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웃음과 찬양이 넘치는 삶
본문
어떻게 살아야 후회 없는 삶이 될까 살같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들을 붙잡아 놓을 수도 없고, 우리 곁을 손살 같이 지나가니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해도 벌써 반년이 지나고 7월을 맞고 보니 지난 반년동안 해놓은 일이 뭔가 하고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생이 후회 없이만 살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귀한 것은 없을 것인데 늘 지나고 보면 후회투성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늘 아름다운 것도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아름다운 인생길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어차피 지나가는 시간이라면 후회하지 않도록 보람 있게 보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웃으며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미래에 기쁨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해도 후회할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을 당한다고 선한 일을 포기하거나 악한 일을 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승자는 웃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웃음을 위해 눈물도 흘려야 합니다. 지금 눈물을 흘리더라도 나중에 웃을 수 있다만 그 길을 선택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지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싫어서 쉬운 길을 선택한다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 웃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마지막 기쁨을 위해 오늘의 고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실 세상을 보면 웃을 일도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감사할 일도 별로 없습니다. 불평할 일만 보이고, 한숨지을 일만 보입니다. 도무지 백성들에게 웃음을 주지 못하고 소망을 주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 것인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입니다. 세상에 기쁨의 일이 별로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가 세상에 뒤틀린 일만 있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보아도 감사와 기쁨을 누릴 수 없는데도 여호와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려면 생각을 뒤집으면 됩니다. 상황을 뒤집어 보면 감사할 일로 바뀝니다. 상황은 변한 것이 없지만 긍정과 부정으로 생각하는 기준에 따라 우리의 감정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10대 자녀가 반항을 하면 그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파티를 하고 나서 치워야 할 게 너무 많다면 그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고.
옷이 몸에 좀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살고 있다는 것이고.
깎아야 할 잔디, 닦아야 할 유리창, 고쳐야 할 하수구가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집이 있다는 것이고,
정부에 대한 불평불만의 소리가 많이 들리면 그건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
주차장 맨 끝 먼 곳에 겨우 자리가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걸을 수 있는데다 차도 있다는 것이고,
난방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고,
교회에서 뒷자리 성도의 엉터리 성가가 영 거슬린다면 그건 내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이고,
세탁하고 다림질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면 그건 나에게 입을 옷이 많다는 것이고,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세금이 많이 부과되었으면 그것은 내가 재산이 많다는 것이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그것을 조금만 바꾸어 생각해보면 감사할 일입니다. 인생은 내가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어떠세요. 갑자기 행복해 지지 않습니까.
미국의 로버트 슐러 목사는 매일 아침 4km씩 조깅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몸이 불편하여 힘들게 조깅을 하는 도중 2가지 감사할 조건을 발견했습니다.
발이 절단된 한 노인이 창가에 앉아서, 그리고 어떤 장애인이 호수가에 휠체어에 앉아 슐러 목사의 달리는 모습을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경우를 보고 슐러 목사는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은 두 다리를 갖고 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의 찬양을 체험한 슐러 목사는 불가능은 없다를 저술하고 “가능성의 목회”라는 유명한 말로서 크게 목회에 성공했습니다.
여러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삶은 많은 것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단 1%입니다. 우리의 몸은 2%의 수분이 부족할 때 갈급함을 느끼지만, 우리의 사랑은 항상 1%에 민감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사에 있어서 사랑은 영원한 주제였나 봅니다. 조금만 부족해도 갈급함을 원하니까요.
1% 오버해서 배려하고, 1% 오버해서 먼저 가까이 가고, 어제와 다르게 1%만 달라지는 것, 어제의 태도보다 1%만 더 적극적인 것, 어제보다 1%만 더 많이 공부하는 것, 오늘의 1%는 바로 내일의 100% 이기에 그래서 행복이라고 합니다. 100%가 부족해서 불만이 아니라 2% 부족하면 불만을 느낍니다. 거기에 1%만 더하면 불만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1%더하면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고 찬양이 넘치는 인생이 됩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웃을 일을 주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눈물을 흘릴 일이 있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반드시 회복시키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웃을 일이 생깁니다. 사실 세상이 어수선하고 불확실하고 짜증스럽게 만드는 일들이 많을 때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어떤 경우에든지 웃을 수 있어야 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기쁨과 감사의 마음은 결국 찬양을 하게 만듭니다.
성도는 고통의 시기에도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나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단한 민족입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붙잡고 계시는 민족이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들의 역사를 보면 정말 질곡의 역사를 써온 민족입니다. 유대인들만큼 환란을 겪은 민족이 없고 나라 없이 1800년을 넘게 살아온 민족입니다. 희망이 없어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삶이 흐트러져서 어려움을 당했음을 깨달았을 때는 항상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감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절입니다. 아무리 시절이 어렵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살아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를 바라보면 참으로 감사가 절로 나옵니다. 아무리 보아도 우리가 이렇게 잘 살 수 있는 여건이 아닌데도 이렇게 먹을 것이 풍성하고 아름다운 물건들이 가게들마다 진열이 되어 있고,
빚으로 살든지 자기 돈으로 살든지 좋은 집에서 살고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자동차를 이렇게 쉽게 타고 다닐 수 있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도자는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그래서 수출은 계속 흑자를 내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노사문제를 보면 모두가 감사한 마음이 없어서 일어나지 않는가 생각해봅니다. 기업가들은 근로자들에게 감사해야 하고 근로자들은 기업가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등 전반적인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웃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구원의 뜻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오도록 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서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찬양이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들이 실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렇게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웃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행하셨으니 웃으며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통해서 하시는 일들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일일이 다 열거하기 곤란합니다만 감사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기뻐할 일이 많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물마시듯이 죄를 범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면서 사는데도 아직도 생명을 앗아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기대를 걸고 사명을 주시고 믿음 안에서 살게 하시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모릅니다.
이 나라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망할 짓들을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이만큼 잘 살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직도 우리나라를 돌보고 계십니다. 한반도를 지키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위기를 당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구해주십니다. 죽을 위기에 놓였을 때 손을 내밀어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는 순간 우리는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셨으니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당신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지만 가끔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예수님을 안믿었으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떤 인생길을 걷고 있을까”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습니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보면 제가 술을 마시면 제법 잘 마실 것 같은데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사람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인기몰이를 하면서 제법 아내의 속을 썩이며 살아갈 것 같은 느낌도 있는데 전혀 그런 삶을 넘보지도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마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예수 안믿었으면 이상한 삶을 살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웃어야 하고 감사해야 하고 찬양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회사에 들어가도 주요부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획부서에 가서 회사의 모든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면 이것은 대단한 영광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위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원대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사역에 동참하게 된 자들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해야 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거기다가 우리가 그 일을 잘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면류관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의 포로가 되고 사단의 포로가 되어 살아야 할 사람인데도 거기에서 해방시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살기 어렵더라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을 바꾸어서 인생을 바꾸어주셨기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는 눈물의 씨를 뿌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더라도 씨를 뿌릴 수 없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뿌리는 씨가 있고, 씨를 뿌릴 때에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소망이 있고, 그것을 거두는 날이 올 것을 소망함이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아무리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내가 하는 기도를 들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이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웃을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5-6절 말씀에 보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할렐루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반드시”입니다. 이 말씀은 열매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아픔과 힘듬이 있더라도 뿌리기만 하면 반드시 단을 거두는 날이 온다는 것은 얼마나 고무적인 일입니까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세상에서 살면서 시절이 어려워 웃음을 잃어가고, 감사를 잃어가는 이 나라 백성들을 향하여 웃음과 감사의 마음을 갖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웃고 삽시다. 기뻐한다는 것은 웃으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코메디 프로그램은 우리를 억지로 웃깁니다. 억지로 웃어도 그것이 우리 삶에 유익하다고 합니다.
웃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은 이젠 상식 중에 상식입니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얼굴 표정이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를 시행해 왔습니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표정이 표현과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는 것입니다. 웃는 표정은 긍정적 표현과 행복한 감정을 끌어낸다는 것입니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우리의 감정을 통제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웃음을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왕인 세조는 평생 수많은 질병에 시달린 왕으로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의약론(醫藥論)을 지어 의원들의 여덟 가지 자질을 담은 이른바 팔의론(八醫論)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심의(心醫), 식의(食醫), 약의(藥醫), 혼의(昏醫), 광의(狂醫), 망의(妄醫), 사의(詐醫), 살의(殺醫)입니다.
심의(心醫)는 환자의 마음을 편안케 하여 병을 낫게 하는 의원이고,
식의(食醫)는 환자가 먹는 음식을 조절하여 병을 낫게 하는 의원이며,
약의(藥醫)는 환자에게 약을 잘 써서 병을 낫게 하는 의원인데 이상 心, 食, 藥 醫는 양의(良醫)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위의 좋은 의사를 뺀 나머지는 모두 악의(惡醫)에 해당합니다. 세조는 양의 중에서도 약을 잘 쓰고, 음식을 잘쓰는 의사보다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병을 낫게 하는 심의(心醫)가 가장 뛰어난 의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심의는 누구나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뜻하게 격려하고 미소를 지어주어 환자를 기쁘게 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가장 뛰어난 의사라는 것입니다. 사실 간호하는 자가 간호를 웃으면서 잘하면 실제 기술을 가진 의사보다 더 좋은 의사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으로 웃을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면 그 열매는 찬양으로 나타납니다. 성도는 아무리 삶이 어렵더라도 찬양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13:15에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찬송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5:19-20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이 말씀에 보면 마음으로 주께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범사에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감사와 찬양은 항상 동전의 이면과 같이 붙어 다닙니다. 때로는 설교 한편 보다도 찬양 한곡이 더 큰 은혜를 끼칠 수 있습니다. 더 큰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테리 로(Terry Law)목사는 교통사고로 그의 아내를 잃었습니다. 세 자녀를 두고 순식간에 가버린 아내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그는 비통함에 젖어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주님, “이건 정말 공평 하지 못합니다”라고 항변했습니다. 이제는 목회도 끝장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내의 장례를 치른 후 한 달쯤 지났을 때 오랄 로버츠 목사와 만났습니다. 로버츠 목사는 “젊은 양반, 내가 시키는대로만 해보게 집으로 가서 주님께 감사기도를 시작하게...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라네”
그 다음 날 그는 새벽 일찍 일어나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먼저 “할렐루야!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 다음 순간 사단은 냉소적인 속삭임으로 ‘무엇 때문에 너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거야 네 어린 세 자녀들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은 네 아내를 빼앗아갔단 말이야. 말도 안돼. 너는 위선자야’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영적 싸움을 15분 넘게 계속한 후에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는 시편 34편1절의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란 다윗의 고백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이 말씀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계속 두 시간 반 가량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기도 중에 그는 성령의 권능에 압도되어 쓰러져서 황홀경에 빠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을 비웃고 있던 사단과 함께 비통함, 자기 연민, 분노 같은 것이 떠나버리고 완전히 치유함을 받아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어느 날 그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을 때 주님은 그에게 음성으로 “네가 찬양과 경배를 통해 사람들을 내게로 인도한다면 나는 병든 자를 치유하고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며, 억압받는 자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는 즉시 찬양 지휘자에게 주님의 메세지를 알리고 1983년 2월에 “리빙 사운드”란 명칭으로 경배와 찬양을 통한 치유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그의 집회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치유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찬양과 경배의 능력과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비결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테리 로 목사는 교통사고로 인한 아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린 결과 주님은 음성으로 응답해 주시고 그에게 찬양과 경배를 통한 치유의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시편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의 찬송은 기적을 만듭니다.
군가는 군인정신을 함양합니다. 교가는 애교정신을 갖게 합니다. 애국가는 애국정신을 가져다 줍니다. 會社歌는 애사심을 갖게 합니다. 찬송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믿음을 돈독히 합니다. 왜냐하면 노래 말은 언어에 곡이 붙어서 입술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떤 노래를 불렀는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노랫말이 어떤 것인가는 한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윤덕심은 “사의 찬미”를 부르고 현해탄에서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투신동반자살을 했습니다. 죽음의 노래를 부르니 죽고 싶었던가 봅니다. 남인수는 “눈감아 드리오리다”를 부르더니 마흔 한 살에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이난영씨는 “목포의 눈물”로 가슴앓이를 하다가 역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차종락은 “낙옆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르다가 스물아홉에 인생낙엽따라 영영 가버렸습니다.
배호는 “돌아가는 삼각지”“안개낀 장충단공원”, “비내리는 경부선” 를 불렀는데 일생동안 방황하는 삶을 살다가 30살에 죽었습니다. 양미란 “흑점”을 물렀는데 골수암으로 떠났습니다. 김정호씨는 “간다간다 나는 간다”를 불렀는데 삼십 삼세에 영 가버렸습니다. 권혜경은 “산장의 여인”을 불러 한평생 외롭게 살았습니다.
반면에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 라고 부른 송대광은 가요 무대 등에 도롯도의 열풍으로 아직도 쨍하고 해뜨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찬송도 밝은 찬송이 좋습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있지만 성도들의 신앙과 불신앙인들이 들었을 때 복음을 듣고 싶어하는 마음을 주며 위로해 주는 아름다운 소망의 가사들이 중요합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다” 이런 것은 특별한 경우에 불러야 합니다. 자꾸 멀리 멀리 가면 됩니까 주님에게 꼭 붙어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찬양을 불러야 합니까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벗은 형제여 담대하게 싸울지라 저기 악한 적병과 /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 곧 승리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억지로라도 감사합시다. 웃고 삽시다. 그리고 입술에는 찬양이 늘 머물도록 합시다. 원하는 무엇을 받아야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는 어린아이 신앙에서 벗어나 이미 받은 것과 현재의 삶을 통해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울면서 씨를 뿌릴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 되고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아름다운 인생길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어차피 지나가는 시간이라면 후회하지 않도록 보람 있게 보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웃으며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미래에 기쁨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해도 후회할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을 당한다고 선한 일을 포기하거나 악한 일을 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승자는 웃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웃음을 위해 눈물도 흘려야 합니다. 지금 눈물을 흘리더라도 나중에 웃을 수 있다만 그 길을 선택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지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싫어서 쉬운 길을 선택한다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 웃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마지막 기쁨을 위해 오늘의 고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실 세상을 보면 웃을 일도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감사할 일도 별로 없습니다. 불평할 일만 보이고, 한숨지을 일만 보입니다. 도무지 백성들에게 웃음을 주지 못하고 소망을 주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 것인가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입니다. 세상에 기쁨의 일이 별로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가 세상에 뒤틀린 일만 있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보아도 감사와 기쁨을 누릴 수 없는데도 여호와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려면 생각을 뒤집으면 됩니다. 상황을 뒤집어 보면 감사할 일로 바뀝니다. 상황은 변한 것이 없지만 긍정과 부정으로 생각하는 기준에 따라 우리의 감정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10대 자녀가 반항을 하면 그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파티를 하고 나서 치워야 할 게 너무 많다면 그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고.
옷이 몸에 좀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살고 있다는 것이고.
깎아야 할 잔디, 닦아야 할 유리창, 고쳐야 할 하수구가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집이 있다는 것이고,
정부에 대한 불평불만의 소리가 많이 들리면 그건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
주차장 맨 끝 먼 곳에 겨우 자리가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걸을 수 있는데다 차도 있다는 것이고,
난방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고,
교회에서 뒷자리 성도의 엉터리 성가가 영 거슬린다면 그건 내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이고,
세탁하고 다림질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면 그건 나에게 입을 옷이 많다는 것이고,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세금이 많이 부과되었으면 그것은 내가 재산이 많다는 것이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그것을 조금만 바꾸어 생각해보면 감사할 일입니다. 인생은 내가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어떠세요. 갑자기 행복해 지지 않습니까.
미국의 로버트 슐러 목사는 매일 아침 4km씩 조깅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몸이 불편하여 힘들게 조깅을 하는 도중 2가지 감사할 조건을 발견했습니다.
발이 절단된 한 노인이 창가에 앉아서, 그리고 어떤 장애인이 호수가에 휠체어에 앉아 슐러 목사의 달리는 모습을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경우를 보고 슐러 목사는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은 두 다리를 갖고 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의 찬양을 체험한 슐러 목사는 불가능은 없다를 저술하고 “가능성의 목회”라는 유명한 말로서 크게 목회에 성공했습니다.
여러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삶은 많은 것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단 1%입니다. 우리의 몸은 2%의 수분이 부족할 때 갈급함을 느끼지만, 우리의 사랑은 항상 1%에 민감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사에 있어서 사랑은 영원한 주제였나 봅니다. 조금만 부족해도 갈급함을 원하니까요.
1% 오버해서 배려하고, 1% 오버해서 먼저 가까이 가고, 어제와 다르게 1%만 달라지는 것, 어제의 태도보다 1%만 더 적극적인 것, 어제보다 1%만 더 많이 공부하는 것, 오늘의 1%는 바로 내일의 100% 이기에 그래서 행복이라고 합니다. 100%가 부족해서 불만이 아니라 2% 부족하면 불만을 느낍니다. 거기에 1%만 더하면 불만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1%더하면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고 찬양이 넘치는 인생이 됩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웃을 일을 주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눈물을 흘릴 일이 있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반드시 회복시키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웃을 일이 생깁니다. 사실 세상이 어수선하고 불확실하고 짜증스럽게 만드는 일들이 많을 때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어떤 경우에든지 웃을 수 있어야 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기쁨과 감사의 마음은 결국 찬양을 하게 만듭니다.
성도는 고통의 시기에도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나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단한 민족입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붙잡고 계시는 민족이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들의 역사를 보면 정말 질곡의 역사를 써온 민족입니다. 유대인들만큼 환란을 겪은 민족이 없고 나라 없이 1800년을 넘게 살아온 민족입니다. 희망이 없어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삶이 흐트러져서 어려움을 당했음을 깨달았을 때는 항상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감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절입니다. 아무리 시절이 어렵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살아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를 바라보면 참으로 감사가 절로 나옵니다. 아무리 보아도 우리가 이렇게 잘 살 수 있는 여건이 아닌데도 이렇게 먹을 것이 풍성하고 아름다운 물건들이 가게들마다 진열이 되어 있고,
빚으로 살든지 자기 돈으로 살든지 좋은 집에서 살고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자동차를 이렇게 쉽게 타고 다닐 수 있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도자는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그래서 수출은 계속 흑자를 내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노사문제를 보면 모두가 감사한 마음이 없어서 일어나지 않는가 생각해봅니다. 기업가들은 근로자들에게 감사해야 하고 근로자들은 기업가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등 전반적인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웃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구원의 뜻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오도록 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서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찬양이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들이 실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렇게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웃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행하셨으니 웃으며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통해서 하시는 일들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일일이 다 열거하기 곤란합니다만 감사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기뻐할 일이 많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물마시듯이 죄를 범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면서 사는데도 아직도 생명을 앗아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기대를 걸고 사명을 주시고 믿음 안에서 살게 하시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모릅니다.
이 나라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망할 짓들을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이만큼 잘 살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직도 우리나라를 돌보고 계십니다. 한반도를 지키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위기를 당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구해주십니다. 죽을 위기에 놓였을 때 손을 내밀어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는 순간 우리는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셨으니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당신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지만 가끔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예수님을 안믿었으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떤 인생길을 걷고 있을까”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습니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보면 제가 술을 마시면 제법 잘 마실 것 같은데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사람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인기몰이를 하면서 제법 아내의 속을 썩이며 살아갈 것 같은 느낌도 있는데 전혀 그런 삶을 넘보지도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마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예수 안믿었으면 이상한 삶을 살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웃어야 하고 감사해야 하고 찬양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회사에 들어가도 주요부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획부서에 가서 회사의 모든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면 이것은 대단한 영광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위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원대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사역에 동참하게 된 자들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해야 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거기다가 우리가 그 일을 잘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면류관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의 포로가 되고 사단의 포로가 되어 살아야 할 사람인데도 거기에서 해방시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살기 어렵더라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을 바꾸어서 인생을 바꾸어주셨기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는 눈물의 씨를 뿌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더라도 씨를 뿌릴 수 없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뿌리는 씨가 있고, 씨를 뿌릴 때에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소망이 있고, 그것을 거두는 날이 올 것을 소망함이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아무리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내가 하는 기도를 들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이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웃을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5-6절 말씀에 보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할렐루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반드시”입니다. 이 말씀은 열매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아픔과 힘듬이 있더라도 뿌리기만 하면 반드시 단을 거두는 날이 온다는 것은 얼마나 고무적인 일입니까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세상에서 살면서 시절이 어려워 웃음을 잃어가고, 감사를 잃어가는 이 나라 백성들을 향하여 웃음과 감사의 마음을 갖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웃고 삽시다. 기뻐한다는 것은 웃으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코메디 프로그램은 우리를 억지로 웃깁니다. 억지로 웃어도 그것이 우리 삶에 유익하다고 합니다.
웃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은 이젠 상식 중에 상식입니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얼굴 표정이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를 시행해 왔습니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표정이 표현과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는 것입니다. 웃는 표정은 긍정적 표현과 행복한 감정을 끌어낸다는 것입니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우리의 감정을 통제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웃음을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왕인 세조는 평생 수많은 질병에 시달린 왕으로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의약론(醫藥論)을 지어 의원들의 여덟 가지 자질을 담은 이른바 팔의론(八醫論)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심의(心醫), 식의(食醫), 약의(藥醫), 혼의(昏醫), 광의(狂醫), 망의(妄醫), 사의(詐醫), 살의(殺醫)입니다.
심의(心醫)는 환자의 마음을 편안케 하여 병을 낫게 하는 의원이고,
식의(食醫)는 환자가 먹는 음식을 조절하여 병을 낫게 하는 의원이며,
약의(藥醫)는 환자에게 약을 잘 써서 병을 낫게 하는 의원인데 이상 心, 食, 藥 醫는 양의(良醫)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위의 좋은 의사를 뺀 나머지는 모두 악의(惡醫)에 해당합니다. 세조는 양의 중에서도 약을 잘 쓰고, 음식을 잘쓰는 의사보다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병을 낫게 하는 심의(心醫)가 가장 뛰어난 의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심의는 누구나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뜻하게 격려하고 미소를 지어주어 환자를 기쁘게 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가장 뛰어난 의사라는 것입니다. 사실 간호하는 자가 간호를 웃으면서 잘하면 실제 기술을 가진 의사보다 더 좋은 의사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으로 웃을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면 그 열매는 찬양으로 나타납니다. 성도는 아무리 삶이 어렵더라도 찬양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13:15에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찬송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5:19-20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이 말씀에 보면 마음으로 주께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범사에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감사와 찬양은 항상 동전의 이면과 같이 붙어 다닙니다. 때로는 설교 한편 보다도 찬양 한곡이 더 큰 은혜를 끼칠 수 있습니다. 더 큰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테리 로(Terry Law)목사는 교통사고로 그의 아내를 잃었습니다. 세 자녀를 두고 순식간에 가버린 아내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그는 비통함에 젖어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주님, “이건 정말 공평 하지 못합니다”라고 항변했습니다. 이제는 목회도 끝장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내의 장례를 치른 후 한 달쯤 지났을 때 오랄 로버츠 목사와 만났습니다. 로버츠 목사는 “젊은 양반, 내가 시키는대로만 해보게 집으로 가서 주님께 감사기도를 시작하게...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라네”
그 다음 날 그는 새벽 일찍 일어나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먼저 “할렐루야!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 다음 순간 사단은 냉소적인 속삭임으로 ‘무엇 때문에 너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거야 네 어린 세 자녀들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은 네 아내를 빼앗아갔단 말이야. 말도 안돼. 너는 위선자야’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영적 싸움을 15분 넘게 계속한 후에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는 시편 34편1절의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란 다윗의 고백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이 말씀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계속 두 시간 반 가량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기도 중에 그는 성령의 권능에 압도되어 쓰러져서 황홀경에 빠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을 비웃고 있던 사단과 함께 비통함, 자기 연민, 분노 같은 것이 떠나버리고 완전히 치유함을 받아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어느 날 그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을 때 주님은 그에게 음성으로 “네가 찬양과 경배를 통해 사람들을 내게로 인도한다면 나는 병든 자를 치유하고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며, 억압받는 자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는 즉시 찬양 지휘자에게 주님의 메세지를 알리고 1983년 2월에 “리빙 사운드”란 명칭으로 경배와 찬양을 통한 치유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그의 집회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치유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찬양과 경배의 능력과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비결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테리 로 목사는 교통사고로 인한 아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린 결과 주님은 음성으로 응답해 주시고 그에게 찬양과 경배를 통한 치유의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시편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의 찬송은 기적을 만듭니다.
군가는 군인정신을 함양합니다. 교가는 애교정신을 갖게 합니다. 애국가는 애국정신을 가져다 줍니다. 會社歌는 애사심을 갖게 합니다. 찬송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믿음을 돈독히 합니다. 왜냐하면 노래 말은 언어에 곡이 붙어서 입술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떤 노래를 불렀는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노랫말이 어떤 것인가는 한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윤덕심은 “사의 찬미”를 부르고 현해탄에서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투신동반자살을 했습니다. 죽음의 노래를 부르니 죽고 싶었던가 봅니다. 남인수는 “눈감아 드리오리다”를 부르더니 마흔 한 살에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이난영씨는 “목포의 눈물”로 가슴앓이를 하다가 역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차종락은 “낙옆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르다가 스물아홉에 인생낙엽따라 영영 가버렸습니다.
배호는 “돌아가는 삼각지”“안개낀 장충단공원”, “비내리는 경부선” 를 불렀는데 일생동안 방황하는 삶을 살다가 30살에 죽었습니다. 양미란 “흑점”을 물렀는데 골수암으로 떠났습니다. 김정호씨는 “간다간다 나는 간다”를 불렀는데 삼십 삼세에 영 가버렸습니다. 권혜경은 “산장의 여인”을 불러 한평생 외롭게 살았습니다.
반면에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 라고 부른 송대광은 가요 무대 등에 도롯도의 열풍으로 아직도 쨍하고 해뜨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찬송도 밝은 찬송이 좋습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있지만 성도들의 신앙과 불신앙인들이 들었을 때 복음을 듣고 싶어하는 마음을 주며 위로해 주는 아름다운 소망의 가사들이 중요합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다” 이런 것은 특별한 경우에 불러야 합니다. 자꾸 멀리 멀리 가면 됩니까 주님에게 꼭 붙어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찬양을 불러야 합니까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벗은 형제여 담대하게 싸울지라 저기 악한 적병과 /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 곧 승리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억지로라도 감사합시다. 웃고 삽시다. 그리고 입술에는 찬양이 늘 머물도록 합시다. 원하는 무엇을 받아야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는 어린아이 신앙에서 벗어나 이미 받은 것과 현재의 삶을 통해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울면서 씨를 뿌릴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 되고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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