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복음을 영화롭게 하는 교회
본문
복음은 교회의 본질이며 시작입니다. 그리고 자랑이며 긍지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믿음 생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이며 진정한 교회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 복음을 중심으로 해서 모인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성도들이 참으로 복음의 터 위에 바로 세워져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점도 중요했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열매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때로 버림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열매는 본질과 관계된 것입니다. 껍데기만 있고 본질이 없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호 4:1,6)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본질이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또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모든 내용이 복음에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복음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힘써 여호와를 알고 힘써 여호와를 사랑하는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호6:1-3)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할렐루야!
2.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은 낱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Good news입니다. 좋은 소식입니다. (마 15: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와 같은 기쁜 일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가 변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되는 것을 원합니다.
두 불행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불신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직 성도가 되지 못한 교인입니다. 교인이라는 말은 복음을 들었어도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가르침을 받고 배우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영적으로 뿌연 안개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 영적으로 자유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유라는 말을 빼고 복음을 말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이미 자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서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향한 자유입니다. Freedom for!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외에는 이 세상에서 구속될 것이 없는 자유를 뜻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정신병원에 가면 이따금씩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직업이 좀 의심스러운데 불 받아라! 능력 받아라! 하고 외칩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을 정체성의 혼란이라고 합니다.
사실 영성은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오는 것입니다.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이 더욱 중요합니다. 영성은 삶에서 배어 나오는 것입니다. 삶에서 묻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 미친 사람처럼 자기 멋대로 말하고 아는 척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나를 움직일 수 없는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나를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고, 나를 행동하게 하는 믿음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소원 성취하는 것, 갖고 싶은 것을 갖는 것,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정도를 복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일시적인 기쁨이 아니라 영구적인 기쁨이 복음입니다.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이 복음입니다.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인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되려면 영속적이고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대부분 비 복음적인 것에 목숨을 겁니다.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유대인들은 그 믿음이 부분적, 정치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돈은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없기 때문에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돈은 침대나 약은 살 수 있어도 잠이나 행복이나 생명을 줄 수는 없습니다.
나이가 40이 넘으면 불혹의 나이라고 말 그대로 얼굴이 평준화가 되어 유혹을 받을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물이 평범한 사람은 40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50이 되면 건강이 평준화됩니다. 나이가 60이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그 몸이 그 몸입니다. 그만하겠습니다. 권력도 젊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 조금 좋아졌다고 우리는 그것을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말대로 헛되고 또 헛된 것에 불과합니다. (눅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에게나 가진 자, 못 가진 자, 권력자나 압박을 받는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이나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기 때문에 복음이 됩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90% 이상을 하층구조, 천민으로 묶어 버립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교회의 본질과 기초가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교회 안에 복음 보다가 무조건 성공, 그냥 우리 자녀들 내신성적 올리는 것이 마치 우리 교회의 본연의 모습인 것 같은 비 복음이 더 판을 치고 있기 때문에 자성하자! 라는 뜻에서 이러한 표어나 기도의 제목이 우리에게 사실 더 절실한 것입니다. (삿 2:10)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신앙을 다 잃게 되고 그 결과는 나라마저 잃어버리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교회는 자녀들에게 분명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진리 때문이 아니고 떡 때문이 아니냐
주님은 비 복음적인 것에 대하여 매우 냉정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여호와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비 복음적인 것에 익숙해 있다가 보니까 엉뚱한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안티 크리스챤의 대부분이 목사와 장로의 자녀들인 것을 아십니까 어설프게 믿은 사람이 더 마귀 짓을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로마 사람들이 아니라 자칭 모태신앙의 사람들, 그래도 남보다 잘 믿는다고 생각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음을 아십니까
이제 우리는 교회의 희망과 생명을 이 복음 안에서 다시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며 끌고 가는 비 복음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우리 안에서 영원히 추방해 버리기를 원합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졌지만 그러나 기독교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필요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제는 필요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붙여지는 이름이 중요합니다. (창 32:27,28)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할렐루야!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그러면
3.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음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
우리는 새해에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 앞에 바로 서기를 원합니다. 복음 앞에 바로 선다는 것은 곧 복음 자체를 영화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릴 수가 있습니다.
먼저 영화롭게 된다는 말씀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의 존재됨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가 그 목적에 맞게 쓰임 받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나의 존재의 존재됨을, 내가 여기에 살아 존재해야 할 그 존재 자체를 가장 분명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심히 좋은 그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그 존재의 목적에 맞게 잘 쓰여 지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참으로 영화롭다! 고 말합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복음을 영화롭게 하는 교회(The Church that Glorifies the Good News)란 이 제자교회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존재하게 하신 그 목적에 맞게 여호와 하나님을 힘써 알고 여호와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는 진정한 성도들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이 뜻은 달리 말씀을 드려서 금년은 영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불법미아 보호자 자수기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은 이따금씩 도로 현수막에서 이러한 글을 보셨을 것입니다. “불법미아 보호자 자수기간”
이것은 이야기를 하면 조금 긴데 간단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일종의 유괴한 어린 아이들을 감금시키고 있는 잘 못된 사람들이 자수하는 기간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불법미아 보호자 자수기간”은 것은 이 미아들에게 자기부모를 찾아주는 행정기관의 특별 캠페인을 뜻합니다.
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복음을 영화롭게 하는 교회”의 표어를 주셨을까요 집을 잃은 미아에게 있어서 복음은 그 부모를 찾아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 예수 좀 만나게 해 줘요!” 이 제자교회가 혹시 영적인 면에서 볼 때 불법으로 미아보호를 하고 있지는 않는지에 대한 자성하는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그 자수기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복음이 심겨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이렇게결론 맺겠습니다. Freedom for! 우리 모두 이 복음 안에서 내일을 향해 완전한 자유인이 됩시다.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점도 중요했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열매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때로 버림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열매는 본질과 관계된 것입니다. 껍데기만 있고 본질이 없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호 4:1,6)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본질이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또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모든 내용이 복음에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복음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힘써 여호와를 알고 힘써 여호와를 사랑하는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호6:1-3)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할렐루야!
2.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은 낱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Good news입니다. 좋은 소식입니다. (마 15: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와 같은 기쁜 일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가 변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되는 것을 원합니다.
두 불행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불신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직 성도가 되지 못한 교인입니다. 교인이라는 말은 복음을 들었어도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가르침을 받고 배우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영적으로 뿌연 안개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 영적으로 자유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유라는 말을 빼고 복음을 말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이미 자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서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향한 자유입니다. Freedom for!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외에는 이 세상에서 구속될 것이 없는 자유를 뜻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정신병원에 가면 이따금씩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직업이 좀 의심스러운데 불 받아라! 능력 받아라! 하고 외칩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을 정체성의 혼란이라고 합니다.
사실 영성은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오는 것입니다.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이 더욱 중요합니다. 영성은 삶에서 배어 나오는 것입니다. 삶에서 묻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 미친 사람처럼 자기 멋대로 말하고 아는 척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나를 움직일 수 없는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나를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고, 나를 행동하게 하는 믿음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소원 성취하는 것, 갖고 싶은 것을 갖는 것,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정도를 복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일시적인 기쁨이 아니라 영구적인 기쁨이 복음입니다.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이 복음입니다.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인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되려면 영속적이고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대부분 비 복음적인 것에 목숨을 겁니다.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유대인들은 그 믿음이 부분적, 정치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돈은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없기 때문에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돈은 침대나 약은 살 수 있어도 잠이나 행복이나 생명을 줄 수는 없습니다.
나이가 40이 넘으면 불혹의 나이라고 말 그대로 얼굴이 평준화가 되어 유혹을 받을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물이 평범한 사람은 40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50이 되면 건강이 평준화됩니다. 나이가 60이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그 몸이 그 몸입니다. 그만하겠습니다. 권력도 젊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 조금 좋아졌다고 우리는 그것을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말대로 헛되고 또 헛된 것에 불과합니다. (눅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에게나 가진 자, 못 가진 자, 권력자나 압박을 받는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이나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기 때문에 복음이 됩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90% 이상을 하층구조, 천민으로 묶어 버립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교회의 본질과 기초가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교회 안에 복음 보다가 무조건 성공, 그냥 우리 자녀들 내신성적 올리는 것이 마치 우리 교회의 본연의 모습인 것 같은 비 복음이 더 판을 치고 있기 때문에 자성하자! 라는 뜻에서 이러한 표어나 기도의 제목이 우리에게 사실 더 절실한 것입니다. (삿 2:10)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신앙을 다 잃게 되고 그 결과는 나라마저 잃어버리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교회는 자녀들에게 분명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진리 때문이 아니고 떡 때문이 아니냐
주님은 비 복음적인 것에 대하여 매우 냉정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여호와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비 복음적인 것에 익숙해 있다가 보니까 엉뚱한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안티 크리스챤의 대부분이 목사와 장로의 자녀들인 것을 아십니까 어설프게 믿은 사람이 더 마귀 짓을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로마 사람들이 아니라 자칭 모태신앙의 사람들, 그래도 남보다 잘 믿는다고 생각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음을 아십니까
이제 우리는 교회의 희망과 생명을 이 복음 안에서 다시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며 끌고 가는 비 복음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우리 안에서 영원히 추방해 버리기를 원합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졌지만 그러나 기독교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필요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제는 필요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붙여지는 이름이 중요합니다. (창 32:27,28)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할렐루야!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그러면
3.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음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
우리는 새해에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 앞에 바로 서기를 원합니다. 복음 앞에 바로 선다는 것은 곧 복음 자체를 영화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릴 수가 있습니다.
먼저 영화롭게 된다는 말씀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의 존재됨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가 그 목적에 맞게 쓰임 받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나의 존재의 존재됨을, 내가 여기에 살아 존재해야 할 그 존재 자체를 가장 분명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심히 좋은 그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그 존재의 목적에 맞게 잘 쓰여 지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참으로 영화롭다! 고 말합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복음을 영화롭게 하는 교회(The Church that Glorifies the Good News)란 이 제자교회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존재하게 하신 그 목적에 맞게 여호와 하나님을 힘써 알고 여호와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는 진정한 성도들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이 뜻은 달리 말씀을 드려서 금년은 영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불법미아 보호자 자수기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은 이따금씩 도로 현수막에서 이러한 글을 보셨을 것입니다. “불법미아 보호자 자수기간”
이것은 이야기를 하면 조금 긴데 간단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일종의 유괴한 어린 아이들을 감금시키고 있는 잘 못된 사람들이 자수하는 기간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불법미아 보호자 자수기간”은 것은 이 미아들에게 자기부모를 찾아주는 행정기관의 특별 캠페인을 뜻합니다.
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복음을 영화롭게 하는 교회”의 표어를 주셨을까요 집을 잃은 미아에게 있어서 복음은 그 부모를 찾아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 예수 좀 만나게 해 줘요!” 이 제자교회가 혹시 영적인 면에서 볼 때 불법으로 미아보호를 하고 있지는 않는지에 대한 자성하는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그 자수기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복음이 심겨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이렇게결론 맺겠습니다. Freedom for! 우리 모두 이 복음 안에서 내일을 향해 완전한 자유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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