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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귀향

본문

귀소본능이라는 것이 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동물이 자신의 서식 장소나 산란 ·육아 등을 하던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 다시 그 곳으로 되돌아오는 성질」이다. 대표적인 것이 물고기가 연어다. 연어는 다 자라고 나면 신기하게도 자기 고향을 찾아온다. 태어난 곳에서 가까운 해변으로 오게 되면 강물에 포함된 물질로 후각이 자극되고, 그 기억에 의하여 정확한 부화지까지도 찾을 수가 있다고 한다. 비둘기나 꿀벌은 자기의 집을 기억하고서 상당히 먼 거리에서도 잘 찾아온다. 주인집을 찾아 되돌아왔다는 진돗개도 같은 본능을 가졌는지 모른다.
하물며 사람이 고향을 찾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유 명절이 되면 여러 가지 불편과 비용을 감수하면서도 고향 찾아 땅을 밟아보고서야 또 하루하루를 살아갈 능력을 얻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요번 명절에도 그런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고향을 찾는 모습이 제각각이다. 크게 성공해서 보란듯이 금의환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애쓴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대한 만큼의 결과에 이르지 못해 어깨가 축 쳐진 모습으로 슬그머니다녀가는 사람도 있다. 고향 마을 입구에는 어느 누구의 어떤 모습에도 불구하고 “찾아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라는 현수막이 나풀거리고 있다.
여러분의 요번 명절은 어떤가? 여러분도 고향을 찾는가? 어떤 귀향이라고 하겠는가?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정점은 인생의 어느 지점쯤이고, 얼마만큼의 성취에 이르렀다고 하겠는가? 믿음에서 누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는 또 얼마 만큼인가?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축복을 이루어주셨고, 어떤 은혜의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고 하겠는가?
애석하게도 상당히 많은 성도들이 자기에게 부어지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나게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차별이 없는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데 소위 “잘 나간다. ”는 신자들에 비하면 “내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한탄에 빠지기도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걸음을 이끄시고 약속을 이루신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뚜렷하게 감을 잡지 못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믿어도 더 좋아지는 것 없지 않은가?”는 혼동에 빠지기까지 한다.
본문 성경 말씀에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나오미라는 여자 분이다. 유대인으로 자기 나라를 떠나 모압이라는 이방 나라에서 살다가 다시 고향 베들레헴을 찾아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도 룻기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전체 내용을 세세히 다 훑어보더라도 룻기에서 진행되고 있는 내용에는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는 수준의 엄청난 축복이나 기적 같은 놀라운 사건은 나오지 않는다. 그 내용이 아주 평범하거나 아니면 평범한 수준에도 못 미쳐서 “아 부럽다. 나도 저만큼의 복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할만한 일들이 별로 없다.
그러나 룻기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평범한 보통사람들, 아니면 가난하며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차별이 없는 은혜의 섭리를 이루고 계심을 알려주려고 하신다.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높아지는 일이 아니어도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려 하시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읽고 들으면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은혜로 이끌어 가시는 하님의 섭리를 찾아내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1. 실패와 고통
나오미라는 분의 가족이 고향을 떠나 외국으로 나아가게 된 것은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살길이 막막해졌기 때문이었다. 어디에 가면 먹을 양식을 더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를 찾아 모압으로 간 것이다.
그런데 나오미의 가족은 모압으로 피신해 갔다가 거듭되는 불행을 겪어야만 했다. 남편인 엘리멜렉이 죽었다. 두 아들을 장가보내 자부를 얻고 삶이 조금 안정되어 가는데 싶었는데 큰 아들 말론과 작은 아들 기룐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누구하나 가까운 친족이 없는 이국땅에 덩그러니 세 여인만 남게 된 것이다.
흉년이 든 베들레헴 보다는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모압으로 갔는데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나아지기는커녕 삶이 송두리째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나오미의 처지가 왜 그렇게 되었겠는가? 나오미가 겪게 된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었겠는가?
내가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있지만 실상 이런 질문은 정당한 것은 아니다. 당사자도 아니고 직접 관련도 없으면서 남의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판단하는 일은 썩 옳은 일이 아니다. 이번 명절에도 모처럼 만난 친지들이 많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남의 일을 화제로 삼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마음껏 상상하고 판단하면서 재밋거리로 삼을 수 있겠지만 성경은 “남을 판단하는 너도 같은 판단을 받으리라. ”(롬2:1)고 경고한다.
의문을 가진다면 고통의 당사자가 그렇게 해야 하고, 답도 그 당사자가 찾는 것이 좋다. 나오미 스스로는 자기가 겪은 일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었는가? “여호와께서 나를 치셨으므로”(1:13) “전능자가나를 괴롭게 하셨음이라”(1:20) “전능자가 나를 징벌하셨고”(1:21)
나오미는 고통과 슬픔을 여호와 하나님과 연결지어 판단하면서 자기 쪽의 책임을 찾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에서 시작해서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쪽으로 기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기 쪽의 원인을 찾기 보다는 책임을 다른 데로 전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맏고, 그분에게 실수라고는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성도라면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나에게 잘못이 무엇인가?” “내가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하는 사람은 설혹 심각한 범죄가 없을지라도 온전한 믿음을 길러 더 큰 축복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나오미도 “그동안 믿어오던 여호와 하나님이 왜 우리를 지켜주지 않았는가?” 원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다움 더 이상은 여호와 하나님과는 무관하다고 뿌리쳐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룻기의 기록은 1장 초반부에서 끝났을 것이고, 그런 내용이라면 성경으로 기록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나오미는 고통과 슬픔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다. 1:6절.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을 떠나고”
고향 베들레헴에 기근이 끝나고 회복되어 간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이 나타난 결과라고 믿었고, 자기도 그 도움을 얻고자 베들레헴으로 향한다. 자기의 문제가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풀릴 수 있다고 기대한 것이다. 믿음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기대다. 징벌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그것까지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스리며 은혜로 이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공이나 승리 뿐 아니라, 실패와 고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믿음은 너무나 소중하다. 실패가 더욱 고통스럽고 더욱 불행인 것은 그것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때이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께서 더 이상은 도우실 수 없는 것처럼, 마치 여호와 하나님께서 더 이상은 전능하신 분이 못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보다 더 못난 불신은 없다.
나오미가 비록 고통과 괴로움 가운데 있었지만 시종일관 여호와 하나님을 말하며 자기의 일을 여호와 하나님과 연관 지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러분! 그렇게 하는 것이 믿음이다. 즐겁고 좋은 일도 여호와 하나님과 연관 지어 생각하고, 힘들고 괴로운 일도 여호와 하나님과 연관 지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믿음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던 나오미는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는 고통스러운 일을 거듭 겪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생각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도 별수 없구나.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못되었으니 여호와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구나. 믿음이라는 것이 순 가짜다. ”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 위에 서 있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고통과 괴로움의 태풍이 올려 온다고 할지라도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손을 놓치는 일이 결코 없게 하라. 반대로 여러분이 엄청난 성공으로 부귀영화를 다 얻는다 해도 여호와 하나님 잊어버리거나 그분이 이끄시는 길에서 결코 빗나가는 일이 없게 하라.
2. 세밀한 도움
나오미의 귀향은 결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드러내 놓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실패자의 귀향이라고 할 것이다. “믿어서 얻은 결과가 뭐냐?”는 말이 귓전을 맴도는 그런 귀향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그 나오미의 귀향이 얼마나 복된 것으로 바뀌어 가는지를 보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랍게 그 발걸음을 이끌고 계시는지를 보라.
우선 22절이다. 나오미가 누구와 함께 돌아오고 있다. 모압여인 룻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성경은 빠뜨리지 않았다. 1:16,17을 보라. 두 자부가 있었는데 시어머니였던 나오미는 그들의 장래를 위해 친정으로 돌아갈 것을 당부했다. 그 당부를 못 이겨서 한 자부(오르바)는 돌아갔는데 다른 자부 룻만 고집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고집이 아니라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러분 나오미가 어떻게 룻과 같이 동행할 수 있었겠는가? 이스라엘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그만한 믿음과 그만한 효성을 가진 며느리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룻은 왜 남편도 없는 시어머니를 그렇게 따르고 있었는가? 성경은 그가 천성적인 효부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진 여인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동행자였던 것이다. 그러니 룻은 나오미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 1호라고 하겠다.
다음으로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온 때가 언제인지 보라. 22절에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 그들이 추수가 다 마쳐진 다음에 도착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양식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추수기에 도착한 것은 얼마나 세밀한 도움인지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모든 것을 다 은혜에다 끌어다 붙인다고 할지 모른다. 오해하지 말라.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잘 되어 있어서 도착할 시간을 예상하고서 계산된 시간에 출발하면 그만인 우리들은 나오미와 룻이 보리 추수를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도착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잘 모른다. 물론 그들이 추수기를 예상하고서 출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착은 그들이 예정하는 대로 되던 시대가 아니었다. 얼마든지 도중에 길이 막힐 수도 있고, 두 여인네만의 여행길에 어떤 변수가 작용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두 사람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는 것만도 은혜고 더 나아가 가장 풍요로운 추수기에 도착했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정확한 타이밍 때문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얼마나 세밀한 은혜라고 하겠는가?
추수기에 도착했으므로 양식을 구하는 일이 훨씬 수월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베들레헴에 도착한 자부 룻이 양식을 구하려 나아간다. 추수하는 밭에서 이삭줍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법에 떨어진 이삭은 주인이 줍지 않기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몫으로 밭에 그냥 남겨두게 되어 있었다.
그런 풍습을 따라서 룻이 이삭을 주우러 밭으러 나갔다. 들을 빙 둘러보다가 마침 일군들이 보리를 베고 있는 밭을 발견하고 그 밭에 들어섰다. 그 장면을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보라. 2:
3.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 이 ‘우연히’라는 단어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져 있다. ‘우연히’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가? 발걸음을 옮겨가는 룻이 계획적으로나 의도적으로 그 밭으로 가야하겠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아무 밭이나 찾아가는데 마침 보아스의 밭으로 들어갔다는 의미다. 룻으로서는 정말 우연히 그 밭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걸음걸음을 이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그 밭으로 들어가도록 이끌고 계셨던 것이다.
내가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여호와 하나님은 룻을 통해서 이루실 계획을 벌써 갖고 계셨다. 그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룻과 보아스가 만나야 한다. 물론 룻은 그 계획을 아직 모른다. 그러니 보아스를 만나기 위해 그 밭으로 간 것이 아니라 이삭을 줍기 위해 일군들이 보리를 베고 있는 밭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우연히 간 것이다. 룻에게는 ‘우연히’였지만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는 ‘계획적’으로 였다. 그렇게 룻의 발걸음이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이끌리고 있다는 것이 굉장한 은혜다.
오늘날 성도들의 발걸음도 여호와 하나님은 그렇게 이끌고 계신다. 우리는 많은 일들을 우연으로 친다. “운이 좋아서 그랬다. ”거나 “재수가 나빠서 그랬다. ”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모든 일의 배후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하찮은 일로 보일지라도 이끄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면 그 결과는 놀라운 축복이 될 것이다.
3. 후손
이삭을 주우러 남의 밭에 들어간 룻은 그 밭주인의 눈에 띄게 된다. 그 장면도 놀라운 타이밍이다. 4절의 ‘마침’이라는 단어를 보라. 어느 때에 맞춘 것인가? 룻이 부지런히 이삭을 줍고 있는 ‘때마침’이다. 일군들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나오미의 자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룻의 신분을 알고 난 첫 순간부터 보아스가 굉장한 호감을 가지고 분에 넘칠 정도의 호의를 베풀고 있다.
자기 밭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한다. 일군들에게는 룻을 건드리지 말라고 명하고, 일부러 이삭을 흘려주라고 말한다. 물도, 음식도 일군들과 함께 배불리 먹도록 공급한다. 사실상 초면인 여자에게 왜 그렇게 높은 관심과 호의를 베풀고 있을까?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보아스는 룻을 만나보기 전에 벌써 룻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다. 2:11을 보라. 룻에 대한 좋은 소문인가? 나쁜 소문인가? 어떤 사람에 대한 좋은 소문을 듣고 나면 그에 대한 첫인상은 어떨까? 실제로 룻을 보게 된 보아스는 좋은 소문 때문에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밭에서 쉴 새 없이 일하는 모습에서 그 소문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보아스와 룻, 이 두 사람을 만나서 맺어지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는 그 뒤에도 그치지 않았다. 이스라엘 풍습에는 대물림이라는 것이 있다. 형이 후손이 없이 형수는 동생과 결혼하여 후사를 이어가야 했다. 친형제가 없으면 가장 가까운 친족이 대물림의 책임을 가졌다.
룻은 나오미의 자부였다. 자기 남편이 죽고 없었다. 그러면 누가 대물림을 해주어야 하는가? 남편의 동생이 일차 후보다. 그런데 나오미에게는 살아남아 있는 아들이 없었다. 그러므로 다른 친족 중에서 찾아야 했는데. 보아스가 그 친족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면 보아스에게서 대물림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일이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니다. 보아스의 마음이 한없이 룻에게 끌리고 있었지만 친족 중에선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대물림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보아스는 지붕만 쳐다봐야 하고, 룻은 사랑하는 사람 놔두고 엉뚱한 사람과 맺어질 형편이었다. 규정을 무시할 수도 없고, 규정을 지키자니 일이 성사되기는 틀렸고 어쩌면 좋을까?
해결할 방법이 전무할 때에도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남아 있는 방법이 있다. 처음부터 개입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이끄셔서 보아스보다 더 가까웠던 그 친족이 포기하게 하셨다. 어떻게? 4:6. 룻을 맞아들였다가는 그 가난을 다 감당해줘야 할 것이라고 판단하고서 막대한 손해를 감수할 수 없기 때문에 대물림을 포기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기회는 보아스에게 돌아왔다.
망설임이 없이 보아스는 룻을 맞아들였다. 사랑의 결과로 아들을 낳았다. “두 사람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았더라. ”로 성경은 끝나지 않는다. 그 사실을 기록하고 나서 바로 나오미가 등장한다. 4:1
4. 괴로움을 토로했던 나오미가 찬양을 부르고 있다. 그 아들을 오벳이라 이름했다. 성경은 기록을 조금 더 덧붙인다.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다윗이 누군가? 어떤 지위에 올랐는가? 룻기는 왕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그것이 마태복음까지 연결된다. 메시야의 족보다.
우리는 처음에서 나오미의 고통과 괴로움을 보았다. 감추고 싶은 귀향이었다. 그렇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이끄시는 귀향이었다. 시시한 것 같지만 세밀한 이끄심과 은혜가 계속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더 이상 나오미와 룻이 부끄럽지 않게 만들어 주셨다. 괴로움과 고통을 완전히 잊게 만들어주신 것이다. 나오미의 걸음을 이끄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왕족으로 만들어 가고 계셨던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귀향이 가능한가? 다른 사람과 견주어 얼마나 가졌는가? 얼마나 올랐는가를 비교하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인지를 점검하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걸음인가를 점검하라.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여호와가 이끄시고 내가 따르면 어떤 결과에 이르겠는가는 믿음을 바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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