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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불만모드에서 감사모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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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난 6개월을 지켜주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원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밀이나 보리를 처음 거두고 나서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부터 시작됐습니다. 비록 오늘날 우리들이 보리나 밀 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6개월을 뒤돌아보며 여호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오늘 말씀의 키워드는 ‘감사’입니다. 미국에서는 말을 처음 배울 때 ‘아빠, 엄마’ 다음에 가르치는 단어가 ‘감사’라고 합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땡큐(Thank you)’라는 단어가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에도 땡큐를 연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말에 참 인색합니다. 지난 6개월 동안 내 입술에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얼마나 하셨는지요 가족들을 향하여, 교우들을 향하여, 직장 동료들에게, 이 사회와 나라를 향하여 몇 번이나 감사의 표현과 고백을 하셨는지요
지금은 여성시대 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미고사 운동’을 펴는 것을 들었습니다.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이 말을 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마음 문이 열린 사람은 쉽지만 닫힌 마음, 강퍅한 마음을 가진 분들이 이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행복하기를 원하신다면 ‘미고사’를 생활화하십시오. 우리 한 번 실습합니다. ‘여보 미안해! 여보 고마워! 여보 사랑해’ (젊은 분들은 ‘자기’를 넣어서)
성경은 말세가 되면 사람들의 마음에 감사가 사라진다고 지적합니다. 우리는 지금 ‘불만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회 곳곳에 불만의 소리만이 넘쳐납니다. 가정에도, 교회에도, 학교에도, 공장에도, 사무실에도, 시청 앞 광장에도 불만의 소리가 넘칩니다. 모두가 불만의 소리를 높이는 이 시대에 감사하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모드(Mode)를 어디에 맞추어 놓느냐 입니다. 어떤 분은 삶의 주파수가 항상 불만 모드에 맞춰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원망하고 불평할 준비가 돼있습니다. 이런 분의 모토는 “나는 불만스럽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소위 불만 중독증에 걸린 분입니다.
매사를 약간 삐딱하게 봅니다. 인생의 카메라 렌즈를 항상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에 비춥니다. 매사가 원망이고 불평입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고 있습니다.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 때문에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남 잘되는 것도 맘에 들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불만스럽습니다. 항상 이마에 갈매기를 그리고 삽니다. 양 볼에는 ‘왕짜증’이 붙어 있습니다. 이런 분은 후에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웨 궤양에 걸리거나 각종 질병에 시달립니다. 혹시 이것이 나를 보고 하는 말이구나 생각하면 빨리 감사모드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감사모드는 삶을 긍정적으로 보는 태도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더 좋은 것을 바라보는 적극적 태도입니다.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나는 감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감사하는 태도는 삶 전체를 아름답게 비추는 햇볕과 같습니다.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보고를 여는 열쇠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감사 모드에 항상 초점을 맞춥니다.
신앙생활은 한 마디로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어떤 불만족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믿음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젠가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높여 주실 것을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불만모드를 가지고 원망과 불평을 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노동시장에서 일꾼을 모집해서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 (해 뜰 때)’에 일꾼들을 구하여 하루 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일손이 부족했든지 주인은 ‘제 3시(해 뜬 후 3시간이 지난 때)’에도, ‘제 6시(정오 때)’에도, ‘제9시(오후 3시)’에도 노동시장에 나와 일꾼을 모아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이스라엘에서 포도를 거두는 시기에는 매우 바쁩니다.
 익은 포도를 제 때에 거둬들이지 못하면 손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11시 즉 해지기 한 시간 전에 시장에 나가보니 그때까지도 일거리를 얻지 못하고 놀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주인은 해질 때가 다 되었지만 그 일꾼을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하루해가 지고 일이 끝난 다음 일군들을 모아놓고 품삯을 나눠줍니다. 먼저 제 11시에 온 일군, 즉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그 때 이른 아침에 온 일군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면 우리는 아무리 못 받아도 다섯 데나리온 정도는 받겠지’ 그러나 그 생각은 오산이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의 손에 쥐어진 돈은 한 데나리온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투덜거립니다. 불만이 가득합니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는가” “어떻게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종일 뙤약볕에서 수고한 사람을 같이 취급한단 말인가” 그때 주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주님의 이 비유는 누구를 향해서 하신 말씀일까요 당시 영적인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바리새인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교훈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9장의 내용과 연결이 됩니다. 부자 청년이 영생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근심하며 갑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낙심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여호와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 말씀하십니다.
이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27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 집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여러 배의 복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30절)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연속선상에서 오늘 비유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 사이에 영적인 특권의식이 싹트고 있음을 아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우리는 무슨 상을 받을 수 있습니까 무언가 대가를 바라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 모습을 보십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기 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한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보다 ‘내가’ 앞서고,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그 크신 은혜와 사랑보다 내가 주님을 위해 행한 공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영적으로 넘어지는 상태입니다.
주님은 이런 영적인 자만심, 영적인 특권의식, 영적인 공로주의를 경계하시면서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마20:16) 예수님께서는 겸손히 허리를 동이고 끝까지 충성스럽게 일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너보다 훨씬 앞서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불평과 불만의 소리가 높아만 가는 이 시대에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로, 비교모드에서 창조모드로 전환하라.
제일 먼저 온 자들이 원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10절에 대답이 있습니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 씩 받은지라. ” 바로 비교가 원망과 불평을 가져옵니다. 처음 계약할 때부터 이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일을 마치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해지기 한 시간 전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은 것을 보고 비교한 것입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과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물론 비합리적입니다. 그러나 처음 계약만을 생각하면 억울할 것도 없고, 불평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비교하는 순간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바로 비교입니다. 내 안에 있는 원망과 불평의 대부분은 비교로부터 출발합니다. 내가 누군가와 비교하는 순간 열등감이 생기고, 질투가 일어납니다.
여자 분들이 동창회 모임에 다녀오면 괜히 신경질이 납니다. 학교 다닐 때 자기보다 공부도 못한 친구가 남편 잘 만나서 럭셔리한 패션에 고급 차를 몰고 나타납니다. 남편 자랑을 늘어지게 하다가 오늘은 내가 제일 고급 음식으로 쏘겠다고 합니다. 따라가서 먹기는 먹는데 맛이 없습니다. 괜히 열등감이 발동합니다. 화가 납니다. 집에 오면 반갑게 달려오는 강아지를 걷어찹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공연히 바가지를 긁습니다. 지금까지는 남편이 최고인줄 알았는데 공부 못하던 친구와 자기를 비교한 순간부터 모든 것이 불평거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암 중에서 제일 무서운 암이 바로 비교암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전에 싱가폴에 있을 때 백화점에서 TV를 샀습니다. 당시에는 어느 정도 흥정이 가능했습니다. 비싼 물건이기에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아서 가격비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싸게 부른 곳에서 가격을 흥정했습니다. 좋지 않은 영어실력으로 손짓 발짓 다해가면서 값을 깎았습니다. TV를 싼 가격에 샀다는 자부심에 기뻤습니다. TV를 볼 때마다 흐뭇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에 친구 목사님이 오더니 얼마 주고 샀냐고 묻기에 자랑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내가 산값보다 훨씬 더 싸게 산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속이 상하고, 화가 나던지요 그 다음부터는 TV보기가 싫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친구에게 얼마주고 샀냐고 절대 묻지 마세요. 혹시 실수로 물어 봤다면 절대로 바가지 썼다고 말하지 마세요. 저렴하게 잘 샀다고 말해 주세요. 그게 지혜입니다.
마귀는 서로를 비교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상하게 하고, 질투와 시기심을 유발합니다. 어떻게 하면 비교의식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창조의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필요에 의해 지으셨습니다. 얼굴도 다르고 개성도 기질도 다르고 은사도 다릅니다. 인생의 가는 길도 다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독특한 소명이 있습니다. 그 소명을 발견하고 내가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 됩니다. 내가 꼭 옆집 아줌마처럼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친구를 흉내 낼 필요도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인생의 색깔을 따라 살면 됩니다. 그것이 인생의 멋이요 행복입니다.
자신의 삶의 방식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내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창조모드로 바꾸십시오. 그 속에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아직도 비교모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이 시간 창조모드로 전환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작품임을 인정하십시오. 비교하지 말고, 나의 나됨을 감사하며 즐기십시오. 비교의식의 노예가 되는 순간 우리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최고의 걸작품임을 믿으며 사는 것이 바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비결인 줄 믿습니다.
 둘째로, 보상모드에서 은혜모드로 전환하라.
제일 먼저 온 자가 감사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공로의식, 보상의식입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사람보다 일찍 와서 일했기에 당연히 많은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심리가 작용합니다. 물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을 하는 목적이 되면 문제입니다.
반대로 제일 마지막에 부름 받은 일군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먼저 온 자와는 한 데나리온이라는 품삯을 약속하고 불렀지만 마지막에 온 자와는 품삯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일꾼들은 진작 불려갔는데 왜 이 일꾼은 불러 주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아마도 몸이 약하거나, 나이가 들었거나, 뭔가 일하기에는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한 상황인데 아무도 자기를 불러주지 않습니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선택받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집안 걱정에 마음이 천근만근 무겁습니다. 그 순간 포도원 주인이 오더니 자기를 부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절망의 상황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것이죠. 만약 여러분이 마지막에 부름받은 일군이라면 어떤 자세로 일했을까요
자기를 불러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서 열심히 일했을 것입니다. 해가 떨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최선을 다해 일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제일 먼저 와서 일하는 품군과 마지막 품군의 일에 대한 태도는 너무나 다릅니다. 먼저 온 일군은 하루를 떼우면 품삯을 받는다는 보상 심리로 일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온 일군은 나같은 사람을 품군으로 써준 것 만으로도 감사하며 일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삶입니다.
건강한 교회에는 보상심리로 일하는 사람보다 은혜에 사로잡혀 일하는 일군이 많습니다. 나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을 불러서 이렇게 소중한 일을 맡기시다니 감사하기도 하지. 내가 진작 더 젊었을 때에 부름받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제라도 불러서 써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하면 좋을까요 이런 태도를 가지고 일하는 일군이 넘치는 성지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에 온 일군이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을 때 어떠했을까요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너무나 송구스럽고, 고마운 마음으로 얼굴을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돈을 받아야 할지 아니면 받지 말아야 할지’ 당황했을 것입니다.
주인이 베풀어 준 은혜를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기회만 되면 은혜를 갚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이 주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우리가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것은 하루 종일 일해서 얻은 품삯처럼 우리가 뭔가를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 공로나 의로운 행위로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겨우 한 시간도 채 일하지 않은 일꾼처럼 우리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입에서는 ‘감사합니다! 할렐루야!’라는 말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교회 봉사는 바로 이런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들이 주의 일을 하면서도 때때로 원망하고 불평할까요 공로의식 때문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많이 수고했다는 겁니다. 저 사람보다 먼저 와서 10시간이나 더 넘게 일했다는 겁니다. 교회 안에 이러한 공로의식 때문에 고생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불평은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알아서 모셔야지, 내가 이만큼이나 했는데 왜 교회에서 알아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리더스다이제스트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목회자들의 불만 1호는 내가 그렇게 수고하고 사역했는데, 왜 교인들이 나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는냐 입니다. 반대로 교인들의 불만 1호는 내가 이렇게 이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했는데, 우리 목사님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사도 불평이 있고, 교인도 불평이 있습니다. 공로의식 때문입니다. 무언가 보상받고자 하는 보상심리입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나를 불러주신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첫 사랑의 기쁨과 감격의 은혜가 넘쳤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보상모드나 공로모드에서 빨리 은혜의 모드로 전환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복된 신앙생활을 하는 비결인 줄 믿습니다.
 셋째로, 불만모드에서 감사모드로 전환하라.
제일 먼저 불려온 일군은 비교하고, 보상심리에 사로잡혀서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반응을 생각해 봅니다. 먼저 온 품군처럼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럴 수가 있습니까” “왜 우리를 저 늦게 온 사람과 똑같이 취급합니까” 원망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도 얘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주인님, 감사합니다. 저 형제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 친구는 어제에도 일을 못해 집안 식구들은 쫄쫄 굶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저희들이 주인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저 형제보기가 얼마나 민망했는지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면서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우리는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속이 상해서 소화도 제대로 못시키지 않았는지요. 우리는 경쟁하는 상대가 잘 안되면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지 않았는지요.
D. L.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수가 잘못되었을 때 ‘그것 참 고소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미 영적으로 병든 것이다. ”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내안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고, 아픔이 있을지라도 나를 불러주시고, 여기까지 함께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불만모드를 이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모드로 전환하십시오. 그것이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더하여 넘치게 하시는 복을 주십니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마음의 평강을 주십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좋은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수도원과 감옥의 차이를 비교해보십시오. 환경으로 보면 수도원과 감옥은 비슷합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습니다. 수도원에는 평안과 찬양이 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는 불만과 욕설이 있습니다. 수도원과 감옥의 차이는 바로 감사입니다. 똑같은 환경에서 살지만 감사가 있으면 천국에 사는 것이고, 감사가 없으면 지옥에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6개월을 지켜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맥추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동안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감사는 행복한 습관이고, 하늘의 보고를 여는 열쇠입니다. 나의 삶에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입니다. 감사는 바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아직도 내 삶 가운데 원망과 불평이 있습니까 비교모드를 창조모드로, 보상모드를 은혜모드로, 불만모드를 감사모드로 전환하십시오. 감사는 0. 3초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슴으로 감사를 느끼는 시간이 0. 3초입니다. 감사를 위해 매 순간 0. 3초를 투자하십시오. 감사의 생각과 감사의 말과 감사의 행동을 하십시오. 그 속에 더하여 넘치게 하시는 놀라운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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