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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본문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내가’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내가’로 연결되어 있는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구원을 체험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신앙인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주는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
 첫째 :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이는 믿음의 사람 시편 기자가 여호와 하나님과 자기와의 내밀한 관계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그에게 있어 여호와 하나님은 피상적 존재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 번영, 미래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여호와 하나님(his God)’이 아니라 ‘나의 여호와 하나님(my God)’이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내게 객관적인 분이 아니라 주관적이신 분이시요, 남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내,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어머니, 나의 어머니’ ‘우리 교회, 내 교회’ ‘우리 나라, 내 조국’이라고 일컫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여호와 하나님이심으로 우리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이렇게 될 때만이 여호와 하나님과 나와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내가 믿는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목사의 설교를 듣고, 어떤 성도의 간증을 듣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설교나 간증이 신앙을 갖거나 믿음을 성장케 하는 데 도움은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믿음 그 자체는 될 수가 없습니다.
신문에 실린 어떤 기독교 대학 교수의 글입니다.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만나며 그들로부터 많은 인사를 받는다. 그러나 거의 의례적인 인사이다. 허나 때로는 의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정한 감사가 담긴, 나를 가르쳐 주시는 나의 고마우신 선생님으로 알고 진심으로 인사하는 학생도 있다. 그러면 교수도 그 학생 신상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고 기억 속에 입력을 시키며 깊은 마음을 주게 된다. ”
추수감사예배는 매년 연례 행사로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과거에도 은혜를 주셨고, 지금도 은혜를 주시며, 미래에도 은혜를 주실 나의 여호와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리는 특별하고도 뜻깊은 예배입니다.
특히 오늘, 1999년 11월 21일의 추수감사예배는 단순히 1999년의 추수감사예배가 아니라 20세기에 마지막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 죄를 사해 주시고, 크고 작은 고난, 삶의 구석구석, 순간순간에 은혜를 베풀어 주신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주님과 감사로 관계되어야만 합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요, 감사의 봉헌은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내 삶을 만들어 주신 내 여호와 하나님을, 내 주님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의 작은 축복에 감사함이 또 다른 큰 축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둘째 : 내가 감사하리이다
감사란 타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나의 여호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며 잃어버렸던 감사를 찾으시고 쏟았던 감사를 회복하십시오. 기독교인들의 최대 치욕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정신의 결핍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마음을 찾고 회복하여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만 있다면 21세기라는 내일에는 복되고 건강한 나, 가정, 교회, 그리고 나라가 될 것입니다. 여기저기에 분쟁이 있고 미움이 있으며, 문제가 생김은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겐 매사가 감사로 귀결되나 불평하는 자에겐 모든 일이 불만으로 끝납니다. 기독교인들의 생은 불만 속에서 피폐한 삶으로 종지부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는 은혜의 산물이요 신앙의 표현이며, 축복의 열매요, 천국 생활의 상징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내 속에 감사한 마음을 두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며,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족도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감사란 기독교인을 나타내는 표시이며 감사가 나타나는 곳에 참 신앙이 있습니다.
독일 재무장관을 지낸 마르티 바덴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말할 수없이 궁핍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지방 여행을 갔다가 싸구려 여관에 투숙,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의 신발이 없어졌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어떤 죽일 놈이 내 신발을 훔쳐갔냐. 여호와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나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도둑질해가게 그냥 놔두시다니…”라고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했답니다.
그러자 여관 주인이 창고에서 헌 구두를 꺼내주며 그에게 “오늘은 주일인데 나와 같이 교회에 가지 않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는 마지 못해 여관 주인을 따라 교회에 갔습니다.
헌데 그의 옆 자리에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앉아 눈물을 흘리며 찬송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더랍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두 다리를 잃었구나. 신발이 있다고 해도 신을 수 없구나. 저 사람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복된가 신발이야 또 사서 신으면 되는 것을…. ” 마르티 바덴의 삶에 변화가 왔습니다. 그는 삶의 상황에 따라 감사하는 자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서 감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명 재무장관이 되어 국가와 국민에게 크게 봉사하였고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생활이 올바른 삶이며 축복 받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생각할 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가 올바로 살 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다. ” 어거스틴(Augustine)의 말입니다.
왜 없는 것만을 가지고 불평불만을 하십니까 지금 내게 있는 것으로 감사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임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세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이기는 능력에 의하여 증명됩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대략 140억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헌데 기억을 관리하는 것은 대뇌의 후두부이며, 여기에 저장된 기억은 되새기지 않은 상태에서 얼마를 지나면 잊혀지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것으로 저장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저장된 기억은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으로 분리되며, 전자는 의지를 사용해서 노력해야만 기억되는 것이고, 후자는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절로 떠오르는 기억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조건을 조사하고, 찾아 내어 어거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생활 속에서, 그냥, 나도 모르게, 당연히, 저절로 내 속에서 살아나야만 합니다.
폭풍우로 인하여 미국의 에반 스톤 해안에서 배가 난파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노스웨스턴대학생들이 인명 구조에 나섰는데 그 가운데 에드워드 스펜서(E. Spen- cer)라는 학생이 17명을 구조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토레이(Torray) 박사가 LA의 한 모임에서 그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스펜서 씨가 지금 여기에 참석해 계십니다. ”라고 외쳤습니다.
토레이 박사가 그를 강당 위로 초대하자 백발의 노인이 우레 같은 박수 속에서 올라왔습니다. 토레이 박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그 때의 일들 가운데 특별히 인상에 남는 것이 있으신지요 스펜서의 대답입니다. “단 한 가지 있습니다. 제가 구했던 17명 중 그 누구도 내게 감사하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감사할 줄 몰랐던 17명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감사를 잃어버리고 사는 현대인들입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장). ”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었건만 한 사람만이 감사했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십니다. 주님께선 지금도 아홉을 찾고 계십니다.
 셋째 : 내가 높이리이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은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와 감격이 없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높일 수가 없습니다.
영국의 어떤 학교에서 무신론자 과학 선생이 무신론을 주장하고자 칠판에 ‘No where is God(여호와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다)’이라고 썼습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나가 칠판에다가 ‘Now here is God(여호와 하나님께선 지금 여기에 계시다)’라고 고쳐쓰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높임에 있어 언제, 어디서,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고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주저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선 우리가 높이는 만큼 높아지십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수가 늘지 아니하고 있음은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내가 보잘 것 없는 낮은 존재임을 시인하는 것이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시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려고 하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겸손이란 나를 낮추는 것이요 자기를 감추는 것이며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나를 낮추고 내가 숨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려 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내세우며 나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릴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원인이 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St. Francesco)의 제자 중에 마태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겸손의 덕을 영원한 생명으로 알고 겸손의 은혜를 얻기 위해 불붙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늘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 “마태오야, 마태오야, 네가 간구하는 은혜를 내가 주면 너는 그 대신 나에게 무엇을 바치려느냐”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주여 저는 저의 가장 귀한 눈을 빼어드리겠나이다. ” “나는 네가 원하는 은혜도 주고 네 눈도 보존되기를 원하노라. ” 이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이랍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절). ”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결정을 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리고 실천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내 것이 될 것이요,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에머슨(R. W. Emerson)은 말합니다. “마음에 결정된 것을 주의하라 그것이 네 것이 되는 까닭이니라. ”고…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애인이 될 것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좋은 신부가 될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은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새로운 삶은 내 생활을 복되게 할 것입니다.
내가 나의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의 여호와 하나님을 내가 높인다면 허락하신 모든 은혜와 축복이 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내게 객관적인 분이 아니시라 주관적이신 분으로, 그의 여호와 하나님(his God)이 아닌 나의 여호와 하나님(my God)이십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요, 감사의 봉헌은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하나의 작은 축복에 감사함이 또 다른 큰 축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분쟁이 있고 미움이 있으며 문제가 생김은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은혜의 선물이요 신앙의 표현이며, 축복의 열매요 천국 생활의 상징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감사란 기독교인임을 나타내는 표시이며, 감사가 나타나는 곳에 참 신앙이 있습니다.
·감사란 삶의 상황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로서 감사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은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요, 여호와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내가 보잘 것 없는 낮은 존재임을 시인하는 것이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시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나를 낮추는 것이요 자기를 감추는 것이며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나를 낮추고 내가 숨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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