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본문
옛날에 아주 지혜로운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 장군은 전쟁에 나가기만 하면 백전백승을 하는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는 부하들을 다 모은 다음에 주머니에서 동전을 끄집어냅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여러분 내가 이 시간 동전을 높이 던지는데 앞면이 나오면 우리가 이길 것이고, 뒷면이 나오면 질 것입니다. 자 보세요. ”하고는 동전을 던졌습니다. 앞면이 나왔습니다. 이 부하들은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리고는 나가서 이깁니다. 다음번 전투 때도 동전을 던지기만 하면 앞면이 나와요. 또 이겼습니다. 아무에게도 그 비법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장군만 알고 있었어요.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장군의 동전은 양쪽다 앞면밖에는 없는 그런 특수한 동전이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앞면밖에 나올 수 없는 동전과도 같습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은 소망의 면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분명히 절망 중에 있는데 믿음은 우리를 향해서 절망을 읽기를 이것은 ’이것은 희망이라. ’ 이렇게 읽습니다. 분명히 울고 있는데 믿음은 우리를 향해서 ’기쁨이다. ’ 이렇게 바라보고 또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리한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이길 수 있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도 믿음의 동전은 고통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이루어 질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기뻐하라. ” 이렇게 해석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답답한 상황인데도 믿음은 우리에게 잘 될 것이라고 희망이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1년을 돌아봅시다. 돌아보면 동전의 양면처럼 기쁜 일과 슬픈 일 안타까운 일과 희뭇한일 답답한 일과 시원한 일 신나는 일과 힘 빠지는 일 이런 것들이 동시에 이 시간 우리 머리에 교차하지 않습니까 오늘은 지난 1년을 회고하고 정리하면서 새로운 한해 특별히 새로운 천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할 송년 주일입니다. 이 일을 우리가 잘 할 수 있도록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오늘의 말씀은 지난 1년을 믿음으로 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동전 뒷면 같은 모든 사건들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감사하고 새로운 천년과 새해를 맞이할 수 있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살리라. 믿음으로 사는 삶은 먼저 우리의 미래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도는 믿음을 가진 사람인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미래에 대하여 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에 대한 바른 정의가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는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더 나은 것이 기다리고 있으며 더 영구한 산업이 여호와 하나님 은혜 가운데 우리를 위하여 준비되어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이 부호로 표시한다면 이런 화살표가 될 것입니다. 미래를 향하는 화살표 이게 바로 믿음의 또다른 부호가 될 것입니다. 우리 34절 말씀이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는 유대인들 가운데 기독교로 개정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정한 다음에 유대인들이 이 개정한 유대인들을 대단히 많이 핍박을 했습니다. 감옥에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협박을 하기도 했습니다. ”왜 좋은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갔느냐 돌아와라. ” 여러 가지 회유가 있기도 했습니다. 개중에는 기독교를 믿는다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히브리서는 쓰여졌습니다. ”돌아가지 말라. 기독교는 훨씬 더 유대교보다 낳은 종교이다. 예수그리스도는 훨씬 더 모든 것을 능가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하여 기록된 책이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수많은 어려움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투옥된 사람을 돌보는 그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러나 해가 돌아올지도 모르는 가운데 더 나은 미래가 있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오늘 당하는 어려움과 오늘 당하는 핍박과 박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미래 소망이 확실한 자는 오늘의 어떤 고난도 슬픔도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들판에서 홀로 돌 베개를 배고 잠을 자고 있을 때 그때는 바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래를 보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닥다리의 환상은 바로 미래로 연결되는 줄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자세가 바로 되자 그의 태도도 달라졌어요. 미래를 바라보는 소망이 믿음이 그 속에 생기자 그는 지금까지 고독 가운데 절망가운데 배고 있던 돌 베개를 취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제사하는 재단으로 삼았습니다. 기름을 붓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경배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 그는 일찍이 미래로 연결되는 비디오 카메라가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연결해 주셔서 보여주셨던 아름다운 더 나은 미래가 요셉의 눈에 항상 맺혀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보고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가운데 고난이 다가오고 환란이 다가왔지만 늘 바라보는 미래 때문에 감옥 속에서의 고통을 이기고 또한 오해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그런 상황도 넉넉하게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 나은 연구한 산업이 있음을 그들은 바로 기억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미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무서운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쓰는 말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왜그런가하니 앞에 보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미래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어려움과 한란과 고통들은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게 되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미래 때문에 핍박을 이깁니다. 주님이 보여주시는 소망 때문에 고통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제가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데 앞에 있는 모니터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모니터가 보이지 않으면 답답해요. 그렇다고 뒤를 돌아볼 수가 없고요. 한참 답답하게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데 급하게 방송실 요원이 내려왔습니다. 줄이 빠져있었던 거예요. 줄을 연결했습니다. 연결되는 순간에 ’확’하고 모니터 화면이 나왔습니다. 아주 제 마음이 시원해졌어요. 여러분 잘못하면 미래로 연결되는 이 귀한 믿음에 줄이 빠질 수가 있습니다. 끊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게 되요. 답답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나의 미래가 보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배하신 더 나은 미래 영구한 산업이 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오늘의 모든 것이 힘들어 지고 답답해지고 피곤해지고 불평과 불만을 토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곤란은 결국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하는 길목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재의 고통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해야지요. 그럼 어떻게 되죠. ”선을 이루느니라. ” 그렇습니다. 이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어떤 예수 잘 믿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 자매에게 고난이 다가 왔습니다. 어린아이가 아프게 되었습니다. 병들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한지요. 아기 옆에 앉아서 이 자매는 밤새도록 울며불며 기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아이를 제발 살려주세요. 고쳐주세요. 치료해 주세요. ” 울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새벽쯤 되었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소망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기를 손에 붙들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더 나은 미래가 있는 것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왔습니다. 그는 먼동이 틀 무렵 이렇게 기도를 고쳐서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당신 보시기에 최상의 것을 행하십시오. 더 나은 것을 선택하십시오. 저는 주님의 선택을 따르겠습니다. ” 이렇게 기도를 하고 났더니 마음에 평화가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항상 덜 나은 선택을 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더 났지 않다고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항상 더 나은 미래 더 나은 선택을 우리를 위하여 하신다는 선택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그렇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더 나은 미래가 있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더 나은 선택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지금의 고통보다 더 나은 미래가 있는 것을 믿으십니까 지금의 억울함보다 더 나은 미래가 있는 것을 바라보십니까 지금의 초라함보다 더 나은 미래가 있는 것을 바라보십니까 그것을 보셔야 믿음입니다. 지난 1년에 모든 사건과 경험들을 한번 되돌아봅시다. 이 모든 경험들 사건들 이 시간 믿음의 모니터와 연결합시다. 그러면 주님 손에 있는 미래의 아름다운 영상들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건들이 다시금 새롭게 소망가운데 해석되어서 내눈앞에 아름다운 영상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을 보시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미래를 강요하지 마세요. 여호와 하나님 꼭 이런 미래를 주십시오. 이것이 아니면 안됩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억지를 부리지 마세요. 주님 손에 맡겨 드립시다. 주님 보시기에 제일 좋은 선택을 해 주십시오. 저는 그 선택을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기며 주님이 원하시는 그것을 펼쳐주시도록 주님께 미래를 맡기는 믿음의 성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믿음으로 사는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을 인내하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와의 관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발을 딛고 있습니다. 이것을 부호로 표시한다면 이렇게 시금을 가르치는 아래쪽으로 향하는 그런 화살표가 될 것입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지금과 여기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현재 내 상황 바로 거기에서 믿음은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36절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말은 잘못 이해하면 그저 앞으로 될 것에만 마음을 두고 꿈속에서 무엇을 생각하듯이 현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할 위험이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소망을 가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발로 딛고 있는 여러 가지 삶에 정황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모든 사건들 이런 것을 무시하거나 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남들보다 더욱 현실 가운데서 바로 직면하고 인내하고 사는 사람을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루이스티븐슨이 이런 비유를 말했습니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거센 폭풍우를 예로 들어서 믿음의 상황을 설명을 합니다. 수많은 승객들이 배를 타고 있습니다. 파도가 몰아쳐 옵니다. 배가 흔들릴 때마다 승객들은 비명을 지릅니다. ”사람 살려”하고 막 과음을 지릅니다. 그런데 성질이 급하고 인내심이 부족한 승객 한 사람이 위로 올라갔습니다. 가판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선장을 배를 운전하고 있는 그곳으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가서 따질려구요. 왜 배 운전을 제대로 못하느냐구요. 따지려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선장을 핸들을 잡고 ”지금 열심히 운전하고 있습니다. ” 두사람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선장의 얼굴에 웃음이 환했습니다. 미소를 지으면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 그 얼굴을 보면서 다시 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불안에 떨고 있는 다른 사람을 향해서 ”잘 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선장의 얼굴을 보았는데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 그렇습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지금 내 눈앞에 다가오는 폭풍을 바라보면서 파도를 바라보면서 염려하면서 그건 불신입니다. 그는 더 이상 선장의 미소를 보았기 때문에 그의 실력을 믿었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로보트브라운이 이렇게 노래를 부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모든 일은 잘될 것입니다. ” 이 얼마나 놀라운 시입니까 현재 내가 파도를 보고 두려워하고 고통을 참아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선장이신 주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마지막 주일에 주님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시겠어요 주님을 바라보세요. 거기에 우리의 마음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현재 모든 문제를 넉넉히 이기게 될 것입니다. 사건을 바라보지 마세요. 파도를 바라보지 마세요. 주변을 바라보지 마세요. 나를 바라보고 환한 미소를 짓고 안심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시며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그 안에서 오늘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인내를 배우는 귀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인내가 없는 사람은 실컷 봉사하고 고통받고 믿음의 생활을 잘 하고도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해 놓은 귀한 축복들을 놓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참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성경에 대마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 대마는요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전도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그는 참지 못했습니다. 바울을 따라다녀 보았자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인내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으로 갔습니다. 성경에는 그의 일생을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해 놓습니다. ”대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갔고” 성도여러분 만약에 그가 그 순간 인내했으면 대마는 위대한 이름이 되어 우리 앞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대마는 나와 함께 십자가 지기까지 고통하고 인내하다가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의 면류관을 받았느니라. ” 아마 이렇게 기록됐을 거예요. 여러분 지금까지 믿음생활을 해오셨는데 믿음으로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인내하는 사람만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에 주인공들이 될 수 있을 것이.
그러면 인내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오늘 주님의 말씀이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37절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 이것이 바로 인내하는 방법이에요. 잠시잠깐후면 무슨 말씀입니까 이번 한번만 지나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만 지나가면 내일이면 끝이 날것이라고 하는 그런 자세로 하루하루를 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한번만 충성하자고 생각하고 충성하십시오. 이번 한번만 용서하자고 생각하고 용서하십시오. 이번 한번만 이 유혹을 이기자고 생각하고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기 바랍니다. 한번이 중요해요.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하루만 참으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시련을 견딜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통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독립군과 매국노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이 한번의 차이가 있습니다. 매국노는 도저히 내일의 독립이 올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10년, 20년이 되어도 독립이 올 것 같지 않아서 그만 자기 자존심 다 포기하고 매국노가 됩니다. 일본사람에게 빌붙어서 사는 매국노가 됩니다. 독립군은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그들의 마음속에 ”내일이면 독립할 것이다. 잠깐 참으면 조국의 독립이 반듯이 올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이 분명히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참지 않습니까 독립군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한번만 참으세요. 더 오랫동안 참을 생각하지 마시고 딱 한번만 참으세요. 그러면 될 거예요.
저는 매주일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또 성도들 앞에서 이렇게 예배를 인도하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앞으로 1년동안 설교할 것을 고민하면요 아마 머리가 잘못될 지경에 이를 거예요. 그러나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떻해요. 한주일만 주님 앞에 엎드려 ”주여 이번 주에 성도들이 먹을 양식이 무엇입니까” 딱 하나만 주님 앞에 기도하고 준비하고 더 머리를 조아리며 주님의 말씀을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끝나면 그것으로 만족이에요. 왜요 다음 주에는 주님이 또다시 다음주일을 위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하루씩 사십시오. 한번씩만 사시기 바랍니다.
장애인 가운데 4
2. 195km를 완주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너무 훌륭했기 때문에 기자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 불편한 몸으로 완주할 수 있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완주라뇨. 나는 완주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저는 전봇대 하나만 보고 달렸습니다. 50m만 달렸습니다. ” 그는 끝까지 달린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 한 단계만 50m만 달린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도착하고 또 다시 50m만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끝까지 달릴 수가 있었습니다. 성도여러분 멀리 보지 마십시오. 매일 하루씩 사시길 바랍니다. 이번 한번만 참으시면 이길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유혹 한번만 참으시면 이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든 믿음의 힘이 오늘의 나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마치 한번만 참은 듯한 모든 인내로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현재를 이길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한걸음더 나아가서 믿음으로 사는 삶은 뒤로 물러나지 않는 삶을 의미합니다. 과거와의 관계를 우리에게 밝혀주는 그런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부호로 표시한다면 왼쪽으로 가는 뒤쪽으로 향하는 이런 화살표를 우리가 그릴수가 있을 것입니다. 38절과 39절을 말씀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오직 나의 의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윤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하매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
제가 선교사 시절에 이 폭우에 들어오는 배에 가면 고기를 살수가 있습니다. 모래톱위로 배가 올라와요. 거기서 고기를 파는 얼마나 싱싱한 고기를 구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풍경이 거기에서는 전개됩니다. 배들이 모래위로 올라옵니다. 그때부터는 뒤로 물러서면 안돼는 거예요. 앞으로만 가야합니다. 사람들이 쭉 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긴 롤러 같은 것을 배 밑에 댑니다. 그러면 그 위로 배를 밀어서 지나가게 합니다. 또하나를 대고 또하나를 대고 제일 뒤쪽에 있는 것을 앞으로 끌어당겨서 넣습니다. 다시 또 빼서 앞으로 갔다 넣습니다. 그래서 그 배는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위로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저것이 바로 믿음의 생활이로구나” 그래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보리고 한 단계씩 앞으로 향하는 것 이게 바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성도의 삶을 저는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만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다에서 고기 잡던 기억을 하면 안되고 이제는 앞으로 가야만 되기때문이예요. 뒤로 물러나면 모래톱에 걸립니다. 더 이상 고기를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 베드로가 뒤로 물러나서 고기를 잡는 어부의 자리로 다시 돌아갔을 때 그는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을 기억을 하십니까
유대교에서 개종한 기독교인들은 다시 뒤로 물러가 유대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러가면 침윤에 빠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1년동안 뒤로 물러가신 부분들이 있습니까 어느 면에서 뒤로 물러가셨습니까 기도생활이 뒤로 물러가지 않으셨습니까 봉사생활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셨습니까 전도생활이 뒤로 물러가지 않으셨습니까 한 걸음만 물러나면 점점 내 삶은 저 뒤쪽으로 가서 침윤에 빠질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999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뒤로 한번 바라봅시다. 여러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으십니까 가슴이 아파서 전혀 내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 있습니까 원망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따지고 싶음 마음이 여러분 마음속에 있으십니까 혹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여러분 속에 있으십니까 그게 있다고 하면 여러분 그것들 때문에 뒤로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2000년을 맞을 수 없습니다. 새천년의 주인이 전혀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술을 먹고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부두에 메어진 자기 보트로 갔습니다. 그리고 배를 운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3시간쯤 계속해서 시동을 켠 채 앞으로 전진을 했습니다. 정신을 차렸습니다. 이제는 바다 한복판이겠거니 그런데 밖을 보니 여전히 부두에 있었던 거예요. 이상합니다. 내려보았습니다. 보았더니 바로 그 부두에 자기 배가 메어져 있었어요. 그 로프를 풀지 못하고 계속 운전을 했던 거예요. 밤새도록 그 자리에서 ”웅웅” 거리면서 꼼짝도 하지 않음채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 그 모든 줄을 끊으셔야 합니다. 지금 마지막 주일에 나를 메고 있는 지난 일은 없습니까 불만스러운 일, 불평스러운 일, 절망과 시기, 원망 혹은 나에게 해를 끼친 어떤 사람 무엇이든지 상관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를 과거에 묶어 두는 줄이 될 것입니다. 이 시간 믿음의 도끼로 그 모든 것을 내려칩시다. 줄을 끊읍시다. 모든 사건에 대하여 감사하실 때 과거는 우리를 놓아줄 것입니다. 지나온 모든 일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쨌든 주님 앞에 영광을 돌립니다. 이렇게 고백하실 때 한순간 과거가 잡고 있는 모든 줄은 뚝하고 잘라지게 될 것입니다. 무조건 용서해 주세요.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용서하는 순간에 우리를 붙들고 있는 모든 과거의 줄들이 우리를 놓아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새천년에 집입할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그의 모든 줄을 끊고 있습니다. 오직 한일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쫓아가노라. 2000년의 문턱에서 문 고삐를 잡고 뒤로 돌아보고 계시는 성도여러분 과거를 보면서 괴롭고 고통스러워 뒷걸음질 치고 계십니까 믿음의 눈으로 과거를 봅시다. 오직 한 면만의 동전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아도 그 어느것 하나 주의 손길 미치지 않은 곳이 한군데도 없습니다. 뒤로 가려는 내 발걸음을 믿음으로 앞으로 향하게 합시다. 현재의 고통과 답답함을 보면서 거부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성도가 있습니까 주님이 보여주시는 현재의 모습도 믿음으로 보면 동전 앞면 같은 것입니다. 충분히 견딜 수 있고 이길 수 있는 현실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현실들을 바라보고 인내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001년을 생각하면서 불안한 그림이 자꾸 그려지십니까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드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더 나은 미래 더 나은 것을 준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더 낫고 더 좋은 연구한 산업이 우리를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줄 믿는 성도들 되시길 바랍니다. 믿음 안에서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새로운 눈으로 바라봅시다. 믿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2000년을 맞아 믿음으로 살아가는 복된 주님의 백성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앞면밖에 나올 수 없는 동전과도 같습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은 소망의 면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분명히 절망 중에 있는데 믿음은 우리를 향해서 절망을 읽기를 이것은 ’이것은 희망이라. ’ 이렇게 읽습니다. 분명히 울고 있는데 믿음은 우리를 향해서 ’기쁨이다. ’ 이렇게 바라보고 또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리한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이길 수 있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도 믿음의 동전은 고통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이루어 질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기뻐하라. ” 이렇게 해석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답답한 상황인데도 믿음은 우리에게 잘 될 것이라고 희망이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1년을 돌아봅시다. 돌아보면 동전의 양면처럼 기쁜 일과 슬픈 일 안타까운 일과 희뭇한일 답답한 일과 시원한 일 신나는 일과 힘 빠지는 일 이런 것들이 동시에 이 시간 우리 머리에 교차하지 않습니까 오늘은 지난 1년을 회고하고 정리하면서 새로운 한해 특별히 새로운 천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할 송년 주일입니다. 이 일을 우리가 잘 할 수 있도록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오늘의 말씀은 지난 1년을 믿음으로 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동전 뒷면 같은 모든 사건들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감사하고 새로운 천년과 새해를 맞이할 수 있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살리라. 믿음으로 사는 삶은 먼저 우리의 미래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도는 믿음을 가진 사람인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미래에 대하여 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에 대한 바른 정의가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는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더 나은 것이 기다리고 있으며 더 영구한 산업이 여호와 하나님 은혜 가운데 우리를 위하여 준비되어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이 부호로 표시한다면 이런 화살표가 될 것입니다. 미래를 향하는 화살표 이게 바로 믿음의 또다른 부호가 될 것입니다. 우리 34절 말씀이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는 유대인들 가운데 기독교로 개정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정한 다음에 유대인들이 이 개정한 유대인들을 대단히 많이 핍박을 했습니다. 감옥에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협박을 하기도 했습니다. ”왜 좋은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갔느냐 돌아와라. ” 여러 가지 회유가 있기도 했습니다. 개중에는 기독교를 믿는다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히브리서는 쓰여졌습니다. ”돌아가지 말라. 기독교는 훨씬 더 유대교보다 낳은 종교이다. 예수그리스도는 훨씬 더 모든 것을 능가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하여 기록된 책이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수많은 어려움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투옥된 사람을 돌보는 그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러나 해가 돌아올지도 모르는 가운데 더 나은 미래가 있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오늘 당하는 어려움과 오늘 당하는 핍박과 박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미래 소망이 확실한 자는 오늘의 어떤 고난도 슬픔도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들판에서 홀로 돌 베개를 배고 잠을 자고 있을 때 그때는 바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래를 보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닥다리의 환상은 바로 미래로 연결되는 줄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자세가 바로 되자 그의 태도도 달라졌어요. 미래를 바라보는 소망이 믿음이 그 속에 생기자 그는 지금까지 고독 가운데 절망가운데 배고 있던 돌 베개를 취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제사하는 재단으로 삼았습니다. 기름을 붓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경배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 그는 일찍이 미래로 연결되는 비디오 카메라가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연결해 주셔서 보여주셨던 아름다운 더 나은 미래가 요셉의 눈에 항상 맺혀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보고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가운데 고난이 다가오고 환란이 다가왔지만 늘 바라보는 미래 때문에 감옥 속에서의 고통을 이기고 또한 오해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그런 상황도 넉넉하게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 나은 연구한 산업이 있음을 그들은 바로 기억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미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무서운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쓰는 말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왜그런가하니 앞에 보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미래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어려움과 한란과 고통들은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게 되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미래 때문에 핍박을 이깁니다. 주님이 보여주시는 소망 때문에 고통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제가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데 앞에 있는 모니터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모니터가 보이지 않으면 답답해요. 그렇다고 뒤를 돌아볼 수가 없고요. 한참 답답하게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데 급하게 방송실 요원이 내려왔습니다. 줄이 빠져있었던 거예요. 줄을 연결했습니다. 연결되는 순간에 ’확’하고 모니터 화면이 나왔습니다. 아주 제 마음이 시원해졌어요. 여러분 잘못하면 미래로 연결되는 이 귀한 믿음에 줄이 빠질 수가 있습니다. 끊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게 되요. 답답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나의 미래가 보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배하신 더 나은 미래 영구한 산업이 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오늘의 모든 것이 힘들어 지고 답답해지고 피곤해지고 불평과 불만을 토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곤란은 결국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하는 길목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재의 고통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해야지요. 그럼 어떻게 되죠. ”선을 이루느니라. ” 그렇습니다. 이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어떤 예수 잘 믿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 자매에게 고난이 다가 왔습니다. 어린아이가 아프게 되었습니다. 병들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한지요. 아기 옆에 앉아서 이 자매는 밤새도록 울며불며 기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아이를 제발 살려주세요. 고쳐주세요. 치료해 주세요. ” 울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새벽쯤 되었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소망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기를 손에 붙들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더 나은 미래가 있는 것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왔습니다. 그는 먼동이 틀 무렵 이렇게 기도를 고쳐서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당신 보시기에 최상의 것을 행하십시오. 더 나은 것을 선택하십시오. 저는 주님의 선택을 따르겠습니다. ” 이렇게 기도를 하고 났더니 마음에 평화가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항상 덜 나은 선택을 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더 났지 않다고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항상 더 나은 미래 더 나은 선택을 우리를 위하여 하신다는 선택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그렇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더 나은 미래가 있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더 나은 선택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지금의 고통보다 더 나은 미래가 있는 것을 믿으십니까 지금의 억울함보다 더 나은 미래가 있는 것을 바라보십니까 지금의 초라함보다 더 나은 미래가 있는 것을 바라보십니까 그것을 보셔야 믿음입니다. 지난 1년에 모든 사건과 경험들을 한번 되돌아봅시다. 이 모든 경험들 사건들 이 시간 믿음의 모니터와 연결합시다. 그러면 주님 손에 있는 미래의 아름다운 영상들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건들이 다시금 새롭게 소망가운데 해석되어서 내눈앞에 아름다운 영상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을 보시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미래를 강요하지 마세요. 여호와 하나님 꼭 이런 미래를 주십시오. 이것이 아니면 안됩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억지를 부리지 마세요. 주님 손에 맡겨 드립시다. 주님 보시기에 제일 좋은 선택을 해 주십시오. 저는 그 선택을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기며 주님이 원하시는 그것을 펼쳐주시도록 주님께 미래를 맡기는 믿음의 성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믿음으로 사는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을 인내하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와의 관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발을 딛고 있습니다. 이것을 부호로 표시한다면 이렇게 시금을 가르치는 아래쪽으로 향하는 그런 화살표가 될 것입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지금과 여기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현재 내 상황 바로 거기에서 믿음은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36절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말은 잘못 이해하면 그저 앞으로 될 것에만 마음을 두고 꿈속에서 무엇을 생각하듯이 현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할 위험이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소망을 가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발로 딛고 있는 여러 가지 삶에 정황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모든 사건들 이런 것을 무시하거나 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남들보다 더욱 현실 가운데서 바로 직면하고 인내하고 사는 사람을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루이스티븐슨이 이런 비유를 말했습니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거센 폭풍우를 예로 들어서 믿음의 상황을 설명을 합니다. 수많은 승객들이 배를 타고 있습니다. 파도가 몰아쳐 옵니다. 배가 흔들릴 때마다 승객들은 비명을 지릅니다. ”사람 살려”하고 막 과음을 지릅니다. 그런데 성질이 급하고 인내심이 부족한 승객 한 사람이 위로 올라갔습니다. 가판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선장을 배를 운전하고 있는 그곳으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가서 따질려구요. 왜 배 운전을 제대로 못하느냐구요. 따지려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선장을 핸들을 잡고 ”지금 열심히 운전하고 있습니다. ” 두사람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선장의 얼굴에 웃음이 환했습니다. 미소를 지으면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 그 얼굴을 보면서 다시 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불안에 떨고 있는 다른 사람을 향해서 ”잘 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선장의 얼굴을 보았는데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 그렇습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지금 내 눈앞에 다가오는 폭풍을 바라보면서 파도를 바라보면서 염려하면서 그건 불신입니다. 그는 더 이상 선장의 미소를 보았기 때문에 그의 실력을 믿었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로보트브라운이 이렇게 노래를 부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모든 일은 잘될 것입니다. ” 이 얼마나 놀라운 시입니까 현재 내가 파도를 보고 두려워하고 고통을 참아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선장이신 주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마지막 주일에 주님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시겠어요 주님을 바라보세요. 거기에 우리의 마음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현재 모든 문제를 넉넉히 이기게 될 것입니다. 사건을 바라보지 마세요. 파도를 바라보지 마세요. 주변을 바라보지 마세요. 나를 바라보고 환한 미소를 짓고 안심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시며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그 안에서 오늘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인내를 배우는 귀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인내가 없는 사람은 실컷 봉사하고 고통받고 믿음의 생활을 잘 하고도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해 놓은 귀한 축복들을 놓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참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성경에 대마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 대마는요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전도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그는 참지 못했습니다. 바울을 따라다녀 보았자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인내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으로 갔습니다. 성경에는 그의 일생을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해 놓습니다. ”대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갔고” 성도여러분 만약에 그가 그 순간 인내했으면 대마는 위대한 이름이 되어 우리 앞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대마는 나와 함께 십자가 지기까지 고통하고 인내하다가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의 면류관을 받았느니라. ” 아마 이렇게 기록됐을 거예요. 여러분 지금까지 믿음생활을 해오셨는데 믿음으로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인내하는 사람만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에 주인공들이 될 수 있을 것이.
그러면 인내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오늘 주님의 말씀이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37절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 이것이 바로 인내하는 방법이에요. 잠시잠깐후면 무슨 말씀입니까 이번 한번만 지나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만 지나가면 내일이면 끝이 날것이라고 하는 그런 자세로 하루하루를 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한번만 충성하자고 생각하고 충성하십시오. 이번 한번만 용서하자고 생각하고 용서하십시오. 이번 한번만 이 유혹을 이기자고 생각하고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기 바랍니다. 한번이 중요해요.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하루만 참으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시련을 견딜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통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독립군과 매국노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이 한번의 차이가 있습니다. 매국노는 도저히 내일의 독립이 올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10년, 20년이 되어도 독립이 올 것 같지 않아서 그만 자기 자존심 다 포기하고 매국노가 됩니다. 일본사람에게 빌붙어서 사는 매국노가 됩니다. 독립군은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그들의 마음속에 ”내일이면 독립할 것이다. 잠깐 참으면 조국의 독립이 반듯이 올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이 분명히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참지 않습니까 독립군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한번만 참으세요. 더 오랫동안 참을 생각하지 마시고 딱 한번만 참으세요. 그러면 될 거예요.
저는 매주일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또 성도들 앞에서 이렇게 예배를 인도하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앞으로 1년동안 설교할 것을 고민하면요 아마 머리가 잘못될 지경에 이를 거예요. 그러나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떻해요. 한주일만 주님 앞에 엎드려 ”주여 이번 주에 성도들이 먹을 양식이 무엇입니까” 딱 하나만 주님 앞에 기도하고 준비하고 더 머리를 조아리며 주님의 말씀을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끝나면 그것으로 만족이에요. 왜요 다음 주에는 주님이 또다시 다음주일을 위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하루씩 사십시오. 한번씩만 사시기 바랍니다.
장애인 가운데 4
2. 195km를 완주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너무 훌륭했기 때문에 기자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 불편한 몸으로 완주할 수 있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완주라뇨. 나는 완주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저는 전봇대 하나만 보고 달렸습니다. 50m만 달렸습니다. ” 그는 끝까지 달린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 한 단계만 50m만 달린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도착하고 또 다시 50m만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끝까지 달릴 수가 있었습니다. 성도여러분 멀리 보지 마십시오. 매일 하루씩 사시길 바랍니다. 이번 한번만 참으시면 이길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유혹 한번만 참으시면 이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든 믿음의 힘이 오늘의 나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마치 한번만 참은 듯한 모든 인내로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현재를 이길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한걸음더 나아가서 믿음으로 사는 삶은 뒤로 물러나지 않는 삶을 의미합니다. 과거와의 관계를 우리에게 밝혀주는 그런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부호로 표시한다면 왼쪽으로 가는 뒤쪽으로 향하는 이런 화살표를 우리가 그릴수가 있을 것입니다. 38절과 39절을 말씀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오직 나의 의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윤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하매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
제가 선교사 시절에 이 폭우에 들어오는 배에 가면 고기를 살수가 있습니다. 모래톱위로 배가 올라와요. 거기서 고기를 파는 얼마나 싱싱한 고기를 구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풍경이 거기에서는 전개됩니다. 배들이 모래위로 올라옵니다. 그때부터는 뒤로 물러서면 안돼는 거예요. 앞으로만 가야합니다. 사람들이 쭉 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긴 롤러 같은 것을 배 밑에 댑니다. 그러면 그 위로 배를 밀어서 지나가게 합니다. 또하나를 대고 또하나를 대고 제일 뒤쪽에 있는 것을 앞으로 끌어당겨서 넣습니다. 다시 또 빼서 앞으로 갔다 넣습니다. 그래서 그 배는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위로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저것이 바로 믿음의 생활이로구나” 그래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보리고 한 단계씩 앞으로 향하는 것 이게 바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성도의 삶을 저는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만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다에서 고기 잡던 기억을 하면 안되고 이제는 앞으로 가야만 되기때문이예요. 뒤로 물러나면 모래톱에 걸립니다. 더 이상 고기를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 베드로가 뒤로 물러나서 고기를 잡는 어부의 자리로 다시 돌아갔을 때 그는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을 기억을 하십니까
유대교에서 개종한 기독교인들은 다시 뒤로 물러가 유대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러가면 침윤에 빠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1년동안 뒤로 물러가신 부분들이 있습니까 어느 면에서 뒤로 물러가셨습니까 기도생활이 뒤로 물러가지 않으셨습니까 봉사생활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셨습니까 전도생활이 뒤로 물러가지 않으셨습니까 한 걸음만 물러나면 점점 내 삶은 저 뒤쪽으로 가서 침윤에 빠질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999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뒤로 한번 바라봅시다. 여러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으십니까 가슴이 아파서 전혀 내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 있습니까 원망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따지고 싶음 마음이 여러분 마음속에 있으십니까 혹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여러분 속에 있으십니까 그게 있다고 하면 여러분 그것들 때문에 뒤로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2000년을 맞을 수 없습니다. 새천년의 주인이 전혀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술을 먹고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부두에 메어진 자기 보트로 갔습니다. 그리고 배를 운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3시간쯤 계속해서 시동을 켠 채 앞으로 전진을 했습니다. 정신을 차렸습니다. 이제는 바다 한복판이겠거니 그런데 밖을 보니 여전히 부두에 있었던 거예요. 이상합니다. 내려보았습니다. 보았더니 바로 그 부두에 자기 배가 메어져 있었어요. 그 로프를 풀지 못하고 계속 운전을 했던 거예요. 밤새도록 그 자리에서 ”웅웅” 거리면서 꼼짝도 하지 않음채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 그 모든 줄을 끊으셔야 합니다. 지금 마지막 주일에 나를 메고 있는 지난 일은 없습니까 불만스러운 일, 불평스러운 일, 절망과 시기, 원망 혹은 나에게 해를 끼친 어떤 사람 무엇이든지 상관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를 과거에 묶어 두는 줄이 될 것입니다. 이 시간 믿음의 도끼로 그 모든 것을 내려칩시다. 줄을 끊읍시다. 모든 사건에 대하여 감사하실 때 과거는 우리를 놓아줄 것입니다. 지나온 모든 일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쨌든 주님 앞에 영광을 돌립니다. 이렇게 고백하실 때 한순간 과거가 잡고 있는 모든 줄은 뚝하고 잘라지게 될 것입니다. 무조건 용서해 주세요.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용서하는 순간에 우리를 붙들고 있는 모든 과거의 줄들이 우리를 놓아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새천년에 집입할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그의 모든 줄을 끊고 있습니다. 오직 한일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쫓아가노라. 2000년의 문턱에서 문 고삐를 잡고 뒤로 돌아보고 계시는 성도여러분 과거를 보면서 괴롭고 고통스러워 뒷걸음질 치고 계십니까 믿음의 눈으로 과거를 봅시다. 오직 한 면만의 동전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아도 그 어느것 하나 주의 손길 미치지 않은 곳이 한군데도 없습니다. 뒤로 가려는 내 발걸음을 믿음으로 앞으로 향하게 합시다. 현재의 고통과 답답함을 보면서 거부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성도가 있습니까 주님이 보여주시는 현재의 모습도 믿음으로 보면 동전 앞면 같은 것입니다. 충분히 견딜 수 있고 이길 수 있는 현실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현실들을 바라보고 인내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001년을 생각하면서 불안한 그림이 자꾸 그려지십니까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드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더 나은 미래 더 나은 것을 준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더 낫고 더 좋은 연구한 산업이 우리를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줄 믿는 성도들 되시길 바랍니다. 믿음 안에서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새로운 눈으로 바라봅시다. 믿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2000년을 맞아 믿음으로 살아가는 복된 주님의 백성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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