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감사를 나의 것으로
본문
감사는 어느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감사는 감사하는 자의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감사를 나의 것으로 삼으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감사하는 일이 쉬운 것 같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감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 않습니다.
누가복음17장에는 열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중에 예수님께 감사한 사람은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감사한 사람과 감사하지 못한 사람의 비율이 1:9였습니다. 그만큼 감사는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1장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을 알되 여호와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라고 사도 바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타락한 인간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감사가 없으면 그만큼 "내가 타락한 성품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습니다. 몹쓸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었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은혜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아홉 사람은 타락한 성품에 짓눌려서 감사를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얼마나 큰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갑니까 그런데 타락한 성품을 극복하지 못하고 감사를 잊고서 상실한 채 살아갈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육신은 멀쩡해서 힘은 넘쳐 흐르지만, 정신과 영혼은 병든자가 대단히 많습니다. 육신만 온전하다고 해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무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은혜를 입고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육신적인 문둥병보다 더 무서운 병에 걸려 있는
환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도라고 하면, 그 무엇보다도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그분께 찬양하며
예배할 수 있어야, 성도의 기본적인 예의이며 성도다운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나고 감사기도해야 기도가 응답된다는 말씀을 들은 어느 여집사는 한숨을 쉬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남편은 매일 술에 만취되어 늦게 귀가하는 술고래형이기 때문이다. 여집사는 그 남편으로 인해 감사기도를 할 수 있으면 하는 생각에서 한숨을 내쉰 것이다. 그날도 인사 불성이 된 남편을 겨우 끌어다가 눕혔다. 집사가 기도를 하려고 하니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기구한 팔자 타령만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 나는 왜 이런 남자와 결혼해서 이런 고생을 해야 합니까" 훌쩍훌쩍 울었다.
그 때 마침 말씀이 생각나서 감사기도가 응답이 된다는 말씀이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감사할 것이 없으니 감사합니다" 그러다 보니 "옆에서 코를 골고 자는 남편을 쳐다보니 그래도 과부보다는 낫고, 언젠가는 좋은 남편이 될 가능성 이 있어서 감사하고, 저토록 술에 취했어도 다른데 안가고 집에 오니 감사 하고, 토요일 날은 술을 더 많이 마셔서 주일날은 집을 지켜 주어 예배당 가게 하시니 감사하고,
주일날 잠이 나 안자고 먹을 것 찾으면 그것도 교회 가는데 불편한데 주일날 계속 잠을 자니 교회 나오는데 불편하지 않아 감사 하고..... " 계속 감사가 터지고 기쁨이 오기 시작하였다. 자다가 갈증이 나 서 일어난 남편이 깨어 보니 자기 아내가 웃으면서 몸을 흔들거든 "아니 한 밤중에 잠은 안자고 미친사람처럼 뭐하는 거야" "여보 당신하고 사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그래요" 하면서 자기가 지금까지 감사한 것을 다 말하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여보 내가 예수믿는게 그렇게 소원이면 오늘부터 믿어줄께" 10년동안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던 소원이 단 한번의 감사기도로 이루어졌다고 그 여집사는 더 기쁜 감사기도를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감사의 필요성을 느꼈으리라 믿습니다.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면 뜻하지 않는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음주는 특별히 감사하는 마음을 가득 담고 살아야 할 절기인 추수감사절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건강으로 지켜주신 것을 감사하며, 세계 나라적으로 어려운 때에 그래도 이만큼 지켜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감사를 나의 것으로 만들어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1. 감사를 나의 것으로 삼는 자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여러분 과연 무엇 때문에 염려가 되십니까 오늘 본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식주 문제로 염려하고 계시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염려되는 것이 바로 의식주의 문제 일 것입니다.
어쩌면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만 해결되면 우리는 아주 행복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에게 이런 것들이 필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영적인 만족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도 보이는 물질에 급급하여 영적인 축복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가 내 삶을 지배해 버리는 중요한 문제로 되었습니다. 우리는 먹기 위해 사는 성도가 아니요, 마시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소리치지만 우리의 최대 관심이 바로 이것들이라는데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 물질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은 신자나 불신자나 삶의 수단으로서 너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방법으로 물질을 얻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물질을 사랑함으로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리면 신앙생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물질에 눈이 멀기 시작하면 영적인 작용이 마비됩니다. 세상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여호와 하나님은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사람에게는 살아있는 동안 염려하지 않는 다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대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목숨을 위하여, 몸을 위하여' 염려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생명의 안전과 건강, 평안, 이것이 우리 모두의 염려의 뿌리요, 중심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친구에게 "너는 늙지 말아야 한다. "라고 말했더니 그 친구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서 하는 말이 "내가 알기로는 늙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길뿐인데, 내가 이 방법을 택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 하였습니다. 아마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는 말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대답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 살아가면서 염려 없이 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세상 살면서 수많은 문제를 만나는 사람 치고 근심과 염려를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가 가져오는 여러 악영향을 잘 아신 예수님은 염려가 인간의 축복을 막는 가장 큰 적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염려가 생기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눈에 띄는 것은 예수님은 목숨과 몸을 먹을 것과 입을 것에서 구분시켜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숨과 몸을 먹을 것과 입을 것에서 강하게 구분시켜 놓으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염려의 시작은 우리 자신을 먹을 것과 입을 것에서 구분시키지 못함에서 비롯됨을 예수님은 보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염려의 시작은 목숨과 몸을 먹을 것과 의복에서 구분하지 못할 때부터 시작합니다.
우리의 목숨과 몸이 얼마나 귀한 가치가 있는 지를 망각할 때부터 시작합니다. 아니 우리들의 삶의 가치를 먹는 것과 입는 것에 둘 때 염려는 싹터 오릅니다.
그렇다면 이 염려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를 나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은 이 모든 염려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지금 처해진 환경에서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입는 문제에 대하여 만족하면 다툴일이 없어 질것입니다. 오늘날의 먹는 문제는 먹을것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무엇을 먹을 까 하면서 먹을 것을 고르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문제도 매 끼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면 해결이 될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마시는 문제 입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하면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을 품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불평을 합니다. 그 어떤 것이 성취돼도 만족감은 일시적이며 더 큰 것에 대한 미련이 남는 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에게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4장11절에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 고 하였습니다.
불만을 만족으로 바꾸면 얼마든지 염려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1960년 대 까지만 해도 보리고개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겨울에 따뜻한 옷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생활 형편이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옷 입고, 따뜻하게 겨울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삶의 만족이 없습니다. 모든 면에 불만 투성이고, 상대적인 빈곤을 느끼면서 불평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불만을 만족으로 바꾸는 삶의 지혜를 사도바울로부터 배워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하여 전천후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부자였을때 신앙생활 잘 하다가 사업에 망하면 아예 모든걸 포기하는 분이 있고 가난할 때 신앙생활 잘 하다가 부자되면 교만해서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환경을 만나도 그에 맞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어떤 환경을 만나도 그 환경에 맞는 삶을 살면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를 나의 것으로 삼아서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시기를 바랍니다.
2. 감사를 나의 것으로 삼는 자는 더함의 복을 받습니다.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감사는 감사하는 자에게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바로 더함의 유익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영원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감사는 보다 근본적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피조물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므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로마서1장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을 알되 여호와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사도 바울은지적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16절을 통하여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감사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의 사람“ 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절의 말씀에는 감사를 나의 것을 삼는자가 우선적으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너희는 먼저 .... 구하라고 일러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성도들의 삶에 는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우선순위를 따라 살아야 하겠지만, 특별히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도의 삶은 "내 중심의 삶"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삶"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중심의 삶"에서는 나의 판단에 따라 가치도, 우선 순위도 달라질 수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삶"에는 가치도, 우선 순위도 여호와 하나님의 판단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가치관이 확립되면 삶의 우선 순위가 자연히 결정되어집니다. 먼저 할 일을 먼저 하고, 그 후에 나중에 할 일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들렀습니다. 그때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를 위해 마지막 남은 양식으로 떡을 만들어 대접하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한 행위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비가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집에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큰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더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또한 가나의 혼인잔치를 보시면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인들을 명하여 여섯개의 돌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도록 하셨습니다. 항아리에 채워졌던 물은 포도주로 변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는 약속은 어느 상황 어느 곳에서든지 유효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채우시는 그런 능력과 권세가 있으십니다.
감사를 나의 것으로 삼아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으로 더함의 복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감사를 나의 것을 삼는 자는 괴로움도 그날에 족합니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오늘 본절은 감사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성도는 내일 일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성도는 감사하는 성도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은 살기가 좋은 세상이라고 하지만 염려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가중되어 해결되지 않으면 극단적으로 목숨을 버리는 경우가 허다해 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베드로전서5장7절을 통하여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므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당하는 피해가 크기 때문입니다. 염려라고 하는 것은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신앙을 타락시키려고 하는 원수마귀의 인격을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비난하고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염려는 이처럼 우리의 감정을 파괴하고 의지를 약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에 부딪혀도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염려하는 사람은 판단력이 분리되기 때문에 그가 하는 판단의 기준이 흔들리게 되고 모든 일에 해결할 능력을 갖지 못해서 미궁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염려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것입니다. 염려는 우리의 이성을 분열시키고 가정과 사업을 파괴합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늘 염려를 가져다 줍니다. 염려는 예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죄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염려를 물리치려면 감사가 꼭 필요합니다. 때마다 일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함을 느낀다는 자체가 은혜를 받을 그릇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으려면 먼저 내 마음속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는 구원의 감사로서, 수많은 사람중에 나를 택하시어 구원해 주시고영원한 삶을 허락하심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갓 태어난 아기의 손가락을 하나씩 세고 있었습니다. 그는 열손가락을 다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감사를 하지 않는 인생은, 마치 돼지가 도토리나무 밑에서 떨어진 열매를 잘 주워 먹으면서도, 그 도토리가 어디서 온 것인지, 위를 한 번도 바라보지 않는 것과 같은 인생입니다.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의 뚜렸한 증거입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내일은 염려의 대상이 아니라 희망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내일의 일은 내일의 일이고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 지금인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내일의 확실을 만드는 것은 오늘의 성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일에 집중하고 충실하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를 나의 것으로 삼는자는 한 날의 괴로움을 그날에 족할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그 나름대로 고통과 괴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일토록 땀을 흘리며 수고하지만 만족함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분주함과 피곤에 쫓기는 생활의 괴로움속에서 숨통을 조이는 한계의 고통을 느끼지만 성도는 그 괴로움속에서도 반짝이는 지혜를 발견해야 합니다.
괴로움은 고통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정신병자나 철부지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고통으로 느끼는 것이고, 모두가 그 문제를 안고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활을 끈질기게 따라 붙고 아무리 피할래야 피할 길이 없는 고난과 고통과 싸우는 것이 인간이며, 그것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하다가 죽는 것이 인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생의 모든 차원에서 발견되는 것이 고난입니다.
무슨 말로 설명을 하더라도 이 세상에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생명이 다할 때까지 계속 많은 고난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람이든지 차별이 없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지식인이나 무식한 자나, 높은 자나 낮은 자 할 것 없이 인간이면 누구든지 이 고난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고통을 통해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이 성도에게 늘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고통을 통해서 주어지는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성도의 영적 성장에 있어서 참으로 큰 유익을 주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다윗의 고백대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말씀을 지키나이다' 라고 하였으며, 사도 베드로도 성도의 고난의 가치와 그 유익에 대해서 베드로전서1장7절을 통하여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였으며 욥 또한 욥기23장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성도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을 자랑하고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당하는 값진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히12:5-13)이며, "믿음의 시련"(벧전1:7)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단련하심"(욥23:10)이기에 그 고난의 유익은 영적 성장에 있어 큰 유익이 됨을 말씀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유익을 알고 고통을 오래동안 기억하지말고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할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오늘 최선을 다하고, 그 후의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고 안심하고 살라는 뜻입니다. 염려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의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결국 승리한 다는 확신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괴로움에 처한자들은 인내와 소망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사모하는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신 뜻과 그의 도우심의 손길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를 나의 것으로 삼아 괴로움도 그날에 족할 줄 아는 신앙을 소유하시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감사하는 일이 쉬운 것 같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감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 않습니다.
누가복음17장에는 열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중에 예수님께 감사한 사람은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감사한 사람과 감사하지 못한 사람의 비율이 1:9였습니다. 그만큼 감사는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1장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을 알되 여호와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라고 사도 바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타락한 인간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감사가 없으면 그만큼 "내가 타락한 성품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습니다. 몹쓸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었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은혜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아홉 사람은 타락한 성품에 짓눌려서 감사를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얼마나 큰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갑니까 그런데 타락한 성품을 극복하지 못하고 감사를 잊고서 상실한 채 살아갈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육신은 멀쩡해서 힘은 넘쳐 흐르지만, 정신과 영혼은 병든자가 대단히 많습니다. 육신만 온전하다고 해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무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은혜를 입고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육신적인 문둥병보다 더 무서운 병에 걸려 있는
환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도라고 하면, 그 무엇보다도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그분께 찬양하며
예배할 수 있어야, 성도의 기본적인 예의이며 성도다운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나고 감사기도해야 기도가 응답된다는 말씀을 들은 어느 여집사는 한숨을 쉬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남편은 매일 술에 만취되어 늦게 귀가하는 술고래형이기 때문이다. 여집사는 그 남편으로 인해 감사기도를 할 수 있으면 하는 생각에서 한숨을 내쉰 것이다. 그날도 인사 불성이 된 남편을 겨우 끌어다가 눕혔다. 집사가 기도를 하려고 하니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기구한 팔자 타령만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 나는 왜 이런 남자와 결혼해서 이런 고생을 해야 합니까" 훌쩍훌쩍 울었다.
그 때 마침 말씀이 생각나서 감사기도가 응답이 된다는 말씀이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감사할 것이 없으니 감사합니다" 그러다 보니 "옆에서 코를 골고 자는 남편을 쳐다보니 그래도 과부보다는 낫고, 언젠가는 좋은 남편이 될 가능성 이 있어서 감사하고, 저토록 술에 취했어도 다른데 안가고 집에 오니 감사 하고, 토요일 날은 술을 더 많이 마셔서 주일날은 집을 지켜 주어 예배당 가게 하시니 감사하고,
주일날 잠이 나 안자고 먹을 것 찾으면 그것도 교회 가는데 불편한데 주일날 계속 잠을 자니 교회 나오는데 불편하지 않아 감사 하고..... " 계속 감사가 터지고 기쁨이 오기 시작하였다. 자다가 갈증이 나 서 일어난 남편이 깨어 보니 자기 아내가 웃으면서 몸을 흔들거든 "아니 한 밤중에 잠은 안자고 미친사람처럼 뭐하는 거야" "여보 당신하고 사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그래요" 하면서 자기가 지금까지 감사한 것을 다 말하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여보 내가 예수믿는게 그렇게 소원이면 오늘부터 믿어줄께" 10년동안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던 소원이 단 한번의 감사기도로 이루어졌다고 그 여집사는 더 기쁜 감사기도를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감사의 필요성을 느꼈으리라 믿습니다.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면 뜻하지 않는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음주는 특별히 감사하는 마음을 가득 담고 살아야 할 절기인 추수감사절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건강으로 지켜주신 것을 감사하며, 세계 나라적으로 어려운 때에 그래도 이만큼 지켜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감사를 나의 것으로 만들어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1. 감사를 나의 것으로 삼는 자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여러분 과연 무엇 때문에 염려가 되십니까 오늘 본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식주 문제로 염려하고 계시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염려되는 것이 바로 의식주의 문제 일 것입니다.
어쩌면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만 해결되면 우리는 아주 행복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에게 이런 것들이 필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영적인 만족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도 보이는 물질에 급급하여 영적인 축복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가 내 삶을 지배해 버리는 중요한 문제로 되었습니다. 우리는 먹기 위해 사는 성도가 아니요, 마시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소리치지만 우리의 최대 관심이 바로 이것들이라는데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 물질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은 신자나 불신자나 삶의 수단으로서 너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방법으로 물질을 얻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물질을 사랑함으로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리면 신앙생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물질에 눈이 멀기 시작하면 영적인 작용이 마비됩니다. 세상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여호와 하나님은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사람에게는 살아있는 동안 염려하지 않는 다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대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목숨을 위하여, 몸을 위하여' 염려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생명의 안전과 건강, 평안, 이것이 우리 모두의 염려의 뿌리요, 중심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친구에게 "너는 늙지 말아야 한다. "라고 말했더니 그 친구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서 하는 말이 "내가 알기로는 늙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길뿐인데, 내가 이 방법을 택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 하였습니다. 아마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는 말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대답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 살아가면서 염려 없이 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세상 살면서 수많은 문제를 만나는 사람 치고 근심과 염려를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가 가져오는 여러 악영향을 잘 아신 예수님은 염려가 인간의 축복을 막는 가장 큰 적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염려가 생기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눈에 띄는 것은 예수님은 목숨과 몸을 먹을 것과 입을 것에서 구분시켜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숨과 몸을 먹을 것과 입을 것에서 강하게 구분시켜 놓으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염려의 시작은 우리 자신을 먹을 것과 입을 것에서 구분시키지 못함에서 비롯됨을 예수님은 보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염려의 시작은 목숨과 몸을 먹을 것과 의복에서 구분하지 못할 때부터 시작합니다.
우리의 목숨과 몸이 얼마나 귀한 가치가 있는 지를 망각할 때부터 시작합니다. 아니 우리들의 삶의 가치를 먹는 것과 입는 것에 둘 때 염려는 싹터 오릅니다.
그렇다면 이 염려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를 나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은 이 모든 염려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지금 처해진 환경에서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입는 문제에 대하여 만족하면 다툴일이 없어 질것입니다. 오늘날의 먹는 문제는 먹을것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무엇을 먹을 까 하면서 먹을 것을 고르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문제도 매 끼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면 해결이 될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마시는 문제 입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하면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을 품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불평을 합니다. 그 어떤 것이 성취돼도 만족감은 일시적이며 더 큰 것에 대한 미련이 남는 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에게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4장11절에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 고 하였습니다.
불만을 만족으로 바꾸면 얼마든지 염려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1960년 대 까지만 해도 보리고개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겨울에 따뜻한 옷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생활 형편이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옷 입고, 따뜻하게 겨울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삶의 만족이 없습니다. 모든 면에 불만 투성이고, 상대적인 빈곤을 느끼면서 불평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불만을 만족으로 바꾸는 삶의 지혜를 사도바울로부터 배워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하여 전천후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부자였을때 신앙생활 잘 하다가 사업에 망하면 아예 모든걸 포기하는 분이 있고 가난할 때 신앙생활 잘 하다가 부자되면 교만해서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환경을 만나도 그에 맞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어떤 환경을 만나도 그 환경에 맞는 삶을 살면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를 나의 것으로 삼아서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시기를 바랍니다.
2. 감사를 나의 것으로 삼는 자는 더함의 복을 받습니다.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감사는 감사하는 자에게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바로 더함의 유익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영원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감사는 보다 근본적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피조물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므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로마서1장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을 알되 여호와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사도 바울은지적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16절을 통하여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감사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의 사람“ 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절의 말씀에는 감사를 나의 것을 삼는자가 우선적으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너희는 먼저 .... 구하라고 일러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성도들의 삶에 는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우선순위를 따라 살아야 하겠지만, 특별히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도의 삶은 "내 중심의 삶"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삶"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중심의 삶"에서는 나의 판단에 따라 가치도, 우선 순위도 달라질 수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삶"에는 가치도, 우선 순위도 여호와 하나님의 판단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가치관이 확립되면 삶의 우선 순위가 자연히 결정되어집니다. 먼저 할 일을 먼저 하고, 그 후에 나중에 할 일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들렀습니다. 그때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를 위해 마지막 남은 양식으로 떡을 만들어 대접하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한 행위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비가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집에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큰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더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또한 가나의 혼인잔치를 보시면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인들을 명하여 여섯개의 돌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도록 하셨습니다. 항아리에 채워졌던 물은 포도주로 변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는 약속은 어느 상황 어느 곳에서든지 유효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채우시는 그런 능력과 권세가 있으십니다.
감사를 나의 것으로 삼아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으로 더함의 복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감사를 나의 것을 삼는 자는 괴로움도 그날에 족합니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오늘 본절은 감사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성도는 내일 일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성도는 감사하는 성도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은 살기가 좋은 세상이라고 하지만 염려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가중되어 해결되지 않으면 극단적으로 목숨을 버리는 경우가 허다해 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베드로전서5장7절을 통하여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므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당하는 피해가 크기 때문입니다. 염려라고 하는 것은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신앙을 타락시키려고 하는 원수마귀의 인격을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사람은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비난하고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염려는 이처럼 우리의 감정을 파괴하고 의지를 약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에 부딪혀도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염려하는 사람은 판단력이 분리되기 때문에 그가 하는 판단의 기준이 흔들리게 되고 모든 일에 해결할 능력을 갖지 못해서 미궁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염려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것입니다. 염려는 우리의 이성을 분열시키고 가정과 사업을 파괴합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늘 염려를 가져다 줍니다. 염려는 예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죄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염려를 물리치려면 감사가 꼭 필요합니다. 때마다 일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함을 느낀다는 자체가 은혜를 받을 그릇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으려면 먼저 내 마음속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는 구원의 감사로서, 수많은 사람중에 나를 택하시어 구원해 주시고영원한 삶을 허락하심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갓 태어난 아기의 손가락을 하나씩 세고 있었습니다. 그는 열손가락을 다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감사를 하지 않는 인생은, 마치 돼지가 도토리나무 밑에서 떨어진 열매를 잘 주워 먹으면서도, 그 도토리가 어디서 온 것인지, 위를 한 번도 바라보지 않는 것과 같은 인생입니다.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의 뚜렸한 증거입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내일은 염려의 대상이 아니라 희망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내일의 일은 내일의 일이고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 지금인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내일의 확실을 만드는 것은 오늘의 성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일에 집중하고 충실하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를 나의 것으로 삼는자는 한 날의 괴로움을 그날에 족할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그 나름대로 고통과 괴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일토록 땀을 흘리며 수고하지만 만족함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분주함과 피곤에 쫓기는 생활의 괴로움속에서 숨통을 조이는 한계의 고통을 느끼지만 성도는 그 괴로움속에서도 반짝이는 지혜를 발견해야 합니다.
괴로움은 고통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정신병자나 철부지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고통으로 느끼는 것이고, 모두가 그 문제를 안고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활을 끈질기게 따라 붙고 아무리 피할래야 피할 길이 없는 고난과 고통과 싸우는 것이 인간이며, 그것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하다가 죽는 것이 인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생의 모든 차원에서 발견되는 것이 고난입니다.
무슨 말로 설명을 하더라도 이 세상에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생명이 다할 때까지 계속 많은 고난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람이든지 차별이 없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지식인이나 무식한 자나, 높은 자나 낮은 자 할 것 없이 인간이면 누구든지 이 고난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고통을 통해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이 성도에게 늘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고통을 통해서 주어지는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성도의 영적 성장에 있어서 참으로 큰 유익을 주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다윗의 고백대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말씀을 지키나이다' 라고 하였으며, 사도 베드로도 성도의 고난의 가치와 그 유익에 대해서 베드로전서1장7절을 통하여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였으며 욥 또한 욥기23장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성도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을 자랑하고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당하는 값진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히12:5-13)이며, "믿음의 시련"(벧전1:7)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단련하심"(욥23:10)이기에 그 고난의 유익은 영적 성장에 있어 큰 유익이 됨을 말씀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유익을 알고 고통을 오래동안 기억하지말고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할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오늘 최선을 다하고, 그 후의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고 안심하고 살라는 뜻입니다. 염려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의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결국 승리한 다는 확신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괴로움에 처한자들은 인내와 소망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사모하는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신 뜻과 그의 도우심의 손길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를 나의 것으로 삼아 괴로움도 그날에 족할 줄 아는 신앙을 소유하시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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