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송구영신의 밤
본문
이제 2002년도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이제 송구의 시간을 교회로 오시면서 보내시고 영신의 시간, 첫시간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이 때가 되면 새로움과 벅찬 감격에 차 있게 됩니다. 서양사람들은 새해를 맞기 전 사랑하는 사람들과 손에 손을 잡고 새해 맞이 카운트 다운을 합니다.
”셋, 둘, 하나, 드디어 새해입니다. ”이렇게 외치면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고 샴페인을 터트립니다. 그리고 올드랭 싸인(auld lang syne)을 부릅니다. 이 올드랭 싸인은 우리 찬송가에는 338장에 ’천부여 의지 없어서’라는 찬송가로 수록이 되어 있습니.
우리 한국 사람들의 세시 풍습으로는 ’아홉 차례’라는 것이 있습니다. 글을 읽어도 아홉차례 읽고, 새끼를 꼬아도 아홉 차례 꼬고, 나무를 해도 아홉 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아홉이라는 것은 십 분을 다 채우지 않고 약간은 모자라게 살라는 처세 철학이 담겨 있는 세시 풍습이었습니다. 밥을 먹어도 배불리 먹지 말라는 것이나 세력을 남김없이 부리지 말며 말은 하고 싶은 대로 다하지 말고 복도 남김없이 누리지 않는 것이 화를 멀리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하고 있는 TV 드라마 중에 ”상도”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원 작가가 최인호씨인데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올 초에 그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책 가운데에는 ”계영배”라는 잔이 나옵니다. 이 잔이 묘한 잔이라 잔을 가뜩 채우면 채운 것이 다 없어지고 팔 부만 채우면 그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그대로 있는 잔입니다. 절제를 가르치는 잔입니다.
옛 어른들은 절제함이 없는 것을 가장 혐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이 자리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2002년은 은혜의 한 해, 그리고 은혜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잊고 용서하고 새 시간에 새로운 마음으로 맞이하는 새로운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올 한해 어떤 분은 기도 요청서에 기도한대로 기도가 이루어지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직도 기도요청서에 기록한 기도 내용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을 여윈 성도님들도 있습니다.
또 생활에 극한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았던 병으로 고통을 당한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또 가정과 자녀들에게 기쁜 일도 참으로 많이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결혼을 하고 믿음의 선물 자녀를 얻고 믿음이 소중한 성장도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우리 곁을 이제 지나갔습니다. 이 시간 그 가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 교회와 가정과 여러 성도님들의 자녀들이 생업이 여호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회를 저의 입장에서는 2002년도에 동광 교회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성경을 읽다가 역대하 1장에서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새해에는 우리 교회가 능력을 발휘하는 교회라고 표어를 정했는데 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파워는 어디서 나올까 저는 해답이 역대하 1장 7절에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역대하 1장 7절을 보면 일 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무엇을 줄까라고 물어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7절 말씀입니다.
”이 밤에 여호와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그러자 10절에 보면 솔로몬의 대답이 나옵니다. 대답이라는 것이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새해 한해에 우리 성도들과 우리 교회가 설정한 표어 ”능력을 발휘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러기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혜가 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각기 오늘 서원 기도를 가지고 나오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저는 여러분들이 이런 바램들이 있었으면 합니다.
먼저, 바른 길을 걷게 해 달라고 구하시길 바랍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시편 기자가는 ”바른 길로 인도 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광야길 같은 고난의 길을 걸어가면서 굽은 길을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길이 아닌 곳을 가시겠습니까 안전한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시편 강해서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가 우리 교단의 선배 목사님이신 송인구 목사님의 시편 강해를 읽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특별한 것도 없고 새로운 신학이 포함되어 있는 시편 강해는 아니지만 목회 현장에서 생생하게 설교하시면서 풀어놓은 강해 설교라 자주 그 분의 목회를 보는 마음으로 펼쳐 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편 107편을 강해하시고 난 뒤 당신이 직접 지은 시가 하나 있었는데 아주 은혜를 제가 받았습니다.
중국에서 은퇴하신 후에 여진헌 목사님과 선교 활동을 하시다가 먼저 여진헌 목사님이 귀국하시고 난 뒤 그 쓸쓸함을 토로한 글이었습니다
제목은 ”떠나간 벗을 그리며”라는 시입니다.
그는 갔네, 조국의 땅에
나그네 길 나 홀로 이곳에 남았구나
1시간 30분에 갈 수 있는 길이어든
못 가는가 아니 가는가 사명에 사는 몸이
맡겨진 일들 위해 최선을 다한데도
남은 시간 짧고 짧아 마음만 급하니
그가 속히 은혜 중 돌아와서 남은 길 함께 가며
기도로 도와 주길 주님께 기도하며 기다린다. 1996년 6월 4일
정지용의 시같지는 않지만 목회의 길을 마친 복음 전하는 일에 평생을 다하겠다고 하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먼 이역 땅에서 사랑하는 동료 목사님을 먼저 고국으로 보내고 난 쓸쓸한 노 목사님의 심경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송인구 목사님은 이 시를 쓴 다음 해인 1997년 여호와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다가 저녁 식사 후에 갑자기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갑자기 부르실지도 모르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길은 누구도 함께 하지 못하고 나와 함께 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는 고독한 길입니다.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소망하며 사셔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새해를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소원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만족케 됨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9절 말씀은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영혼이 만족하게 되는 새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음식을 많이 먹고 나면 배가 부르고 만족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에 영의 양식을 많이 들게 되면 우리의 영혼이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이 만족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 영혼이 구원받았기에 죄가 우리를 칭칭 동여매고 있는 사슬에서 해방되고 이제 더 이상 죄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 영혼의 만족이란 영혼이 자유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이하에 보면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인간됨의 표시는 자유함입니다.
경제적인 자유, 정치적인 자유, 사회적인 자유, 문화적인 자유함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죄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이 자기의 비리를 폭로하고 질책하자 그를 잡아다가 죽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유롭게 생을 끝냈지만 헤롯은 평생 괴로움으로 병들어 남은 생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네로 황제도 바울의 목을 쳤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찬송을 부르며 자유함을 만끽했지만 네로는 가책과 고민에 미치광이가 되어 죽었습니다. 누가 자유인입니까 누가 영혼의 만족을 누리면 산 사람입니까
의를 위한 고난, 그 고난속에도 자유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불의와 타협하고 못할 짓 다하고 출세하고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면 그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바울신학의 대가인 신학자 부르스는 ”박해자를 두려워 말고 너희를 유혹하는 이들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도리어 우리에게 자유함을 박탈해 갑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 박해자들은 사도들에게 참 자유를 주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세상의 돈에서부터 자유하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또 아직도 세상의 습관에서 자유하지 못한 분들도 있습니다. 근실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자기 생활이 통제가 되지 않는 분들도 자유하지 못한 분들입니다. 여러분 ! 모든 부분에서 여러분의 신앙에 비추어 한점 부끄럼이 없는 자유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 자유는 아들이 자유케 하면 자유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참 자유는 사랑입니다. 참자유는 영생함입니다. 죽음에 연연해하지 않고 죄에 연연해하지 않고 늘 사랑하고, 늘 진리를 배우는 자유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이 주시는 자유함으로 영혼의 만족을 얻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 마지막으로 감사와 찬송으로 일관된 생을 사시는 올 한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 시편기자는 구속해 주심에 감사하며 좋은 것을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감사와 축복은 부메랑과 같다고 했습니다. 늘 감사하고 늘 축복을 빌면 받을 이가 없으면 그것이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생명을 오늘까지 연장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희로애락의 인생 가운데 희로 시작한 인생이 여호와 하나님의 안에서 희로 끝나는 인생이 되길 바라며 감사의 인생을 사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시대에 가장 큰 비극은 감사가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면 건강한 영혼이 됩니다. 원망하면 영혼이 병듭니다. 감사가 살면 모든 것이 살아납니다.
욥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그는 재산을 잃었고, 건강을 잃었습니다. 가정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독백을 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 하나님이시오, 거두신 자도 여호와 하나님이시라” 오늘 내가 다 잃었지만 결국 주셨던 것과 누렸던 것은 사실입니다. 과거의 은혜를 현재의 조그만 불평으로 인해서 부정해 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 중심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질 때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여기서 죽는다고 하더라고 여호와 하나님의 주신 은혜는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고, 내가 여기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여기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참 감사는 진실함에 있습니다. 고귀한 믿음 속에서 우러나옵니다. 부귀와 영화보다는 의로운 죽음을 택하는 감사가, 얻는 것보다 잃어버린 것들이 있어도 감사가 터져 나와야 합니다.
하박국 3장 17절의 말씀입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는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런 감사가 우리의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단지 좋은 일이 생겨서 드리는 감사가 아닙니다. 성숙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생각이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감사가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복이란 별게 아닙니다. 감사하는 그 순간 우리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올 한해 우리 동광 성도들은 감사와 찬송으로 일관된 삶을 사시며 늘 영혼의 만족을 구하며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며 사시길 축원합니다.
”셋, 둘, 하나, 드디어 새해입니다. ”이렇게 외치면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고 샴페인을 터트립니다. 그리고 올드랭 싸인(auld lang syne)을 부릅니다. 이 올드랭 싸인은 우리 찬송가에는 338장에 ’천부여 의지 없어서’라는 찬송가로 수록이 되어 있습니.
우리 한국 사람들의 세시 풍습으로는 ’아홉 차례’라는 것이 있습니다. 글을 읽어도 아홉차례 읽고, 새끼를 꼬아도 아홉 차례 꼬고, 나무를 해도 아홉 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아홉이라는 것은 십 분을 다 채우지 않고 약간은 모자라게 살라는 처세 철학이 담겨 있는 세시 풍습이었습니다. 밥을 먹어도 배불리 먹지 말라는 것이나 세력을 남김없이 부리지 말며 말은 하고 싶은 대로 다하지 말고 복도 남김없이 누리지 않는 것이 화를 멀리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하고 있는 TV 드라마 중에 ”상도”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원 작가가 최인호씨인데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올 초에 그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책 가운데에는 ”계영배”라는 잔이 나옵니다. 이 잔이 묘한 잔이라 잔을 가뜩 채우면 채운 것이 다 없어지고 팔 부만 채우면 그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그대로 있는 잔입니다. 절제를 가르치는 잔입니다.
옛 어른들은 절제함이 없는 것을 가장 혐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이 자리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2002년은 은혜의 한 해, 그리고 은혜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잊고 용서하고 새 시간에 새로운 마음으로 맞이하는 새로운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올 한해 어떤 분은 기도 요청서에 기도한대로 기도가 이루어지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직도 기도요청서에 기록한 기도 내용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을 여윈 성도님들도 있습니다.
또 생활에 극한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았던 병으로 고통을 당한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또 가정과 자녀들에게 기쁜 일도 참으로 많이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결혼을 하고 믿음의 선물 자녀를 얻고 믿음이 소중한 성장도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우리 곁을 이제 지나갔습니다. 이 시간 그 가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 교회와 가정과 여러 성도님들의 자녀들이 생업이 여호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회를 저의 입장에서는 2002년도에 동광 교회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성경을 읽다가 역대하 1장에서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새해에는 우리 교회가 능력을 발휘하는 교회라고 표어를 정했는데 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파워는 어디서 나올까 저는 해답이 역대하 1장 7절에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역대하 1장 7절을 보면 일 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무엇을 줄까라고 물어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7절 말씀입니다.
”이 밤에 여호와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그러자 10절에 보면 솔로몬의 대답이 나옵니다. 대답이라는 것이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새해 한해에 우리 성도들과 우리 교회가 설정한 표어 ”능력을 발휘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러기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혜가 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각기 오늘 서원 기도를 가지고 나오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저는 여러분들이 이런 바램들이 있었으면 합니다.
먼저, 바른 길을 걷게 해 달라고 구하시길 바랍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시편 기자가는 ”바른 길로 인도 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광야길 같은 고난의 길을 걸어가면서 굽은 길을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길이 아닌 곳을 가시겠습니까 안전한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시편 강해서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가 우리 교단의 선배 목사님이신 송인구 목사님의 시편 강해를 읽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특별한 것도 없고 새로운 신학이 포함되어 있는 시편 강해는 아니지만 목회 현장에서 생생하게 설교하시면서 풀어놓은 강해 설교라 자주 그 분의 목회를 보는 마음으로 펼쳐 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편 107편을 강해하시고 난 뒤 당신이 직접 지은 시가 하나 있었는데 아주 은혜를 제가 받았습니다.
중국에서 은퇴하신 후에 여진헌 목사님과 선교 활동을 하시다가 먼저 여진헌 목사님이 귀국하시고 난 뒤 그 쓸쓸함을 토로한 글이었습니다
제목은 ”떠나간 벗을 그리며”라는 시입니다.
그는 갔네, 조국의 땅에
나그네 길 나 홀로 이곳에 남았구나
1시간 30분에 갈 수 있는 길이어든
못 가는가 아니 가는가 사명에 사는 몸이
맡겨진 일들 위해 최선을 다한데도
남은 시간 짧고 짧아 마음만 급하니
그가 속히 은혜 중 돌아와서 남은 길 함께 가며
기도로 도와 주길 주님께 기도하며 기다린다. 1996년 6월 4일
정지용의 시같지는 않지만 목회의 길을 마친 복음 전하는 일에 평생을 다하겠다고 하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먼 이역 땅에서 사랑하는 동료 목사님을 먼저 고국으로 보내고 난 쓸쓸한 노 목사님의 심경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송인구 목사님은 이 시를 쓴 다음 해인 1997년 여호와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다가 저녁 식사 후에 갑자기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갑자기 부르실지도 모르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길은 누구도 함께 하지 못하고 나와 함께 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는 고독한 길입니다.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소망하며 사셔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새해를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소원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만족케 됨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9절 말씀은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영혼이 만족하게 되는 새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음식을 많이 먹고 나면 배가 부르고 만족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에 영의 양식을 많이 들게 되면 우리의 영혼이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이 만족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 영혼이 구원받았기에 죄가 우리를 칭칭 동여매고 있는 사슬에서 해방되고 이제 더 이상 죄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 영혼의 만족이란 영혼이 자유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이하에 보면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인간됨의 표시는 자유함입니다.
경제적인 자유, 정치적인 자유, 사회적인 자유, 문화적인 자유함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죄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이 자기의 비리를 폭로하고 질책하자 그를 잡아다가 죽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유롭게 생을 끝냈지만 헤롯은 평생 괴로움으로 병들어 남은 생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네로 황제도 바울의 목을 쳤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찬송을 부르며 자유함을 만끽했지만 네로는 가책과 고민에 미치광이가 되어 죽었습니다. 누가 자유인입니까 누가 영혼의 만족을 누리면 산 사람입니까
의를 위한 고난, 그 고난속에도 자유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불의와 타협하고 못할 짓 다하고 출세하고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면 그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바울신학의 대가인 신학자 부르스는 ”박해자를 두려워 말고 너희를 유혹하는 이들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도리어 우리에게 자유함을 박탈해 갑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 박해자들은 사도들에게 참 자유를 주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세상의 돈에서부터 자유하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또 아직도 세상의 습관에서 자유하지 못한 분들도 있습니다. 근실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자기 생활이 통제가 되지 않는 분들도 자유하지 못한 분들입니다. 여러분 ! 모든 부분에서 여러분의 신앙에 비추어 한점 부끄럼이 없는 자유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 자유는 아들이 자유케 하면 자유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참 자유는 사랑입니다. 참자유는 영생함입니다. 죽음에 연연해하지 않고 죄에 연연해하지 않고 늘 사랑하고, 늘 진리를 배우는 자유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이 주시는 자유함으로 영혼의 만족을 얻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 마지막으로 감사와 찬송으로 일관된 생을 사시는 올 한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 시편기자는 구속해 주심에 감사하며 좋은 것을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감사와 축복은 부메랑과 같다고 했습니다. 늘 감사하고 늘 축복을 빌면 받을 이가 없으면 그것이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생명을 오늘까지 연장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희로애락의 인생 가운데 희로 시작한 인생이 여호와 하나님의 안에서 희로 끝나는 인생이 되길 바라며 감사의 인생을 사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시대에 가장 큰 비극은 감사가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면 건강한 영혼이 됩니다. 원망하면 영혼이 병듭니다. 감사가 살면 모든 것이 살아납니다.
욥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그는 재산을 잃었고, 건강을 잃었습니다. 가정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독백을 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 하나님이시오, 거두신 자도 여호와 하나님이시라” 오늘 내가 다 잃었지만 결국 주셨던 것과 누렸던 것은 사실입니다. 과거의 은혜를 현재의 조그만 불평으로 인해서 부정해 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 중심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질 때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여기서 죽는다고 하더라고 여호와 하나님의 주신 은혜는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고, 내가 여기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여기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참 감사는 진실함에 있습니다. 고귀한 믿음 속에서 우러나옵니다. 부귀와 영화보다는 의로운 죽음을 택하는 감사가, 얻는 것보다 잃어버린 것들이 있어도 감사가 터져 나와야 합니다.
하박국 3장 17절의 말씀입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는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런 감사가 우리의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단지 좋은 일이 생겨서 드리는 감사가 아닙니다. 성숙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생각이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감사가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복이란 별게 아닙니다. 감사하는 그 순간 우리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올 한해 우리 동광 성도들은 감사와 찬송으로 일관된 삶을 사시며 늘 영혼의 만족을 구하며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며 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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