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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감사의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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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 말씀을 증거하면서 저는 우리의 삶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환경의 변화나 다른 사람의 변화에 의하여 찾아오는 것이 아닌 나의 "마음가짐의 변화", "인격의 변화" 그리고 근본적으로 "심령의 변화"에서 출발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나 자신의 마음자세와 영성이 새로워질 때, 진정한 변화를 체험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환경으로 인하여 감사하게 되고, 주변의 사람들로 인하여 감사하게 된다면, 우리 가운데는 여전히 감사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진정한 감사 역시 나 자신의 마음자세와 영성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즉 진정한 감사는 '감사의 조건'을 환경에서 찾고자 하는데서 올라서야 합니다.
반드시 나에게 유익이 되고, 만족스러움이 있어야 감사가 아니라 비록 세상기준으로 '잘되는 것'이 보이질 않는다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과 영이 새로워지면, "모든 일에 감사" 할 줄 아는 높은 차원의 신앙을 유지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초월적 감사"라고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하고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기가 막힌 경험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의 길을 열어주셨고, 대적을 멸절 시키셨습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르광야로 들어가 거기서 3일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라'라는 곳에 당도하였습니다.
긴 여정에 지치고 목마른데 마라에서 '물'을 발견한 그들은 주저 없이 달려가 그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 물은 너무 써서 마시질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젠 살았다'하고 달려가 마신 물을 너무 써서 마실 수 없게 되자 "실망"을 넘어 "절망감"까지 느끼게 됩니다.
유일한 희망, 자신들의 갈증을 해결할 줄로 기대하였던 환경이 '마라'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절망으로,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긍정이 부정으로, 감사는 불평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를 내고 불평하면서 원망을 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그것은 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고, 그 물이 써서 마시기에 적당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일상에서 느끼는 '불평'은 자신의 기대치에 충족되지 못한 실망감과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은 환경 때문에 시작됩니다.
사실, 바로 며칠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놀라운 일을 생각하면 지금 내가 기대하는 것이 불발로 끝났다고 하여도 이건 하찮은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 원망의 근원에는 이런 사고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모세, 당신이 우리를 여기로 인도하였으니 당연히 마실 물 정도는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 "
이 원망은 궁극적으로 그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눌림과 억압의 자리에서 구원받고, 해방되었다는 "사실"보다는 그 이후에 지금 당장 이 '목마름'을 해결하게 할 물이 없다는 "환경"이 더 크게 보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은혜, 구원이라고 하는 명백한 사실이 우리가 당하고 있는 현실보다 항상 더 크게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감사"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현실을 두고도 '불평하는 자'가 있고, '감사하는 이'가 있게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둘 중 누가 행복한 사람, 행복을 아는 사람이겠습니까
나의 사고의 중심에 항상 내가 받은 구원, 너무나 확실한 구원이 자리한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로 살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억상실증상'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바로 며칠 전에 목격한 이적과 생생한 간증들이 오늘 나의 갈증 때문에 곧 바로 '감사'에서 '불평'으로 바뀐 건, 분명 심각한 기억상실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이 기억상실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지금의 삶이 힘들다고 느끼신다 거나 자꾸 낙심이 되거나,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불평이 쏟아져 나오는
분이 계십니까 마음에서 자꾸 평안을 빼앗기는 분이 계시는가. 이건 분명 기억상실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기억한다면
'기도하는 자리'부터 찾으시길 바랍니다. 받은 은혜를 다 쏟아 버리셨다면 '은혜 받는 자리'부터 찾으시길 바랍니다. 예전엔 힘들어도 감사가 있고, 입숙에 찬양이 있었는데 지금은 감사도 찬양도 사라졌다면 지금 나에겐 뭔가 정말 소중한 것에 대한 망각현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현실에 대한 실망은 혹시 나 자신의 욕망에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 때문은 아닌가 점검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욕심은 죄를 잉태합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감사가 소멸된 인격에서는 원망밖에는 나올 것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은 "사실"보다는 지금 쓴물을 맛 본
"현실"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쓴물을 만나고 있는 이 길도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살려내신 길임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내가 만들어 둔 욕심의 굴레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 갇혀서 그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잊고 불평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내 자리가 어둡고 외롭고 힘들다고 원망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내 삶의 현실 앞에 감사함으로 마주서야 합니다.
없는 것 안 되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래도 내가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을 보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2003년 7월 서울 영등포역에서는 어떤 어머니가 아이들 여럿을 데리고 부산행 새마을호를 타려하고 있었습니다. 아이중 하나가 플랫홈으로 들어오는 기차 길에 떨어졌을 때 역무원 김행균씨는 반사적으로 아이에게 뛰어들어 아이를 건지고 자신은 기차에 두 다리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합니다. 문제는 이 장면을 목격한 아이의 엄마가 자기 아이를 데리고 얼른 기차에 오르고 기차는 출발을 했다는 것입니다.
기차가 부산역에 당도하도록 차내 방송은 이 어린이와 엄마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당시에 김행균 역무원의 의로운 행동에 감동한 만큼이나 나 몰라 라 한 그 아이의 엄마를 질타했습니다. 하지만 김행균씨는 자신은 "그 아이와 엄마가 나타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 엄마가 이기적이거나 비겁하다거나 무책임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어디선가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
감사를 모르는 사회에 거꾸로 희생과 더불어 넉넉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감싸주는 그 인격이 더 아름답습니다. 왜 그 엄마는 찾아와서 감사할 줄을 몰랐을까요. 너무나 엄청난 일이 벌어져서 사회적 시선을 받는 것이 몹시 부담스러웠을까 지금도 얼마나 가책을 느끼며
지내고 있을까요 여러분 감사할 줄 아는 것도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굴뚝같은데 선뜻 감사의 말도 감사의 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제대로 된 감사가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 라고 말하는 것은 그다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문화, 체면위주의 문화는 "꼭 말로 해야 아나, 마음만 있으면 그만이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바벨론 포로가 된 다니엘이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음모로 인하여 사자 굴에 던지 우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었기에 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질 것을 알고도 기도 하였는데, 그이 기도에는 감사가 들어 있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 하였더라"(단6:10) 무엇을 감사하였을까 기도하는 자는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법이 제정된 현실 속에서 그는 기도하며 감사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감사는 지금의 상황에 의하여 줄어들지 않는 감사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주로 보시고 살아감에 대한 근본적 감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그림자가 드리워도 그의 감사는 결코 위축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라’의 현장은 분명 어두움의 현실, 실망과 좌절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는 인간의 탐욕과 기대가 좌절된 ‘쓰디쓴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마라의 현장에서 감사의 자리로 나아와야만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인생의 마라의 쓴물 앞에서 낙망하고 실망하고 불평하는 분이 계십니까.
어찌하여 어기서는 감사 할 수 없게 되었는가…….
이 현실의 물이 감당할 수 없는 쓴물이기 때문인가.
감사의 출발점은 ‘내 삶의 만족’ 이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의 출발점은 “그래도 지금 주님은 나와 함께 계십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출발점에는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고, ‘사랑’이 있고, ‘주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어디든 가겠습니다. 감사함으로 더 견디겠습니다. ’하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 여러분의 심령 속에 뜨거운 감사를 가득 채우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주님은 나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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