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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긍휼을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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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김을 받을 사람이 누구인가?
긍휼이 필요합니다 2004년도 한 해도 저물어 갑니다. 오늘이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 동안 신앙생활 열심히 하신 분들, 교회 일에 몸 바쳐 헌신하신 분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심은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흘린 땀방울은 반드시 결실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흘린 눈물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긍휼을 베푸시기 원합니다. 혹 우리에게 선한 것이 있다면 넘치는 긍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먼저 긍휼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 봅시다. 사람 하나죽어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대도시에는 어제 시내의 교통사고 현황을 알리는 게시판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망자와 부상자의 숫자를 기록합니다. 늘 보아서 그런지 몇 명이 죽었다고 해도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사고를 당한 한 사람 한 사람은 귀한 사람들입니다. 누구네 집 귀한 자식일 수도 있고, 교회에서 신실한 일군일 수도 있고, 사회에서도 유명한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여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습니다. 힘으로 다스리는 세상은 냉정합니다. 로마 시대로 돌아가 봅시다. 로마 시대에는 노예에게 인권이 없습니다.
노예는 살아있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인 마음대로 죽일 수 있고, 주인 마음대로 팔 수 있습니다. 늙고 병든 노예는 팔아버립니다. 건강하지 못한 아이들도 버림받습니다. 길에서 주운 아이들을 데려다 키워서 구걸을 하거나 창녀로 만듭니다. 일부러 불구로 만들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동냥하게 합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지역에서는 쌍둥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겨서 흙으로 만든 항아리에 담아서 표범의 먹이로 던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냉혹한 시대를 산다면 끔찍한 일입니다. 긍휼을 받지 못하고 산다면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긍휼과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긍휼은 죄의 비참함을 다루고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말합니다. 긍휼은 고통을 제거하려는 의욕입니다. 상대방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행동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이란 여호와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약속을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변덕스러운 분이 아닙니다. 언제나 어떤 환경에서도 변치 않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자연계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납니다. 비가 오고 햇볕이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이 없다면 하늘의 문이 닫히고 기근과 가뭄이 임할 것입니다.
만약 햇볕이 없다면 모든 생명은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약속한 햇볕이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추운 겨울만 계속될 것입니다. 지구에 빙하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온 우주 만물에 여호와 하나님의 성실한 사랑, 곧 긍휼이 가득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실 때 언약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삼아서 큰 나라를 이룰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은 신실합니다.
아브라함이 기다리다 지치고 가끔씩 한눈을 팔 때도 있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한번도 다른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언약을 변경하거나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죽고 400년이 지났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애굽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세의 손을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로 전락해서 정치적으로 학대를 받았고, 경제적으로 노동력과 세금 등으로 수탈당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언약에 근거한 사랑이 곧 긍휼입니다. 요셉은 열일곱 살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형들에게 버림을 받아서 애굽의 노예가 되었고, 보디발의 집에서는 손도 한번 잡지 않은 보디발의 아내를 겁탈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도 들어갔습니다. 세상이 요셉을 버리고, 형제들조차도 요셉을 철저하게 파멸의 길로 던졌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요셉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요셉에게 약속한 성실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요셉에게 베푼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노예를 돌아보시고, 감옥에 들어간 죄수를 돌아본 성실한 사랑이 곧 긍휼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길을 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피를 흘리고 쓰러진 그 사람의 곁을 여러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제사장도 지나가고 레위인도 지나갑니다. 마음에는 안 됐다고 생각하고 동정했는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이나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이 그의 곁을 지나갑니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서 상처를 싸매고, 그를 일으켜서 나귀에 태우고 여관까지 데려갔습니다. 주인에게 강도만난 사람의 회복을 부탁하고 비용이 모자라면 돌아와서 갚겠다고 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돈도 손해고, 시간도 손해입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조건 없이 그를 도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도운 것처럼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오네시보로의 교훈 누가 긍휼을 받을 사람입니까 오네시보로 같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보로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원컨데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16절). ” 왜 바울은 오네시보로의 집에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기를 기도합니까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자주 면회했습니다. 감옥에 갇히면 답답하고 외롭습니다. 바울도 인간입니다. 사람이 그립습니다. 들리는 소식으로는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이 바울에게 등을 돌렸다고 합니다. 마음이 상합니다.
감옥생활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복음을 떠나고 바울을 등진 사람들을 생각할 때 너무 마음이 상합니다. 이런 가운데도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찾아서 면회합니다. 로마 감옥에 갇힌 죄수가 한 둘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바울을 찾았습니다. 당시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핍박이 임할 때라 잘못하면 바울처럼 잡혀서 감옥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남들이 두려워하고 숨을 때 오네시보로는 담대하게 바울을 면회하였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보로의 면회로 큰 힘을 얻었습니다. “자주 유쾌케 하였다”고 오네시보로를 칭찬합니다. 감옥에 갇힌 자를 면회하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더구나 여호와 하나님의 일군을 면회하고 용기를 주는 것은 더욱 선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일군은 비판이나 비난이나 견제의 대상이 아닙니다. 긍휼히 여길 종들입니다.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종들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자주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마음을 시원하게 해야 합니다. 수넴의 귀부인은 엘리사 일행이 수넴을 방문할 때마다 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다락방까지 제공했습니다.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수넴 여인에게 아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깁니다. 오네시보로를 긍휼히 여깁니다. 그와 그의 집이 긍휼을 얻습니다. 병든 자리에서 치료되고, 가난한 자리에서 회복하고, 실패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형들에게 버림받은 요셉을 긍휼히 여긴 것처럼,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긍휼히 여긴 것처럼, 강도만난 사마리아 사람을 긍휼히 여긴 것처럼 우리를 긍휼히 여길 것입니다. 오네시보로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가 무너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금방 등을 돌렸습니다. 믿음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혹시 바울처럼 잡혀서 고난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복음이 막 전파되던 초대교회 상황에서는 담대함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는 복음을 확신했고,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를 기뻐하였습니다. 분위기 따라서 이랬다저랬다 하는 기회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담대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을 얻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 책임집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 누구입니까 복음을 모른다 하는 사람입니까 복음을 믿기는 믿지만 아직도 의심하고 감추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공개적으로 담대하게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탄 배가 지중해를 지날 때, 배는 파선되었지만 바울과 그의 일행은 살아났습니다. 네로 황제에게 복음을 전하러가는 복음의 담대한 증인을 여호와 하나님이 바다에 빠져 죽게 하지 않습니다. 아합왕 시대에 이스라엘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고 기근이 들었습니다. 바알에게 절하고, 바알의 선지자가 무서워서 다 숨었습니다. 한 사람 엘리야가 담대히 갈멜산에 올라가서 제단을 쌓고 기도합니다. 바알이 참 신인지, 여호와가 참 신인지 알아보자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담대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바벨론 왕 앞에서 신앙을 숨기지 않습니다. 왕이 하사한 산해진미를 거부하고 채식만 합니다. 왕이 하사한 산해진미라 할지라도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들을 높이십니다. 긍휼을 베푸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는 자를 나도 시인할 것이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검증된 믿음의 사람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오네시보로는 로마 감옥에서 바울을 섬길뿐 아니라 지난날 에베소에서도 바울을 섬겼습니다.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나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18절). ” 현재와 과거가 일치합니다. 사람의 됨됨이는 지속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하십니다. 한번쯤은 반짝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금은 아닙니다. 변함이 없어야 금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꾸준하게 섬겨야 합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변함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보배입니다. 변함없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와 긍휼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다음달에 공동의회를 열고 안수집사와 권사를 선출하고자 합니다. 당회에서 추천을 할 때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성경적인 자격을 갖추어야 하고, 총회법도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형편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예담교회에 출석한지 만 3년이 지나야 하는 조건입니다. 3년이 지난다고 다 안수집사의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해도 3년은 지나야 자격을 얻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안수집사의 자격을 어렵게 생각하면 한이 없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오랜 동안 변함없이 잘 섬기는 사람이면 족합니다. 재주보다 중요한 것이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이 섬기는 것입니다. 교회 3년 다닌 것이 무슨 자랑이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근본입니다.
결혼을 앞두고 교제할 때에도 상대방을 충분히 알아야 합니다. 테스트를 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결혼 후에는 테스트 하면 안 됩니다. 데이트 할 때에는 사계절을 겪어 보아야 상대방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여름에 좋은 사람이 겨울에도 좋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여유가 있을 때에는 누구나 호인입니다. 찬 바람이 불고 인생에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시간과 장소와 환경을 떠나서 신실하다면 그 사람은 된 사람입니다. 오네시보로는 오랜 세월을 통해 검증된 사람이었습니다.
노인의 백발은 면류관입니다. 세월이 지나도록 백발이 되도록 변함없이 섬기면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것입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의 교훈 오네시보로와 달리 긍휼을 받지 못할 사람이 있습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입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것과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15절). ” 이들이 어떤 인물인지는 잘 모릅니다. 어떤 이유로 인해 바울을 등진 것 같습니다. 일부러 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보면 바울을 등지는데 앞장선 인물인 것 같습니다.
 한 때는 바울에게서 복음을 받고 바울을 도왔지만 어떤 이유로 바울을 버렸습니다. 버렸다는 표현은 이들 때문에 바울이 상당히 마음이 아팠음을 암시합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만 아닙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바울을 등졌습니다. 아시아는 아시아의 수도인 에베소를 말합니다. 바울은 3년 동안이나 에베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와 같은 사람이 있어서 안 됩니다.
교회에 어렵게 하거나 성도의 교제에 흠을 내서 안 됩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등을 돌리고 상처를 낼 것 같으면 차라리 하지 않은 낫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갚아야 하고, 성도의 교제에 참여했으면 죽을 때까지 성도의 교제를 유지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등을 돌립니까 돈이나 명예나 자존심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핑계하지 맙시다. 잔인했던 사람들은 시대가 바뀌었을 때 가장 참혹한 일을 당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얼마나 끔찍한 악을 저질렀습니까
지금은 누가 히틀러를 영웅이라 합니까 악마의 화신일 뿐입니다. 소련 공산주의의 선구자인 레닌은 어떠합니까 그의 동상은 성난 군중들에 의해 무참히 쓰러뜨림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하만은 유대인을 미워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온 유대인을 죽이려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러나 그 운명의 날 새벽에 왕이 허락을 받기 위해 궁궐에 들어갔다가 모든 것이 뒤바뀌어 자기가 세운 나무에 자기가 매 달려 죽지 않았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 어느 분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야기입니다.
월남을 하다가 공산당에게 붙잡혔답니다. 감시병과 얼굴이 마주쳤는데 서로 놀랐답니다. 이분은 선생님이셨고, 그 감시병은 다름 아닌 선생님의 제자였던 것입니다. 감시병을 깜짝 놀라더니 “선생님, 이 길을 따라서 빨리 떠나세요” 하고 친절하게도 길까지 안내해서 극적으로 살았답니다. 평소에 긍휼을 베푸신 선생님이었기에 죽을 자리에서도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누가 긍휼을 받습니까 긍휼을 베푸는 자가 긍휼을 받습니다. 혹 교회에 짐을 지운 일이 있으면 오늘로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됩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처음에 문제를 일으켰다가 새 사람 된 대표적인 인물이 마가입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1차 선교 여행을 떠날 때 데리고 간 사람인데, 선교 여행 중에 일행을 이탈해서 돌아갔습니다. 사명감을 잃었거나 여행이 너무 험해서 혼자 살겠다고 도망간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것이 바나바와 바울의 다툼의 원인이 되어서, 바나바와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때부터 각각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바울은 마가를 절대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바울이 나중에 바울이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러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 ” 처음에는 한두 번 다 실패합니다. 뒤돌아섭시다. 처음에는 교회에 짐을 지우고, 성도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나중이 문제입니다. 돌아섰습니까, 새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긍휼을 기다리라 바울은 오네시보로의 집에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기를 간구합니다(16절).
그리고 다시 18절에 긍휼히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18절). ” 우리도 이런 기도를 드립시다. 피차 긍휼을 나눔으로 긍휼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16절에서 긍휼과 18절에서 긍휼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긍휼을 받는 시간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현재도 긍휼을 받지만, 그날에 긍휼을 꼭 받을 것입니다.
그 날이 무엇입니까 마지막 심판의 날입니다. 지금 당장에 임하는 긍휼도 필요하지만, 장차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가서 긍휼을 받아야 합니다. 두 번째 차이는 어떤 긍휼인가 하는 것입니다. 현세적이고 세상적인 긍휼입니까 영원하고 내세적인 긍휼입니까 지금 사는 세상에서 긍휼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세에서 긍휼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이고 내세에서 받을 긍휼입니다. 늘 병석에서 고생하던 사람이 어느 날 벌떡 일어났습니다.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고, 듣지 못하던 사람이 듣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걷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긍휼입니다. 병으로 고생해본 사람은 성한 몸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알 것입니다. 가난하게 생활하는 분의 어려움은 겪어보지 않은 분들은 가난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모를 것입니다. 고생의 떡과 눈물의 생수를 마셔보지 않으면 인생을 모릅니다. 생활에 걱정 없이, 남을 도우면서 살 수 있다면 행복한 인생입니다. 어느 날 장례식에 다녀오면서 옆에 앉으신 장로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깜짝 놀랄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에 다시 태어나면 부자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이분이 믿음이 없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려운 생활에 대해서 고통 때문에 하신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재수나 삼수를 하면 대학에 한번 붙으면 어한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병을 고치고, 여유 있게 살아도, 내세에서 받을 긍휼을 부정해서 안 됩니다. 바울은 네로황제에게 재판을 받고 순교합니다. 억울하게 죽습니다. 로마 감옥에서 순교의 날을 기다리면서 묵상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그 날에 내게 상 주실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보로가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긍휼 얻을 것을 기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당장에 상을 받지 못해도 그 날에 우리에게 상 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풉시다. 주의 백성들과 교회에 긍휼을 베풉시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긍휼을 받을 것입니다. 기도의 골방에 들어가서 한없이 기도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길 것입니다. 죄의 비참함에서 우리를 건질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긍휼로 남을 긍휼히 여기고, 교회와 성도를 섬깁시다. 긍휼을 베푸는 것은 이론이나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천이 문제입니다. 긍휼을 받은 대로 긍휼을 베풀면 긍휼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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