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TOP
DOWN

[감사절] 감사요법을 아십니까?

본문

“감사요법”이라는 말을 들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돈 베이커라는 크리스챤 작가이며 심리학자인 분이 이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온갖 걱정거리들로 고심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 사무실 직원들 월급 챙겨줄 일이며, 자신의 아내가 최근에 병원에서 MRI검사를 해 놓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일이며, 집에 들어가면 가장인 자신이 손봐야 할 산더미 같은 일거리들이며, 신문을 볼 때 마다 정치와 경제가 너무나 답답하게 돌아가고 있는 일이며 기타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하여 걱정이 끊임이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자신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알고 있는 사실과 자신의 삶에 몰려오는 현실의 염려들 사이에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합니다.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만 염려가 되는 자신의 현실이 더욱 염려스럽더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아내까지 소화불량에 불면증에 호흡곤란에 위경련에 우울증까지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 부부가 어느 날 완벽한 치료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가장 부작용이 없고 안전하고 확실한 치료법인 “탱스테라피”(감사요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야 말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 감사요법을 적절히 사용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식사 앞에서의 감사’였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 ‘또 잔을 가지 사 사례하시고’(마26:27) 하였습니다. 이것은 감사기도를 올리시고 떡과 잔을 나누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 앞에서는 ‘먼저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마14:19) 떡을 나눠주셨습니다. 이것도 역시 감사기도를 올리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예수님에게 있어서 특별하고도 거룩한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은 ‘감사하는 습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실 때,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시라면 일용할 양식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앞에 감사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이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먹을 것이 있음에 감사하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지금 전 세계 인구의 14% 다시 말하면, 8명중의 한 사람은 당장 먹을 양식을 구하지 못하여 고민을 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매해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약 이천만 명가량이나 된다는 놀라운 통계가 우리들 앞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한 끼의 양식을 앞에 두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예수님의 감사는 “축복 앞에서의 감사”였습니다. 우리말 성경의 곳곳에 예수님의 기도를 “축사하시고”라고 번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감사’와 ‘축복’이 같은 말인 것처럼 혼용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무리 작은 식량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진 것임을 잘 알고 계셨고,
그래서 그분의 감사기도는 동시에 그 축복이 다시 나눠지길 원하시는 ‘축복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기쁨은 나누면 백가 되고, 감사도 나누면 배가 되며, 이러한 감사와 기쁨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나눠지기를 기도하면 그 기도는 또 다른 축복을 불러온다고 하는 신비를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오병이어의 본질입니다.
19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 무리를 명하여 잔디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감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여러분 가만히 보면, 지금의 이 상황, 즉 이렇게 많은 무리에게 먹을 것이라곤 겨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뿐인 상황에서 “감사”한다는 것은 매우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거의 2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먹이기에 턱없이 부족한 이 보잘 것 없는 작은 식량을 앞에 두고 예수님은 감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단순히 예수님이 어린아이의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2만 명을 먹이신 기적의 사건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차라리 “감사로 인하여 일어난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 유명한 스펄젼 목사님은 그 설교에서 “한 자루의 촛불을 인하여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별빛을 주시고 별빛을 인하여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인하여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인하여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조차 필요치 않은 천국을 주신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어떠한가.
 남들은 햇빛을 쪼이는데 난 겨우 달빛밖에 없다고 불만이고, 남들은 달빛이라도 있는데 난 겨우 별빛에 의지해야 하는거냐고 불만이고, 남들은 별빛이라도 바라볼 수 있는데 난 이 촛불하나에 만족해야 하겠냐고 툴툴거리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축복임을 스스로 깨닫고 살아갈 때, 예수님이 그런 것 처럼 즉각적으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감사는 또 다른 축복과 기적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 처럼, 사람이 자신의현실속에서 감사를 잃고 살아가는 것은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나로서는 이것만 해도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 하고 살아가는 사람과, ‘겨우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감사하겠냐. 내 주변에는 이것 이상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차이가 큽니다. 감사는 절대감사이어야 옳습니다. 남들이 나보다 못한 조건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래도 다행입니다. 하고 감사하는 것도 사실은 건강한 감사가 아닌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죄의식에 사로잡힌 세리의 주눅 든 모습을 자극하는 기도를 올립니다.
 ‘여호와 하나님 저는 이레에 한번씩 금식을 하고 십일조도 이렇게 드리고 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진정한 감사가 아니라 자기자랑이요 허세였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장애를 보면서, 난 저런 장애가 없으니 감사하다던가. 다른 사람의 가난함을 보면서, 그래도 난 저 사람보다는 나으니 감사 하다던가 다른 사람이 병들어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난 건강한 육신이 있으니 감사하다 하는 감사를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사실 이러한 감사는 건강한 감사가 아닙니다.
반대로 남들의 잘되고 축복을 받는데 자신은 그러한 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현실을 생각하면서 ‘감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건강한 신앙은 아닌 것입니다. 감사는 절대감사가 옳습니다. 남들이야 어떻든 간에 나의 오늘의 나 된 것이 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고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은 더하는 감사의 조건을 부어주실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절대감사는 병들어도 감사, 사고가 나도 감사, 물질적인 손해를 보아도 감사, 생활에 곤란을 당하여도 감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삶을 주신 것이 감사하고 내가 어찌되었든 이렇게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일용할 양식 앞에 감사’ ‘주신 축복 앞에 감사’였으며 또 한 가지는 “삶의 위기 앞에서의 감사”였습니다. 마26장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만찬이 끝나면, 자신이 체포당하시고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입니다. ’하신 것은 이제 곧 십자가상에 달려 살이 찢기고 피를 쏟아야 할 자신의 몸을 나눠 주고 계신다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마26:28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러한 인생 최대의 위기인 죽음을 앞에 두시고 예수님은 감사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요11장에 가서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의 현장에서 감사기도를 올리고 계십니다. 물론 예수님으로서는 이 죽음의 현장이 곧 부활의 현장이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라고 하는 현실은 참으로 슬픈 것이고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슬픔은 곧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요11장41절을 보면,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 하나입니다. ”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이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죽음의 현장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요, 이렇게 기도하면 그 기도를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은 들어주실 것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감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26장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감사하셨고, 요11장에서는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 감사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가 있으셨을까. 이 모든 상황들은 묵상해 보면, 참으로 두렵고 막막하고 가슴이 답답한 일이며, 절망과 좌절 그리고 포기로 이어질 상황이 아니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모든 상황을 뛰어넘는 감사의 비결을 알아낼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분명 범사에 감사하는 비결을 알아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모든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비결은 “과연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을 수 있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 슬프고 괴로운 현실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하시고자 하시는 원대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음을 믿고 계셨기에 ‘그래도 감사 합니다’할 수 있으셨다는 말입니다.
롬8:28의 바울의 고백이 이 시점에 딱 어울리는 구절이겠다 “우리가 알거니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을 믿는다면 예수님처럼 우리들도 어떤 상황(고통과 위기와 두려움과 낙망)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 변함없는 ‘절대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도 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인류에게 부활의 소망을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할 수 있으셨고,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도 인류구원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을 이뤄드릴 수 있음을 믿으셨기에 그 십자가의 피와 잔도 감사함으로 받으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도 우리의 삶에 부딪히는 모든 역경의 배후에 존재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을 수만 있다면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내가 겪는 이 문제와 위기 상황과 고민거리들 앞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보이지도 않고 이해도 될 수 없겠지만, 이제 곧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게 될 것이며 그것은 ‘나를 살리시기 위한 뜻’이심을 믿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감사하는 삶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인 살전5장18절에 등장하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더욱 공감이 될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 이니라”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 감사는 그저 그려려니 하는 감사로 지나가고 있진 않습니까 사망의 권세 앞에서도 주저함이 없이 ‘감사’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앞서 “감사요법”이라는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당부하셨건만, 우리들은 이러 저런 걱정거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소화불량, 신경성 위경련, 불면증, 우울증, 온갖 스트레스 등에 시달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모든 것을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을 알아냈다고 하질 않습니까. 더군다나 그 요법은 비용도 들지 않고, 후유증도 없고 게다가 완벽한 치료법이라고 하질 않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모든 일에 감사하고 모든 상황에 감사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죽음과 절망이라는 최악의 상황앞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기에 “감사 합니다”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만이 직접 활용하고 그 효과를 체험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참으로 보배로운 인생의 처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였다면, 바로 그사람은 인생의 고난을 승리로 죽음을 부활로 바꾸며 살아가는 기적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발견한 ‘감사치유법’이라는 글을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잘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당신이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면 감사하십시오. 그것은 당신에게 안정된 직장과 사업과 재산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몸무게가 늘어나서 옷이 맞지 않는다면 감사하십시오. 그것은 당신이 아직은 먹을 것이 넉넉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세탁할 옷가지들이 구석에 산더미처럼 쌓여있거든 감사하십시오. 적어도 당신은 갈아입을 옷의 여유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집에 고쳐야 할 수도꼭지가 있고, 청소해야 할 창고가 있고, 더러운 창문이 있다면 갑사 하십시오, 적어도 당신에게는 몸을 위탁할 집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말에 마트에 가서 주차할 곳이 없어서 옥상까지 올라갔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 잠시라도 걸어갈 운동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나라를 잘못 다스려서 못마땅하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개인의 의사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뒷자리에 앉아서 찬송하는 분의 음정과 박자가 엉망이라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의 청력이 아직은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울려대는 자명종 시계소리가 짜증스럽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일어나서 가야할 곳,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루해가 저물었을 때, 온몸이 나른하고 피곤하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오늘도 하루를 허송세월하지 않고 뭔가 생산적으로 살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서로 얼굴을 대할 때 마다, 찡그리면서 ‘날 위해 기도 좀 해줘요’하기 보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기도 할 수 있으니 감사해요’하고, ‘기도제목을 나눌 수 있는 소그룹이 있으니 감사해요’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니 감사하다고 할 수 있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