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감사하는 삶
본문
독일계 스위스인이며, 시인, 소설가, 화가로 활약한 헤르만 헤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행복은 대상이 아니라 재능이다. ”이 말의 뜻은, 사람들은 흔히 어떤 좋은 조건이 자기에게 다가오면 그 대상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어떤 난관 속에서도 그 속에서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을 헤르만 헤세는 재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오늘은 우리교회에서 지키는 추수감사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을 앞둔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구하고 생각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내게 주신 은혜가 뭐지 내 월급이 올랐나 승진이 됐나 건강이 좋아졌나 뭘 감사하라는 거지 우리는 이렇게 감사의 조건과 감사의 제목을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행복의 대상이나 행복의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대상과 조건을 뛰어넘어 그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행복을 가려내고 행복을 취하는 재능,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삶에 대하여 본을 보이셨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병이어(5餠2魚)의 기적에 대한 말씀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배불리 먹은 사람의 수가 여자와 어린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모든 수를 다 합하면 최소한 이일만 명은 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무리 앞에 먹을 음식은 고작 어린아이 도시락 하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턱없이 모자라는 음식 앞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본문 19절에“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라고 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라는 것은 유대 가정에서는 가장이면 누구나 하는 평범한 일이었습니다. 탈무드에 의하면“감사 없이 무엇을 즐기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께 강도짓을 하는 것과 같다. ”라고 할 정도로 감사가 일상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축사하다”의 뜻은 원어의 의미로“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한다. ”는 것입니다. 아무리 감사가 일상화되었다 할지라도 이만 명이 넘는 무리 앞에서 어린아이 도시락 하나를 앞에 두고 감사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감사의 대상이 아니라 악조건 속에서 감사를 끄집어내는 재능인 것입니다. 악조건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예수님의 감사함이 우리들에게 주는 감사의 교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감사는 선택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감사는 대상이 아니라 감사를 끄집어내는 재능”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는 것, 친구를 맺는 것, 내가 다니며 배운 학교, 내가 소속된 교회, 내가 다니는 직장, 이 모두가 다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이런 것만 아니라 감사하느냐 아니면 원망하고 불평하느냐 하는 것도 선택입니다. 황경이 좋다하여 다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환경이 좋지 않다고 하여 다 원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수만 명의 무리 앞에서 아이 도시락 하나를 놓고 감사하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이것은 환경을 보고 감사하신 것이 아니라 감사의 선택입니다. 예수님은 절대 부족한 상황, 절대빈곤의 상황에서 원망이나 불평이 아닌 감사를 선택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는 나를 따르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우리들은 어떤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감사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다니엘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은 유대인 청년으로 나라가 멸망할 때 바벨론으로 포로로 붙잡혀갔습니다. 남달리 영리하고 지혜로웠던 다니엘은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공부를 했고, 훗날 베벨론 나라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지혜로웠던 총리 다니엘은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한 간신들이 음모를 꾸며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려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 함정에 걸려든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굴 속에 던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다 알고 있던 다니엘은 어떻게 했습니까 구약성경 다니엘서 6장 10절에 보면“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 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지금 감사할 조건이 아닙니다. 감사할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감사했습니다. 이것은 환경을 보고 감사하신 것이 아니라 감사의 선택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 던져졌지만 천사가 나타나 사자의 입을 막으므로 무사했습니다.
간신들의 음모임을 뒤늦게 알았던 왕이 그 간신들을 사자 굴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 다니엘서 6장 24절에 기록하기를“왕이 명을 내려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져 넣게 하였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숴뜨렸더라. ”고 했습니다. 감사를 선택했더니 감사한 상황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감사할만한 상황을 보고 감사한 것이 아니라 전혀 감사할 상황이 아니지만 먼저 감사했을 때 감사할 상황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미국의 청교도들이 감사한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신대륙에 도착한 그들이 도착한 플리머스라고 하는 곳은 미국 동북부에 위치해 있는 아주 추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해 겨울, 혹독한 대륙의 추위와 굶주림, 질병, 그리고 인디언들의 습격 속에서 거의 과반수의 사람들이 죽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청교도들은 절망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과 개척의 의지를 불태우며 정착의 꿈을 펼쳐 나갔습니다.
봄이 되자 청교도들은 밭을 일구어 유럽에서 가지고 온 밀과 완두콩과 호박 등을 심었습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인디언들이 몰려와 그것들을 다 짓밟아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청교도들은 그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금식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상황을 돌보아 주십시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그런데도 그들의 상황은 그리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질병도 여전하고, 인디언들의 공격도 여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시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되자 그들은 또다시 금식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농부가 이런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금식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생각을 달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비록 농사는 흉년이 들고 형제자매들이 병마로 쓰러지는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 가운데서도 우리가 감사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유럽에서 신앙의 자유를 잃고 얼마나 쫓겨 다녔습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비록 다른 여건은 좋지 않지만, 신앙의 자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 앞에는 광대한 대지가 열려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금식 대신 감사의 기간을 정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농부의 말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기도주간을 선포하는 대신 감사의 주간을 선포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그 감사주간이 끝나고 얼마 후였습니다. 인디언들이 찾아서 상호협력과 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했습니다.
그 후 청교도들은 인디언들과 우호적 공존관계를 맺고, 밀과 옥수수 경작방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해 가을에는 아주 풍성한 추수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자기들을 도와준 인디언들을 초청해 함께 추수감사절을 지키며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근대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청교도의 감사도 상황을 보고 감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망이나 불평을 배제하고 선택한 감사였습니다. 감사를 선택했더니 감사한 상황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감사할만한 상황을 보고 감사한 것이 아니라 전혀 감사할 상황이 아니지만 먼저 감사했을 때 감사할 상황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이었던 이무라 가즈오씨는 일본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오사까의 한 병원 내과의사로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섬유육종 암으로 오른편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한 쪽 다리를 절단한 후 초인적인 인내로 의사의 사명을 다하다가 암이 폐로 전이 되어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기록한 편지와 글이“종이학”이란 책으로 출판되어 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종이학이란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져 일본 열도에 커다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책에서“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가보다”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습니다. 그가 남긴 글은 이렇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귀한 것에 사람들은 왜 감사할 줄 모를까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이,
형제가 있고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손이 둘이고 다리가 둘이고, 손을 뻗어 무엇을 잡을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것,
이것보다 더 멋지고 감사한 일이 있을까!
그런데 아름답고 귀한 것이 아무도 감사할 줄 모르고
그거야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루 세끼 밥 먹고, 밤이 오면 잠자고, 다음날 아침을 맞는다는 것,
웃고, 울고, 노래하고, 소리치고, 뛰어 다닌다는 것,
산에 오르고, 바닷가를 거닌다는 것,
온갖 자연의 멋지고 아름다운 것에 아무도 감사할 줄 모르고 산다는 것,
너무나 희안한 일이 아닌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눈물 나게 소중한 것인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나는 것인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아무도 무른다.
그걸 아는 사람은 마침내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려 본 사람만 알 수 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가지고 있던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과 주위를 살펴보면 감사해야할 일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범사에 감사하라. ”하셨습니다. 감사는 좋은 환경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감사를 선택할 때 감사한 환경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2. 감사는 능력입니다.
데보라 노빌이라는 사람이 쓴“감사의 힘”이라는 책에서 그는 말하기를“감사 합니다, 라는 짧은 말이 우리 인생 전체를 바꿀만한 강력한 힘이 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더 나아가“감사라는 말은 그 사람 속에 잠재된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비밀열쇠”라고 했습니다.
1. 감사는 행복을 안겨주는 힘이 있습니다.
모두가 소원하는 행복은 어디서 올까요 전혀 부족함이나 불편함이 없는 잘 갖춰진 완벽한 환경을 통해서 올까요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치스러운 환경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은 종이 위에 태양의 그림을 그려놓고 그 그림에서 햇빛이 발산되기를 기다리는 어리석음과 같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부족함이 없는 환경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극한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가 깨닫고 한 말은“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 1:2,14)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결코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싹이 나고 자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감사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행복은 외부적인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탐욕에 눈이 가려 이미 얻은 것, 현재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잊어버리고, 현재 없는 것, 못하는 것만 생각한다면 천하를 얻는다 해도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참된 만족이 없을 것입니다.
어려운 가운데에도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 가는 아내의 정성을 생각한다면 아내에 대한 감사한 생각이 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집안 식구들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오는 남편이 있습니다. 남편의 성실한 삶을 생각한다면 비록 수입이 많지 못하다 할지라도 남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솟아날 것입니다. 또한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나는 자녀의 모습을 본다면 비록 학교에서 1등은 못한다 할지라도 감사한 마음이 가득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나를 이만큼 키워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부모님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사무쳐 올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신 은혜, 내 영혼과 육신을 이날까지 지켜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나로 하여금 순간마다 깨닫게 하시며 새 힘을 주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감사함이 넘칠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는 미움이 사라집니다.
감사하는 마음에는 이해와 사랑이 솟아납니다.
감사하는 마음에는 불평과 원망이 사라집니다. 이러한 마음에 만족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에 환경과 상관없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행복을 바라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범사에 감사하라. ”고 하셨습니다.
2. 감사는 건강을 유지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미국의 젊은 화가“오너 숄맨”은 결혼을 하고, 그의 아내가 잉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숄맨은 임파선 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숄맨은 아내에게 조용히 말을 했습니다. "우리 감사합시다. 이때까지 살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시다. 우리 부부의 좋은 만남과 사랑을 허락하신 것을 감사합시다. 바로 죽지 않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시다. ”그리고 그는 남은 3개월 동안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예수님의 성화를 그리기로 결정하고 정성을 다해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 그림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팔려나갔습니다. 그의 생명은 3개월의 한시적인 생명이라고 의사는 진단을 했는데, 30년이 지나도 그는 죽지 않고 건강했습니다.
그의 주치의인 존 헨리는 말하기를“감사는 최고의 항암제이다. 감사는 최고의 해독제이다. 감사는 최고의 치료제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감사함의 능력입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맑은 음성과 화면을 보려면 채널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람의 몸에도 생체 리듬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생체 리듬을 감사함에 맞추어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할 때 인체의 기능이 원활할 뿐 아니라 건강하게 됩니다. 반면 불평하며 원망하게 될 때, 인체의 리듬이 깨어지며 건강을 약화시킵니다.
사람의 몸에 정상적인 산소가 부족하게 되면 암이 발생하기 쉬운 환경을 이루게 되는데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미움이나 증오 불만 같은 부정적인 마음이 생기게 되면 체내의 정상적인 산소를 소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감정 중 산소를 가장 많이 소비시키는 것이 증오라고 합니다. 평안한 마음과 기쁨이 넘치는 삶,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고 만물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즉 감사할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이라고 합니다. 감사는 인체의 신진대사를 정상화해 면역력을 높여주고 자연 치유력을 활성화시켜 건강한 삶을 지켜주는 열쇠가 된다는 것입니다.
3.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시편 50편 23절에“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하셨습니다.
수만 명 앞에 어린아이 도시락인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라는 절대 부족 속에 감사를 선택하여 감사하신 예수님 앞에 하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이 12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조금 전 말씀드린 다니엘의 경우나 청교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 힘력자(力)를 쓰는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권력(勸力), 재력(財力), 실력(實力), 체력(體力)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힘이 있습니다. 감사력(感謝力)입니다. 감사의 힘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힘입니다.
사람의 말이나 삶은 모두가 심는 씨앗과 같습니다. 감사의 씨앗을 심으면 감사의 열매가 맺습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는 목사는 말하기를“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면 부님께서 천국을 주신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면 레벨이 높아집니다. 작은 것을 보고 감사하면 더 큰 것을 주시고, 더 큰 것 주심에 감사하면 그보다 더 큰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느 분이 며칠간의 출장에서 돌아와 오래간 만에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유치원에서 배웠는지“감사히 먹겠습니다. ”하며 수저를 들었습니다. 어찌나 예쁘던지, 우리 식구들은 이제 앞으로 항상 감사의 인사를 하고 밥을 먹기로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식탁에 반찬이 달랑 두 가지만 올라 왔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불평도 못하고, 그래도 감사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자기도 모르게 한 말이“간신히 먹겠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범사에 감사함의 조건을 찾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파멸로 이끄는 사탄의 미혹입니다.
감사는 선택입니다.
감사는 능력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행복이 임하는 능력입니다.
감사는 육신의 건강이 임하는 능력입니다.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감사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일에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감사로 사람의 심령을 시험하십니다. 감사는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는 인격의 한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되 범사에 감사를 선택하시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힘입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교회에서 지키는 추수감사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을 앞둔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구하고 생각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내게 주신 은혜가 뭐지 내 월급이 올랐나 승진이 됐나 건강이 좋아졌나 뭘 감사하라는 거지 우리는 이렇게 감사의 조건과 감사의 제목을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행복의 대상이나 행복의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대상과 조건을 뛰어넘어 그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행복을 가려내고 행복을 취하는 재능,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삶에 대하여 본을 보이셨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병이어(5餠2魚)의 기적에 대한 말씀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배불리 먹은 사람의 수가 여자와 어린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모든 수를 다 합하면 최소한 이일만 명은 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무리 앞에 먹을 음식은 고작 어린아이 도시락 하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턱없이 모자라는 음식 앞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본문 19절에“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라고 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라는 것은 유대 가정에서는 가장이면 누구나 하는 평범한 일이었습니다. 탈무드에 의하면“감사 없이 무엇을 즐기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께 강도짓을 하는 것과 같다. ”라고 할 정도로 감사가 일상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축사하다”의 뜻은 원어의 의미로“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한다. ”는 것입니다. 아무리 감사가 일상화되었다 할지라도 이만 명이 넘는 무리 앞에서 어린아이 도시락 하나를 앞에 두고 감사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감사의 대상이 아니라 악조건 속에서 감사를 끄집어내는 재능인 것입니다. 악조건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예수님의 감사함이 우리들에게 주는 감사의 교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감사는 선택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감사는 대상이 아니라 감사를 끄집어내는 재능”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는 것, 친구를 맺는 것, 내가 다니며 배운 학교, 내가 소속된 교회, 내가 다니는 직장, 이 모두가 다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이런 것만 아니라 감사하느냐 아니면 원망하고 불평하느냐 하는 것도 선택입니다. 황경이 좋다하여 다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환경이 좋지 않다고 하여 다 원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수만 명의 무리 앞에서 아이 도시락 하나를 놓고 감사하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이것은 환경을 보고 감사하신 것이 아니라 감사의 선택입니다. 예수님은 절대 부족한 상황, 절대빈곤의 상황에서 원망이나 불평이 아닌 감사를 선택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는 나를 따르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우리들은 어떤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감사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다니엘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은 유대인 청년으로 나라가 멸망할 때 바벨론으로 포로로 붙잡혀갔습니다. 남달리 영리하고 지혜로웠던 다니엘은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공부를 했고, 훗날 베벨론 나라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지혜로웠던 총리 다니엘은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한 간신들이 음모를 꾸며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려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 함정에 걸려든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굴 속에 던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다 알고 있던 다니엘은 어떻게 했습니까 구약성경 다니엘서 6장 10절에 보면“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 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지금 감사할 조건이 아닙니다. 감사할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감사했습니다. 이것은 환경을 보고 감사하신 것이 아니라 감사의 선택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 던져졌지만 천사가 나타나 사자의 입을 막으므로 무사했습니다.
간신들의 음모임을 뒤늦게 알았던 왕이 그 간신들을 사자 굴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 다니엘서 6장 24절에 기록하기를“왕이 명을 내려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져 넣게 하였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숴뜨렸더라. ”고 했습니다. 감사를 선택했더니 감사한 상황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감사할만한 상황을 보고 감사한 것이 아니라 전혀 감사할 상황이 아니지만 먼저 감사했을 때 감사할 상황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미국의 청교도들이 감사한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신대륙에 도착한 그들이 도착한 플리머스라고 하는 곳은 미국 동북부에 위치해 있는 아주 추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해 겨울, 혹독한 대륙의 추위와 굶주림, 질병, 그리고 인디언들의 습격 속에서 거의 과반수의 사람들이 죽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청교도들은 절망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과 개척의 의지를 불태우며 정착의 꿈을 펼쳐 나갔습니다.
봄이 되자 청교도들은 밭을 일구어 유럽에서 가지고 온 밀과 완두콩과 호박 등을 심었습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인디언들이 몰려와 그것들을 다 짓밟아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청교도들은 그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금식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상황을 돌보아 주십시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그런데도 그들의 상황은 그리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질병도 여전하고, 인디언들의 공격도 여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시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되자 그들은 또다시 금식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농부가 이런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금식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생각을 달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비록 농사는 흉년이 들고 형제자매들이 병마로 쓰러지는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 가운데서도 우리가 감사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유럽에서 신앙의 자유를 잃고 얼마나 쫓겨 다녔습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비록 다른 여건은 좋지 않지만, 신앙의 자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 앞에는 광대한 대지가 열려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금식 대신 감사의 기간을 정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농부의 말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기도주간을 선포하는 대신 감사의 주간을 선포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그 감사주간이 끝나고 얼마 후였습니다. 인디언들이 찾아서 상호협력과 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했습니다.
그 후 청교도들은 인디언들과 우호적 공존관계를 맺고, 밀과 옥수수 경작방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해 가을에는 아주 풍성한 추수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자기들을 도와준 인디언들을 초청해 함께 추수감사절을 지키며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근대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청교도의 감사도 상황을 보고 감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망이나 불평을 배제하고 선택한 감사였습니다. 감사를 선택했더니 감사한 상황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감사할만한 상황을 보고 감사한 것이 아니라 전혀 감사할 상황이 아니지만 먼저 감사했을 때 감사할 상황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이었던 이무라 가즈오씨는 일본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오사까의 한 병원 내과의사로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섬유육종 암으로 오른편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한 쪽 다리를 절단한 후 초인적인 인내로 의사의 사명을 다하다가 암이 폐로 전이 되어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기록한 편지와 글이“종이학”이란 책으로 출판되어 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종이학이란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져 일본 열도에 커다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책에서“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가보다”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습니다. 그가 남긴 글은 이렇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귀한 것에 사람들은 왜 감사할 줄 모를까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이,
형제가 있고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손이 둘이고 다리가 둘이고, 손을 뻗어 무엇을 잡을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것,
이것보다 더 멋지고 감사한 일이 있을까!
그런데 아름답고 귀한 것이 아무도 감사할 줄 모르고
그거야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루 세끼 밥 먹고, 밤이 오면 잠자고, 다음날 아침을 맞는다는 것,
웃고, 울고, 노래하고, 소리치고, 뛰어 다닌다는 것,
산에 오르고, 바닷가를 거닌다는 것,
온갖 자연의 멋지고 아름다운 것에 아무도 감사할 줄 모르고 산다는 것,
너무나 희안한 일이 아닌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눈물 나게 소중한 것인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나는 것인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아무도 무른다.
그걸 아는 사람은 마침내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려 본 사람만 알 수 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가지고 있던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과 주위를 살펴보면 감사해야할 일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범사에 감사하라. ”하셨습니다. 감사는 좋은 환경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감사를 선택할 때 감사한 환경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2. 감사는 능력입니다.
데보라 노빌이라는 사람이 쓴“감사의 힘”이라는 책에서 그는 말하기를“감사 합니다, 라는 짧은 말이 우리 인생 전체를 바꿀만한 강력한 힘이 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더 나아가“감사라는 말은 그 사람 속에 잠재된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비밀열쇠”라고 했습니다.
1. 감사는 행복을 안겨주는 힘이 있습니다.
모두가 소원하는 행복은 어디서 올까요 전혀 부족함이나 불편함이 없는 잘 갖춰진 완벽한 환경을 통해서 올까요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치스러운 환경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은 종이 위에 태양의 그림을 그려놓고 그 그림에서 햇빛이 발산되기를 기다리는 어리석음과 같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부족함이 없는 환경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극한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가 깨닫고 한 말은“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 1:2,14)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결코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싹이 나고 자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감사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행복은 외부적인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탐욕에 눈이 가려 이미 얻은 것, 현재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잊어버리고, 현재 없는 것, 못하는 것만 생각한다면 천하를 얻는다 해도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참된 만족이 없을 것입니다.
어려운 가운데에도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 가는 아내의 정성을 생각한다면 아내에 대한 감사한 생각이 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집안 식구들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오는 남편이 있습니다. 남편의 성실한 삶을 생각한다면 비록 수입이 많지 못하다 할지라도 남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솟아날 것입니다. 또한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나는 자녀의 모습을 본다면 비록 학교에서 1등은 못한다 할지라도 감사한 마음이 가득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나를 이만큼 키워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부모님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사무쳐 올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신 은혜, 내 영혼과 육신을 이날까지 지켜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나로 하여금 순간마다 깨닫게 하시며 새 힘을 주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감사함이 넘칠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는 미움이 사라집니다.
감사하는 마음에는 이해와 사랑이 솟아납니다.
감사하는 마음에는 불평과 원망이 사라집니다. 이러한 마음에 만족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에 환경과 상관없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행복을 바라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범사에 감사하라. ”고 하셨습니다.
2. 감사는 건강을 유지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미국의 젊은 화가“오너 숄맨”은 결혼을 하고, 그의 아내가 잉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숄맨은 임파선 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숄맨은 아내에게 조용히 말을 했습니다. "우리 감사합시다. 이때까지 살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시다. 우리 부부의 좋은 만남과 사랑을 허락하신 것을 감사합시다. 바로 죽지 않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시다. ”그리고 그는 남은 3개월 동안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예수님의 성화를 그리기로 결정하고 정성을 다해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 그림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팔려나갔습니다. 그의 생명은 3개월의 한시적인 생명이라고 의사는 진단을 했는데, 30년이 지나도 그는 죽지 않고 건강했습니다.
그의 주치의인 존 헨리는 말하기를“감사는 최고의 항암제이다. 감사는 최고의 해독제이다. 감사는 최고의 치료제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감사함의 능력입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맑은 음성과 화면을 보려면 채널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람의 몸에도 생체 리듬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생체 리듬을 감사함에 맞추어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할 때 인체의 기능이 원활할 뿐 아니라 건강하게 됩니다. 반면 불평하며 원망하게 될 때, 인체의 리듬이 깨어지며 건강을 약화시킵니다.
사람의 몸에 정상적인 산소가 부족하게 되면 암이 발생하기 쉬운 환경을 이루게 되는데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미움이나 증오 불만 같은 부정적인 마음이 생기게 되면 체내의 정상적인 산소를 소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감정 중 산소를 가장 많이 소비시키는 것이 증오라고 합니다. 평안한 마음과 기쁨이 넘치는 삶,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고 만물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즉 감사할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이라고 합니다. 감사는 인체의 신진대사를 정상화해 면역력을 높여주고 자연 치유력을 활성화시켜 건강한 삶을 지켜주는 열쇠가 된다는 것입니다.
3.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시편 50편 23절에“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하셨습니다.
수만 명 앞에 어린아이 도시락인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라는 절대 부족 속에 감사를 선택하여 감사하신 예수님 앞에 하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이 12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조금 전 말씀드린 다니엘의 경우나 청교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 힘력자(力)를 쓰는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권력(勸力), 재력(財力), 실력(實力), 체력(體力)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힘이 있습니다. 감사력(感謝力)입니다. 감사의 힘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힘입니다.
사람의 말이나 삶은 모두가 심는 씨앗과 같습니다. 감사의 씨앗을 심으면 감사의 열매가 맺습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는 목사는 말하기를“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면 부님께서 천국을 주신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면 레벨이 높아집니다. 작은 것을 보고 감사하면 더 큰 것을 주시고, 더 큰 것 주심에 감사하면 그보다 더 큰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느 분이 며칠간의 출장에서 돌아와 오래간 만에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유치원에서 배웠는지“감사히 먹겠습니다. ”하며 수저를 들었습니다. 어찌나 예쁘던지, 우리 식구들은 이제 앞으로 항상 감사의 인사를 하고 밥을 먹기로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식탁에 반찬이 달랑 두 가지만 올라 왔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불평도 못하고, 그래도 감사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자기도 모르게 한 말이“간신히 먹겠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범사에 감사함의 조건을 찾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파멸로 이끄는 사탄의 미혹입니다.
감사는 선택입니다.
감사는 능력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행복이 임하는 능력입니다.
감사는 육신의 건강이 임하는 능력입니다.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감사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일에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감사로 사람의 심령을 시험하십니다. 감사는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는 인격의 한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되 범사에 감사를 선택하시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힘입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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