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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오순절 성령강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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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신자가 갖게 된 특권은 무엇일까? 첫 성령강림에서 강조된 일이 방언이다. 모든 성도는 다 방언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 성령받은 증거는 반드시 방언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사도행전 19장에서는 에베소 교회에 이미 교인들이 예수를 믿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다시 안수하여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는 기사가 나타나 있다. 이것이 중요한 근거가 되어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성령을 받고 은사를 나타내게 되는데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구원은 받았지만 성령받는 일은 다른 문제이다. 성령을 받으면 분명히 성경 어디에나 강조되는 것처럼 꼭 방언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런가? 오늘은 이 점을 살펴보자.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사마리아와 에베소 교회에 있었던 방언은 여기에서 일어난 방언과는 다른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의 방언은 어떤 방언인가?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5-11)”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외국어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신자들이 알고 있는 방언은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대화용 말이 아니고 신령한 언어이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방언이 두드러졌다고 하는 것은 성령이 오셨다는 증거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심으로 이제 우리에게 무엇을 시키시려고 하는 것이다. 이 방언이 그런 의미에서 성령이 와 계시다는 표징이 아니고 성령이 오셔서 시키시려고 하는 어떤 일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해야만 성령이 오신 표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 외국어 방언을 주시는 이유는 자명하다. 사도행전 1:8의 약속 때문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지금 이 방언은 성령이 오신 증거가 아니라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너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땅 끝까지라는 전도의 책임의 영역을 위해서 주어진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외국어가 등장하는 이유는 이런 것이다. 성령이 임하자 ‘외국어를 할 능력을 가졌다’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명령하시기를 이제 이 복음은 유대인들만의 것이 아니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의 모든 족속에게 허락하신 것이라는 표로서 성령이 임하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자로서의 표가 아니라 이제 내가 너희들이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과 같이 유대인만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요 온 천하 만민의 여호와 하나님이 되려 함이 아니요 온 천하 만민의 아버지가 되려 함이며 나도 유대인만을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 천하 만민을 구원하러 온 메시야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내가 그들 모두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졌으니 이제 너희는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그래서 성령이 오시자 외국어가 터져 나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구속 사업의 혜택이 누구에게까지 허락된 것이냐를 강조하려는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의 요점이다. 성령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방언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의 차원이 아니라 이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며 대상은 어디까지냐 하는 의미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은 충격적 사건이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사도들이 지금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성령을 받을 만한 실력이 있거나 특별해서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 모두는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얻으며 민족적인 구별로써 우열의 개념이 없으며 전 민족 땅 끝이라는 지적을 여기서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약속, 성령강림과 방언을 허락하신 데에는 그 대상이 땅 끝까지요 각 족속이라는 뜻보다 좀 더 깊은 뜻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
바로 이 말씀의 응함이다. 이러므로 일차적으로는 방언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쓰는 언어이지 신령한 언어가 아니라는 것부터 이해를 해야 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그 약속의 성취이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방언을 주시고 나가서 전도하게 하는 것과 성령이 직접 한 심령을 두드려 그를 얻는 것과 어느 쪽이 완벽하고 쉽겠는가? 성령이 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래도 성도들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과 같이 이제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어 그의 일을 이루겠다는 약속의 성취이다. 그 속에는 우리를 어떻게 요구하고 계시느냐가 담겨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 속에는 성부 여호와 하나님과 성자 여호와 하나님의 관계와 같은 관계로써 우리를 이제부터 대접하고 초대한다는 놀라운 약속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성경이 묘사한 대표적인 부분들을 추적해 보자.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3-17)”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셨다. 그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 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합치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제부터는 성자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성부 여호와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공식적인 선언이기도 하다. 거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까지 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지금 오순절 성령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그들에게 외국어를 준 것은 결국 이들에게 내가 너희들 모든 민족들에게 외국어를 준 것은 결국 이들에게 내가 너희들 모든 민족들에게 말할 수 있게 했다라고 함으로써 이들이 하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전하고자 하는 말이요, 이들이 전하는 내용은 내가 기뻐하는 일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만일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흡족한 자들이 아니라면 그 가는 길을 막아서실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여호와 하나님 편을 들기에 부적합한 자라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입을 열지 않으실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고 그들에게 외국어를 할 수 있게 하셨다. 우리는 그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요 우리의 발걸음과 입술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비밀들을 펼치시기로 하며 우리 마음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비밀과 온 뜻들을 함께 나누시기로 한 대상이다 하는 뜻이 포함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부르셨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가 얼마나 높은 존재가 되었기에 여호와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우리에게 다 맡겨 놓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이 말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성부 여호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분리된 적이 없다고 하신다. 성부 여호와 하나님이 성자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언제나 지키신다. 예수님은 한번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어긴 적이 없으시다. 성부 여호와 하나님 쪽에서 성자 여호와 하나님을 보면 언제나 흡족하고 만족스럽기 때문에 기쁜 것이다. 그렇게 주님은 아버지의 보냄을 받았고 우리도 그렇게 또한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1:8은 성령이 오셨으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방언을 하고 전도를 하게 되었다는 차원이 아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여호와 하나님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내 멋대로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은 내 편이다. 신자는 주님께서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는 자이기 때문에 내 멋대로 할 수 없는 자이며 그래서 성령이 와 계시는 것이다. 또 우리는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놓아두시지 않는 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신자이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지금 성령이 오셨더니 마음의 기쁨이 있고 이런 은사가 나타났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실 수 있도록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음 놓고 땅 끝까지 모든 족속의 영혼을 우리에게 맡기실 수 있어서 우리에게 방언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이다. ‘우리 중에 아무도 자신의 존재가 자기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실수하고 실패한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우리 하나만으로의 우리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우리다. 성령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성부 여호와 하나님과 성자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어긋날 리 없다. 우리는 그런 존재로 지금 부름을 받았고 그래서 모든 것이 허락될 수 있는 존재이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강림의 가장 중요한 대목인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정하시는가 할 때에 마태복음 16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6-19)”
성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령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계시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내가 하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도 안하시겠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다 안하실 리야 없지만 말하자면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계시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우리 인생에 우리의 개성들을 쓰시면서 우리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나를 확장하시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우리에게 방언을 하게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주민등록증과 인감도장과 저금통장까지 맡기신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교회에 베푸신 축복이다. 허락하신 특권이다.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을 입은 상급을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그 선포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깊은 감사가 있어야 한다. 신자가 되었다는 특권을 놓치지 말고 살아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역하시기를 원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대등한 관계로 우리의 의견을 들으시고 우리의 인생을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감사가 있고 찬송이 있고 정말 승리와 기대 속에서 우리의 인생을 거는 것이다. 남에게 이 특권들을 빼앗기지 말고 허락된 것들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시간만 보내는 게으른 신앙 생활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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