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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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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맞벌이를 하는 부부가 아침에 함께 차를 타고 출근하는데 아내가 한참을 가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머! 전기다리미를 안 끄고 나온 것 같아요. 그러자 남편은 놀라서 차를 돌려 집으로 향했는데 집에 가보니 전기다리미는 꺼져 있었습니다.
다음 날도 아내는 남편과 함께 한참 차를 타고 가다가 여보, 오늘도 전기다리미를 깜빡 잊고 끄지 않은 것 같아요 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귀찮고 짜증이 났지만 불이 날까봐 겁이 나서 집으로 차를 돌렸으나 하지만 이 날도 전기다리미는 꺼져 있었습니다.
다음날, 차가 출발한 지 10분쯤 지나자 아내가 또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보, 전기다리미를 끄고 나왔는지 안 끄고 나왔는지 통 기억이 안나요. 남편은 차를 도로변에 세우고 트렁크를 열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기 있다. 전기다리미.
건망증이 상당히 심한 사람이죠. 예,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에 감사하다가도 금방 잊어버리고 원망과 불평을 하는 때가 있습니다. 인생길을 가다 보면 평탄한 길이 나타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광야와 같이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는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에 우리의 삶의 시각을 조금만 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면 얼마든지 승리의 삶, 풍요로운 삶, 행복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김해삼일교회는 다음 주일을 추수 감사주일로 지키게 됩니다. 2008년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어려운 경제 여건에서도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여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주일입니다. 믿음으로 동참하시는 분께는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따를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교회 성도는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엡 0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여러분이나 저나 이 말씀을 대하면 늘 부담스럽기만 하죠 무엇 때문입니까 범사(凡事)에 라는 말과 항상(恒常) 이라는 말 때문입니다.
감사하라고 하는 말에 범사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우리는 왠지 부담을 느끼게 되고 감사하라는 말 앞에 항상 이라는 수식어가 있으면 더욱 기가 죽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범사라는 말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떤 일을 당하든지 간에 조건 대지 말고 감사하라는 뜻이고 항상 이라는 말은 시종일관 어떤 상황을 만나도 변함없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강도 높은 의미를 가진 감사라는 말씀을 읽으면 가책 받지 아니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마 그 가운데 목사인 저 자신이 가장 많은 가책을 받을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지 못한 때가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려고 무척 노력을 하고 또 감사도 많이 하지만 이 말씀이 요구하는 선(線)에는 아직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솔직히 저 자신이 숨길 수가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항상 감사하십시오. 하고 얼마든지 외칠 수 있지만 진지하게 이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령 젊은 나이에 깊은 지병을 안고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치료보다는 오히려 병은 점점 더 깊어갈 때 과연 그 입에서 감사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평생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될 어린 장애인 자녀로 인해 씨름하는 부모님의 입에서 제대로 감사가 나올 수 있을까요
혹은 이력서를 수십 통 써 가지고 다니면서 취직을 해보려 하지만 회사에서 면접 한 번 제대로 못 본다면 그 입에서 과연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내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정말 감사하겠느냐 말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이런 현실에서 이 말씀을 대한다면 아무래도 범사에 항상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생활을 한다는 것이 현실성 없는 이상론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은 적당히 보고 넘어가는 것이 상책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감사주일을 앞두고 비현실적인 말씀처럼 혹은 이상론처럼 여겨진다고 적당히 보고 넘어간다면 그것 역시 괜찮은 일이겠습니까 아무래도 아니에요.
적어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란 육신의 관점에 볼 때 비현실적이고 이상론처럼 보일 뿐이지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라(엡 05:20)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영적 원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①첫 번째 영적 원리는 왜 범사에 감사를 하느냐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입니다. 이름이라는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마 0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하니라.
나 같은 죄인을 이 세상의 죄악에서 건져주신 구세주라는 말이지요. 이 세상의 것을 다 잃어버린다 해도 이 이름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사하며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②두 번째 영적 원리는 왜 범사에 감사를 하느냐 하면 천지만물의 주인 되신 전능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항상 감사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것은 너무 비현실적인 일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며 변명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의 옷자락을 믿음으로 붙드는 사람에게는 어떤 죄를 범했든지, 어떤 과거를 가졌든지 간에 다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시간 나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우리 가정에 베푸신 은혜, 가족들에게 건강을 허락하신 은혜가 얼마나 귀합니까
물론 이 자리에 계신 우리 가운데 개인적으로는 슬픔과 고통과 고난을 겪는 분도 더러는 있습니다. 사업의 부진으로 인해 힘들게 지내시는 분도 있고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롬 08:28)는 지금의 아픔이 지나고 나면 나중에는 크게 유익하게 해 주실 것임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김해삼일교회도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아픔의 순간들도 많았고, 속께나 썩이는 분들로 인해 상처의 부분들이 상당부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들에 얽매여 괴로워하기 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지우고 유익 된 부분들만 생각한다면 이제부터 그 아픔들이 축복으로 전환되어질 것입니다.
저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우선순위에 두고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을 보니 금년 한 해야말로 가장 복 된 한 해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금년의 추수감사 주일에 우리의 힘을 결집하고 또 GUP 30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2월 7일 설립 기념 주일에는 여호와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기를 소망합니다.
2.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어디에 근거해야 합니까
08 여호와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의 생활을 보면 그의 생활 자체가 항상 감사의 연속이었습니다.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구원의 감격이 사무쳐 있었고 매일 매일의 생활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를 표현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그 감사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바울의 감사의 조건들은 세상의 환경적인 요소가 아니라 영적인 요소에 있었습니다.
자기 속사람이 여호와 하나님과 어떻게 영적 교제를 나누느냐 에 두었다는 말입니다. 즉 자신의 처한 환경이나, 건강이나, 가정이나, 재산이나, 명예나, 지위나, 성공이나 이와 같은 것들에 가치 기준에 두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흔히 모든 것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야만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만 바울은 세상의 좋은 환경이나 평안한 생활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고후 11:23…....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번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은 로마에 가서도 대부분 감옥에 있었으며 일생은 거의 핍박과 환난과 곤고의 생활로 점철되어 있음에도 감사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가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그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흔히 육신이 건강하면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만 이렇게 병들고 몸이 괴로운데 무슨 감사를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을 합니다.
또 사업이 잘 되어서 많은 흑자를 내었으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지만 사업이 그만 부진하여서 많은 손해를 보았는데 무슨 감사를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감사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의 몸이 건강해서 혹은 사업이 잘 되어서 감사의 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고후 12장에 보면 오히려 그의 육체 가운데 찌르는 사단의 가시가 있었다고 고백한 일을 기억하시죠
그래서 이 육신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을 때 그가 어떠한 응답을 받았습니까
고후 12:0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自高)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0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0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 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바울은 건강하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의 생활을 한 것은 아닙니다. 육신으로는 오히려 건강이 여의치 못한 처지였으니까요 물론 우리 몸이 건강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또한 우리 가정이 다 평안하다면 더욱 좋은 일이며, 평안하다면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정에 베푸신 큰 은혜요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의 경우는 독신의 은사를 받아 일생을 홀로 지내다 보니 이 가정에서 오는 아늑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복음의 나그네로서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평안히 쉴 곳이 없는 생활을 하였음에도 감사가 떠나지 않았던 것은 세상의 환경에서 오는 조건들을 감사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줄로 믿을 때 감사가 나타납니다.
행 18:0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바울이 아덴 전도를 마치고 고린도에 전도하러 갔을 때 그곳에는 죄악의 세력이 강성하였고 전도할 기회도 무척 많았습니다. 반면 강렬하게 대적하는 유대인들로 인하여 바울이 복음의 상당한 위축을 느끼고 있을 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주신 위로의 말씀입니다.
이후부터 바울은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서 조금도 위축됨 없이 평안하게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삶에 대한 인도가 계속되고 있는 한 세상살이의 풍랑도 핍박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의 환경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빌 04:0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라.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풍랑이 없을 것이라고 하지 않고 그 풍랑 속에도 함께하시겠다고 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사 43:0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 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 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0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지금의 경제가 우리에겐 IMF에 준하는 정도로 대단히 힘겹습니다. 기업들이, 사업들이 국가적으로 대단히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 믿음의 가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힘차게 찬양을 합시다.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도록 마음을 크게 넓힙시다. 부드러운 심령을 가집시다.
성도 여러분! 감사는 +와 같아서 모든 것에 감사하면 거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지고 원망과 불평은 -와 같아서 이미 가진 것까지 없어집니다. 힘들수록, 어려울수록 더욱더 애써 감사할 거리를 찾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많은 감사할 거리가 생기는, 감사할 일들이 넘치는, 축복이 많아지는 기적을 체험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감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불평의 일에 대해서는 과감히 입을 닫을 줄 아는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감사와 불평의 공통적인 특징은 하면 할수록 더욱 불어난다는 사실 기억하십시오. 불평은 하면 할수록 더욱더 불평의 일들이 쌓여가고 반면 감사는 고백하면 할수록 감사할 일들과 축복이 눈덩이처럼 불어만 가는 것 말입니다.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니며,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고, 사랑은 표현할 때까지 사랑이 아니며,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님을 아시죠 감사는 마음으로, 행동으로 표현할 때만이 진정 감사가 되는 겁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미국에 John Newton 이라고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젊은 시절 방탕하였던 삶을 살다가 나중에는 노예 무역선의 선장까지 한 극악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변화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대상 17:16,17절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 늘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나 같은 죄인 살려주신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려주신 그 은혜 너무 감격합니다. 하며 그 감격으로 주를 찬양하는 중에 찬송시를 썼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05장입니다.
1.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3.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아멘.
성도 여러분! 가끔은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불평하고 싶은 일을 만나기도 하는데 연약한 사람들끼리 모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불평할 거리 때문에 감사할 거리를 잃어버리고 불평의 공장을 가동시키지 맙시다.
왜 많은 사람들이 감사의 생활에 접근하지 못합니까 다른 사람의 환경과 비교하여 자신의 약한 모습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당면한 고난의 문제가 아무리 크게 보여도 그러한 것들 때문에 감사의 제목이 가려진다면 결국은 나만 손해이지 않습니까
어떠한 환경이든지 감사의 마음으로 보면 그 심령에는 천국이 펼쳐질 것이며 불평의 마음으로 보면 그 심령은 고통과 불행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 50개를 선별했는데 그중에서 땡큐가 28퍼센트로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감사가 몸에 배어 있음을 느끼게 하는 증거 아닙니까
성인이 되면 평균 2만 6,000개의 단어를 알게 된다고 하는데 그 중에 사람을 가장 기쁘게 하는 최고의 언어가 감사합니다. 이며 또한 여호와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언어도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격언 중에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혀에 붙기 전까지 아이에게 아무 말도 가르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결단을 합시다.
롬 08:28 우리가 알거니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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