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사중주 감사
본문
오늘은 일 년을 지켜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감사절을 맞이하여 예배에 참여한 성지가족 모두에게 더 놀라운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회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1950년대 지구촌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필품은 72가였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필수품은 18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의 생필품은 500가지 이상이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필수품도 5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50-60여 년 전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고 감사할까요
오늘날 우리는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문화적 혜택을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먹고 살 것이 없어서 궁색하게 생활하던 몇 십 년 전에 비해서 우리는 엄청난 풍요로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더 메마르고 각박합니다.
영적으로도 더 침체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감사’가 메말랐다는 것입니다.
행복해 지려면 감사에 눈을 떠야 합니다.
많이 가졌다고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감사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감사는 곧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몇 년 전 세계 54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행복 지수를 조사했습니다.
가장 행복한 나라로 예상을 깨고 최빈국인 방글라데시가 뽑혔습니다.
그 뒤를 이어 아제르바이잔이 2위, 나이지리아가 3위였습니다.
반면에 경제 대국이며 최고의 문화시설과 교육환경, 자연환경 등을 두루 갖춘 선진국들인 미국, 스위스. 독일, 캐나다, 일본 등은 40위권 밖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행복 지수는 23위였습니다.
가장 행복 지수가 높은 방글라데시는 어떤 나라입니까
1인당 국민소득 200달러요, 인구 밀도는 세계 1위입니다.
문맹률이 90%가 넘고, 매년 홍수로 국토의 80%이상이 물에 잠깁니다.
천연자연도 없고, 교육 시설이나 의료시설은 열악하기 그지없습니다.
사회는 양극화 되어있고, 뇌물과 부정부패가 만연한 나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할 직장도 없고, 공부할 학교도 없고, 아파도 찾아갈 병원조차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비록 환경적으로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작은 것에 감사하며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과 이웃들 간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통해 행복의 끈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진국 국민들은 소득이 상승해도 더 이상 개인의 행복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도 상대적 빈곤에 불행하게 여깁니다.
가족 간에 유대감이 사라지고, 사회에서는 끊임없는 경쟁구조 속에 시달립니다.
군중 속에 고독을 느끼며, 외롭고 쓸쓸하게 삽니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는 소득이 조금만 나아져도 삶의 질에 큰 영향을 줍니다.
가족 간에 동질감이 강하고, 어려울수록 서로 돕고, 협력하는 관계를 맺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는 불행하게 보여도 자신들은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이처럼 행복 지수는 객관적인 조건이나 지표보다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주관적인 태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소유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에 비례합니다.
행복은 없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 자족하는 것입니다.
이미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래서 칼 힐티는 그의 행복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하라. 그러면 젊어진다. 감사하라. 그러면 발전이 있다. 감사하라. 그러면 기쁨이 있다. ”
지극히 작은 일에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지수가 높습니다.
사람은 행복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일시적인 감사가 아니라 평생감사를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요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주님께서 보여주신 ‘감사의 4중주’를 함께 듣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있는 것을 감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없는 것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가지고 감사를 드리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십시오.
벧세다 들녘에서 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식사 시간이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 식사를 제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음식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6:5)
그러자 제자인 빌립은 ‘이백데나리온’의 돈이 있어도 부족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안드레가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는 것을 보고합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그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태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을 듣자마자 사람들을 질서정연하게 자리에 앉게 합니다.
비록 너무나 작은 음식이지만 예수님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가지고 오게 합니다.
“혹시 더 없느냐” “다른 것을 가진 사람은 없느냐” 묻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작음 음식이지만 감사의 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 나누어 주라고 명하십니다.
그 결과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무려 5천명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만 보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주신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남과 비교하다가 불행합니다.
우리는 비교의식과 열등감 때문에, 더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걱정과 염려 때문에 감사를 잃어버립니다.
모차르트의 일생을 다룬 ‘아마데우스’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비교의식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가를 봅니다.
살리에리는 당시의 최고의 음악가입니다.
모차르트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행복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모차르트와 자신의 음악을 비교하면서 그의 인생은 불행의 늪으로 빠집니다.
그를 화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은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온 힘을 다해 작곡을 해도 사람들이 기억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여자들과 어울려 놀 것 다 놀면서도 자투리 시간에 취미삼아 작곡하는 것 같은데 그의 음악은 불후의 명작이 됩니다.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꿰뚫어보는 안목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왜 저에게는 천재를 알아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모차르트와 같이 천재적인 작곡 능력은 주시지 않았습니까”
결국 비교의식과 열등감이 그의 인생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비교를 통해서 시기심의 노예로 전락시켜버립니다.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가난에서 오는 슬픔도, 실패에서 오는 고통이 아닙니다.
재능이 모자라서,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가장 큰 비참은 ‘비교’로부터 옵니다.
비교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난 너무 못 생겼고, 뚱뚱하고, 키도 작고, 머리도 좋지 않고, 좋은 대학을 나오지도 못했고, 집안 배경도 좋지 않고, 남들처럼 돈도 없고.....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것들은 모두 남과 비교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열등감의 열매들입니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남과 비교하는 탁월한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교의식에 사로잡힐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나의 사랑받는 자녀이며, 내가 만든 최고의 걸작품이다. ”
옆에 계신 분을 이렇게 축복합니다.
“당신은 사랑받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당신은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
“내가 보기에도 당신은 정말 멋지십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마귀에게 속지 마십시오.
이미 내게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없는 것을 찾지 말고, 이미 주신 삶 속에서 자족하며 감사하십시오.
이미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 더 놀라운 오병이어의 기적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실패 속에서도 감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삶이 항상 성공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삶 가운데 느끼는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십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시며 생명의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전도한다고 해서 다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전도하다가 낙심한 분이 계십니까
용기를 내십시오. 위로를 받으십시오.
예수님도 전도에 실패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심혈을 기울여 동족인 유대인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며 핍박합니다.
그들을 책망하고, 탄식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마11:21)
그러나 이런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감사를 잃지 않습니다.
마태복음11장 25-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
비록 동족인 유대인 어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아이들은 받아들입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척 하는 유대인들은 거부해서 가슴 아팠지만 부스러기 은혜로 아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 감사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며, 모든 결과도 아버지의 뜻으로 인정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때로 우리는 실패를 경험하고,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서 분노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실패 속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더 놀라운 뜻이 담겨 있음을 기대하며 감사하십시오.
그 속에서 주님은 갑절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미국 오하이오 주 신시네티에 프록터 갬블 비누회사가 있습니다.
프록터 사장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신실한 신앙인으로 회사가 어려울 때도 원망 불평하지 않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한번은 직원이 실수하는 바람에 엉뚱한 비누가 생산되어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부서 책임자는 담당 직원을 심하게 질책했고, 직원은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회사가 큰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프록터 사장은 흥분하거나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분명 무엇인가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 비누를 잘 연구해 보았더니 가벼운 것이 특징입니다.
잘못 만들어진 비누인데 물에 넣으니 물에 둥둥 뜨는 것입니다.
“아! 비누가 물위에 뜨는구나! 물에 뜨는 비누! 멋있다. ”
그래서 그는 그 상품을 버리지 않고 시장에 팔았습니다. 그런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것이 세계적인 아이보리 비누입니다.
그렇습니다. 실패의 자리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감사로 영광 돌리는 사람, 그에게 바로 더 놀라운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슬픔의 자리에서도 감사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감사하십니다.
주님은 너무 바쁘셔서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서야 무덤에 도착하십니다.
이미 나사로의 몸에는 냄새가 납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너무 안타까워하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사람들에게 죽음은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절망을 의미합니다.
슬픔과 애통이 가득한 자리에서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으로 나아가 “돌을 옮겨 놓으라”(요11:39) 말씀하시고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요11:41)
예수님은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먼저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뜻밖의 기도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생명을 나사로를 통해서 이미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죽음 앞에서도 찬송을 부르며 예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예배는 슬픔의 예배가 아니라 천국환송예배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도 원치 않는 슬픔의 파도가 밀려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과 고통이 엄습합니다.
그때 우리는 마르다 자매처럼 ‘주님께서 일찍 오셨다면 죽지 않았을텐데.. ’ 하면서 원망하거나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슬픔 너머에 계시는 주님의 환희와 감격을 기대하며 감사해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 주님은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슬픔 속에서도 감사하며 주님께 나아갈 때 어둠을 빛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환희로 만들어 가시는 부활의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도 감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아시고, 여러 번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알지만 정말 내가 15시간이 지난 후면 죽는다는 것을 안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그것도 잔인무도하게 사람을 죽인 사형수나 황제를 모독한 정치범들이 달려 죽는 십자가에서 가장 처참하게 죽는 다는 것을 안다면 과연 감사가 나올 수 있을까요
아마 사형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질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음 앞에서는 두려움에 만감이 교차하여 밤새도록 기도하십니다.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 야고고,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에 오르시면서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십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나의 뜻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라고 간구합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셨든지 모세혈관이 파괴되어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죽음을 바로 앞둔 최후의 만찬에서 이렇게 감사하십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막14:22-23절)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십니다.
“이는 내 몸이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피다. 받아 마셔라. ”
주님은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 앞에서도 당신의 몸을 온전히 우리에게 주시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감사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영생의 소망,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마지막 몸을 십자가에 찢으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는데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 가운데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요
주님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자신의 유익과 욕심을 위해 십자가를 이용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주님의 구원의 십자가를 감사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가슴 깊은 곳에서 이런 찬양이 흘러야 나와야 합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참 믿음의 눈이 뜨여질 때 우리는 참 기쁨을 회복할 수 있고, 진정한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은 감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면 더 큰 것을 얻습니다.
부족할 때 감사하면 더 넘치는 복을 받습니다.
고통 중에 감사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형통케 하셨을 때 감사하면 그 복을 오랫동안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감사의 씨앗을 심는 사람만이 더 큰 감사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 믿음의 법칙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뒷북 감사가 아니라 미리 감사하십시오.
무엇을 주시면(If) 감사하는 일차원의 감사가 아닙니다.
무엇을 주셨기 때문에(Because)의 이차원적 감사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삼차원의 감사가 필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 않았어도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예배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움직일 수 있는 건강 주셨음을 감사하십시오.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 더 놀라운 감사의 기적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감사절에만 드리는 일시적인 감사가 평생을 감사로 곱게 물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이 보여주신 4중주의 감사가 우리 삶 가운데 항상 연주되어서, 주님과 함께 춤을 추며 기뻐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감사절을 맞이하여 예배에 참여한 성지가족 모두에게 더 놀라운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회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1950년대 지구촌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필품은 72가였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필수품은 18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의 생필품은 500가지 이상이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필수품도 5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50-60여 년 전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고 감사할까요
오늘날 우리는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문화적 혜택을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먹고 살 것이 없어서 궁색하게 생활하던 몇 십 년 전에 비해서 우리는 엄청난 풍요로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더 메마르고 각박합니다.
영적으로도 더 침체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감사’가 메말랐다는 것입니다.
행복해 지려면 감사에 눈을 떠야 합니다.
많이 가졌다고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감사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감사는 곧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몇 년 전 세계 54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행복 지수를 조사했습니다.
가장 행복한 나라로 예상을 깨고 최빈국인 방글라데시가 뽑혔습니다.
그 뒤를 이어 아제르바이잔이 2위, 나이지리아가 3위였습니다.
반면에 경제 대국이며 최고의 문화시설과 교육환경, 자연환경 등을 두루 갖춘 선진국들인 미국, 스위스. 독일, 캐나다, 일본 등은 40위권 밖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행복 지수는 23위였습니다.
가장 행복 지수가 높은 방글라데시는 어떤 나라입니까
1인당 국민소득 200달러요, 인구 밀도는 세계 1위입니다.
문맹률이 90%가 넘고, 매년 홍수로 국토의 80%이상이 물에 잠깁니다.
천연자연도 없고, 교육 시설이나 의료시설은 열악하기 그지없습니다.
사회는 양극화 되어있고, 뇌물과 부정부패가 만연한 나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할 직장도 없고, 공부할 학교도 없고, 아파도 찾아갈 병원조차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비록 환경적으로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작은 것에 감사하며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과 이웃들 간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통해 행복의 끈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진국 국민들은 소득이 상승해도 더 이상 개인의 행복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도 상대적 빈곤에 불행하게 여깁니다.
가족 간에 유대감이 사라지고, 사회에서는 끊임없는 경쟁구조 속에 시달립니다.
군중 속에 고독을 느끼며, 외롭고 쓸쓸하게 삽니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는 소득이 조금만 나아져도 삶의 질에 큰 영향을 줍니다.
가족 간에 동질감이 강하고, 어려울수록 서로 돕고, 협력하는 관계를 맺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는 불행하게 보여도 자신들은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이처럼 행복 지수는 객관적인 조건이나 지표보다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주관적인 태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소유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에 비례합니다.
행복은 없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 자족하는 것입니다.
이미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래서 칼 힐티는 그의 행복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하라. 그러면 젊어진다. 감사하라. 그러면 발전이 있다. 감사하라. 그러면 기쁨이 있다. ”
지극히 작은 일에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지수가 높습니다.
사람은 행복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일시적인 감사가 아니라 평생감사를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요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주님께서 보여주신 ‘감사의 4중주’를 함께 듣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있는 것을 감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없는 것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가지고 감사를 드리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십시오.
벧세다 들녘에서 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식사 시간이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 식사를 제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음식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6:5)
그러자 제자인 빌립은 ‘이백데나리온’의 돈이 있어도 부족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안드레가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는 것을 보고합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그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태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을 듣자마자 사람들을 질서정연하게 자리에 앉게 합니다.
비록 너무나 작은 음식이지만 예수님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가지고 오게 합니다.
“혹시 더 없느냐” “다른 것을 가진 사람은 없느냐” 묻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작음 음식이지만 감사의 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 나누어 주라고 명하십니다.
그 결과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무려 5천명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만 보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주신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남과 비교하다가 불행합니다.
우리는 비교의식과 열등감 때문에, 더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걱정과 염려 때문에 감사를 잃어버립니다.
모차르트의 일생을 다룬 ‘아마데우스’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비교의식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가를 봅니다.
살리에리는 당시의 최고의 음악가입니다.
모차르트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행복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모차르트와 자신의 음악을 비교하면서 그의 인생은 불행의 늪으로 빠집니다.
그를 화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은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온 힘을 다해 작곡을 해도 사람들이 기억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여자들과 어울려 놀 것 다 놀면서도 자투리 시간에 취미삼아 작곡하는 것 같은데 그의 음악은 불후의 명작이 됩니다.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꿰뚫어보는 안목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왜 저에게는 천재를 알아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모차르트와 같이 천재적인 작곡 능력은 주시지 않았습니까”
결국 비교의식과 열등감이 그의 인생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비교를 통해서 시기심의 노예로 전락시켜버립니다.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가난에서 오는 슬픔도, 실패에서 오는 고통이 아닙니다.
재능이 모자라서,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가장 큰 비참은 ‘비교’로부터 옵니다.
비교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난 너무 못 생겼고, 뚱뚱하고, 키도 작고, 머리도 좋지 않고, 좋은 대학을 나오지도 못했고, 집안 배경도 좋지 않고, 남들처럼 돈도 없고.....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것들은 모두 남과 비교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열등감의 열매들입니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남과 비교하는 탁월한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교의식에 사로잡힐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나의 사랑받는 자녀이며, 내가 만든 최고의 걸작품이다. ”
옆에 계신 분을 이렇게 축복합니다.
“당신은 사랑받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당신은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
“내가 보기에도 당신은 정말 멋지십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마귀에게 속지 마십시오.
이미 내게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없는 것을 찾지 말고, 이미 주신 삶 속에서 자족하며 감사하십시오.
이미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 더 놀라운 오병이어의 기적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실패 속에서도 감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삶이 항상 성공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삶 가운데 느끼는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십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시며 생명의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전도한다고 해서 다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전도하다가 낙심한 분이 계십니까
용기를 내십시오. 위로를 받으십시오.
예수님도 전도에 실패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심혈을 기울여 동족인 유대인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며 핍박합니다.
그들을 책망하고, 탄식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마11:21)
그러나 이런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감사를 잃지 않습니다.
마태복음11장 25-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
비록 동족인 유대인 어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아이들은 받아들입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척 하는 유대인들은 거부해서 가슴 아팠지만 부스러기 은혜로 아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 감사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며, 모든 결과도 아버지의 뜻으로 인정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때로 우리는 실패를 경험하고,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서 분노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실패 속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더 놀라운 뜻이 담겨 있음을 기대하며 감사하십시오.
그 속에서 주님은 갑절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미국 오하이오 주 신시네티에 프록터 갬블 비누회사가 있습니다.
프록터 사장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신실한 신앙인으로 회사가 어려울 때도 원망 불평하지 않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한번은 직원이 실수하는 바람에 엉뚱한 비누가 생산되어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부서 책임자는 담당 직원을 심하게 질책했고, 직원은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회사가 큰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프록터 사장은 흥분하거나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분명 무엇인가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 비누를 잘 연구해 보았더니 가벼운 것이 특징입니다.
잘못 만들어진 비누인데 물에 넣으니 물에 둥둥 뜨는 것입니다.
“아! 비누가 물위에 뜨는구나! 물에 뜨는 비누! 멋있다. ”
그래서 그는 그 상품을 버리지 않고 시장에 팔았습니다. 그런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것이 세계적인 아이보리 비누입니다.
그렇습니다. 실패의 자리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감사로 영광 돌리는 사람, 그에게 바로 더 놀라운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슬픔의 자리에서도 감사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감사하십니다.
주님은 너무 바쁘셔서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서야 무덤에 도착하십니다.
이미 나사로의 몸에는 냄새가 납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너무 안타까워하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사람들에게 죽음은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절망을 의미합니다.
슬픔과 애통이 가득한 자리에서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으로 나아가 “돌을 옮겨 놓으라”(요11:39) 말씀하시고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요11:41)
예수님은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먼저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뜻밖의 기도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생명을 나사로를 통해서 이미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죽음 앞에서도 찬송을 부르며 예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예배는 슬픔의 예배가 아니라 천국환송예배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도 원치 않는 슬픔의 파도가 밀려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과 고통이 엄습합니다.
그때 우리는 마르다 자매처럼 ‘주님께서 일찍 오셨다면 죽지 않았을텐데.. ’ 하면서 원망하거나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슬픔 너머에 계시는 주님의 환희와 감격을 기대하며 감사해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 주님은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슬픔 속에서도 감사하며 주님께 나아갈 때 어둠을 빛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환희로 만들어 가시는 부활의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도 감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아시고, 여러 번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알지만 정말 내가 15시간이 지난 후면 죽는다는 것을 안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그것도 잔인무도하게 사람을 죽인 사형수나 황제를 모독한 정치범들이 달려 죽는 십자가에서 가장 처참하게 죽는 다는 것을 안다면 과연 감사가 나올 수 있을까요
아마 사형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질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음 앞에서는 두려움에 만감이 교차하여 밤새도록 기도하십니다.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 야고고,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에 오르시면서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십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나의 뜻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라고 간구합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셨든지 모세혈관이 파괴되어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죽음을 바로 앞둔 최후의 만찬에서 이렇게 감사하십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막14:22-23절)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십니다.
“이는 내 몸이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피다. 받아 마셔라. ”
주님은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 앞에서도 당신의 몸을 온전히 우리에게 주시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감사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영생의 소망,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마지막 몸을 십자가에 찢으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는데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 가운데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요
주님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자신의 유익과 욕심을 위해 십자가를 이용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주님의 구원의 십자가를 감사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가슴 깊은 곳에서 이런 찬양이 흘러야 나와야 합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참 믿음의 눈이 뜨여질 때 우리는 참 기쁨을 회복할 수 있고, 진정한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은 감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면 더 큰 것을 얻습니다.
부족할 때 감사하면 더 넘치는 복을 받습니다.
고통 중에 감사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형통케 하셨을 때 감사하면 그 복을 오랫동안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감사의 씨앗을 심는 사람만이 더 큰 감사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 믿음의 법칙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뒷북 감사가 아니라 미리 감사하십시오.
무엇을 주시면(If) 감사하는 일차원의 감사가 아닙니다.
무엇을 주셨기 때문에(Because)의 이차원적 감사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삼차원의 감사가 필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 않았어도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예배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움직일 수 있는 건강 주셨음을 감사하십시오.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 더 놀라운 감사의 기적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감사절에만 드리는 일시적인 감사가 평생을 감사로 곱게 물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이 보여주신 4중주의 감사가 우리 삶 가운데 항상 연주되어서, 주님과 함께 춤을 추며 기뻐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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