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애통하는 사람들의 복
본문
사람이 애통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은 나약하거나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슬플때 애곡하는 것과 실패하여 애통하는 것과 기뻐서 눈물짓는 것은 사람의 참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아파하며 눈물로 애통하는 사람은 그 영혼이 살아있는 증거다. 눈물이 메마른 사람은 삭막하고 매정하며 사랑이 결핍된 상태다. 눈물은 감정을 맑게 하고 이성을 밝게 하며 영혼을 깨끗하게 한다.
애통은 주님을 찾게 하고 위로를 받게 함
애통할 원인이 있다는 것은 시련과 역경과 문제에 직면했을 때를 말한다. 애통의 눈물이 없을 때는 남을 원망하고 형편과 환경을 탓하지만 애통할 수 있을 때에는 주님을 찾는 믿음의 마음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된다. 인생 행로에서 애통하며 살아갈 우리들이 주님의 위로를 받는다면 그것보다 큰 복이 없다. 애통이 크면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도 큰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가 따르는 눈물은 행복한 눈물이다.
애통하신 주님이 우리의 눈물을 기억하심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때 세번 우신 기록이 성경에 있다. 나사로가 죽었을때(요 11:)와 예루살렘 도성의 멸망을 미리 보시고(눅 19:) 우셨으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드리실때(히 5:7)에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다. 애통을 경험하신 주님이 눈물의 기도를 기억하신다. 애통의 눈물을 주님의 병에 담으신다. (시 56:8)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위로 속에서 복된 삶을 누린다.
지난주간에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 나간지 두달 정도 밖에 되지 않은 한 가정을 만났습니다. 지난번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때 두 따님과 두 외손을 잃어버린 아버지와 어머니였습니다. 두 따님 모두 이화여대를 졸업한 수재에다가 큰 따님은 검사 부인이요, 둘째 따님은 큰 회사에 스카우트 되어 불란서에 가서 연수를 받고 돌아온지 얼마 안되었고 곧 결혼할 상대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마음을 누가 감히 이해할 수 있으며 위로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순간순간 눈물을 쏟아내는 그 어머니의 모습은 마음아파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석달 이상을 주야로 애통하여 그 눈에는 눈물이 다 말라버렸을 터인데도 아직도 눈은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여러번 실신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아픈 마음을 오직 주님께서 치유해 주시고 하늘의 위로로 채워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슬픔과 아픔과 애통 속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매일 새벽기도는 말할 것도 없고 틈만 나면 교회 나가서 기도와 찬송으로 주님의 위로를 받으며 절망을 이겨 나간다고 했습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와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호화로운 궁궐에 사는 사람이나 작은 오두막집에 사는 사람이나 모두 수고와 슬픔을 지닌채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가는 곤난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말하기를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 했으며(욥 5:7), 시편 기자는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한다"(시 84:6)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이 없고 눈물없는 세상을 갈망하지만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고 말하지 못하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는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눅 6:21에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애통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펜데오'( )인데 이는 극도의 슬픔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님, 자식, 애인이 죽을때 펜데오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런 극한적인 애통이 복이 있다는 말은 역설적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인간의 애통이 복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 애통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의 삶을 다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통은 사람의 참된 모습을 나타내게 합니다.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는 것은 그가 나약하거나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의 눈물은 결코 불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진실되고 진지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눈물 한방울 없는 삭막한 사람의 모습은 어딘가 진실을 잃었고 참된 자아가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많이 울고 애통하는 사람의 마음은 수정같이 맑은 법입니다.
성경에서 많이 운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의 참된 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복을 주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복함으로 눈물로 침상을 적셨고 베드로는 닭소리를 듣고 통곡함으로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여 위대한 사도의 길을 걸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2:4에서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썼노니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받은 훌륭한 사람들은 모두 그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로 인하여 인격과 믿음을 깨끗케 하였습니다. 진정한 눈물이 없는 사람은 웃음도 없는 것이며 애통함이 없는 사람은 주의 위로도 없을 것입니다. 지도자는 남몰래 눈물을 많이 흘립니다. 그 눈물이 사람을 진실되게 만들어 리더쉽을 발휘하게 합니다.
1940년 5월 13일 영국은 독일의 공격을 받고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때에 윈스턴 처칠경은 전시 내각을 구성하면서 영국 국민들에게 호소했습니다. '내가 바칠 수 있는 것은 피와 눈물과 땀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의 호소를 들은 영국 국민들은 모두 조국애로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독일을 이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눈물은 사람이 흘리는 가장 진한 액체입니다. 우리에게는 때로 슬픔의 눈물이 있고, 때로는 감격의 눈물이 있고, 때로는 회개의 눈물이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눈물이건 간에 눈물이 있는 곳에는 진실이 있는 것이며 그 진실은 우리를 참되게 하고 고상하게 하며 성숙하게 합니다.
그래서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은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심장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따뜻한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이 있으면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인격자가 될 것입니다. 눈물은 그 사람의 진실한 표현입니다. 눈물은 그 사람을 정화시킵니다. 회개의 눈물은 영혼을 깨끗하게 합니다. 참회의 눈물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현대 목회 상담학에서는 우리 사람들의 병든 마음,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하는 데에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눈물은 병든 육체를 치료하며, 상한 마음을 고쳐주며, 더러운 마음을 깨끗이 씻어 줍니다. 그리고 눈물은 타락한 길에서 돌이키게 합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Johann W. Von Goethe)는 '눈물과 더불어 빵을 먹어 본 사람이 아니면 인생의 참뜻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긴급한 문제를 고백하면서 간절히 기도할 때에 눈물의 부르짖음이 있어야 주님의 응답을 신속히 받을 수 있습니다. 깊은 눈물의 기도를 마쳤을때 우리 마음속에는 기쁨과 감격이 가득 차고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와 응답을 경험할 것입니다. 눈물은 추한 인생을 정화시키고 삶의 가치와 깊은 뜻을 깨닫게 합니다. 애통은 죄인을 의인되게 하며 죄사함의 은혜를 입게 합니다. 눈물의 성도들이 많은 교회는 부흥하게 되며 선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애통은 주님을 찾게 하고 거기서 위로를 받게 합니다.
우리는 애통하는 사람을 세상에서 불쌍한 사람으로 여기고 동정합니다. 그러나 애통하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웃어라 그리하면 복이 올 것이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애통하라 그리하면 너희 즐거움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요 16:20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하시면서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점점 이기주의로 흐르고 있습니다. 남의 슬픔과 애통에 대하여 무관심합니다. 도리어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남의 슬픔에 위로할 사람이 없으며 위로한다고 하여도 그 위로는 무기력하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제는 애통하는 부모에게 자식도 찾아오지 않는 각박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되도다 그가 위로를 받을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위로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위로받아야 할 애통하는 민족이었습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수탈당하고, 굶주림에 시달리고, 망국 백성으로서 한을 품고 애통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율법의 멍에 아래서 애통하는 백성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상처 투성이었습니다. 그 많은 상처들로 인해 고통하는 백성들에게 행복을 약속하시면서 위로를 선언하십니다. 골짜기가 깊어야 시냇물이 길게 흘러가듯이 애통하는 자만이 끝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인간은 연약한 갈대입니다. 험악한 인생 행로에 영혼과 육체에 상처가 나고 때때로 작은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꺾어집니다. 성한 사람이 없습니다. 저마다 위로받기를 원하지만 위로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위로의 여호와 하나님이 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편안할 때에도 함께 하시며 만나 주십니다.
그러나 애통할때 더욱 가까이 만나 주십니다. 시편 34:18-19에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며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나 참 좋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슬퍼하고 애통할때 더욱더 좋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인생 행로에서 애통하면서 예수님의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 믿는 사람이 받는 큰 은총입니다. 애통이 크면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도 큽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가난한 자의 복은 애통하는 자의 복에 선행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서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고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만 사모하는 자만이 모든 슬픔과 눈물에서 주님의 위로를 받으며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물질로 위로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 지위로 위로받으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거기서 얻어지는 위로는 진정한 위로가 아닙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아야 참된 위로입니다. 어떤 사람을 주께서 위로하십니까 지쳐서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서러워서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약함을 고백하며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강함과 부함과 힘을 의지하거나 자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위로가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약함과 무능함과 슬픔을 눈물로 고백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위로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가난에 참예한 자 될때 주님의 위로도 넘치는 것입니다. 고후 1:5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고후 1:3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여호와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큰 위로의 손길로 다가서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 좋으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위로와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애통할때 애통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기억하십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셨고 우는 자와 함께 우셨습니다. 신약성경 안에 예수님이 세번이나 우셨다는 기록이 있는데 예수님 자신을 위해 우신 일은 한번도 없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주님이 우셨습니다. (요 11:) 오라비를 잃고 통곡하는 두 누이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사 우셨습니다. 그들의 슬픔에 함께 울어주신 울음입니다.
우리가 슬픔을 당하고 기막힌 애통이 있을때 주님이 함께 울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픔을 당하여 눈물로 간구하는 동안 사랑의 주님은 곁에 오셔서 함께 울어 주십니다. 주님이 동정하시고 주님이 위로하시고 주님이 함께 울어주시는 애통이 있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눅 19:)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배역하는 예루살렘 거민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몇날이 못되어 멸망당하게 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민족과 국가의 암담한 미래를 보신 주님은 우셨습니다. 울어야 할 민족의 지도자들이 울지 않으니 주님이 우신 것입니다. 겉으로는 여호와 하나님 잘 섬기는 예루살렘이지만 안으로는 부패한 그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외식적인 믿음을 보시고 우십니다. 울어야 할 우리가 울지 않는 한 예수님은 우리 대신 울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또한번 우신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셨습니다. (히 5:7) 모든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통곡과 눈물이 없었던들 우리는 멸망받을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애통하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주님께서 이 민족을 위해 눈물을 흘리심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었으며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통곡하심으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애통을 경험하셨기에 애통하는 우리를 기억하시고 도우십니다. 한 많고 슬픔 많은 세상에서 절망의 눈물과 탄식의 눈물이 아니라 주님이 기억하시는 눈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시 56:8에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주의 병에 담길 수 있는 눈물, 주님이 기억하시는 애통, 주의 책에 기록될 수 있는 통곡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시편 126편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애통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이요 위로인 것입니다. 우리의 눈물과 애통을 보시고 응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이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애통은 주님을 찾게 하고 위로를 받게 함
애통할 원인이 있다는 것은 시련과 역경과 문제에 직면했을 때를 말한다. 애통의 눈물이 없을 때는 남을 원망하고 형편과 환경을 탓하지만 애통할 수 있을 때에는 주님을 찾는 믿음의 마음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된다. 인생 행로에서 애통하며 살아갈 우리들이 주님의 위로를 받는다면 그것보다 큰 복이 없다. 애통이 크면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도 큰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가 따르는 눈물은 행복한 눈물이다.
애통하신 주님이 우리의 눈물을 기억하심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때 세번 우신 기록이 성경에 있다. 나사로가 죽었을때(요 11:)와 예루살렘 도성의 멸망을 미리 보시고(눅 19:) 우셨으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드리실때(히 5:7)에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다. 애통을 경험하신 주님이 눈물의 기도를 기억하신다. 애통의 눈물을 주님의 병에 담으신다. (시 56:8)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위로 속에서 복된 삶을 누린다.
지난주간에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 나간지 두달 정도 밖에 되지 않은 한 가정을 만났습니다. 지난번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때 두 따님과 두 외손을 잃어버린 아버지와 어머니였습니다. 두 따님 모두 이화여대를 졸업한 수재에다가 큰 따님은 검사 부인이요, 둘째 따님은 큰 회사에 스카우트 되어 불란서에 가서 연수를 받고 돌아온지 얼마 안되었고 곧 결혼할 상대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마음을 누가 감히 이해할 수 있으며 위로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순간순간 눈물을 쏟아내는 그 어머니의 모습은 마음아파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석달 이상을 주야로 애통하여 그 눈에는 눈물이 다 말라버렸을 터인데도 아직도 눈은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여러번 실신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아픈 마음을 오직 주님께서 치유해 주시고 하늘의 위로로 채워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슬픔과 아픔과 애통 속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매일 새벽기도는 말할 것도 없고 틈만 나면 교회 나가서 기도와 찬송으로 주님의 위로를 받으며 절망을 이겨 나간다고 했습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와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호화로운 궁궐에 사는 사람이나 작은 오두막집에 사는 사람이나 모두 수고와 슬픔을 지닌채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가는 곤난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말하기를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 했으며(욥 5:7), 시편 기자는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한다"(시 84:6)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이 없고 눈물없는 세상을 갈망하지만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고 말하지 못하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는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눅 6:21에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애통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펜데오'( )인데 이는 극도의 슬픔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님, 자식, 애인이 죽을때 펜데오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런 극한적인 애통이 복이 있다는 말은 역설적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인간의 애통이 복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 애통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의 삶을 다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통은 사람의 참된 모습을 나타내게 합니다.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는 것은 그가 나약하거나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의 눈물은 결코 불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진실되고 진지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눈물 한방울 없는 삭막한 사람의 모습은 어딘가 진실을 잃었고 참된 자아가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많이 울고 애통하는 사람의 마음은 수정같이 맑은 법입니다.
성경에서 많이 운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의 참된 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복을 주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복함으로 눈물로 침상을 적셨고 베드로는 닭소리를 듣고 통곡함으로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여 위대한 사도의 길을 걸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2:4에서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썼노니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받은 훌륭한 사람들은 모두 그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로 인하여 인격과 믿음을 깨끗케 하였습니다. 진정한 눈물이 없는 사람은 웃음도 없는 것이며 애통함이 없는 사람은 주의 위로도 없을 것입니다. 지도자는 남몰래 눈물을 많이 흘립니다. 그 눈물이 사람을 진실되게 만들어 리더쉽을 발휘하게 합니다.
1940년 5월 13일 영국은 독일의 공격을 받고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때에 윈스턴 처칠경은 전시 내각을 구성하면서 영국 국민들에게 호소했습니다. '내가 바칠 수 있는 것은 피와 눈물과 땀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의 호소를 들은 영국 국민들은 모두 조국애로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독일을 이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눈물은 사람이 흘리는 가장 진한 액체입니다. 우리에게는 때로 슬픔의 눈물이 있고, 때로는 감격의 눈물이 있고, 때로는 회개의 눈물이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눈물이건 간에 눈물이 있는 곳에는 진실이 있는 것이며 그 진실은 우리를 참되게 하고 고상하게 하며 성숙하게 합니다.
그래서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은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심장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따뜻한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이 있으면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인격자가 될 것입니다. 눈물은 그 사람의 진실한 표현입니다. 눈물은 그 사람을 정화시킵니다. 회개의 눈물은 영혼을 깨끗하게 합니다. 참회의 눈물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현대 목회 상담학에서는 우리 사람들의 병든 마음,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하는 데에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눈물은 병든 육체를 치료하며, 상한 마음을 고쳐주며, 더러운 마음을 깨끗이 씻어 줍니다. 그리고 눈물은 타락한 길에서 돌이키게 합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Johann W. Von Goethe)는 '눈물과 더불어 빵을 먹어 본 사람이 아니면 인생의 참뜻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긴급한 문제를 고백하면서 간절히 기도할 때에 눈물의 부르짖음이 있어야 주님의 응답을 신속히 받을 수 있습니다. 깊은 눈물의 기도를 마쳤을때 우리 마음속에는 기쁨과 감격이 가득 차고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와 응답을 경험할 것입니다. 눈물은 추한 인생을 정화시키고 삶의 가치와 깊은 뜻을 깨닫게 합니다. 애통은 죄인을 의인되게 하며 죄사함의 은혜를 입게 합니다. 눈물의 성도들이 많은 교회는 부흥하게 되며 선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애통은 주님을 찾게 하고 거기서 위로를 받게 합니다.
우리는 애통하는 사람을 세상에서 불쌍한 사람으로 여기고 동정합니다. 그러나 애통하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웃어라 그리하면 복이 올 것이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애통하라 그리하면 너희 즐거움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요 16:20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하시면서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점점 이기주의로 흐르고 있습니다. 남의 슬픔과 애통에 대하여 무관심합니다. 도리어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남의 슬픔에 위로할 사람이 없으며 위로한다고 하여도 그 위로는 무기력하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제는 애통하는 부모에게 자식도 찾아오지 않는 각박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되도다 그가 위로를 받을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위로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위로받아야 할 애통하는 민족이었습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수탈당하고, 굶주림에 시달리고, 망국 백성으로서 한을 품고 애통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율법의 멍에 아래서 애통하는 백성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상처 투성이었습니다. 그 많은 상처들로 인해 고통하는 백성들에게 행복을 약속하시면서 위로를 선언하십니다. 골짜기가 깊어야 시냇물이 길게 흘러가듯이 애통하는 자만이 끝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인간은 연약한 갈대입니다. 험악한 인생 행로에 영혼과 육체에 상처가 나고 때때로 작은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꺾어집니다. 성한 사람이 없습니다. 저마다 위로받기를 원하지만 위로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위로의 여호와 하나님이 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편안할 때에도 함께 하시며 만나 주십니다.
그러나 애통할때 더욱 가까이 만나 주십니다. 시편 34:18-19에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며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나 참 좋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슬퍼하고 애통할때 더욱더 좋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인생 행로에서 애통하면서 예수님의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 믿는 사람이 받는 큰 은총입니다. 애통이 크면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도 큽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가난한 자의 복은 애통하는 자의 복에 선행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서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고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만 사모하는 자만이 모든 슬픔과 눈물에서 주님의 위로를 받으며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물질로 위로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 지위로 위로받으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거기서 얻어지는 위로는 진정한 위로가 아닙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아야 참된 위로입니다. 어떤 사람을 주께서 위로하십니까 지쳐서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서러워서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약함을 고백하며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강함과 부함과 힘을 의지하거나 자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위로가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약함과 무능함과 슬픔을 눈물로 고백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위로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가난에 참예한 자 될때 주님의 위로도 넘치는 것입니다. 고후 1:5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고후 1:3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여호와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큰 위로의 손길로 다가서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 좋으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위로와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애통할때 애통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기억하십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셨고 우는 자와 함께 우셨습니다. 신약성경 안에 예수님이 세번이나 우셨다는 기록이 있는데 예수님 자신을 위해 우신 일은 한번도 없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주님이 우셨습니다. (요 11:) 오라비를 잃고 통곡하는 두 누이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사 우셨습니다. 그들의 슬픔에 함께 울어주신 울음입니다.
우리가 슬픔을 당하고 기막힌 애통이 있을때 주님이 함께 울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픔을 당하여 눈물로 간구하는 동안 사랑의 주님은 곁에 오셔서 함께 울어 주십니다. 주님이 동정하시고 주님이 위로하시고 주님이 함께 울어주시는 애통이 있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눅 19:)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배역하는 예루살렘 거민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몇날이 못되어 멸망당하게 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민족과 국가의 암담한 미래를 보신 주님은 우셨습니다. 울어야 할 민족의 지도자들이 울지 않으니 주님이 우신 것입니다. 겉으로는 여호와 하나님 잘 섬기는 예루살렘이지만 안으로는 부패한 그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외식적인 믿음을 보시고 우십니다. 울어야 할 우리가 울지 않는 한 예수님은 우리 대신 울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또한번 우신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셨습니다. (히 5:7) 모든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통곡과 눈물이 없었던들 우리는 멸망받을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애통하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주님께서 이 민족을 위해 눈물을 흘리심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었으며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통곡하심으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애통을 경험하셨기에 애통하는 우리를 기억하시고 도우십니다. 한 많고 슬픔 많은 세상에서 절망의 눈물과 탄식의 눈물이 아니라 주님이 기억하시는 눈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시 56:8에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주의 병에 담길 수 있는 눈물, 주님이 기억하시는 애통, 주의 책에 기록될 수 있는 통곡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시편 126편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애통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이요 위로인 것입니다. 우리의 눈물과 애통을 보시고 응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이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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