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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안식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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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사람들은 옛날보다 많이 살기가 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피곤하다는 말이라든지, 지쳤다고 하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 이유가 어디 있을까? 우리가 많은 것을 얘기할 수 있겠지만 삶이 좀 자연스럽지 못하고 뒤죽박죽 되서 그렇지 않을까? 예를 든다면 잠자는 것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건강하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요즘엔 대부분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 그러니 몸이 견딜 수가 있겠습니다. 생리학적으로 얘기를 하면 밤 10시서부터 3시 사이에 숙면을 해야 가장 건강하다고 얘기하고 밤에 자야 키가 자란다고 그럽니다.
왜냐하면 낮에는 성장호르몬이 나오지를 않는다고 그럽니다. 해가 뜸과 동시에 성장 호르몬은 나오지 않아서 잠을 밤에 많이 자야 키가 자란다. 이런 얘기도 합니다. 근데 요즘 우리의 삶이 이런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것에서 뒤죽박죽이 되어 있습니다.
음식도 그렇습니다. 요즘에는 비닐 하우스 재배를 많이 하기 때문에 여름에 먹을 걸 겨울에도 먹고 겨울에 먹을 걸 여름에도 먹습니다. 그래서 어떤 유치원에서 아이들한테 "딸기에 언제 나나요?” 그랬더니 "사철에 납니다. ” 이렇게 대답을 했더래요. 옛날에는 보통 딸기가 어느 철에 납니까? 5월 달에 납니다. 요즘에는 뭐 시도 때도 없이 포도가 나오죠. 포도는 주로 가을에 나오는데 시품이 있어서 여름에도 포도가 나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삶이 뒤죽박죽이고 철이 없는 것은 다 철 따라 먹지를 않기 때문에 철이 없어졌다고 이런 우스운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우리 옛날에는 흔히 말해서 잘 살지 못했고 가난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옛 어른들은 삶의 절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개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식음유절” 먹고 마시는데 절도가 있었다. "기고유상”일상생활을 규칙적으로 했다. 그리고 "불망작로” 쓸 데 없는 일에 힘을 소비하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 옛 어른들께서 살아가셨던 삶의 모습이고 그래서 건강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에 사람들은 술을 꿀물 마시듯 마신다고 그럽니다. 삶에 절제가 없습니다. 마음 내키는 데로 힘을 소모하고 있습니다. 삶의 터전에 피폐해 집니다. 마음이 피폐해집니다. 거기에 고단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피곤함이 있게 됐습니다. 결국 자연을 무시했다고 하는 것은 천륜을 무시한 것이요.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한 것이며, 동시에 인간의 삶의 무시하게 되는 그래서 우리의 삶에 진정한 안식이 없는, 피곤함, 지침, 짜증 이런 것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안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안식이라고 하는 말을 쓸 때 꼭 안식일이라든지, 우리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안식을 얘기하지 않더라도 안식이라고 하는 말을 쓰면 그 말속에는 무언가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있습니다. 무언가 깊은 분위기를 갖게 하는 그런 느낌이 이 말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 안식처, 영원한 안식, 이런 말을 합니다. 또 안식이라고 하는 말을 쓰게 될 때 그 말속에는 이 안식이 나하고 가까이 있고 지금 여기에 있다고 하는 느낌보다는 어디에선가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선가 안식이 내게 오고 있고, 그리고 어디엔가를 가면은 내가 좀 안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좀 아득하다고 하는 느낌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식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과 거리가 먼 것이 아니라, 정말로 진정한 안식은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을 이런 느낌 속에서 시사해 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안식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의 한 부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 속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 속에서 주어진 복과 거룩함을 갖는 삶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하는 삶이라고 얘기할 때 그 안식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서는 어떤 의미가 되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 만물이 다 이룬 후에 지으시던 일이 마치니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 그러니깐 우리들이 말하는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의 역사와 그 창조한 것이 완성된 것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피아니스트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연주를 많이 하는 분입니다. 밤에 집에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쉬어야 할 시간인데, 쉬지 않고 계속해서 피아노를 혼자 연주합니다. 그래서 "아 이제 피곤하실텐데, 좀 쉬시죠. ”"아니요 나는 이게 쉬는 것입니다. ” 자신이 연주하고 연주한 것에 만족하고 그리고 또 그 연주한 것을 위해서 다시 피아노를 치면서 "나는 이것이 쉬는 것입니다. ” 우리가 쉰다고 할 때 안식이라고 할 때 이제는 일을 다 해서 지치고 몸을 가눌 수가 없어서, 어찌 할 수 없어서 드러눕는 것은 쉬는 게 아닙니다. 병든 것이죠. 근데 사람들은 병들어 누워있으면서 이제 그 때서야 겨우 뭐라고 말하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하도 안 쉬니까는 이렇게라도 쉬게 하시나 보다고,”
여러분 그러다가 아주 쉬는 수가 있으니깐 조심해야 합니다. 쉰다고 하는 것이 내가 약하고 지쳐서 병들어서 쓰러져서 그리고 그 다음에서야 "아이고, 좀 쉬어야 되겠구나. ”여러분 그것은 쉬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제가 목사로서 이렇게 말씀드리면 오해를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저의 선배목사님이 저 강남에 아주 큰 교회 목사님이 목회 한 10년쯤 계속 하시다가 그만 무력증에 빠져서 쉬게 되었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주 유명하신 목사님입니다. 그래서 이 분이 일년동안을 하와이에 가서 쉬었습니다. 그리고도 몸이 회복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쉴 수 없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 죽으면 죽으리
라. 죽더라도 이제는 교회에 가서 강단에서 죽어야지. ” 그리고 오셔서 다시 또 목회를 하시면서 힘을 얻으셔 가지고 지금 또 목회를 잘 하시고 계시는데, 그분이 후배들을 모아논 가운데서 후배 목회자들을 모아놓고 강의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약간 표현이 좋지 않으니깐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사람이 안식년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병신년을 지내게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남편이 병신년을 지내게 되면, 아내는 등신년을 지내게 된다는 거예요. ” 그러니 여러분 남편이 제대로 쉬지 못해서 병들면 남편이 병들었고, 그 다음에 남편이 병들면 아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아내가 제대로 쉬지 못해서 병들면 남편이 어려워지는 것이죠. 그러면 그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 갑갑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와 그 창조를 마친 것, 특별히 해야 할 일을 다하고 그 일이 선하고 그것이 목적에 맞아서 만족해서 이제는 됐다. 거기에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냥 할 일 없이 드러누워서 쉬는 것이 안식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예 하루 놀고 하루 쉽니다. ”
여러분 이건 축복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 은퇴하고 그러면 이제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에 하루 놀고 하루 쉬는 것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해야 되는데 쉬고 있다면 그것은 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분은 극단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옥이 무엇이냐, 지옥은 일이 없는 곳이다. ” 지옥에 가면 일이 없대요. 천당에는 일이 많대요. 사람이 일이 있어야 힘이 나고 그리고 그것이 힘이 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인간이 인간 될 때에 안식이 있습니다.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거기 안식이 있습니다. 인간이 서로 섬기면서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와 교제와 봉사와 사랑 이것은 모두 안식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안식 속에는 노동의 순수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할 수 있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은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영원을 바라보는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은 안식일을 어떻게 우리에게 의미화해 주셨는가? 다시 말씀드리면 여호와 하나님은 어떻케 해서 안식을 우리들에게 구별해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복 주셨다. 안식일을 복 주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안식하는데, 그 안식에 복을 주셨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모든 생애의 바퀴 속에서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일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복을 빌면서 살아라. 이것은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우리는 상호간에 인격의 존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사이에는 존중이 있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복 주셨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중히 여기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존중히 여겨야 됩니다. 이것은 얽어 매임에서 해방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착취나 노예적인 삶이 금지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기적인 삶이 포기되어야 거기 복이 있고 안식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공동체 내에서 서로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어야 되는데, 그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려면 모든 관계에서 복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삶 속에서 안식이 있는 것, 안식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서로에게 복됨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나는 복된데 저 사람은 복되지 못하면 이것은 안식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좋은데 나는 행복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언젠가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 니가 나를 무시했으니, 언젠가는 눈물 날 적이 있겠지. ”눈물만 나면 괜찮죠. "피눈물 날 때가 있으리라. ”
여러분 그러면은 행복해 지겠습니까?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 안식은 복이 될 때 서로에게 복이 될 때 안식이 됩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이 안식의 복을 가르치는 데 7일, 7년, 49년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7일 한 주에 하루를 안식해라. 그래도 우리에게 복이 있다. 쉬라. 일반적으로 생각해도 그렇게 말씀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7년에는 쉬라. 땅을 쉬게 하라. 사람만 쉬는 것이 아니라 땅까지 쉬게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땅까지 쉬게 하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땅도 쉬게 하라. 짐승들도 쉬게 하라. 다 쉬게 하라. 이 7년이 일곱 번 지나가서 49년이 되면, 그 다음엔 노예들을 돌려보내라. 어떤 이유에서 왔던지 네 집에 종으로 있거나 자유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다 풀어서 해방시켜라. 그 다음에 남의 땅을 산 것도 돌려보내라.
여러분, 요즘에 무슨 일이 있냐면 벌써 북한에 대한 부동산 투기가 일고 있데요. 고향을 떠난 지 50년이 됐는데도, 옛날에 내고향 땅 문서 가지고 가서 땅 찾겠다는 것이죠. 그런 어리석은 생각하지 말아야 되겠죠.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땅을 산지 50년이 되면 50년이 지나면, 주인에게 돌려보내라. 이런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서로 서로에게 복되게 하라. 이것이야말로, 사회의 정의요, 분배의 균등이요, 그리고 복지의 보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한 평생 자기 부를 갖고 그것도 모자라서 계계승승이 이어 갈려고 하는 욕심을 부릴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의 부나, 우리의 소유를 무시하고 갖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우리가 생각해 보십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전통의 문제가 아니고,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복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해방과 자유를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끼리 관계된 모든 것을 복 되게 하는데, 그것을 나누는데 안식하는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게 했다. 안식은 거룩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거룩이라고 하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가 안식하는 삶을 함께 누리는데 여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식한다고 할 때 그냥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것
은 분명하게 세상의 가치와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정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합당한 것이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먼저 지키신 것이기 때문에 정당한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복 받게 하는데, 쓰일 수 있는 유용성이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구별된 것입니다. 이 안식이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조심성을 갖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무심 결에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충실하게 살고 충실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안식한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그 은혜에 대해서 주의력을 갖는 것이며, 그 은혜에 대한 보유하는 힘을 갖는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주의력이 무엇일까요? 내 삶을 정성을 다해서 정성을 드리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멋대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안식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약속을 여호와 하나님이 부어주신 그 복을 내가 지키는 능력을 가지는 것으로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시 한 번 안식의 차원을 달리 합시다. 안식의 차원을 달리 합시다. 그냥 먹고 즐기고 놀아버리는 소비문화의 그러한 형식이 아니라, 사람끼리 서로 서로 복 주는 복의 등불을 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우리의 것을 드리는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좀 큰 교회인데, 아마 그래도 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잘 산다고 생각할까요. 어떤 사람이 이제 자동차를 타고 내렸습니다. 그래서 자동차에서 내리신 분은 교회로 들어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분을 모시고 온 기사는 저 쪽에 있는 기사 대기실에 가서 다른 기사들하고 어울려 놉니다. 안에서는 주인께서 예배를 드리는데 밖에서는 이 사람들끼리 모여서 고스톱을 치고 놉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고스톱을 치면서 이렇게 얘기하더라는 거예요.
"그래 너는 천당 가라, 나는 지옥 간다. ” 사장이 안 들으니깐. 예. 여러분 나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면서 은혜 받는다고 하면서 자기 기사 일주일에 한 번 놀게도 못하면 되겠습니까? 이건 한 부분적인 얘기에 불과합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우리의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되풀이해서 말씀드리지만 서로에게 복되고 그리고 거룩하고 깨끗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예배의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가치가 구분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가치도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한 단계 더 넘어서서. 안식한다고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극적으로 사람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우리들이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는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와 그 최종적인 길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 때문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고 비난하고, 힐난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그러는데, 일만 안 하는 것으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으로 착각
하고 있는데 여기에다가 사람들을 묶어놓고 있는데,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해 보라. 안식일에 환자가 있는데, 고쳐야 되겠냐 안 고쳐야 되겠냐. 선한 일을 해야 되겠냐, 안 해야 되겠냐. 양이 웅덩이에 빠졌는데, 건져내야 되겠느냐, 안 건져내야 되겠느냐. 그러면 생명을 구해야 되겠느냐, 구하지 않아야 되겠느냐. ” 주님은 단호하게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이 안식하는 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
여러분 다시 한 번 우리가 착각하지 마십시다. 내가 안식을 지킨다고 그래서, 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는 약속을 받기 위해서 이 안식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축복과 우리의 거룩함을 위해서 우리가 안식하는 것입니다. 안식하는 이 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바로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의 안식의 뜻, 사랑 그것을 가진 사람만이 영생의 안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바로 모든 사람에게 이 생명의 안식을 주기 위해서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것의 복됨을 증거하기 위해서 바로 이 안식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안식이 있는 사람은, 영원한 안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안식이 없는 사람은 영원히 쉬지 못하는 지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안식의 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천국 생활의 한 부분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안식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은 지옥의 한 부분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할머니가 주일이 지났는데도 교회에 마당에 와서 또 서성이고, 또 그 다음날도 교회 마당에 와서 서성이고 그러시더래요. 할머니께서 별로 하실 일이 없으시니깐 이렇게 교회마당에 와서 서성이는가보다. 그래서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왜 이렇게 교회 마당에서 서성이고 계세요?" 할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래요. "목사님,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안식하는게 너무 좋아서 그렇습니다. 하루를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그래
서 오늘도 또 안식하겠지. 오늘도 또 안식하면 좋겠지 그러고 제가 왔다가 갑니다. 목사님 이 안식하는 일은 영원하겠죠?"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그럽니다. "그럼요. 태양이 기울고, 달이 져도, 태양도 없고 달도 필요 없는 안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 우리에게 태양이 없고, 달이 없고, 돈이 없고 ,명예가 없고 이 세상이 더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그런 거 없는 것이 필요 없는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안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40대에 간암이 걸린 한 중년 되시는 분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습니다. 한 병원에서는 3개월, 또 한 병원에서는 6개월 밖에 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교회에 친구의 권유를 받아서 첨 나왔습니다. 창피해서 저 구석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리고 옆에 친구가 머리를 숙이니깐 자기도 따라서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가 기도를 알았겠습니까? 뭘 알았겠습니까? 그는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고백했다고 그럽니다. "그래 이렇게 될라고 일주일에 하루도 쉬지 않았나. 이 꼴 될라고 일주일에 하루도 쉬지 못했나?" 그는 그렇게 자기 스스로 고백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후회했다고 그럽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안식 결코 이 안식이 우리를 억울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손해나게 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미국이 처음에 개척할 때 처음에 사람들은 동부로 왔습니다. 잘 아시는데로 보스톤에 프리모스 항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부로 왔습니다. 그런데 소문에 들리기를 서부에 가면 살기도 좋고 기후도 좋고 서부에 가면 금광도 많다고 아 그래서 사람들이 서부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서부에 처음 도착해 가지고 금광을 발견할 사람은 사업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나중에 알아봤더니 보통 사람들은 빨리 가서 금광 먼저 찾으려고 그냥 서부로, 서부로 쉬지도 않고 달려가다가 말도 쓰러지고 사람도 쓰러지고 지져 쓰러졌는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가다가 일주일 되면 하루 쉬고, 또 가다가 일주일 되면
하루 쉬고, 또 쉬고 이렇게 가다보니깐 오히려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달려가서 금광도 발견하고 그랬답니다. 주일날 하루 쉰다고 돈 못 번다고 여러분, 내가 손해본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분명히 앞서가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롱펠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일은 일주일간을 묶는 황금고리이다. "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안식을 가지고 산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그 뜻 안에서 안식한다는 것은 내 생애의 황금고리를 가지고 거기에 모든 것들을 엮어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평안이 있습니다. 참 평안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귀한 역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고 그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해마다 구정과 추석에 큰 명절을 당하죠. 이 명절이 정말 안식을 누리는 명절인지, 아니면 고통 당하는 명절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이 기회에 정말 안식을 가짐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해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복되어지고 이런 놀라운 은혜가 충만해져서 오히려 복을 나누고 복을 키우고 복에 근원으로 사는 이런 축복이 우리에게 충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식일에 주인 되시는 주님의 은혜, 안식일을 예비하신 주님의 사랑, 우리가 안식할 영원한 장소를 마련해 주신, 그 주님의 준비, 그리고 안식을 주시는 주님의 긍휼, 이것이 넘친다면 기쁨도 넘칩니다. 평강도 넘칩니다. 자유도 넘치고 해방도 넘치게 됩니다. 오늘 바로 이 마음으로 이 축복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승리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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