 해주는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태양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의 우상이고 자연의 주기성이 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고 메시야이고 중보자입니다. 성령도 인격도 아니고 이것을 성령처럼 인격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과 성령이 아닌 이러한 자연종교에 침투를 받았고 이것에 의해서 교회가 좌지 우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이 소위 뉴에이지 운동입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이방종교들의 정신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이러한 자연적인, 종교적인 정신을 가지고 겉으로 드러날때는 반대를 하지만 실제로 공공연히 드러나지 않고 숨겨지고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이 자체를 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도 똑같이 분별할수 없는 소경상태에 빠져 있다는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들 책임입니다. 교인들은 이세상의 복과 형통에 집착해 있고 욕망을 깨우쳐 주어야할 목사들은 반대로 그것을 부추기고 만족시킬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을 안하면 교인들을 놓칠까봐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들뜨고 자극받은 교인들이 자기 교회가 행사를 하지 않으면 남의 교회라도 가기 때문에 그만큼 기독교가 이교화되어 있고 이방정신이 되어 있는 것이 오늘 한국 교회의 신자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참으로 인격적인 신앙이 되어 있지 않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형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꿔말하면 천국 백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천국 백성 된다는 것은 이런 모든 것에서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속에 있고 천국 속에 있기 때문에 항상 주님과 교제하고 항상 주님안에 있고 잘되도 주님, 못되도 주님안에, 주님안에서 우리가 늘 새로워지고 채움을 받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기가 필요하고 일정한 반복되는 자연의 시간속에서 움직여 진다면 신앙이 아니고 자연종교속에 있는 하나의 종교성으로 전락해 버리는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 오늘 한국 교회입니다. 우리들 자신도 고칠것이 있어도 내년부터 잘하지 라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하지뭐 기다립니까 주님과 함께 하는데 뭐 내년이 필요합니까 영원속에 있는 사람들아닙니까 이런 의식들이 별것아닌 것 같아도 얼마나 이교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는가를 직시를 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이 어떤것인가를 바로 보고 바른 믿음가운데서 살아가도록 해야합니다. 우리 신자들이 이러한 것을 벗어나야합니다.
이러한 이교적인 것을 자꾸 벗어나야합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무시로 인격적으로 교통하고 함께 우리가 살고 있고 예수님안에서 만족하는 사람들이 우리 신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정해진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특별한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늘 영원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에대한 단순한 이야기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영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영원입니다. 시작도 없는 것은 머리에 상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학에서 말하는 영원입니다.
영원은 다른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영원입니다. 이 영원속에는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속에는 시간이 있고 흐름도 있고 현재도 미래도 과거도 있지만 항상 여호와 하나님앞에 사는 시간이기 때문에 특별한 시간은 없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항상 특별한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더불어 항상 특별한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이원리를 확인해야합니다. ‘아 내가 영원속에 있는 사람이고 예수님앞에 있는 사람이구나.
그러니 넘어져도 예수님앞에서 새롭게 일어나고 범죄해도 예수님바라보고 새로워지고 우리가 늘 예수님앞에서 새로운 체험을 받고 그 예수님이 내 만족이고 충만함이고 전부로구나. ’라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새로워 지는 그러한 사람이 바로 영원을 사는 백성이고 천국 백성입니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것이고 복입니다. 여기에 제사장들이 두손을 들고 복을 빌었습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이 복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져 있는데 이복을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데 또 누릴수 있도록 얼마든지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져 있는 사람인데 내가 언제든지 이복을 누리면서 살아야 겠구나 그래서 내가 이 세상때문에 어두워지지 말고 이세상 현실 때문에 놓치지 말고 살아야 겠구나라는 생각을 갖고 붙잡고 사는 생활이 신앙의 생활이고 믿음의 생활입니다.
이것이 복이구나 이것에 대해서 놓치지 말아야 겠구나가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확인하면서 이 생각을 붙들고 사는 것이 믿음의 생활이고 성령의 생활입니다.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 이런 생활을 계속 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함께 사는 생활입니다. 이러면서 여러분 마음 속에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가까이 있고 싶어하면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모든 일을 행해야 합니다. 어떤일을 하든지 간에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하십시오. 그래서 특별한 것을 생각하지 말고 특별한 것은 예수님이니간 예수님앞에서 항상 특별한 생각을 하면서 사는 의식이 우리 믿음의 의식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생활하십시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생활하면 하루하루가 귀하게 생활할 수밖에 없다. 오늘, 오늘, 하루 하루가 여호와 하나님보시는 날이다. 이런 자세가 안갖추어져 있으면 이교적인 정신 상태에 빠져있는것입니다. 중간상태는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안되있으면 ‘내가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있구나. ’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여호와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렇게 살수 있다는 사실이 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이 시대에 기독신앙인이 세상과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말씀을 잘 기억하면서 항상 예수님앞에서 항상 새로운 생활을 살아가도록 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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