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TOP
DOWN

[감사절]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

본문

예수님이 열명의 문둥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아홉은 자기 갈 길로 가고, 오직 한 사람만 돌아와서 예수님께 사례했습니다.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아홉은 어디 있느냐(16-17). ”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은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실망스럽고 기대 이하라는 섭섭함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돌아와서 감사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 주님은 감사할 줄 아는 그 사람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감사하는 것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하는 제사는 없습니다.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답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최상의 예배입니다.
주님을 섭섭하게 한 아홉과 칭찬받은 한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우선 공통점을 생각해 봅시다. 열명이 다 문둥병자였습니다. 다 같이 예수님께 소리 높여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소리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 치유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문둥병자가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고쳐달라고 간구한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치유를 믿읍시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못하실 것이 없습니다. 문둥병도 고치고, 장님의 눈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도 일으키십니다. 인본주의 신앙이 되지 않도록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집시다.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믿읍시다. 주님은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처럼 무덤에서 찾지 맙시다.
열명의 문둥병자는 다 같이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4). ” 문둥병자들의 병을 판단하고, 병의 치유를 확인하는 것은 제사장이 할 일입니다. 문둥병이 나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직 낳지도 않은 상태에서 문둥병자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갈 수 있습니다.
순종해야 갈 수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믿는 대로 즉시 순종하면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치유의 능력을 믿었고, 가서 몸을 보이라는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가는 길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문둥병이 어린아이 살같이 깨끗하게 치유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열명의 문둥병자들이 다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 아홉과 사마리아 사람은 차이가 있습니까 아홉은 깨끗해진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기 위해서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아마도 문둥병이 치료된 것에 흥분해서 더 빨리 갔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 감사할 생각은 잊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주님께 돌아와서 사례하였습니다. 문둥병을 고쳐준 예수님이 중요합니까 문둥병의 고침을 확인해 줄 제사장이 중요합니까
병을 고친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자기 좋아서 자기 갈길 가는 사람과 감사한 마음에 주님께 돌아와서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을 줄만 아는 사람이 있고 받은 은혜 갚으려 발길을 돌이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 중의 믿음이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이 감사입니다. 믿음의 능력도 귀하지만, 믿음의 덕은 더욱 중요합니다.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이 두 천사에게 바구니를 하나씩 주면서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하나는 기도를 담는 바구니이고, 다른 하나는 감사를 담는 바구니였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두 천사가 바구니를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바구니의 형편이 어떠했겠습니까 기도를 담는 바구니는 가득 차 있었지만 감사를 담은 바구니는 겨우 몇 개의 감사만 들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바구니는 기도보다 감사가 가득 차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육신의 문둥병은 고쳤어도, 감사가 없다면 영혼은 여전히 문둥병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눈으로 직접 보고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광야 길을 가면서 길이 험하다고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영적으로는 아직도 어린아이입니다. 육체의 자유는 얻었지만, 영혼은 아직도 노예입니다. 이제 어른이 됩시다. 자유 합시다. 믿고 순종하고, 그리고 감사합시다. 감사하는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예배를 드립니까 감사함으로 예배드립시다. 기도합니까 감사 기도를 드립시다. 일용할 양식을 얻었습니까 감사합시다. 헌금을 드립니까 감사함으로 헌금을 드립시다. 찬양합니까 감사의 찬양을 드립시다. “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드립시다.
감사할 이유
아홉은 자기 갈 길로 가고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 주님께 돌아와서 사례했습니다. 사례한다는 것은 단순한 인사치례가 아니라 깊은 환희와 감격에서 흘러나오는 감사를 의미합니다. 왜 고침 받은 사마리아 사람은 주님께 사례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첫째, 예수님 만난 것을 감사합시다. 예수님이 자기 있는 근처를 지나간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은 세상에서는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 평생에 한번 있을까말까 하는 희귀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근처를 지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더구나 문둥병자들이 거처하는 근처를 지나간다는 것은 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멀리서나마 예수를 바라보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라고 소리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케도니아 사람처럼 건너와서 복음을 전해달라고 손짓하여도 전할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믿고 싶어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믿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좋은 만남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만나서 안 될 사람을 만나면 손해보고, 가서 안 될 길을 가면 조난당합니다. 강도 만나지 않고, 선한 믿음의 이웃을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우리의 가는 길을 막는 대적이 없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런 대적을 만나더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둘째, 믿고 순종하게 하심을 감사합시다.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 할지라도 어떻게 문둥병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간단 말입니까 문둥병자는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일반 사회와 격리됨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고. 영적으로는 더욱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어서 고통스럽습니다. 문둥병자는 좋은 것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남들이 갖지 못한 열정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믿음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는 것처럼 생각되어도, 믿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서 믿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서 내주하시면서 믿음을 주시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다고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아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다.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다면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부자청년처럼 교회의 문을 두드렸다가 끝내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셋째, 은혜로 고침 받은 것을 감사합시다. 문둥병은 불치의 병입니다. 돈이나 의술로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거저 받은 은혜라고 합니다. 내 공로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자랑할 것이 있으나,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기에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일인가 웬 은혜가 그 사랑 크셔라. ”
구원받은 것 감사합시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인가 하는 육체의 문제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한 죄의 문제를 풀고 구원받은 것을 감사합시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시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수많은 기적들이 우리 몸 안과 밖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할 때 불뱀에 물려 죽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면 즉시 재앙이 닥칩니다. 전쟁과 기근과, 질병과 지진 같은 재앙을 만납니다.
새 차를 사도 간혹 심각한 하자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돈 준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고, 적은 확률이긴 하지만 온전한 차를 만나야 합니다. 새 차도 중고차 보다 못한 결함이 발행할 수 있습니다. 비행기가 언제나 안고 뜨는 것이 아닙니다. 사고도 일어나고 비상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사단의 세력이 아직도 활동하는 영적 세계에서 믿음의 생활을 온전히 감당하려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없습니다.
그런데 왜 아홉명은 돌아와서 감사하지 않았습니까 은혜를 같이 받았지만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해진 몸을 보이고, 집으로 돌아가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루빨리 하고 싶었습니다. 은혜 받은 것 감사할 줄도 모르고, 어떻게 자기 갈 길은 그렇게 빨리 갑니까 배은망덕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 "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여 주여 합니까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면 나를 주인으로 섬기는 과거로 돌아갑니다. 왜 기도했습니까 나 잘 되자고. 왜 열심히 봉사했습니까 나 잘되자고. 왜 믿었습니까 나 잘되자고. 내가 잘되는 것이 좋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나 은혜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를 나 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립시다.
왜 감사하지 못합니까 은혜를 깊이 깨닫지 못한 때문입니다. 여전히 율법 아래 있습니다. 의식법이나 정결법에 얽매여 있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함을 확인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둥병을 고친 예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제사장은 다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과거의 울타리와 전통에서 벗어납시다. 은혜 받았으면 은혜의 법으로 합시다. 거저 주시는 긍휼, 아무 조건 없는 긍휼을 받았다면 우리도 조건 없이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고 감사합시다.
주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셨다면 감격해야 합니다. 겉으로 조금 상처만 난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고난 받다가 일과가 끝났다고 퇴근하고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십작사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가 은혜의 보좌로 바뀌었습니다. 은혜의 깊은 강으로 들어갑시다. 은혜가 떨어지면 안 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노예 상인도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를 찬송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십자가의 깊은 은혜와 감격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감사하라
즉시 감사합시다.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와(15). ” 은혜가 식기 전에 감사합시다. 만일 우리가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감사하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께 베푸신 모든 복은 우리의 부주의함으로 신속하게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번제로 드리라 할 때 지체하지 않고 즉시 순종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발했습니다.
물 위로 걸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베드로는 즉시 순종하여 물 위로 걸었습니다. 감사도 은혜가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장맛은 묵은 것이 좋다고 하지만 감사는 묵으면 맛과 향을 잃기 쉽습니다. 오늘 감사 오늘 하고, 작은 감사도 잊지 말고 그 자리에서 합시다. 감사합니다. 이 인사만큼 간단하고 좋은 말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한 마디가 황소를 잡아서 드리는 제사보다 귀합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합시다. 남에게 식사 대접을 받았다면 고맙다고 인사할 것입니다. 집에서 아내가 식탁을 준비했다면 더 감사할 일입니다. 비싼 돈 주고 사 먹는 외식보다 정성으로 준비한 알차고 깨끗한 음식이 얼마나 좋습니까 일용할 양식으로 감사하고, 아름다운 꽃이 핀 것으로 감사합시다. 호수공원에 핀 꽃들도 아름답고 예쁘다고 생각하고 보면 더 아름답습니다. 안식의 밤을 주신 것으로 감사하고, 땀 흘려 일하게 하심을 감사합시다.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릴 자리가 있다는 것을 감사하고, 만나면 반가워하는 믿음이 이웃이 있다는 것을 감사합시다. 먹으면 얼마나 먹겠습니까 세계적인 절경이라면 얼마나 절경이겠습니까 일상에서 누리는 행복에 감사합시다. 당연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감사할 일입니다. 깨끗하게 관리된 화장실에도 수고한 손길이 있습니다. 잘 정돈된 거리에도 누군가의 수고가 있습니다. 잘 비워진 쓰레기통에도 누군가의 수고가 있습니다. 하룻밤을 편히 잘 수 있는 것도 나라 지키는 군인들의 수고가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나의 영적 삶을 위해 정성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감사합시다. 남들보다 더 크게 감사합시다. 믿음으로 감사합시다. 손양원 목사님은 1948년 여순사건이 터졌을 때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잃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순천사범학교와 순천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버지를 닮아 신앙과 민족정신에 불탔습니다. 두 형제는 좌익 동기생들에 의해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무자비하게 총살당했습니다. 당시 동인은 24살, 동신은 19살이었습니다.
한 번에 두 아들을 잃은 손 목사는 며칠 동안 비통의 시간을 겪으면서 신음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장례식에서는 기쁜 목소리로 이런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두 아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니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과부는 전 재산인 두 렙돈을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마케도니아 교회는 극한 가난에도 풍성한 연보를 드렸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2). ” 동냥하러 온 거지도 천원주면 안받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데 천 원짜리 오천 원짜리로 되겠습니까 이제부터 만 원짜리로 합시다. 목사인 제가 들어도 시험들 것 같은 말씀을 힘주어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있는 교인들은 달동네에 사는 하루 일용 근로자로 노동하는 분들이 대부분인데 다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정성을 다하라는 뜻으로 은혜로 받습니다. 훌륭한 교인입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모시면서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삼하6:3-4). ”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본 다윗의 아내 미갈은 왕이 품위에 맞지 않게 가벼운 처신을 했다고 비난하다가 저주를 받습니다. 죽는 날까지 아들이 없었습니다. 별빛만한 감사를 하면 달빛만한 감사를 주시고, 달빛만한 감사를 하면 햇빛만한 감사를 주십니다. 감사함으로 믿음의 그릇을 가득 채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의 그릇대로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금요일 찬양기도회를 마치고 집에 가서 아내와 교회 탐방을 가서 보고 온 이야기를 하다가 밤을 새웠습니다. 날이 환하게 밝아오는데 새벽 5시가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선교센터 건축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곧 이야기는 목회와 예배로 옮겨갔습니다. 열린예배와 교회 부흥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양보할 수 없는 피 튀는 토론으로 날이 샜습니다. 건물이야 말하기 간단하지만, 신앙과 신학의 기초에서 이해해야 하는 목회와 예배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교회 선교센터를 세우게 하신 것은 특별히 감사할 일이고, 은혜주시는 대로 욕심없이 바르게 목회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이렇게 해서 밤샘 토론을 맺었습니다. 밤을 새니까 몸에 무리가 가서 후유증이 큽니다. 그래도 감사함과 목회의 바른 방향에 대한 비전으로 끝을 맺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고, 무슨 계획이나 비전이 있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다짐으로 맺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