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진정한 행복
본문
오늘은 추석날입니다. 이런 명절에는 누구나 복을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은 거의 사라진 풍속이지만 예전이면 추석 때 보름달에게 연신 절하면서 복을 비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아직도 추석날 성묘 가서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제사지내면서 복을 달라고 하는 분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신문에 보니까, 요즈음은 제사 풍속도 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제사 음식도 차리기 귀찮기 때문에 ‘다례원’ ‘홍동백서’ 등 차례상을 대신 차려주는 업체들에게 20만원 정도만 주면 밥만 빼고 음식과 향, 양초까지 준비해준다고 하는데 이러한 ‘홈쇼핑 차례상’은 주문이 밀려 배달이 늦어질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과연 조상들이 잡수신다고 믿고 있다면 정성이 빠진 제사상을 받고 얼마나 황당해 하실까요?
더 한심한 이야기는,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어차피 차례 후 우리가 먹을 음식인데 피자나 스파게티처럼 좋아하는 음식을 올리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별로 각자 입맛대로 스테이크, 만두, 갈비 등을 만들어 와서 제사를 지낸 후에 나눠 먹는다고 합니다. 제 나이 또래만 해도 피자나 스파게티가 버터 냄새 때문에 입에 맞지 않는데 돌아가신 조상들이 그런 음식을 받고 어떠실까요?
여하튼 열심히 제사를 지내는 것도 자기들이 복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갖가지 수고와 고독, 수치를 이겨 내며 땀 흘려 수고해 마지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 서점에서나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은 행복에 관해서 쓴 책이라고 합니다. 마치 여름날에 불 나방이들이 불을 항해 몰려드는 것처럼 너나없이 행복을 향해 날개를 퍼덕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행복을 찾았다는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고 불행하다는 자들만 가득 차니 과연 참다운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부쉬의 훌륭한 시 가운데 행복은 저 산 너머 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분이 달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왜 달리고 있는가?” “나는 행복을 찾기 위하여 달리고 있다. 행복은 저 산 너머 있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힘을 내서 찾아 가보니 흰 말뚝이 있는데 그 곳에 「행복은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산 너머 있다. 」고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또 힘을 내서 달려가 보니까 또 말뚝 하나가 있는데 거기 기록은「행복은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산 너머 있다. 」고 했습니다. 그래서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나중에는 행복이란 없고 흰 말뚝마저 보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늙었기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참다운 행복은 어떻게 찾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에서 배우고자 합니다.
1. 탕자의 불행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왜 탕자는 불행을 만났을까? 왜 낙망과 실패를 당한 후에 돼지 울 옆에서 쥐엄나무 열매를 먹는 비참한 꼴을 당하게 되었습니까?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방종의 자유를 곧 행복이라고 착각한 데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 밑에서 살 때에 자기는 언제나 매여 지낸다고 생각하고 불만이 많았습니다. 아버지가 잔소리를 하고 어느 때는 야단을 칠 때에도 전부 자기를 얽어매는 속박의 율례로 생각했습니다.
그저 한번 마음껏 자기가 계획하고 자기의 힘으로 땀 흘려 사업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아무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심한 말다툼으로 유산을 타 가지고 속박의 집을 벗어나 무한한 자유가 펼치어 있는 세상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는 곧 행복의 나날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남은 결과는 불행의 잿더미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불행은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사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데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그러한 방종적인 자유를 가지기를 간절히 희구하고 있고 또 그러한 자유로움을 누리기 위해 과감히 자기를 속박하는 일상적 사슬로부터 탈출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신자들 중에도 그러한 분이 많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교사와 찬양대로 열심히 봉사하다가 왜인지 싫증이 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면서 지내니까 나중에는 심한 피로감에 휩싸입니다. 교회가 율례적인 사슬로 느끼어 집니다. 설교도 싫어지기 시작하고 무슨 부장이나 구역장의 간섭도 싫어집니다. 좁은 길의 폐쇄성이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어느 날 멀리 이사를 가서 큰 교회에 출석하면서 등록도 안합니다.
주일 아침 예배만 드리고 식구들과 야구장도 가고 낚시터도 갑니다. 멀리 야외에 나가서 음식을 끓여 먹으며 지내다 오니 거기가 비로소 천국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넓은 길이 이렇게 훤하게 펼쳐 있음에도 굳이 좁은 길을 고집했던 자기 과거의 삶이 후회스럽습니다. 그러나 착각입니다. 육신은 편안할지 모르나 날로 짓눌러 오는 영적인 압박감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양심의 가책을 잊기 위해 더 오락이나 다른 일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어느 날부터 이상하게 사업도 흔들리고 그렇게 순종적이던 자녀들조차도 반항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탕자가 경험했던 내려가는 길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결국 그 길의 끝에 와서 쓰디쓴 쥐엄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후회할 때는 이미 많은 것을 잃은 다음입니다.
아무 간섭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권력자 비스마르크는 말하기를 ‘나의 일생 동안 행복을 느낀 때는 불과 24시간뿐이었노라’고 실토했고, 방랑의 시인으로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시인 이태백은 잔을 들어 술을 마시면서 ‘근심은 더욱 깊어만 간다. ’고 탄식했습니다. 좁은 길에서 벗어나 넓은 길에서 아무 간섭 없이 마음껏 자유롭게 사는 것은 육신적인 쾌감은 있으나 영적인 깊은 불안에 매이기 시작합니다.
(2)탕자의 불행은 물질의 풍족함이 행복이라 착각한 데 있습니다.
탕자는 언제나 아버지에게 용돈이나 필요한 돈을 타다 쓰는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탕자는 나름대로 인정도 많고 배포가 컸기 때문에 친구들을 만나면 언제나 앞장서서 돈을 썼기에 아버지가 주는 부스러기 돈으로는 도무지 성에 안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주력하는 농사에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부자임에도 농사만 지을 뿐 새로운 신종 사업에 투자를 못합니다.
몇 번 말씀을 드렸어도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 ’는 식의 대답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너무나 고리 타분합니다. 자기 생각에는 돈만 있으면 떼돈을 벌 신종 사업이 널리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돈만 벌 줄 알았지 쓸 줄 모르는 구두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택도 현대식으로 더 멋지게 리모델링 할 수 있을 터인데, 구식만 고집하니 너무나 불편합니다.
만약 자기가 돈만 풍부히 있다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며 행복을 만끽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큰 결심을 하고 아버지에게 들어가서 강권적으로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저도 이제 성장했으니 독립을 하고자 합니다. 내가 이러한 사업을 하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내게 물려 줄 유산을 주시는 셈치고 지금 주시면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라고 간청했습니다.
당시는 차남은 유산의 3분지 1을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모 살아생전에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날마다 와서 조르기를 여러 날 합니다. 할 수 없이 유산에 해당한 살림을 나누어주었습니다. 탕자는 천하를 잡은 듯이 우쭐거리며 큰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먼 곳으로 떠났습니다. 남은 결과는 빈털터리로 큰불행한 자가 되었습니다.
행복은 결코 물질이 풍부한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질이 많을수록 더 많은 근심이 자기를 찌르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담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 철학가 F. 베이컨은 ‘돈은 최선의 종이요, 최악의 주인이다. ’고 했습니다.
일본 유원미길(有原末吉)이 쓴 「교훈예화사전」에는 이런 예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큰 부자 상인의 건물에 한 가난한 신발 수선공이 세 들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돈이 많은 부자는 언제나 많은 돈을 세고 살면서 밤이면 재산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두 수선공은 아주 가난해도 무엇이 즐거운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래를 부르며 삽니다. 부자는 은근히 부화가 치밉니다.
그래서 친구의 충고에 따라 구두 수선공에게 제법 큰 돈을 주었습니다. 구두 수선공은 그것을 받고 나서 근심에 싸이기 시작 합니다. ‘이것을 누구한테도 보여 주어서는 안 된다. 보면 누구나 훔치려고 할거야. 아내한태도 비밀로 해야지. ’라고 했습니다. 돈이 많아진 다음 수선공은 사람들을 피합니다. 아내조차도 보기 싫습니다. 오직 돈에만 마음이 가 있습니다.
그러니 일에도 재미가 없고 옛날처럼 노래도 부를 수가 없습니다. 아내가 “당신은 왜 갑자기 변했습니까?”라고 계속 따지자 수선공은 할 수 없이 실토를 했습니다. 아내는 울면서 “우리는 그 돈이 있기 전에는 행복했습니다. 공짜로 생긴 그 돈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즉시 그 돈을 돌려주세요. 그러면 다시 행복해질 것입니다. ”라고 호소합니다.
구두 수선공은 큰 결심을 하고 그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구두 수선공의 노랫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돈만 많으면 행복해 질 것이라는 착각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3)탕자의 불행은 향락을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고 착각한 데 있습니다.
탕자는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가 갔습니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주변 사람들이나 거래처 사람들, 혹은 관청 사람들과 교제하기 위해서 향연을 베풉니다. 돈이 많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산해진미를 차리고 그 도시에서 이름난 기생들을 불러다가 먹고 마시고 춤춥니다. 돈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특히 온갖 브로커들이 모여들어 유망한 사업이라고 소개하면서 당장 떼돈을 벌 것처럼 떠벌립니다. 아무 경험이 없는 이 청년은 쉽게 유혹에 넘어가 목돈을 댑니다. 그러면서 밤마다 온갖 친구들과 잔치를 벌입니다. 온갖 미인들이 다가와 갖은 애교를 부립니다. 관청 사람들도 굽실굽실 거립니다. 천하가 내 손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속음이요 망함이요, 뜨내기 친구나 일회용 애인들로부터의 배신뿐이었습니다. 도트 티하메르는 말하기를 ‘저속한 향락에서 행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쓴 맛만 가져올 뿐이다. ’라 했고, 파우스트는 말하기를 ‘향락은 우리를 비천하게 한다. ’고 했습니다. 땀 흘려 수고한 후에 가지는 휴식이나 오락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나 전혀 땀 흘리지 않고 향락만 추구하는 것은 불행의 늪으로 빠지게 할뿐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오늘 이 설교를 듣는 분 중에는 돈을 많이 벌어서 미인과 결혼해서 고급 아파트와 최고급의 가구, 최고급의 별장과 고급 승용차를 굴리며 매일 호의호식하며 세계 여기 저기 여행하는 것으로 행복을 얻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자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그렇다면 탕자는 어떻게 행복을 찾았습니까?
마침내 탕자는 부모와 친구, 여자와 재산, 향락과 야망을 상실한 채 비참한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매일 최고급의 호화 식으로 배불리던 자가, 너무 굶주리다 못해 돼지 먹이인 쥐엄나무 열매로 배를 채우려는 비참한 처지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몰락한 탕자가 어떻게 해서 행복을 찾았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불행과 고독, 슬픔과 배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오늘 말씀에서 세 가지로 행복의 방법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1)탕자의 행복은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돌이킨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입니까? 영어로 행복은 ‘햅피(happy)'라고 합니다. 기쁘다는 뜻입니다. 기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쁠 때 마음에 행복감이 차오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가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 때, 마음의 기쁨보다는 갖가지 것이 마음의 기쁨을 빼앗습니다. 욕망의 마음, 더 가지고 싶은 소유욕이 일어납니다.
더 명예욕이 강해지고, 더 음란의 사람이 됩니다. 그 결과, 불만과 고민, 질투와 고독이 마음 가득히 쓰레기처럼 쌓입니다. 물론, 세상은 잠깐은 만족을 줍니다. 안목의 정욕도 잠시 채워 주고, 이생의 자랑인 명예욕도 다소 높여 줍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더 큰 욕망, 더 큰불만이 검은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것을 발견합니다. 탕자가 넓은 길을 따라 세상 깊이 들어간 결과 불만과 고독, 배신과 상함이 가득 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 비참한 지경에 와서 탕자는 깊이 깨닫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이에 스스로 돌이켜’입니다. 쥐엄나무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하지만, 그것도 없어서 못 먹습니다. 이제는 배신이나 파산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저 배가 터지게 한번 먹었으면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향집이 생각나면서 목이 칵 메어집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 세상의 절망을 느낀 동시에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소망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찼습니다. 저는 돌이켰습니다.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탕자는 세상의 고독과 욕망, 질투와 시기, 경쟁욕과 좌절로부터 방향을 바꾸어 아버지의 집을 향해 마음을 열었습니다. 대 전환, 대 회개였습니다.
그러자 절망으로 가득 차던 어두운 마음속에 기쁨의 빛이 새어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중에 행복한 마음을 가지지 못 한 채 어둡고 음울한 마음으로 앉아 계신 분이 계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 줄 압니까?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출석하면서도 기쁨이 없는 이유도 세상을 향해 뒷문을 열고 있으면서 요나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는 궁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속히 돌아서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 마음을 여십시오. 그 순간, 여러분 마음속에 기쁨이 고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회개입니다.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 불타는 욕망으로 가득 차던 마음을 바꾸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눈물의 회개를 뿌릴 때 기뻐하십니다. 그 순간, 하늘의 뭇 천사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여러분 주변에서 헌화하는 황홀한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 뜻하지 않은 환난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의 부인이 정신 이상에 걸려 미쳐 버리고 참모총장이던 스크린톤이 반기를 들었습니다. 링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면초가 속에서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잠시 등한히 했던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너무나 세상에 깊이 빠져 있음을 깨닫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그는 자기 부인 말고 다른 여인에게 음란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음을 회개하고
그 여자 사진을 찢어 불태우며 철저히 돌이켰을 때에 마음의 큰 기쁨과 평안이 기득 차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쁨이 없는 자는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명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더 내려가는 삶을 살기 전에 지금 돌아서시기 바랍니다.
(2)탕자가 아버지를 향해 더 가까이 나가는 만큼 더 큰 기쁨이 차오릅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사실 육신적으로는 생각하면 너무나 창피한 길입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저 놈이 아버지 살아생전에 유산을 빼앗다 시피 해 가지고 가더니 꼴좋구나. 거지 중에 상거지가 되었구나. ”라고 손가락질 할 것입니다. 아니, 아버지도 몽둥이를 들고 나와 “야, 이 놈아. 내 눈에 피 눈물을 뿌리게 하고 떠나더니 무슨 염치로 돌아오느냐?”
“네 놈 때문에 이제는 고개도 못 들겠구나. 차라리 나가서 죽어 없어져라”라면서 때려 내쫓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수치와 모욕을 당한다 할지라도, 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된다 할지라도 이 길 만은 가야 합니다. 차라리 아버지 손에 맞아 죽더라도 아버지께 지은 죄는 회개하고 죽으리라. 그래야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
그런 각오로 무거운 발을 한 걸음, 한 걸음씩 아버지께로 가까이 갑니다. 그런데 놀랍지요. 아버지께 가까이 올수록 더 큰 기쁨이 차오릅니다. 그 길은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아픔과 모욕의 길이었으나 영혼은 모든 무거움을 벗고 부활을 향해 훨훨 날아오릅니다. 여러분이여, 행복한 삶을 원하십니까? 여호와 하나님께로 가까이 더 가까이 나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탕자는 아버지께 철저한 헌신을 약속할 때 최상의 행복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 앞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욕하고 때리는 대신에 끌어안고 웁니다. 잃은 돈은 탓하지 않고 잃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만 기뻐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큰 결심을 하고 돌아온 탕자라도 ‘제 버릇 개 못 준다. ’고 어물어물 아버지께 모른 척 늘어 엉겨 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탕자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품꾼의 하나로 써 주소서”라 했습니다. 모든 영광, 모든 자랑, 모든 권한을 다 아버지께 맡기고 아버지 의 종으로 살기를 결단한 것입니다. 철저한 헌신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 순간 , 터질 듯한 희열이 차올랐을 것입니다.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은 고난만 강요하지 않습니다.
육신은 고달프지만 영혼은 기쁨과 희열로 넘치는 것입니다. 오, 여러분이여,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은 무엇인지 압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철저한 헌신을 드릴 때입니다. 모든 것을 주께 맡겨 버리고 그의 종으로만 전폭적으로 결단할 때 기쁨이 가득 차는 것입니다. 바울이 과거 율법을 위해 헌신할 때는 아무 기쁨이 없더니다메섹 도상에서 고꾸라진 뒤에는 오직 이 은혜를 갚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 날마다 가까이 나갑니다.
갖은 고난을 견디어 내면서 헌신에 진력할 때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영원한 기쁨을 소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기쁨은 어떠한 핍박이나 감옥에서도 빼앗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깊이 고백합니다. 고후6:8-10에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그러므로 이러한 진리를 발견한 사람들은 그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가기를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탕자의 형을 보십시오. 언제나 아버지 옆에 가까이 살았으나 아버지께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은 결과, 겉으로는 모범생 같았으나 속으로는 불만을 품고 사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평안과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세상을 향했던 마음을 회개함으로 돌이켜 여호와 하나님께 향하십시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께 철저한 헌신을 약속하십시오. 그 때에 큰 평안과 기쁨이 강하게 임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화 뱅크」에는 이런 예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인도 봄베이시에서 사역중인 한 미국인 선교사의 간증입니다.
인도에 처음 갔을 때는 무서운 더위와 허다한 일에 대한 긴장을 참고 견디기에 무척 곤란을 느꼈던 그는 8년째 되는 무렵에는 수십 번의 졸도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일년간의 휴양명령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집회를 인도했고 의사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인도에 돌아가 전도를 계속했습니다.
그의 건강은 극도로 쇠약해졌으며 정신적으로나 신경적으로 온통 지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앞으로의 반생을 폐인으로 지내지나 않을까 두려워했고, 고향으로 돌아가 밭을 일구며 건강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를 고민했습니다. 참으로 암흑과 같은 시기였습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집회시간에 기도하고 있는데, “이 일을 위하여 너를 불렀는데, 너는 복종할 마음의 자세를 갖추었는가?”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주여, 저는 이제 틀렸습니다. 제 힘이 다하였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음성은 “만일 네가 고민하는 바를 내게 맡겨 버린다면, 나는 너를 보호할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그는 지체 없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주님의 뜻대로 따르겠나이다. ” 이 말을 마치자 형언할 수 없는 평화감이 그의 전신에 가득 차 왔습니다. 주님은 풍요한 생명을 그에게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 후 그의 생활은 변했고 정신적으로는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일을 해도 지칠 줄 몰랐습니다. 그는 묵묵히 여호와 하나님에게 순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60여세가 넘도록 충실하게 봉사할 수 있었다는 간증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진정한 행복을 원하십니까? 세상을 향했던 마음을 회개로 돌이켜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여십시오. 이제 넓은 길을 버리고 좁은 길을 따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전적인 헌신을 다짐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제사 음식도 차리기 귀찮기 때문에 ‘다례원’ ‘홍동백서’ 등 차례상을 대신 차려주는 업체들에게 20만원 정도만 주면 밥만 빼고 음식과 향, 양초까지 준비해준다고 하는데 이러한 ‘홈쇼핑 차례상’은 주문이 밀려 배달이 늦어질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과연 조상들이 잡수신다고 믿고 있다면 정성이 빠진 제사상을 받고 얼마나 황당해 하실까요?
더 한심한 이야기는,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어차피 차례 후 우리가 먹을 음식인데 피자나 스파게티처럼 좋아하는 음식을 올리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별로 각자 입맛대로 스테이크, 만두, 갈비 등을 만들어 와서 제사를 지낸 후에 나눠 먹는다고 합니다. 제 나이 또래만 해도 피자나 스파게티가 버터 냄새 때문에 입에 맞지 않는데 돌아가신 조상들이 그런 음식을 받고 어떠실까요?
여하튼 열심히 제사를 지내는 것도 자기들이 복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갖가지 수고와 고독, 수치를 이겨 내며 땀 흘려 수고해 마지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 서점에서나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은 행복에 관해서 쓴 책이라고 합니다. 마치 여름날에 불 나방이들이 불을 항해 몰려드는 것처럼 너나없이 행복을 향해 날개를 퍼덕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행복을 찾았다는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고 불행하다는 자들만 가득 차니 과연 참다운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부쉬의 훌륭한 시 가운데 행복은 저 산 너머 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분이 달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왜 달리고 있는가?” “나는 행복을 찾기 위하여 달리고 있다. 행복은 저 산 너머 있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힘을 내서 찾아 가보니 흰 말뚝이 있는데 그 곳에 「행복은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산 너머 있다. 」고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또 힘을 내서 달려가 보니까 또 말뚝 하나가 있는데 거기 기록은「행복은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산 너머 있다. 」고 했습니다. 그래서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나중에는 행복이란 없고 흰 말뚝마저 보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늙었기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참다운 행복은 어떻게 찾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에서 배우고자 합니다.
1. 탕자의 불행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왜 탕자는 불행을 만났을까? 왜 낙망과 실패를 당한 후에 돼지 울 옆에서 쥐엄나무 열매를 먹는 비참한 꼴을 당하게 되었습니까?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방종의 자유를 곧 행복이라고 착각한 데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 밑에서 살 때에 자기는 언제나 매여 지낸다고 생각하고 불만이 많았습니다. 아버지가 잔소리를 하고 어느 때는 야단을 칠 때에도 전부 자기를 얽어매는 속박의 율례로 생각했습니다.
그저 한번 마음껏 자기가 계획하고 자기의 힘으로 땀 흘려 사업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아무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심한 말다툼으로 유산을 타 가지고 속박의 집을 벗어나 무한한 자유가 펼치어 있는 세상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는 곧 행복의 나날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남은 결과는 불행의 잿더미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불행은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사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데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그러한 방종적인 자유를 가지기를 간절히 희구하고 있고 또 그러한 자유로움을 누리기 위해 과감히 자기를 속박하는 일상적 사슬로부터 탈출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신자들 중에도 그러한 분이 많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교사와 찬양대로 열심히 봉사하다가 왜인지 싫증이 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면서 지내니까 나중에는 심한 피로감에 휩싸입니다. 교회가 율례적인 사슬로 느끼어 집니다. 설교도 싫어지기 시작하고 무슨 부장이나 구역장의 간섭도 싫어집니다. 좁은 길의 폐쇄성이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어느 날 멀리 이사를 가서 큰 교회에 출석하면서 등록도 안합니다.
주일 아침 예배만 드리고 식구들과 야구장도 가고 낚시터도 갑니다. 멀리 야외에 나가서 음식을 끓여 먹으며 지내다 오니 거기가 비로소 천국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넓은 길이 이렇게 훤하게 펼쳐 있음에도 굳이 좁은 길을 고집했던 자기 과거의 삶이 후회스럽습니다. 그러나 착각입니다. 육신은 편안할지 모르나 날로 짓눌러 오는 영적인 압박감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양심의 가책을 잊기 위해 더 오락이나 다른 일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어느 날부터 이상하게 사업도 흔들리고 그렇게 순종적이던 자녀들조차도 반항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탕자가 경험했던 내려가는 길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결국 그 길의 끝에 와서 쓰디쓴 쥐엄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후회할 때는 이미 많은 것을 잃은 다음입니다.
아무 간섭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권력자 비스마르크는 말하기를 ‘나의 일생 동안 행복을 느낀 때는 불과 24시간뿐이었노라’고 실토했고, 방랑의 시인으로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시인 이태백은 잔을 들어 술을 마시면서 ‘근심은 더욱 깊어만 간다. ’고 탄식했습니다. 좁은 길에서 벗어나 넓은 길에서 아무 간섭 없이 마음껏 자유롭게 사는 것은 육신적인 쾌감은 있으나 영적인 깊은 불안에 매이기 시작합니다.
(2)탕자의 불행은 물질의 풍족함이 행복이라 착각한 데 있습니다.
탕자는 언제나 아버지에게 용돈이나 필요한 돈을 타다 쓰는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탕자는 나름대로 인정도 많고 배포가 컸기 때문에 친구들을 만나면 언제나 앞장서서 돈을 썼기에 아버지가 주는 부스러기 돈으로는 도무지 성에 안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주력하는 농사에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부자임에도 농사만 지을 뿐 새로운 신종 사업에 투자를 못합니다.
몇 번 말씀을 드렸어도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 ’는 식의 대답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너무나 고리 타분합니다. 자기 생각에는 돈만 있으면 떼돈을 벌 신종 사업이 널리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돈만 벌 줄 알았지 쓸 줄 모르는 구두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택도 현대식으로 더 멋지게 리모델링 할 수 있을 터인데, 구식만 고집하니 너무나 불편합니다.
만약 자기가 돈만 풍부히 있다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며 행복을 만끽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큰 결심을 하고 아버지에게 들어가서 강권적으로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저도 이제 성장했으니 독립을 하고자 합니다. 내가 이러한 사업을 하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내게 물려 줄 유산을 주시는 셈치고 지금 주시면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라고 간청했습니다.
당시는 차남은 유산의 3분지 1을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모 살아생전에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날마다 와서 조르기를 여러 날 합니다. 할 수 없이 유산에 해당한 살림을 나누어주었습니다. 탕자는 천하를 잡은 듯이 우쭐거리며 큰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먼 곳으로 떠났습니다. 남은 결과는 빈털터리로 큰불행한 자가 되었습니다.
행복은 결코 물질이 풍부한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질이 많을수록 더 많은 근심이 자기를 찌르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담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 철학가 F. 베이컨은 ‘돈은 최선의 종이요, 최악의 주인이다. ’고 했습니다.
일본 유원미길(有原末吉)이 쓴 「교훈예화사전」에는 이런 예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큰 부자 상인의 건물에 한 가난한 신발 수선공이 세 들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돈이 많은 부자는 언제나 많은 돈을 세고 살면서 밤이면 재산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두 수선공은 아주 가난해도 무엇이 즐거운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래를 부르며 삽니다. 부자는 은근히 부화가 치밉니다.
그래서 친구의 충고에 따라 구두 수선공에게 제법 큰 돈을 주었습니다. 구두 수선공은 그것을 받고 나서 근심에 싸이기 시작 합니다. ‘이것을 누구한테도 보여 주어서는 안 된다. 보면 누구나 훔치려고 할거야. 아내한태도 비밀로 해야지. ’라고 했습니다. 돈이 많아진 다음 수선공은 사람들을 피합니다. 아내조차도 보기 싫습니다. 오직 돈에만 마음이 가 있습니다.
그러니 일에도 재미가 없고 옛날처럼 노래도 부를 수가 없습니다. 아내가 “당신은 왜 갑자기 변했습니까?”라고 계속 따지자 수선공은 할 수 없이 실토를 했습니다. 아내는 울면서 “우리는 그 돈이 있기 전에는 행복했습니다. 공짜로 생긴 그 돈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즉시 그 돈을 돌려주세요. 그러면 다시 행복해질 것입니다. ”라고 호소합니다.
구두 수선공은 큰 결심을 하고 그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구두 수선공의 노랫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돈만 많으면 행복해 질 것이라는 착각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3)탕자의 불행은 향락을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고 착각한 데 있습니다.
탕자는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가 갔습니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주변 사람들이나 거래처 사람들, 혹은 관청 사람들과 교제하기 위해서 향연을 베풉니다. 돈이 많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산해진미를 차리고 그 도시에서 이름난 기생들을 불러다가 먹고 마시고 춤춥니다. 돈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특히 온갖 브로커들이 모여들어 유망한 사업이라고 소개하면서 당장 떼돈을 벌 것처럼 떠벌립니다. 아무 경험이 없는 이 청년은 쉽게 유혹에 넘어가 목돈을 댑니다. 그러면서 밤마다 온갖 친구들과 잔치를 벌입니다. 온갖 미인들이 다가와 갖은 애교를 부립니다. 관청 사람들도 굽실굽실 거립니다. 천하가 내 손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속음이요 망함이요, 뜨내기 친구나 일회용 애인들로부터의 배신뿐이었습니다. 도트 티하메르는 말하기를 ‘저속한 향락에서 행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쓴 맛만 가져올 뿐이다. ’라 했고, 파우스트는 말하기를 ‘향락은 우리를 비천하게 한다. ’고 했습니다. 땀 흘려 수고한 후에 가지는 휴식이나 오락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나 전혀 땀 흘리지 않고 향락만 추구하는 것은 불행의 늪으로 빠지게 할뿐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오늘 이 설교를 듣는 분 중에는 돈을 많이 벌어서 미인과 결혼해서 고급 아파트와 최고급의 가구, 최고급의 별장과 고급 승용차를 굴리며 매일 호의호식하며 세계 여기 저기 여행하는 것으로 행복을 얻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자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그렇다면 탕자는 어떻게 행복을 찾았습니까?
마침내 탕자는 부모와 친구, 여자와 재산, 향락과 야망을 상실한 채 비참한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매일 최고급의 호화 식으로 배불리던 자가, 너무 굶주리다 못해 돼지 먹이인 쥐엄나무 열매로 배를 채우려는 비참한 처지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몰락한 탕자가 어떻게 해서 행복을 찾았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불행과 고독, 슬픔과 배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오늘 말씀에서 세 가지로 행복의 방법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1)탕자의 행복은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돌이킨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입니까? 영어로 행복은 ‘햅피(happy)'라고 합니다. 기쁘다는 뜻입니다. 기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쁠 때 마음에 행복감이 차오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가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 때, 마음의 기쁨보다는 갖가지 것이 마음의 기쁨을 빼앗습니다. 욕망의 마음, 더 가지고 싶은 소유욕이 일어납니다.
더 명예욕이 강해지고, 더 음란의 사람이 됩니다. 그 결과, 불만과 고민, 질투와 고독이 마음 가득히 쓰레기처럼 쌓입니다. 물론, 세상은 잠깐은 만족을 줍니다. 안목의 정욕도 잠시 채워 주고, 이생의 자랑인 명예욕도 다소 높여 줍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더 큰 욕망, 더 큰불만이 검은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것을 발견합니다. 탕자가 넓은 길을 따라 세상 깊이 들어간 결과 불만과 고독, 배신과 상함이 가득 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 비참한 지경에 와서 탕자는 깊이 깨닫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이에 스스로 돌이켜’입니다. 쥐엄나무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하지만, 그것도 없어서 못 먹습니다. 이제는 배신이나 파산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저 배가 터지게 한번 먹었으면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향집이 생각나면서 목이 칵 메어집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 세상의 절망을 느낀 동시에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소망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찼습니다. 저는 돌이켰습니다.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탕자는 세상의 고독과 욕망, 질투와 시기, 경쟁욕과 좌절로부터 방향을 바꾸어 아버지의 집을 향해 마음을 열었습니다. 대 전환, 대 회개였습니다.
그러자 절망으로 가득 차던 어두운 마음속에 기쁨의 빛이 새어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중에 행복한 마음을 가지지 못 한 채 어둡고 음울한 마음으로 앉아 계신 분이 계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 줄 압니까?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출석하면서도 기쁨이 없는 이유도 세상을 향해 뒷문을 열고 있으면서 요나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는 궁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속히 돌아서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 마음을 여십시오. 그 순간, 여러분 마음속에 기쁨이 고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회개입니다.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 불타는 욕망으로 가득 차던 마음을 바꾸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눈물의 회개를 뿌릴 때 기뻐하십니다. 그 순간, 하늘의 뭇 천사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여러분 주변에서 헌화하는 황홀한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 뜻하지 않은 환난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의 부인이 정신 이상에 걸려 미쳐 버리고 참모총장이던 스크린톤이 반기를 들었습니다. 링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면초가 속에서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잠시 등한히 했던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너무나 세상에 깊이 빠져 있음을 깨닫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그는 자기 부인 말고 다른 여인에게 음란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음을 회개하고
그 여자 사진을 찢어 불태우며 철저히 돌이켰을 때에 마음의 큰 기쁨과 평안이 기득 차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쁨이 없는 자는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명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더 내려가는 삶을 살기 전에 지금 돌아서시기 바랍니다.
(2)탕자가 아버지를 향해 더 가까이 나가는 만큼 더 큰 기쁨이 차오릅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사실 육신적으로는 생각하면 너무나 창피한 길입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저 놈이 아버지 살아생전에 유산을 빼앗다 시피 해 가지고 가더니 꼴좋구나. 거지 중에 상거지가 되었구나. ”라고 손가락질 할 것입니다. 아니, 아버지도 몽둥이를 들고 나와 “야, 이 놈아. 내 눈에 피 눈물을 뿌리게 하고 떠나더니 무슨 염치로 돌아오느냐?”
“네 놈 때문에 이제는 고개도 못 들겠구나. 차라리 나가서 죽어 없어져라”라면서 때려 내쫓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수치와 모욕을 당한다 할지라도, 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된다 할지라도 이 길 만은 가야 합니다. 차라리 아버지 손에 맞아 죽더라도 아버지께 지은 죄는 회개하고 죽으리라. 그래야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
그런 각오로 무거운 발을 한 걸음, 한 걸음씩 아버지께로 가까이 갑니다. 그런데 놀랍지요. 아버지께 가까이 올수록 더 큰 기쁨이 차오릅니다. 그 길은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아픔과 모욕의 길이었으나 영혼은 모든 무거움을 벗고 부활을 향해 훨훨 날아오릅니다. 여러분이여, 행복한 삶을 원하십니까? 여호와 하나님께로 가까이 더 가까이 나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탕자는 아버지께 철저한 헌신을 약속할 때 최상의 행복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 앞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욕하고 때리는 대신에 끌어안고 웁니다. 잃은 돈은 탓하지 않고 잃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만 기뻐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큰 결심을 하고 돌아온 탕자라도 ‘제 버릇 개 못 준다. ’고 어물어물 아버지께 모른 척 늘어 엉겨 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탕자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품꾼의 하나로 써 주소서”라 했습니다. 모든 영광, 모든 자랑, 모든 권한을 다 아버지께 맡기고 아버지 의 종으로 살기를 결단한 것입니다. 철저한 헌신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 순간 , 터질 듯한 희열이 차올랐을 것입니다.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은 고난만 강요하지 않습니다.
육신은 고달프지만 영혼은 기쁨과 희열로 넘치는 것입니다. 오, 여러분이여,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은 무엇인지 압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철저한 헌신을 드릴 때입니다. 모든 것을 주께 맡겨 버리고 그의 종으로만 전폭적으로 결단할 때 기쁨이 가득 차는 것입니다. 바울이 과거 율법을 위해 헌신할 때는 아무 기쁨이 없더니다메섹 도상에서 고꾸라진 뒤에는 오직 이 은혜를 갚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 날마다 가까이 나갑니다.
갖은 고난을 견디어 내면서 헌신에 진력할 때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영원한 기쁨을 소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기쁨은 어떠한 핍박이나 감옥에서도 빼앗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깊이 고백합니다. 고후6:8-10에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그러므로 이러한 진리를 발견한 사람들은 그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가기를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탕자의 형을 보십시오. 언제나 아버지 옆에 가까이 살았으나 아버지께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은 결과, 겉으로는 모범생 같았으나 속으로는 불만을 품고 사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평안과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세상을 향했던 마음을 회개함으로 돌이켜 여호와 하나님께 향하십시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께 철저한 헌신을 약속하십시오. 그 때에 큰 평안과 기쁨이 강하게 임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화 뱅크」에는 이런 예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인도 봄베이시에서 사역중인 한 미국인 선교사의 간증입니다.
인도에 처음 갔을 때는 무서운 더위와 허다한 일에 대한 긴장을 참고 견디기에 무척 곤란을 느꼈던 그는 8년째 되는 무렵에는 수십 번의 졸도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일년간의 휴양명령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집회를 인도했고 의사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인도에 돌아가 전도를 계속했습니다.
그의 건강은 극도로 쇠약해졌으며 정신적으로나 신경적으로 온통 지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앞으로의 반생을 폐인으로 지내지나 않을까 두려워했고, 고향으로 돌아가 밭을 일구며 건강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를 고민했습니다. 참으로 암흑과 같은 시기였습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집회시간에 기도하고 있는데, “이 일을 위하여 너를 불렀는데, 너는 복종할 마음의 자세를 갖추었는가?”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주여, 저는 이제 틀렸습니다. 제 힘이 다하였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음성은 “만일 네가 고민하는 바를 내게 맡겨 버린다면, 나는 너를 보호할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그는 지체 없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주님의 뜻대로 따르겠나이다. ” 이 말을 마치자 형언할 수 없는 평화감이 그의 전신에 가득 차 왔습니다. 주님은 풍요한 생명을 그에게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 후 그의 생활은 변했고 정신적으로는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일을 해도 지칠 줄 몰랐습니다. 그는 묵묵히 여호와 하나님에게 순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60여세가 넘도록 충실하게 봉사할 수 있었다는 간증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진정한 행복을 원하십니까? 세상을 향했던 마음을 회개로 돌이켜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여십시오. 이제 넓은 길을 버리고 좁은 길을 따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전적인 헌신을 다짐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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