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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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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오신 인생이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실 인생 즉 평생이 어떤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 질문을 받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가장 많은 분들은 "행복한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또 적지 않은 분들은 틀림없이 "건강한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고 하실 것입니다.
로맨틱한 분이라면 "사랑에 빠져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고 대답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물질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라면 "그저 돈 고생 안하는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유난히 권력 지향적인 사고를 지니신 분이라면 "내 이름 석자를 남기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고 대답하실지 모릅니다.
좀 더 의식이 있어 나름대로의 분명한 어떤 가치관을 붙들고 사시는 분이라면 "가치있는 평생 혹은 보람있는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고 하실 것입니다.
좀 더 신앙적인 분들이라면 아마도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의 유명한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나를 따라오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들을 잠시 후에 함께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를 조금은 통속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오늘의 언어로 바꿀수 있다면 저는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평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시편 23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로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삼고 그의 인도를 경험하는 삶이 결코 고난이 면제된 인생은 아니지만 그분의 도우심으로 충분히 행복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의 마지막에 시편기자는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의 내 인생도 그분의 도우심으로 행복할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자기 인생이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평생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평생"-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1. 우리의 과거를 감사할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시편에서 시편기자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할 때 그는 지금 자신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정녕"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있게 말할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과거의 경험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과거에서 그가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었고, 또는 원수들의 치열한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마침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고 고백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고백자체가 감사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인 혹은 미래 지향적인 인생을 살다 보면 이미 누릴수 있었던 과거의 은혜를 망각하기 쉽습니다.
랍비 해롤드 쿠스너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 랍비가 길을 가다가 길을 뛰어 가고 있는 교인을 만났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뭐가 그리 급해서 어디로 그렇게 가고 계십니까"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가"보면 모르시나요 저는 지금 성공을 좇아가고 있고 번영을 좇아가고 있습니다. " 그래서 랍비는 다시 그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성공과 번영이 앞에만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지요. 그런데 만일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의 성공과 번영을 들고 당신 뒤에서 오시고 있다면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그제서야 그는 "그렇다면 당연히 뛰던 것을 정지하고 뒤를 보아야 하겠지요"했다고 합니다.
오늘 시23:6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좇아오고 있다고 기록합니다. "나를 따르리니"라고 우리 성경에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원문에는 좀더 강력한 단어로 나를 "좇아오다"(radaphpursue)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축복이 줄곧 나를 좇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걸음을 멈추고 과거를 돌아보며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축복들을 헤아려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심리학자 아브라함 마슬로우(Abraham Maslow)는 성숙한 성인의 특성으로"인생의 장에 베풀어지는 축복들에 대하여 놀라움과 기쁨, 감격으로 날마다 새롭게 감사할줄 아는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감사를 습관화할줄 알아야 합니다. 랍비 쿠스너(Kushner)는 감사를 생활화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수표를 쓸때마다 수표 구석에 "Thank-you"라고 쓴답니다.
전기요금 전화요금 청구서를 지불할 때마다 "감사합니다"고 쓴답니다. 심지어 세금을 낼 때마다 "감사합니다. "고 쓴답니다. G. K. 체스터튼(Chesterton)경은 "성탄절 어린이들이 양말을 걸어놓고 그 양말에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넣어주신 것을 감사한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가 신는 양말에 튼튼한 두 다리를 넣어 주신 것을 인하여 우리는 얼마나 더욱 감사해야 할 것인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특히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하심의 반대는 악함입니다. 인생에는 얼마나 많은 악한 일들이 벌어집니까
다윗도 이런 악함들을 경험해 왔습니다.
사울왕의 질투와 시기, 신하들의 배신 심지어는 아들의 배신 그러나 이 모든 악함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함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선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선하심(tov)은 상대방을 유익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인자하심이란 히브리어로 '헤세드'(hesed)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본래 "언약을 지키시는 성실하시고 자비하신 사랑"(covenant-keeping faithful and merciful love)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며 끊임없이 인간들의 불성실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성실함으로 우리를 버리지도 않으시고 떠나지도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께 불성실할 때라도 그는 우리를 용서하시며 기다려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가 약속한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걸어온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으십니까 이런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 그리고 인자하심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자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2. 우리의 현재를 만족할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편 23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본문인 6절에 오기까지는 대부분의 시제가 현재 시제로 표기됩니다. 본문 6절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할 때에 영어 성경으로 읽으시면 "Surely goodness and love will(shall) follow me"로 미래 조동사가 사용됩니다.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일관성있게 현재 시제가 사용됩니다. 목자의 인도를 지금 받으며 행복해 하는 만족함의 고백인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The Lord IS-)-지금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He makes me)-지금 그렇게 하시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He restores-)-지금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He leads me-)-지금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My cupoverflows)-지금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미 지적한바 있습니다만 현대인의 삶이 지나치게 결과 중심 혹은 목표 지향적이 되면서 현대인들은 오늘이라는 이 순간의 행복 곧 과정의 행복을 놓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의 행복을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그분 때문에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랍비 쿠스너는 자기가 관여한 학교에서 한번은 학교 교사들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고 합니다. 눈이 오는 날 아이들이 창 밖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거든 제발 야단치지 말고 창밖에 내리는 눈을 즐기게 해주라고 했답니다.
켄 가이어가 쓴 "묵상하는 삶" 22-23p에 보면 멕시코 시티의 "양파파는 노인"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멕시코 시티 시장 한구석에서 '포타라모'라는 이름을 가진 인디언 노인이 양파 스무줄을 걸어놓고 팔고 있었습니다. 시카고에 온 미국인 한 사람이 다가와서 물었다고 합니다. 양파 한줄에 얼마나 되느냐고. 10센트라고 대답합니다. 두줄에는 20센트라고. 세 줄에는 30센트라고. "깍아 주시는 것이 없으시군요. 그러면 스무줄을 다 살터이니 얼마에 파시겠습니까"하자, 그 노인은 "그렇게 팔수는 없다"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미국인은 다시 "아니 왜 못 파십니까 양파 팔러 나오신 것 아닙니까"하자 그는 이런 잊을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나는 양파를 팔뿐 아니라 내 인생을 살기 위해서 여기 나온 것입니다. 난 이 시장을 사랑합니다. 여기 북적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햇빛을 사랑하고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하고-사람들과 인사를 건네는 것을 사랑하고 친구들을 사랑하고 농작물 이야기하는 것을 사랑한답니다. 그런데 당신에게 한꺼번에 몽땅 팔면 나는 내 인생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이 노인이야말로 현재의 행복을 아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오늘이 즐겁고 현재가 만족스러운 인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평생-어떻게 가능할수 있을까요
3. 우리의 미래를 확신할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편의상 인생의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누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결코 분리될수 없는 것들입니다. 과거가 현재를 만들고 현재가 미래를 만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미래 설계를 위해 우리의 살아온 과거를 잘 학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가 중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역사는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행적인 것입니다. 지금 시편기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호와 하나님의 행적을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자기 인생에 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좇아 온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앞으로도 나를 인도해 갈것임을 확신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그는 '정녕"이라는 강조 부사를 사용합니다. 자신의 미래에 함께 하실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확신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 불변하신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시106:1을 읽어보십시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러면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경험하며 살수가 있겠습니까 오늘의 시편은 우리가 그것을 위해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 사랑을 거절하지 마시고 받아드리시면 됩니다. 누리시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 한 평생을 마무리하며 이 고백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리고 사람들은 당신의 인생에 함께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안에 있었던 당신을 또한 선하고 인자하셨던 사람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톤의 전기작가가 그의 일생을 취재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가서 리빙스톤이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 기억의 조각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 동일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리빙스톤이 여기서는 무슨 일을 했느냐고. 여기서는 무슨 설교를 했느냐고. 그런데 이 작가가 가장 많이 들었던 대답이 이런 말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그가 무슨 설교를 했는지를 이제는 잘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선하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부유한 포도원 주인이 자기가 고용한 일군중 한 사람이 값비싼 포도주 통을 엎질러서 포도주를 다 쏟은 것을 알고 그를 법정에 고발합니다.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면서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분명히 법은 당신편에 있소. 당신의 일군은 마땅히 당신에게 손해 배상을 해야 하오. 그러나 당신은 부자이고 일군은 가난하지 않소. 듣기에 당신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이라고 들었소. 그래서 오늘 나는 당신에게 법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지만 당신이 헤세드(Hesed)에 따라 행동하기를 판결하는 바이오. 헤세드의 원리에 따라 고소를 취하하고 당신의 일군에게 임금을 지불하여 주시면 좋겠소.
당신은 경제적으로는 조금 손해를 보지만 영적으로는 더 부요해 지실 것이오. 그래서 당신이 일군을 용서한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도 당신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헤세드로 인해 세상이 더욱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해주시면 좋겠소"(해롤드 쿠스너, The Lord is my shepherd, p. 160-161)
그는 재판관의 권고를 따랐다고 합니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 이 시편23:6을 부끄럼없이 고백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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