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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감사가 넘치는 바울

본문

추수감사절에는 세 가지 정신이 담겨있습니다.
 첫째는 청교도 신앙이고, 둘째는 이웃과의 교제이고, 그리고 셋째는 하나 님께 감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킬 때 바로 이 정신을 이 어받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아무리 열악한 환경 속에 있 다고 할지라도 감사를 잃어버리지 맙시다. 그 동안 베풀어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복에 대해 감사합시다. 그리고 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이웃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 절기는 청교도와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영국에서는 국교회에 대한 개혁으로 청교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1620년 9월 2일 180톤급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배에 남자 72명, 여자 29명, 총 101명이 승선했습니다. 그들은 65일간의 긴 항해 끝에 11월 9일 미국 메사추세츠주 케이프카드만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앞에는 굶주림, 매서운 추위, 사나운 맹수의 습격, 그리고 인디언들의 공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된 것입니다. 그 해 겨울을 보내고 1621년 2월 28일 101명의 청교도 가운데 그동안 50명의 목숨을 잃었습니다. 봄에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도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인디언들이 농사기구를 훔쳐가기도 하고, 콩밭 밀밭을 짓밟아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은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인디언 추장인 마사소이드와 상호협력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이후 그들은 인디언들로부터 옥수수와 밀을 경작하는 법을 배워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 해 가을 그들의 농사는 풍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1주일간 축제를 열었습니다. 1621년 11월 마지막 주 목요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입니다.
 유대인들의 감사절기
여호와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몇 가지 절기를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유월절, 오순절(칠칠절, 맥추절), 나팔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 등입니다. 이러한 절기들은 모두 감사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열 번째 장자 죽음에서 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오순절은 곡식 추수를 감사할 뿐 아니라 시내 산에서 율법을 수여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절기이며 성령이 임함을 감사하는 절기로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팔절은 새해 첫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초막절은 출애굽 이후 광야생활 때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아울러 한 해의 곡식 추수를 마치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처음으로 농사하여 초막을 짓고 가족들과 함께 한 주간을 초막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출애굽한 사건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절기를 지키도록 명하신 것은 은혜를 깨닫고 때를 따라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감사할 줄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어찌 보면 우리 인간의 본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얼마나 많은 날 불평불만을 하였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만큼 많은 은혜와 기적을 체험한 자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애굽의 열 번째 장자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을 받았지요, 홍해를 기적으로 건넜지요,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지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와 보호를 받았지요, 반석에서 생수를 맛보았지요…
….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은혜와 이적을 체험했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여호와 하나님과 주의 종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입만 열면 원망이고 입만 열면 불평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경험한 광야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다 죽도록 하셨겠습니까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감사하지 아니하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또한 감사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큰 은혜와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모두가 다 감사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본문 말씀
빌립보서는 바울의 감사가 담겨있는 편지입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선교를 하면서 빌립보 교회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빌립보서 4:15~16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특히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어려운 처지를 알았던 빌립보 교회는 정성껏 사랑의 성금을 모아 그에게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일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겠습니까 그래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썼던 편지가 빌립보서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로마 감옥에 갇혀있고 설상가상으로 경제적인 궁핍함에 처해있는 바울이 그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바울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누가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단지 빌립보 교회가 보내준 사랑의 성금 때문에 감사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아무리 극한 상황 속에서라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면 감사할 수 있는지를 바울에게서 배우기를 원합니다.
1 바울은 주(主) 안에서 감사했습니다.
본문 10절 "내가 주안에서 기뻐함은…….
우리가 주안에 있어야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어디에 갇혀 있습니까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나는 주안에 있다'는 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환경만 보았다면 그것은 감옥뿐이었을 것입니다. 경제적인 궁핍함뿐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배고프고 굶주리고 헐벗음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에는 여러분을 감싸고 있는 열악한 환경만 보이십니까 열악한 환경에서 감싸여서 조금도 옴짝 달싹하지 못하는 환경에 처했습니까 사업이 잘 안됩니까 하는 일들이 막힙니까 누구를 원망할 만한 어려운 한경에 처했습니까 주님 안에 있음을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 있음을 인정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눈으로 주님 안에 있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환경만 바라보고, 세상만 바라보고, 사람만 바라본다면, 낙심되고 원망스럽고 좌절 내지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는 믿음 없는 행위입니다.
 38년 된 병자
38년 동안이나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때 그는 자신의 처지를 말합니다. 누구하나 자신을 물이 동할 때 못으로 넣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불행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면서 사는 인생입니다. 부모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고 친한 친구도 소용이 없고 사랑하는 부인도 자신에게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바라본다면 그는 원망과 불평속에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신령한 눈으로 예수를 발견하였다고 하면 환한 웃음을 웃으면서 감사하면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탓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눈을 가진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4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있을 때에 비로소 기뻐할 수 있습니다. 환경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어떠한 환경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면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찬455장 1절)
신앙인이 항상 기뻐할 수 있음은 주안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주안에 있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도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 안에 있다면 자신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무릎을 꿇게 하고 자신이 만주의 주가 되고 만왕의 왕이 되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십자가는 모멸감을 면치 못하고 자존심이 구겨지는 일입니다.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외쳤던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이기 때문입니다. 오죽 하였으면 할 수 만 있으면 이 쓴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하지 말고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하였습니다. 이 때 그 십자가는 자신에게 영광이 되었습니다.
2 바울은 자족함으로 감사하였습니다.
본문 11-12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인류의 크나큰 병중의 하나는 '욕심과 탐욕'입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문제들은 대부분 다 욕심이 과해서 생겨나는 것들입니다. 현대인은 만족하고 자족할 줄을 모릅니다. 욕심이란 뭘까요 얼토당토않게 많은 것을 원하는 것만 욕심이 아닙니다. '나에게 조금만 더 있으면……. ' 하는 마음이 바로 욕심입니다. 왜 사람들이 사치하고, 허영에 들뜨고, 향락과 퇴폐에 빠집니까 다 욕심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원망하고 불평합니까 자족할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너무 욕심부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욕심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신앙생활 한다고, 헌신했다고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야 됩니다. 바울은 일평생 자족하는 마음, 만족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풍부에도 궁핍에도 어떠한 형편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6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이익이 되느니라. " 원래 남의 떡이 맛있어 보이고 커보이는 것입니다. 다 욕심 때문입니다. 항상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을 품은 사람이 있습니다. 참 불행한 것입니다.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녀, 내 부모, 내 가정, 내 직장, 내 교회 만족하고 감사하시기를
 행복지수
98년도에 런던정경대학(LSE)이라는 곳에서 어느 나라가 가장 행복한가하는 조사를 한 바 있는데 그 당시에 방글라데시, 아제르바이잔, 나이지리아가 1,2,3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영국의 심리학자 로스웰(Rothwell)과 인생 상담사 코언(Cohen)이 만들어 2002년 발표한 행복공식(즉,행복지수)에서도 1위를 방글라데시가 차지했다고 합니다.
가난한 나라들이 행복지수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이유를 경제학자 레이야드는 두 가지 요인으로 보았습니다.

⑴ 사람들이 너무 쉽게 더 좋은 여건에 적응해 버린다는 사실!!
부채가 있을 때는 선풍기가 아쉬웠는데, 선풍기가 생기니 이번에는 에어컨이 없으면 불만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불행을 느낀다는 것이다.

⑵ 상대적 소득수준!!
하버드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남들이 2만 달러 받을 때 5만 달러 받는 것이 남들이 20만 달러 받을 때 100만 달러 받는 것보다 더 좋다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소득수준이나 경제적 제도가 후진국인 방글라데시 등의 국가의 행복지수가 더 높게 나온 것입니다. 로스웰과 코언이 행복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했는데 아래의 내용들입니다. 이 말은 생존경쟁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소유하고 많아야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비교해서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아야하고 가져야 하고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만 달러 받으면 식구들과 충분히 먹고 살아가는데 다른 사람이 20만 달러 받으면 불행하다는 이야기나 같습니다. 나보다 더 부자로 살고 월급이 많으면 박탈감을 갖는 것이나 동일합니다. 내가 낸 세금으로 내가 받아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받는 것은 박탈감을 갖게 된 불행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살아 있는 동안은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보호자가 됨을 알아 그 안에 사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3 바울에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한다.
본문 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바울은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면 된다. '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여러분! '안 된다, 할 수 없다, 힘들다, 어렵다, 곤란하다' 하면서 주저주저 하는 자가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적극적으로 열심히 사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불평은 대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고, 감사는 열심히 충성하는 사람들이 합니다.
디모데전서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골로새서 1:29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였노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하면 됩니다. 감사도 동일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게 합니다. 인간은 항상 욕심 때문에 감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모습
아이들은 무엇을 주고 달라면 안 줍니다. 조금만 달라고 해도 안 줍니다. 한쪽 손에 10000원 짜리 지폐를 가지고 달라고 하면 그 때에야 줍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나에게서 나가면 손해보는 감정을 가집니다. 그러나 주게 되면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이 있음을 믿을 때 서슴없이 주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맺는 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1세대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 받았지만 그곳에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능력이 부족해서 그들에게 주시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도 여호와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감사하는 자가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반면에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가 가는 곳입니다. 주님은 지옥에 떨어진 자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간다'고 했습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것은 지옥에 가서도 원망하고 불평한다는 의미입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자들이 이 땅에서 감사했겠습니까
원망하고 불평하는 그 버릇 버리지 못하고 지옥에 가서도 여전히 원망하고 불평할 것입니다. 감사해 보십시오. 지옥 같았던 우리의 마음이 천국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지옥 같았던 우리 가정이 천국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온통 천국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감사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감사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시편 50:14 "감사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시편 100:4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
시편 107: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에베소서 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라"
골로새서 3:15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
누가복음 17:11이하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도중 한 조그마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예수님께 소리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 고쳐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그들은 가다가 문둥병이 다 나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만 돌아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사례했습니다. 열 명이 다 큰 은혜를 체험했지만 감사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10%에 불과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 오히려 감사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주님은 감사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왜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주실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서도 감사할 줄 모른다면 이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배은망덕한 행위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여러분, 감사합시다. 어떻게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까

⑴ 주안에서 감사하였습니다.
⑵ 자족함으로 감사하였습니다.
⑶ 여호와 하나님으로 감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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