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나의 나 된 것은
본문
세상의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아주 값지고 행복한 것이 되기도 하고 너무나 불행하고 가치 없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평생을 땅 밖에 모르면서 살았든지, 거리를 누비며 청소하는 삶을 살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온 인생을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청소를 하면서 살고 인분을 처리하면서 살망정 그 삶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떳떳하게 생각하면 그 인생은 값지고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고관 대작을 지내면서도 그 인생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확신이 없다면 그 인생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우리의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인 것입니다.
여러분! 잠언을 계속해서 묵상해 가시면서 잠언서 기자가 얼마나 마음에 집중하고 있는가를 주의해서 보셨을 줄 압니다. 물론 지혜가 첫 번째 가는 주제입니다. 그래서 지혜 있는 사람과 미련한 사람이 계속 대조되면서 중첩, 중첩, 또 중첩되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 있는 사람 가운데 한가지가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묵상한 말씀 중에 몇 곳을 함께 찾아보시겠습니다.
잠3:1절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잠3:5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잠4:23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14:10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 잠14:30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잠14:33 "지혜는 명철한 자의 마음에 머물거니와 미련한 자의 속에 있는 것은 나타나느니라" 잠15:13-15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느니라. 고난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잠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이 외에도 마음이 교만한 자에 대한 언급, 마음에서 어떤 일을 계획하는 것들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말씀들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하기 나름인 마음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곧 죽을 것 같은 절박한 상황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극복할 수 있는 상황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너무나 쉬운 상황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넘기 힘든 거대한 산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감사의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되지만 불평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불행하게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2 본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이미 여러 번 생각해 보았던 바울의 자기 이해입니다. 앞서 마음에 대해서 길게 말씀드린 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의 인생을 객관적인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을 행복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든 길을 그는 끝까지 인내하면서 걸었습니다. 다메섹을 경험한 이후로 어느 한 시간 편안한 잠자리에서 대접받으면서 살지 못하고 거친 이국 땅으로 전전하면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온 사도 바울 자신은 자신의 인생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추수 감사 주일을 맞이하는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생각의 문제, 믿음의 문제,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 아무도 바울의 삶이 힘들지 않았다고 말씀하실 분은 없으실 줄 압니다. 특히 아덴과 고린도에서의 바울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영적침체에 빠졌습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에 붙잡혀 이겼습니다. 좋은 동역자들과 함께 말씀을 회복함으로 인해서 다시금 복음에 대한 확신과 열정을 회복했습니다. 어려워서 감사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감사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감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고 사탄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고전9:19-2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여호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
자존심도 다 팽개치고 살았습니다. 어리석다고 비웃음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미련하게 살았습니다. 줏대도 없고 고집도 없고 속도 없는 뼈 없는 사람과 같이 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엇이 이런 삶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그는 배울 만큼 배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착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음의 문제요, 믿음의 문제요, 생각하기 나름인 것입니다.
여러분! 땅과 자신과 환경을 향해 있는 눈을 들어서 하늘을 보고 이 영글어가는 자연을 보십시오. 꽃피는 봄에는 새로운 움들이 돋아나서 새 생명의 찬가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폭염의 여름은 생명의 강인함과 성장의 기쁨을 줍니다. 그리고 이 결실의 가을은 아름다운 열매를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이제 곧 찬바람이 불어오고 안식의 겨울이 올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주시고 섭리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에 우리 마음을 열고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 인생을 축복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좀 현실감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만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구는 시속 1,000마일의 속도로 자전한다고 합니다. 1마일은 약
1. 6km입니다. 그러니까 시속16000km로 자전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일 이 지구가 100마일로 돌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낮의 길이가 120시간이요 밤의 길이도 역시 120시간입니다. 그렇다면 낮의 뜨거운 햇빛아래 살아남을 생명이 몇이며 혹 살아난다고 해도 밤의 추위아래서 살아남을 생명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누가 시속 1,000마일로 결정하여 낮에는 따뜻하게 밤에는 시원하게 만드셨습니까 과학자들이 지구 속도가 1,000마일인 것은 알아냈지만 누가 어떻게 가장 이상적인 1,000마일의 속도로 결정했는지는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믿음의 눈으로 창조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배려요 사랑인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을 날마다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어떻게 감사가 없을 수 있습니까 감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의 문제이며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달과 지구의 거리는 24만 마일입니다. 바다의 조수 현상은 바로 달과 지구의 적당한 거리 때문에 생겨진다
고 합니다. 그런데 만일 달과 지구의 거리가 24,000마일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동해 바닷물이 백두산까지 올라갔다가 쭉 빠져 내려가고 다시 쭉 올라갔다가 쭉 빠져 내려가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구상에 어떤 생명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누가 달과 지구의 거리를 적당하게 24만 마일로 정하시매 바닷물이 찰랑 찰랑할 정도로 찻다가 모래를 물의 경계로 정하시매 더 이상 넘어오지 못하고 다시 썰물로 빠지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는 이 우주 구석구석 닿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창조와 섭리 속에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고 하는 한 생명이 태어났습니다. 말을 바꾸면 나라고 하는 한 생명을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태초에 이렇게 지구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감사함이 없겠습니까 보이는 것마다 감사요 느끼는 것마다 감사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탕자를 기억하시지요.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종이 될 각오를 하고 되돌아오기 전에는 밥상의 밥을 보면서 투정하고 아버지가 철마다 해주시는 옷에 대해서도 감사는커녕 그저 당연히 해주는 것이고 칼라와 취향이 맞지 않는다고 투정했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 중에도 이런 지체들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들의 피 땀 흘리는 수고의 값으로 학교 생활하고 옷과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우리 부모님들은 도대체 뭘 하셨느냐는 식의 생각 말입니다. 탕자 역시도 그랬습니다. 그는 유산을 상속받는 것이 권리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직 아버지가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유산을 달라고 하는 불효를 저지르면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객지에서 돈을 다 써버리고 돼지의 쥐엄 열매를 먹으면서 마음의 모진 각오를 하고 돌아왔을 때 세상은 전과 같은 세상이요, 밥상도 전과 같은 밥상이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탕자의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밥상을 받으면서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며 이 음식들 속에 담겨져 있는 어머니의 사랑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아버지가 일구어 놓은 일들을 하면서도 그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어울려서 노는 것보다 열심히 일하는 쪽을 택했을 것입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탕자의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사물을 보는 눈,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바로 우주는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의 전환, 신앙에의 눈이 열려짐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집을 나가기 전의 탕자처럼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과 불만만 일삼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까 그들 중에는 우리들 보다 뛰어난 사람도 많고 칭송 받을 만한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선한 사람도 아니며 이 사회에 영향력을 미칠만한 사람도 아닙니다. 나보다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도 많고, 나보다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람 더 많은데…, 나보다 사회적으로 신사숙녀가 더 많은데… 왜 하필이면 만삭되지 못한 나 불평과 불만 투성이인 나! 늘 안식하지 못해서 깨끗하고 바른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나를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저 입이 있어 겨우 한마디한다면 "나의 나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뿐입니다. 다른 것 다 제쳐 두고서라도 우리는 이 이유 하나 때문이라도 감사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위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생명을 포기하셨다는 사실에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에 착념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어디에 마음을 두느냐가 문제입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세상적인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같은 의미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벌이고 있는 천국의 삶을 살기 운동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삶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보자는 운동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착념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한 사형수가 있다고 합시다. 사형 날자가 잡혀 이제 철창 안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땅도 하늘도 봄, 여름도 부귀영화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특사로 무죄 방면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감옥을 나오는 그 순간 그에게 펼쳐지는 모든 것에 갑자기 의미가 생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아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딸 된 자들이 느껴야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감사함이 끝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감사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벌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 돈을 잃으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건강하다고만 감사하는 사람, 건강 잃었을 때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성공했다고 감사하는 사람, 실패하면 감사 못합니다. 내 소원 들어 주셨다고만 감사하는 사람, 내 소원이 안 이루어 질 때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것, 나에게 구원을 전달해 주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주신 성령의 인치심에 확신을 갖는 것, 여기에서만 비로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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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감사하는 삶은 행복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땅에 행복한 사람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타락한 사람은 욕망하는 존재라고 프로이드와 라캉은 설파합니다. 그래서 끝없이 욕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행복은 또 다시 저편으로 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값없이 새 생명을 주시면서 자족하고 지족하는 삶을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한 구절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바울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주목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었는가를 생각하고자 했습니다.
여러분! 감사의 눈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보면 감사의 조건은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불평의 눈으로 우리의 삶을 보면 한 가지도 감사할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주님이 주신 이 생명까지도 값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로봇이 아니기 때문에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실망도 맛 볼 수 있고,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절망감을 맛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들은 근본적으로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한 발짝만 뒤로 물러서서 보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것들입니다. 여러분! 다시 기억하십시오.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사도 바울의 인생을 기억하시고 생각을 바꾸셔서 날마다 감사뿐인 인생! 아름답고 활기찬 인생으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잠언을 계속해서 묵상해 가시면서 잠언서 기자가 얼마나 마음에 집중하고 있는가를 주의해서 보셨을 줄 압니다. 물론 지혜가 첫 번째 가는 주제입니다. 그래서 지혜 있는 사람과 미련한 사람이 계속 대조되면서 중첩, 중첩, 또 중첩되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 있는 사람 가운데 한가지가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묵상한 말씀 중에 몇 곳을 함께 찾아보시겠습니다.
잠3:1절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잠3:5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잠4:23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14:10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 잠14:30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잠14:33 "지혜는 명철한 자의 마음에 머물거니와 미련한 자의 속에 있는 것은 나타나느니라" 잠15:13-15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느니라. 고난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잠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이 외에도 마음이 교만한 자에 대한 언급, 마음에서 어떤 일을 계획하는 것들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말씀들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하기 나름인 마음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곧 죽을 것 같은 절박한 상황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극복할 수 있는 상황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너무나 쉬운 상황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넘기 힘든 거대한 산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감사의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되지만 불평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불행하게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2 본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이미 여러 번 생각해 보았던 바울의 자기 이해입니다. 앞서 마음에 대해서 길게 말씀드린 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의 인생을 객관적인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을 행복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든 길을 그는 끝까지 인내하면서 걸었습니다. 다메섹을 경험한 이후로 어느 한 시간 편안한 잠자리에서 대접받으면서 살지 못하고 거친 이국 땅으로 전전하면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온 사도 바울 자신은 자신의 인생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추수 감사 주일을 맞이하는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생각의 문제, 믿음의 문제,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 아무도 바울의 삶이 힘들지 않았다고 말씀하실 분은 없으실 줄 압니다. 특히 아덴과 고린도에서의 바울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영적침체에 빠졌습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에 붙잡혀 이겼습니다. 좋은 동역자들과 함께 말씀을 회복함으로 인해서 다시금 복음에 대한 확신과 열정을 회복했습니다. 어려워서 감사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감사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감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고 사탄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고전9:19-2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여호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
자존심도 다 팽개치고 살았습니다. 어리석다고 비웃음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미련하게 살았습니다. 줏대도 없고 고집도 없고 속도 없는 뼈 없는 사람과 같이 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엇이 이런 삶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그는 배울 만큼 배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착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음의 문제요, 믿음의 문제요, 생각하기 나름인 것입니다.
여러분! 땅과 자신과 환경을 향해 있는 눈을 들어서 하늘을 보고 이 영글어가는 자연을 보십시오. 꽃피는 봄에는 새로운 움들이 돋아나서 새 생명의 찬가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폭염의 여름은 생명의 강인함과 성장의 기쁨을 줍니다. 그리고 이 결실의 가을은 아름다운 열매를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이제 곧 찬바람이 불어오고 안식의 겨울이 올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주시고 섭리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에 우리 마음을 열고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 인생을 축복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좀 현실감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만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구는 시속 1,000마일의 속도로 자전한다고 합니다. 1마일은 약
1. 6km입니다. 그러니까 시속16000km로 자전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일 이 지구가 100마일로 돌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낮의 길이가 120시간이요 밤의 길이도 역시 120시간입니다. 그렇다면 낮의 뜨거운 햇빛아래 살아남을 생명이 몇이며 혹 살아난다고 해도 밤의 추위아래서 살아남을 생명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누가 시속 1,000마일로 결정하여 낮에는 따뜻하게 밤에는 시원하게 만드셨습니까 과학자들이 지구 속도가 1,000마일인 것은 알아냈지만 누가 어떻게 가장 이상적인 1,000마일의 속도로 결정했는지는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믿음의 눈으로 창조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배려요 사랑인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을 날마다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어떻게 감사가 없을 수 있습니까 감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의 문제이며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달과 지구의 거리는 24만 마일입니다. 바다의 조수 현상은 바로 달과 지구의 적당한 거리 때문에 생겨진다
고 합니다. 그런데 만일 달과 지구의 거리가 24,000마일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동해 바닷물이 백두산까지 올라갔다가 쭉 빠져 내려가고 다시 쭉 올라갔다가 쭉 빠져 내려가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구상에 어떤 생명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누가 달과 지구의 거리를 적당하게 24만 마일로 정하시매 바닷물이 찰랑 찰랑할 정도로 찻다가 모래를 물의 경계로 정하시매 더 이상 넘어오지 못하고 다시 썰물로 빠지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는 이 우주 구석구석 닿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창조와 섭리 속에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고 하는 한 생명이 태어났습니다. 말을 바꾸면 나라고 하는 한 생명을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태초에 이렇게 지구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감사함이 없겠습니까 보이는 것마다 감사요 느끼는 것마다 감사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탕자를 기억하시지요.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종이 될 각오를 하고 되돌아오기 전에는 밥상의 밥을 보면서 투정하고 아버지가 철마다 해주시는 옷에 대해서도 감사는커녕 그저 당연히 해주는 것이고 칼라와 취향이 맞지 않는다고 투정했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 중에도 이런 지체들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들의 피 땀 흘리는 수고의 값으로 학교 생활하고 옷과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우리 부모님들은 도대체 뭘 하셨느냐는 식의 생각 말입니다. 탕자 역시도 그랬습니다. 그는 유산을 상속받는 것이 권리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직 아버지가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유산을 달라고 하는 불효를 저지르면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객지에서 돈을 다 써버리고 돼지의 쥐엄 열매를 먹으면서 마음의 모진 각오를 하고 돌아왔을 때 세상은 전과 같은 세상이요, 밥상도 전과 같은 밥상이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탕자의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밥상을 받으면서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며 이 음식들 속에 담겨져 있는 어머니의 사랑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아버지가 일구어 놓은 일들을 하면서도 그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어울려서 노는 것보다 열심히 일하는 쪽을 택했을 것입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탕자의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사물을 보는 눈,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바로 우주는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의 전환, 신앙에의 눈이 열려짐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집을 나가기 전의 탕자처럼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과 불만만 일삼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까 그들 중에는 우리들 보다 뛰어난 사람도 많고 칭송 받을 만한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선한 사람도 아니며 이 사회에 영향력을 미칠만한 사람도 아닙니다. 나보다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도 많고, 나보다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람 더 많은데…, 나보다 사회적으로 신사숙녀가 더 많은데… 왜 하필이면 만삭되지 못한 나 불평과 불만 투성이인 나! 늘 안식하지 못해서 깨끗하고 바른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나를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저 입이 있어 겨우 한마디한다면 "나의 나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뿐입니다. 다른 것 다 제쳐 두고서라도 우리는 이 이유 하나 때문이라도 감사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위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생명을 포기하셨다는 사실에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에 착념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어디에 마음을 두느냐가 문제입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세상적인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같은 의미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벌이고 있는 천국의 삶을 살기 운동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삶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보자는 운동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착념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한 사형수가 있다고 합시다. 사형 날자가 잡혀 이제 철창 안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땅도 하늘도 봄, 여름도 부귀영화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특사로 무죄 방면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감옥을 나오는 그 순간 그에게 펼쳐지는 모든 것에 갑자기 의미가 생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아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딸 된 자들이 느껴야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감사함이 끝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감사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벌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 돈을 잃으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건강하다고만 감사하는 사람, 건강 잃었을 때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성공했다고 감사하는 사람, 실패하면 감사 못합니다. 내 소원 들어 주셨다고만 감사하는 사람, 내 소원이 안 이루어 질 때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것, 나에게 구원을 전달해 주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주신 성령의 인치심에 확신을 갖는 것, 여기에서만 비로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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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감사하는 삶은 행복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땅에 행복한 사람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타락한 사람은 욕망하는 존재라고 프로이드와 라캉은 설파합니다. 그래서 끝없이 욕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행복은 또 다시 저편으로 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값없이 새 생명을 주시면서 자족하고 지족하는 삶을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한 구절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바울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주목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었는가를 생각하고자 했습니다.
여러분! 감사의 눈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보면 감사의 조건은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불평의 눈으로 우리의 삶을 보면 한 가지도 감사할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주님이 주신 이 생명까지도 값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로봇이 아니기 때문에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실망도 맛 볼 수 있고,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절망감을 맛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들은 근본적으로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한 발짝만 뒤로 물러서서 보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것들입니다. 여러분! 다시 기억하십시오.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사도 바울의 인생을 기억하시고 생각을 바꾸셔서 날마다 감사뿐인 인생! 아름답고 활기찬 인생으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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