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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감사의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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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금년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일년의 삶을 지켜 주셨고 한 해의 농사를 축복해 주셔서 올해도 풍년을 맞이했습니다. 한 해 동안 사건과 사고도 많았지만 그래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시간까 지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추수에 대한 감사뿐이 아니고 일 년의 삶을 생각해 보면서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감사"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합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감사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마음은 하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결코 쉬운 마음이 아닙니다.
일본의 내촌감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일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 그리고 배신이나 죽음으로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못 하는 불신앙으로, 그리고 성경을 읽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막힌 귀로, 또한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도록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분명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셔야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감사하는 마음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몇 가지 교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은 "믿음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화되면 불만과 원망과 불평의 마음부터 우러나옵니다. 이것들은 감사의 싹을 자르는 요소들입니다. 오늘 신앙인들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이 원망과 불만과 불평을 안고 살아갑니다. 기뻐하고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신앙인들보다는 매사에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이 약화되어서 그렇습니다.
믿음과 신앙과 영적 풍성함을 유지하고 살아갈 때 그 마음에 소망이 있고 넉 넉함이 있고 감사함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한 시인은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 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라고 노래했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그 풍성한 축복을 경험해 본 사 람만이 할 수 있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거친 들도 초막도 천국이 됩니다. 믿음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들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믿음의 열매로 그의 신앙을 증거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은 "축복 받은 마음"입니다.
감사는 분명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아무나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그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셔야 그런 마음을 가질 수가 있고 그것을 표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원망과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입만 열면 불평 불만이 튀어나옵니다.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감사나 만족함을 표현하는 사람 이 적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축복 받은 마음입니다.
미국의 어느 청년이 청년답지 않게 늘 감사하면서 살아갔습니다. 대개의 청년들은 꿈도 크고 야망도 누구 못지 않게 대단하기 때문에 현재의 삶이 늘 미흡 하다고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젊은이가 그렇게 감사하면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이 청년이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절망의 삶을 살았습니다. 할 일도 많고 결혼도 해야 할 나이인데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늘상 없는 다리 한 쪽만 생각하며 살자니 앞날이 캄캄 했을 것입니다. 이 지점이 인간의 한계점입니다. 사람은 없어진 다리에 집착합 니다. 그러는 사이에 또 다른 다리는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인가 눈이 뜨이면서 다리 하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없어진 다리 대신 남아 있는 그 다리를 발견하게 된 것입 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다리가 하나 남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고무다리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청년은 이 남은 다리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이 청년은 마침내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 훈련 을 마치고 마침내 그 다리를 가지고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식인종들이 덤벼들 었습니다. 그는 고무다리를 던져 주었습니다. 식인종들은 그 다리를 씹어보았지 만 씹히지 않자 마침내 그 선교사를 신적 존재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다리를 절단하게 하신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 때 그가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오늘 현대인들은 한편 참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전에 없 던 풍요를 누리고 문화를 누리며 편리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또 한편 으로 생각해 보면 오늘 현대인들은 참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대개는 만족함과 행복함이 없이 살아갑니다. 늘 부족을 느끼고 불만하며 갈증 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인간의 행복이나 만족함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하늘이 주 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은 "더 큰 감사를 불러들이는 마음"입니다.
확실히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일이 더 많이 생깁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은 더 큰 감사를 불러들입니다. 감사하는 곳에는 또 기적이 일어납니다. 불 평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불평의 조건만 늘어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들에 게는 언제나 감사의 조건들이 더 많이 만들어지는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스펄전은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 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영원한 빛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월등 한 감사의 조건을 점점 더 부여하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죄"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 하고 감사하지 않는 것은 무지해서 감사를 깨닫지 못하거나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하거나 교만한 마음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 는 불신앙이므로 근본적인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해서 드린 감사의 기도문입니다. 이스라 엘에는 언약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법궤라고도 불렀습니다. 그 속에는 아론의 지팡이와 십계명 돌비와 만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신적 권위 가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왕 때에는 이 언약궤가 70여년 동안 변방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작업이 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놓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감격했고 안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너무나 감격해서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그때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 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 원하여 만국 가운데서 건져내시고 모으시사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할지어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 까지 송축할지로다".
다윗은 참 기막힌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목동으로 초라하게 살았습 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골리앗과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사울로부터도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 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참 기적과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되었을 것입 니다. 그래서 오늘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안치시켜 놓고 나서 이 감격 의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 닙니다. 진정한 감사는 다음과 같은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첫째는 "과거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과거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초라했든지 화려했든지 누구나 과거를 가지고 있 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지난날 가운데 뼈아팠던 일, 억울했던 일, 서운했던 일, 그리고 배은 망덕했던 사람을 생각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지적했듯이 사람은 지난날 속에서 행복했던 일, 기뻤던 일들이 더 많이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각자 뼈아픈 일들만 생각하고 원망과 불행했 던 일들만 기억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 습성 때문에 과거를 잊지 못하고 매여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16:9-17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맥추절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당부가 아니고 명령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430년을 종살이를 하 면서 압박과 고난의 삶을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광야에 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평화의 땅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첫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결실입니까. 과거를 생각하면 꿈같은 생활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첫 수확을 거두고 감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과거를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 "과거의 쓰라림을 잊지말고 그 고난 가운데서 인도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미국인들의 가장 큰 명절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그것은 미국인들 의 조상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 당했던 지난 세월의 그 아픔을 잊을 수 없 기 때문입니다. 그 조상들이 지켰던 추수감사절의 그 기막힌 의미를 어떻게 잊 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윗은 과거를 생각하면 뼈가 저렸을 것입니다. 지나온 생애 순간 순간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과거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똑같은 감회에 젖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지난날을 생각하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축복의 마음입니다.
 둘째는 "현재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현재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입 니다. 즉 "구원의 삶"입니다. 오늘 내가 "주 안에서 살고 있다"는 이것이 축복 입니다. 생각하면 감격할 일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밀턴은 말년에 소경으로 살았습니다. 에디슨은 귀머거리가 되어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결같이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고 보니 귀머거리, 소경인 것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에디슨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발명왕으로, 밀턴에게는실낙원으로 보상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감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이고 상급입니다.
빌리 그래함이라고 하는 분이 전도집회를 하면 언제나 따라다니며 찬양도 하 고 간증도 하는 한국출신 맹인 성악가가 있습니다. 그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맹인인 나를 인도해 줄 때 100m 앞 전방에 뭐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눈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 뛰라든가, 층계가 있으니 올라가 라고만 말합니다. 나는 그 인도자의 말만 듣고 따라가면 안전하게 목적지에 갈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나를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10년 앞을 모릅니다. 20년 앞도 모릅니다. 또 알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면 우리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옛날 태어났던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감사의 기 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지금은 한 나라의 임금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적같 은 일입니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현재를 생 각할 수 있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태어났을 때 그 환 경, 그 삶이 어떠했습니까. 가난, 무지, 초라함이 그 때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오늘의 삶을 상상이나 했습니까. 그때는 모두 무작정 상경한 분들 많았을 것입니다. 대책 없이 고향을 떠난 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까지 내 뜻과는 상관없이 여호와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입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날이 이렇게 왔듯이 장 차 우리의 미래도 여호와 하나님은 그렇게 인도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분명히 우리 의 앞날도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길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 실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고 만족함이 있 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내일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장차 주어질 하 나님의 영광과 은총과 그 나라를 생각하는 생활입니다. 그것도 없이 살면 그것 은 신앙도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은 임종시 고통 속에서도 "오늘의 고난은 장차 주어질 영광과 족 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구절을 암송하며 죽어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신앙의 세계는 위대한 것입니다. 사람은 미래가 중요합니다. 미래가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는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추장이 임종을 맞았습니다. 한겨울이었습니다. 후계자감 세 명을 불러서 말하기를, "산너머에 가서 선물을 한 가지씩 가져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들은 눈 덮인 산을 넘어가서 한 사람은 양지바른 곳에 핀 꽃 한 송이를, 또 한 사람은 청초 한 포기를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은 그냥 빈 손으로 내려 왔습니다. 저마다 가져온 선물을 드렸지만 빈손으로 온 청년은 선물대신 의미있는 보고 를 했습니다. "저는 산너머에서 꽃도 보았고 풀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 보 다 더 좋은 것을 보았습니다. 산 너머에서는 넓은 들을 보았고 넓은 강을 보고 왔습니다, 그 곳이 장차 우리 부족이 살아갈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서 속히 쾌유하셔서 우리를 이끌고 그 넓은 곳으로 가서 살게 해 주십시요" 하고 말했 습니다. 그 때 그 추장은 이 세 번째 젊은이에게서 소망에 찬 부족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추장은 마침내 그 젊은이에게 추장 자리를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저 앞에 놓인 즐거움, 꿈, 소망, 그것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 는 사람들입니다. 감사는 믿음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같은 축복이 함께 하 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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