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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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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마다 11월 셋째 주일을 한국교회는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 날짜가 언제이든 한국교회가 추수 감사절을 지킴으로 받은 복이 큽니다. 추수감사절을 통해서 감사할 줄 아는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이 아닌 때에도 우리는 예배드리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헌금을 보면 매우 역설적입니다. 이사하고 감사, 심방 받고 감사, 개업하고 감사 등은 이해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사고 중에서도 목숨을 지켜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 시험에서 벗어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 병의 차도가 있어 감사 등 아직 위로가 필요한 성도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과거 17세기 때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가 미국을 건설했습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에 102명이 타고 가다가 대서양에서 죽고 살아남아 미국 동부의 플리마우스에 도착한 사람은 겨우 47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신대륙에 도착하면서 신앙고백서를 만들어 낭독했습니다. "플리마우스 선언"(Plymouth statement. 1620. 11. 20)이라 하여 그 서약문 제 1항에 보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장래 목적을 설정한다"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사나 죽으나 주님의 영광을 위한 인생으로 정하였기에 도착한 그 이듬 첫 해에 병고와 추위, 인디언들의 습격 속에서도 살아남은 청교도들은 겨우 얻은 몇 마리의 칠면조와 몇 개의 빵 조각을 놓고서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꿈이 실현되었기에 드린 감사절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후회와 원망 그리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절망스러운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떤 형편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였고 고난도 주님이 주시는 훈련으로 당연히 받아들였기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교도 정신이었고 오늘의 미국이 생기게 된 힘이었습니다.
바로 이 감사의 본을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이 모범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한국교회 성도들은 매우 좋아해 왔습니다. 일본 식민지 시절 하에서도, 6. 25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도, 70년대의 고도 성장 시절의 엄청나게 열악한 노동 환경 가운데서도, 우리 한국교회는 감사의 문화를 만들어 우리 사회가 건전하게 성장하는데 큰 공헌을 해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가정이나 학교에서도 "고맙습니다, 혹은 감사합니다"란 말을 인격 지도에 매우 중요한 내용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손님이 아이에게 용돈을 주면 못받도록 지도했습니다. "주지 마세요, 애 버릇 나빠집니다"고 했던 것이 언제부터인지 "고맙습니다"고 인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란 인사말을 자주 쓰는 사람들은 매우 밝고 긍정적인 생활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말속에는 이미 기쁨이 내재되어 있고 또한 현실에 적응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가정이나 사회에서 힘든 일로 근심하다가 교회에 오면 "목사님 감사합니다, 집사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자연 자주 쓰게 되는데 그러면 마음에 힘을 얻고 돌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한해는 우리 모두에게 큰 고통의 한 해였습니다. IMF로 인한 실업자가 증가했고, 사업이 불황을 만나 문을 닫아야만했고, 집중호우로 인하여 엄청난 수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범사에 감사하는 모습들이 많았습니다. 교육관 건축을 하면서 모든 성도들이 힘든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무엇이라 형언하기 어려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3대 감사절(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을 지키도록 명령했습니다(출 23:16).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재물에 탐이 나셔서 세우신 제도가 아니라 곧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세우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그것이 영성 훈련이 되었고 저절로 가정과 사회에 유익한 성품으로 자라게 한 것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성막에 나와 예배 드릴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들의 광야 길 노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감사와 속죄의 예배를 계속 드리게 함으로써 오히려 이스라엘이 낙심치 않고 소망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게 했습니다.
우리 부모들은 모범을 보여 자녀들도 아름다운 한국교회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도록 가르칩시다.
2. 감사를 어떻게 하는가
설교 본문에서 "감사하라"는 말이 여러 다른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1절에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2절엔 "여호와께 찬송할지어다"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행위는 곧 즐거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곧 히브리 문화와 기독교 서구 문화를 창조케 했습니다. 고대 대 제국들이 남긴 문화의 유적은 대체로 건축물입니다. 피라미드나 만리장성과 같은 토목 건축조형물들입니다. 그러나 그 피라미드나 로마의 포도를 놓는데 노예로 동원된 히브리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은 시와 노래를 남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감사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힘을 가졌던 사람들은 돌의 유적을 남겼다면 힘은 가지지 못했으나 감사하며 노래했던 믿음의 사람들은 글과 소리의 문화를 남겼습니다. 오늘 날 돌은 움직이지 못하지만 글과 소리는 지금도 전파되어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 받은 성도들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엡 5:18-20)이라고 했습니다. 곧 성령이 우리 속에서 하시는 일이 노래하며 즐거워하며 감사하는 행복한 삶을 창조케 하는 사역입니다. 물론 당시 초대 교인들은 물질의 풍요함이나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여 새 술에 취하게 했고 어린이들은 예언했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았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주님을 즐거워했고 맹수의 굴이나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서도 '알렐루야'를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곧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온 신령한 노래가 군마와 창검의 이방 제국 문화를 이겼던 것입니다.
3.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감사하는 것을 노래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성악가들이나 가수들이 최고의 감사자들이 될 것입니다. 성경 본문에서 "새 노래"라는 말이 나옵니다. 물론 성경에서 언어적으로 별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말이 구약에 7회, 신약에 2회 사용되었는데 그 문맥에서 우리에게 주는 뜻이 매우 깊습니다.
시 40:3에 "새 노래 곧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새 노래'는 '여호와 하나님께 올릴 찬송'이고 그 찬송을 담고 있는 입을 보고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새 노래'는 단순한 곡조소리가 아니라 곧 태도였습니다. 이 전에 부르던 노래로 익숙한 모습이 아니라 노래하는 마음이 새로워져 있는 것입니다. 노래하기 전에 그의 태도가 새롭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노래하는 자의 입술을 보고는 여호와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감사하며 기뻐하며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 모습이 너무나 진실하게 보여 단순한 입술의 말로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벧전 3:15) 했습니다. 즉 이웃이 내가 가진 그 소망, 감사, 노래의 이유를 묻게될 정도로 진실하고 확신에 찬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 요한 계시록에 '새 노래'에 대한 언급이 두 차례 나오는데 그 중 14:3에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새 노래'는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이 배우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노래'는 이 전에 없던 새로 지은 노래, 요즘 현대 세속 음악과 접속된 노래 흔히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노래와는 구별된 구원받은 거룩한 성도들만이 부를 수 있는 찬송입니다.
이 십사만 사천명에 해당하는 자는 순교자란 해석도 있습니다만, 꼭 순교자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입은 참 믿음을 가진 성도를 가르킵니다. 그들은 당시 순교할 만큼 핍박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입술에는 넘치는 '새 노래'가 있었던 것입니다. 가난했고 버림받은 자들이었지만 범사에 감사하여 입술에는 항상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부르는 노래가 있었던 것입니다.
4. 마무리하며
성도 여러분!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양합시다.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합니다"(5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어졌습니다"(6절). 아직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가운데 계시며 범사를 주장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더 풍성케 하실 것임을 믿고 의지합시다. 그리하여 새 노래가 풍성한 성도와 우리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자비로우신 여호와 하나님. 오늘 세상이 황폐해져가고 황무해져 가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탄식하며 삶의 희망을 잃고 살아갑니다. 오늘 이러한 동일한 고통속에 처한 우리 성도들이 함께 모여 추수감사예배를 드리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새 노래를 가르쳐 주시고, 그 노래속에서 삶이 변화되게 하시고 세상사람들을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참된 감사자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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