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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추수감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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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의 한국교회 추수감사절은 우리 나라의 전통사상과의 만남을 모색하고 전통문화를 한가위(추석)문화와 접하면서 새로운 신학적 조명을 할 필요의 시점에 와 있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은 감사에 근거한 믿음의 생활이며 믿음의 가치는 오로지 감사에서 발휘됨을 깨달아야 한다. 새 천년의 추수감사절은 이러한 의미를 가지면서 21세기 문화선교에 주력하는 한국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의 특성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십자가의 종교, 부활의 종교, 생명의 종교, 말씀의 종교, 은혜의 종교, 감사의 종교라고 한다. 다 옳은 말이지만 우리 기독교는 지구촌에 사는 인생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종교라고 함이 가장 타당하다 할 것이다. 감사라는 것은 누구에게서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그 고마움에 대한 사례를 드리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마찬가지로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부모님의 은혜, 사회의 은혜, 국가의 은혜를 입고 서로 상부상조하고 관계를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은혜를 감사하며 생활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곧 신앙이요, 감사의 고백이 찬송과 기도이며 감사의 행동이 곧 예배이며 감사의 생활이 곧 구원받은 자의 생활인 것이다.
감사 또는 감사드림(thanks giving)이라는 표현은 성서적 신앙의 특징을 잘 표현한 말이다. 감사는 항상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어지고 있으며 이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계약관계 안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 감사의 행위는 언제나 계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구체적 행동을 하심으로 촉발된다. 구약성서에서 "야다"는 "감사를 드리다"라는 동사의 뜻이고 "토데"는 "감사를 드림"이라는 명사이다. 신약성서에는 "유카리스테오",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 감사를 드린다"라는 단어가 가장 흔하게 동사로서 사용되고 있고, "유카리스티아"(감사한 마음)가 명사로서 사용되어 있다. 구약성서에서 감사는 시편마다 언급되고 감사는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하여 주제가 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야훼에게 감사를 드린 이유들을 보면 이스라엘이나 그 백성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해 주심과 심판과 감옥 그리고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심과 사악한 자를 거꾸러뜨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를 높이시는 야훼의 정의로운 심판, 죄지은 백성들의 용서 등 야훼의 계약에 따라 베푸시는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의 하나가 감사였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행하는 이러한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계약 의무를 성취하겠다는 표현임을 그 감사에 둔다는 점이다.
신약성서를 보면 생전에 예수를 안 자들은 예수가 행한 일, 그의 인격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생전에 예수를 뵙지 못했으나 믿는 사람들, 특히 사도 바울 같은 이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에 감사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도래하는 왕국에 참여할 것에 대하여, 복음을 전하게 된데 대하여, 특별한 영적인 은사에 대하여, 육적인 음식에 대하여,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에 대하여, 믿음의 전파에 대하여, 형제들의 사랑과 신앙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감사했다. 이런 감사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초대교회에서 이룩하신 것에 대하여 마음 깊이 여호와 하나님께 쏟는 초대교회 전체의 진심 어린 감사의 드림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 역사 안에서 행하신 구체적 행위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의 감사는 신앙을 향한 부름(Call to Faith)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오직 감사는 감사가 나타나는 데에만 참신앙이 있다. 사실 감사를 하게 하는 힘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것이며 감사드림은 그의 권능을 향하여 와진 것으로 그의 이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응답하고 그의 신앙을 지킴에 따라 복음의 권세는 새로운 감사를 낳게 하며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도록 만든다.
추수감사절의 참의미는 첫번 추수감사절 청교도들의 순전한 감사에 기인되어야 한다. 고로 감사절의 참의미는 다시 여호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예배로 감사를 표시하게 하는 일이다. 또한 우리는 자연과 문화의 유산에서 감사의 의미를 찾는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자연과 문화와의 부단한 교섭이다. 자연이나 문화 없이 인간은 생존할 수 없다. 우리는 매일같이 공기를 마시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행복과 산과 물과 아름답게 핀 꽃과 나무와 새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현대인은 이 은혜에 대한 감사를 망각해 버렸다. 또 우리는 자연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의 유산에서 감사의 뜻을 찾아야 한다. 현대인은 문명의 온갖 이기를 이용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깊은 감사를 하지 않는다. 우리가 야만 생활에서 문명 생활로 한 걸음 더듬어 올라가 문화사의 자취를 살핀다면 거친 자연을 소재로한 이념의 승리를 하나의 감격으로만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와 땀으로 엮어진 드높은 마음들의 희생이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이 추수물의 축복을 감사했듯이 우리들도 물질적인 축복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 또 한가지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같이 받아야 할 나의 이웃과의 윤리적인 관계에서 감사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감사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동정의 표시이다. 우리는 날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노상에서 사람들을 대하면서 산다.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사람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우리는 불우한 이웃에 대해서 사랑과 동정을 실천한 미담을 300년전 청교도와 본토 원주민 인디안 사이의 교제에서 찾아야 한다. 인종도 언어도 풍속도 생김도 전혀 다른 낯선 침입자 청교도와 원주민 사이에 벌어진 사랑과 동정은 결국 인류역사에 있어서 유례가 없는 모든 인종과 문화의 전통이 한데 모여 한가족을 이룬 북미 합중국이라는 공동사회의 축복이 실현되었고 또 그들이 일찍이 밟았던 강변에 UN 본부가 우뚝 솟은 것은 청교도들과 그 이웃 사이에서 표시된 감사의 결과이다. 이러한 이웃과의 사랑과 감사로 엮어진 공동사회는 오늘날 분열되고 피흘리고 싸우는 모든 민족과 지역에도 똑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가난한 이웃에게 옷 한 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나누어 줄 수 있는 동정과 사랑이 있다면 이 사회는 보다 밝아질 것이며 인간들의 입에서는 감사의 표현이 넘쳐흐를 것을 믿는다. 이제 선교1세기에서 2세기로 접어든 한국교회는 추수감사절의 시기를 정해야 한다. 이것은 성숙된 한국교회의 토착화된 기독교문화의 기인이다.
60년대 토착화 문제논의와 함께 추수감사절 문제가 대두되었다. 미국의 청교도들이 지키던 감사절을 맹목적으로 우리가 답습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1974년 9월 27일 한국기독교장로회 경동교회는 처음으로 감사절 예배를 추석으로 앞당겨 거행했다. 이날 경동교회는 "추수감사절을 즐기는 밤"을 갖고 가면극과 민속놀이 등으로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돗자리와 멍석이 깔린 마루에서 "강강수월래"로 시작, 전통적인 기독교 형식이 아니고 순수한 우리 고유의 가면극을 빌어 서민의 애환과 저항정신을 오늘의 사회현실에 초점을 맞추어 감사의 대예배와 축제를 드렸다. 이렇게 한국 교회는 1960년대부터 토착화한 측면에서 전통종교 - 무교 - 불교 - 유교 등 그리고 전통사상과의 만남을 모색해 왔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전통문화를 민중문화의 측면에서 만나고 새로운 신학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탈놀이는 민중의 축제이다. 지배 양반계층과는 반대로 해학과 웃음을 통한 현실 비판으로서 새로운 문화 삶을 창조한다. 한국 교회가 억압과 불평등의 현실에서 자기 이익적인 교회 성장을 꾀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 중요한 것이 '섬김과 나눔'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복과 소유'로 바꾸어 자신들의 정복과 소유를 정당화한 서구 신학과 교회의 형태를 그대로 답습한데 있다.
우리 나라의 전통문화는 지배문화가 아니고 민중의 문화이다. 민중 문화로서의 전통 문화는 '정복과 소유'가 아니라 '섬김과 나눔'의 문화이다. 전통 문화의 밑바닥에는 무교적인 성격이 깔려있는데 일찍이 유동식 교수는 '무교란 노래와 춤으로서 하늘과 땅, 신령과 인간이 하나로 융합되어 새로운 생명과 문화를 창조하는 원초적인 종교 현상이다'라고 했다. 이런 의미로 민중문화는 민중의 한(恨)의 사제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민중이 염원하는 새로운 생명과 문화를 창조하기 위한 섬김과 나눔의 축제이다. 이러한 우리의 민중문화가 서구의 정복문화보다 그리스도의 진리에 더 접근됨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추수감사절에 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미국교회의 전통을 따라 11월 셋째 주일에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린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성서의 추수감사제와는 다르다.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인들이 인디언들을 정복하고 그 결과로 얻은 소출을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감사한데서 미국의 첫 번 추수감사제는 시작된다.
남의 것을 빼앗고서도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감사하는 형식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빼앗음을 정당화했다. 이러한 감사에서 그들은 인디언을, 흑인을, 유색인을 무자비하게 착취하고서도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했다. 이것이 그들의 신학과 신앙의 기본 성격이며 그들은 이 신학신앙을 정통화 했다.
본문에 있는 추수절의 규례로 보면 정당하게 땀흘려 거둔 곡식을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고 , 바친 그 곡식을 남종과 여종, 나그네, 과부, 고아 등과 나누도록 되어있다. 자신의 소유를 나누는 것이 추수제의 원형이다. 추수제는 소유의 감사가 아니라 나눔의 감사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민중 문화 속에 형성되어온 추석 역시 소유의 감사가 아니라 나눔의 감사이다. 추석(한가위)이면 부락제로서 하늘과 조상에게 감사하고 그 감사한 소유를 함께 나누는 잔치를 벌인다. 이러한 우리의 전통문화도 계승하면서 전통문화를 무조건 이교화하고 우상화하는 신앙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꽃 피워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는 1960년대부터 토착화 측면에서 전통사상과의 만남을 모색해 왔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전통문화를 민중문화의 측면에서 만나고 새로운 신학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탈놀이는 민중의 축제다. 지배 양반 계층과는 반대로 해학과 웃음을 통한 현실비판으로서 새로운 문화와 삶을 창조한다. '설날'은 이미 교회들이 신년예배형식으로 기독교화 했다. 이제 교회는 전통문화를 소재로 하는 교육내용이나 활동 등을 개발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전통문화의 발굴을 통해 '정복과 소유'가 아닌 '섬김과 나눔'의 추수감사절을 구현해 나가야 한다.
원래 우리 민족은 추석(한가위)에 햇곡식을 수확함으로 감사하며 조상들의 묘소를 찾는 대명절로 삼고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는 민족적 축일과는 상관없이 미국의 전통인 감사절을 그들의 축일로 정하고 있다. 이는 서구적 전통이나 미국 문화와의 유래는 보전하면서 우리의 선교 대상인 한국 문화와의 접목은 생각지 않게 지내왔다. 한국 교회는 이제 새 천년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문화적 질병을 치유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근대에 와서 자주 논란이 되어 온 타종교와의 대화, 토착화 문제, 민중신학 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나 다름없이 금년에도 추석을 맞는다.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을 새천년부터 "추석에 곁들인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우리의 감사절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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