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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본문

지금부터 약 1970여 년 전에 유대 땅 갈보리 산 해골 언덕에는 세 사람의 사형수가 몇 시간의 차이를 두고 로마의 가장 잔인한 사형방법인 십자가 형틀 위에서 못 박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두 사람은 우리들과 성정이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시 51:5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고 고백한 대로 우리가 죄있는 부정모혈에서 태어난 것처럼 이 두 사람도 죄인인 어머니의 뱃속에서 10개월간 자라났고 그들의 성장은 그 어버이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들도 귀여운 재롱을 떨었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자라가면서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것처럼 이 두 사람도 우리와 동일한 죄악을 범했습니다. 우리들이 부모의 교도와 생명의 교훈을 미워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등 뒤로 던지며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입을 악에게 주고 혀로 궤사를 지으며 앉아서 형제를 공박하며 형제들을 비방한 것(시 50:18-20)같이 이 두 사람도 그러하였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십계명을 차례로 범한 것처럼 이 두 사람도 십계명을 차례로 범하였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변명할 것입니다. “아니요 나는 간음하지 않았소”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십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아니요 나는 살인하지 않았소”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 3:15). 또 여러분은 주장할 것입니다.
“내가 비록 거짓말도 더러 하고 욕심은 내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1, 2, 3계명은 감히 두려워서 범하지 않았습니다 도덕적으로는 완전하지 못해도 적어도 종교적으로는 경건합니다” 이런 분들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인간 사이에서 죄를 짓는 그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시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여호와 하나님의 존엄과 주권에 대하여 모독한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까 도적질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마지막 계명은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인데 골 3:5-6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제10계명을 범하는 것은 곧 1, 2계명을 범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1970여 년 전에 갈보리 산 해골 언덕에서 죽어간 두 사형수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정에서 볼 때 우리가 구경할 만한 유별난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동일한 정죄 안에 있는 죄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운명 안에서 바로 우리 자신의 운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 앞에서 우리들은 이 두 행악자와 동일한 정죄 안에 처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두 죄인이라고 기록했는데 이들이 죄인이라면 우리들도 죄인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두 행악자라고 기록했는데 이들이 행악자라면 우리들도 행악자입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두 강도라고 기록했는데 이들이 강도라면 우리들도 강도입니다. 아마도 이 두 사람은 너무나 가난해서 남의 물건을 훔치다가 사람을 살해했기 때문에 강도죄로 극형을 받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습관적으로 범죄하다가 가중처벌로 사형을 받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로마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한 죄목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강도질한 죄에 비하여는 지극히 작은 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시간을 강도질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강도질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재물을 강도질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멸시하고 그들의 행복과 신념을 강도질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교만하고 외식하는 바리새인이요 서기관입니다. 이 두 강도는 자기 죄 때문에 십자가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흉악한 강도이면서 도 죄없는 체, 의로운 체, 잘난 체 “저 두 강도는 죽어야 해”라고 저주하며 삿대질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신 법정에서 우리는 변개치 못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롬 1:28-32을 보십시오. “또한 저희가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여호와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롬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라고 말씀했고, 롬 3:23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이 두 강도처럼 죽음과 고통의 십자가에 매달려야 하고, 또 실제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음과 고통의 십자가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히 9:27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했는데 사람들 중에 고통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죽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두 강도는 십자가의 수치와 고통에 그의 육체가 이그러지며 몸부림쳤습니다. 그보다 더욱 무섭게 그들의 영혼이 두려움에 쌓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의 육체는 몇 시간, 아니면 몇 날이 못되어 고통의 극한에서 해방될 것이지만 그 너머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영한 진노의 심판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왜 이렇게 죄가 두려움을 가져옵니까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4:18). 사람이 참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육체의 이그러진 고통 때문이 아닙니다.
그 너머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영한 심판이 두렵고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죄 지은 영혼은 불멸이므로 죄에 대한 형벌도 영영합니다. 이 두 강도는 죄에 매였기 때문에 죽음과 고통의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품은 죄성과 지은 죄과를 영원히 벗어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형벌은 영원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각기 자신의 죄를 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영한 심판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들을 낳고 더없이 기뻐하던 부모도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 함께 웃고 울던 친구도 외면했습니다. 그렇게도 사랑한 자식들도 죽어가는 그들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하늘도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땅도 그들을 토해 내었습니다. 그러므로 두 죄인은 하늘과 땅 사이 십자가 위에 매달려 사람에게 버림받고 여호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들의 육체는 죽음의 고통에 시달립니다. 그들의 영혼은 영영한 지옥을 예감합니다. 이것이 온 인류가 가야 할 길입니다. 이것이 온 세상 사람에게 미칠 운명입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두려움과 불안, 심판과 지옥은 이 두 강도의 것만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들 가운데 또 한 사람이 고통과 번민 속에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강도들 사이에서 똑같이 벌거벗기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백성과 로마 병정들에게 희롱의 대상이 된 그 사람은 그들이 알기에 어떠한 사람이었을까요 아마도 두 강도는 이 사람 예수에 대하여 소문만 듣다가 골고다로 끌려가면서 비로소 대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때문에 그들을 좇아왔습니다. 백성 중에 어떤 감상적인 여자들은 예수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습니다.
그때 예수는 돌이켜서 그들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눅 23:28,31). 두 강도에게는 마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자만 죽음과 고통을 당할 것이 아니요 너희도 당할 것이고 더 크게 당할 것이라는 말씀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십자가에 못 박아 예수를 중심으로 좌우로 십자가 셋이 세워졌습니다. 백성들과 관원들이 서서 구경하며 비웃기 시작합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여호와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이와 같이 군병들도 예수를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눅 23:36)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다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저편 강도는 화가 났습니다. 온 수족이 뒤틀리고 피가 밑으로 모이기 시작하는데 자칭 유대인의 왕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적과 기사를 행한다는 메시야 예수는 정작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혹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자기를 위하여 무슨 묘수를 행하지 않을까”하고 한가닥 걸었던 일말의 기대가 깨어지자 그의 입에서도 똑같은 비방이 쏟아져 나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여자들과 백성과 관원들과 군병들과 강도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여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동정하여 감상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동정을 거부합니다. “감상적인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도 나를 믿지 않으면 너희 자녀와 함께 영영한 슬픔과 수치, 고통과 심판, 공포와 지옥을 피할 수 없노라” 백성과 관원들과 사형을 집행하는 군병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은 근래 보기드문 구경거리였습니다. “그가 과연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가 그가 과연 메시야인가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다만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저편 강도는 그의 마지막 구원의 여망인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렸습니다. 은혜의 기회는 영원히 그를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므로 멸망받을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하는 세상의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무런 효험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한낱 멜로 드라마의 눈물이요, 역사적인 이야기꺼리요, 답답할 때 비꼬인 심령으로 기대어보는 시험대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슬픔과 수치, 고통과 심판, 공포와 지옥의 형벌이 밀어닥칠 것입니다. 저편 강도는 모든 세상 사람들의 걸어가는 넓은 길,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대표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를 가운데 두고 이편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도 저편 강도와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비꼬인 심령을 가지고 비방했었습니다(마 27:44, 막 15:32 참조). 그러나 예수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희는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기도했을 때 그의 마음은 이상한 빛으로 비추어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마음에 임하고 그의 육신에서 굳은 마음이 제하여지고 부드러운 마음이 주어졌습니다(겔 11:19, 36:26). 예수의 이름 그대로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기도가 이 강도에게서 즉각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은 절망과 고통과 죽음의 극히 짧은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 강도에게 적용시키셨습니다. 성령님은 고요하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이 강도를 깨우치기 시작합니다. 죄와 허물로 인하여 죽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이 강도의 영혼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운행하기 시작하자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자신은 죄인이며 의로우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가 지금 자기 옆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 당하고 계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자기의 죄가 용서함 받게 되는지 어떤 방법으로 자기가 구원 받게 되는지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 알게 된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자기를 구원할 자는 오직 예수 밖에 없으며 바로 그 예수가 자기 죄를 용서하고 의롭게 해 주기 위하여 지금 자기와 함께 피흘려 죽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 53:5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중생하였고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편 강도가 예수께 대하여 비방할 때 그는 자기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는 먼저 그 강도를 향하여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난 다음 예수님을 향하여 기도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예수님은 이편 강도의 회개와 신앙에 대하여 즉시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강도의 죄와 벌을 짊어지셨습니다. 그 강도의 절망과 고통, 심판과 지옥을 자신이 대신 담당하셨고 그 강도에게는 낙원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그것은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여호와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 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는 그 결과적 사실로 증명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은 그 강도는 예수의 말씀이 떨어지자 말자 그 영혼에 파도 같이 밀려오던 두려움이 물러가고 밝은 햇빛이 비취었습니다. 은혜의 꽃이 피었고 강물 같은 기쁨이 넘쳤습니다. 형벌과 심판의 공포가 사라지고 의와 평강과 희락이 가득찼습니다.
사망의 쏘는 것이 제거되고 사망은 이김의 삼킨바 되었습니다. 그의 육체는 비록 십자가 위에 못 박혀있었지만 자기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안에 자기가 있고 자기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성령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는 이 강도의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되었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었던 것입니다(고전 1:30-31). 할렐루야!
이편 강도는 은혜로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편 강도의 체험은 오늘날 예수를 구주로 믿는 우리들의 체험입니다. 우리는 저주받은 행악자였습니다. 우리는 추악한 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우리는 예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된 것입니다. 2005년을 보내고 2006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길목에서 저는 제 자신과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우리도 십자가 위에 못 박혀서 만나뵈옵자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회개한 강도는 예수의 구원을 받았지만 그 몸은 십자가 위에서 살아서 내려오지 않고 죽어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구주로 믿은 그때로부터 그의 영혼에는 낙원이 시작되었고 십자가 상의 죽음을 통하여 완전한 낙원천국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 믿은 후에 한번도 세상으로 내려와서 다시 마음의 낙원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믿은 이후 계속해서 십자가 위에 못 박혀있었고 또 거기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 강도가 예수 믿은 후 십자가에 못 박혀있었다는 사실은 바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애매한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는 신앙생활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골 1:24).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입니다(롬 6:6).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믿음의 눈으로 지금도 밝히 보는 것처럼(갈 3:2) 우리 자신도 회개한 강도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있는 자신을 날마다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사탄은 예수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지만 예수님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했습니다. 사탄을 심판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을 때 사탄은 심판을 받아 우리 앞에서 쫓겨나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롬 8:2). 죄와 세상과 사탄을 이기는 승리와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낙원을 얻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히 13:12-13에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말씀했고,
갈 5:24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씀했으며, 갈 2:20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 6:14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씀했고, 또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합니다.
방금 새 아침을 맞이한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므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사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자신을 성령 안에서 날마다 긍정할 때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내 마음에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임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를 뵈옵고 있는 한, 십자가에 가까이 의지하고 서서 게서 천국가도록 머물고 있는 한, 낙원은 결코 다시 잃어버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십자가 위에서 회개하고 주님만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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