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하나님과 며느리가 기뻐할 수 있는 추석
본문
"나 홀로 믿음"의 성도님을 기억하시나요?
모든 사람들이 손꼽아 기다린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특히 추석 닥아옴이 마치 돈없는 사람에게 할부값 지불날짜가 닥아오는 것보다 더 부담이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짝믿음"을 가진 성도들일 것입니다.
이 "나 홀로 믿는 성도"는 일가친척이 모이는 특별한 날이면 더욱 외롭고 힘이 듭니다. 그래서 때로, 예수님 믿는 것이 자신의 가정적 삶의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차례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는 일로 시작하여 절하는 문제, 술 담배 및 놀이문화까지 수학공식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복병처럼 숨어있기 때문에 차라리 고향가기 전날, 심한 감기 몸살로 몸져 눕기를 원하는 교인도 만나 보았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이미 인가귀도가 된 성도들은 진심으로 중보기도하시는 사랑이 필요한 시간이 닥아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올해는 그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시기 위하여 말입니다. 특히 교회의 제직이 되신 분들 만큼 이라도 패배하지 않고, 만복의 근원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만 경배 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가정 식구들 중, 명절에 제일 미운 사람은?
또 명절이 그리 달갑지 않는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마는 실상은 그리 마음이 여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성들인데, 특히 일부 가정의 며느리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며느리들이 "명절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음을 몇몇 통계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충청북도 여성 민우회가 2000년 청주지역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명절에 대한 앙케이트 결과를 보면 조사대상 여성 158명 중 54명(34,2%)은 "명절이란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대답을 하였으며, 심지어 27명은(17,2%)는 "명절이 없었으면 좋겠다. "라고 응답을 하였습니다.
또 제일제당 사내보의 "CJ 패밀리"가 주부사원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명절기간 중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이런 응답을 하였습니다.
30명은 시어머니, 26명은 남편, 24명이 동서, 그리고 10명이 시누이가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통계결과가 기독교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결과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엄청난 차이는 없을 것이라 생각듭니다.
며느리가 하는 일이 마음에 차지 아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참 많은 것을 요구하는 시어머니와, 명절의 그 많은 일들과, 시어머니와 시누이로 인하여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 몰라라 하고 있는 남편이 밉기만 한 명절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명절 끝에 잠시라도 자신의 딸과 사위는 함께 찾아와 인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도, 거리가 가능해 친정 어머니를 찾아 뵈올 수 있는 며느리에게는 계속 집안일만 시키며 결국 보내기 싫어 하시거나, 심지어 보내지 않으시는 시어머니를 향한 며느리들의 소리없는 반란과 한숨이 남편을 향한 섭섭함으로 이어지는 현실을 우리 기독교인 들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겠습니까?
명절을 가족축제로 만드는 사람들.
분명한 것은 요즘처럼 핵가족화된 상황에서 맞이하는 추석은, 대가족제도 당시의 그것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과거의 농경사회에서 조상을 향한 감사차례가 중심이 되었던 추석의 성격을, 이제는 흩어졌던 가족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지난 한해를 함께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조상의 건덕을 이야기하며, 가족사랑을 확인하는 자리로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즉 추석은 온 가족이 함께 기쁨을 나누는 가족축제로 바뀌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며느리가 가족축제의 희생 어린양이 되지 않도록, 며느리의 "고통지수"를 서로 나누어 가지는 결단과 지혜, 그리고 실천이 필요할 것입니다.
즉 며느리만의 고통지수가 아니요, 모든 가족들이 함께 그 지수를 "평등지수"로 만드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추석을 그런 가족축제로 만드는데는 집안 어르신의 결단이 제일 중요합니다. 먼저 찾아 올 자식들에게 한 두가지 씩 음식을 만들어 오게 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지혜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안 어르신께서, 자녀들이 정성으로 만들어 온 음식을 맛보며 시상품까지 준비할 수만 있다면 "신세대노인"이라는 칭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부엌일의 일부분을 제비뽑기를 해서 며느리들 외에 다른 남자들 및 모든 식구들이 끼니 때마다 맡아하는 새로운 모습은 참으로 신선한 가정 분위기를 만들어 줄 것이며 평등지수를 높이는 좋은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식사 후, 집안의 어른들과 남자들은 방에 앉아 멍하니 테레비를 보는 명절, 또는 연휴 내내 고스톱만 쳐서 결국 파스를 어깨와 팔목에 붙이며 집으로 돌아오는 명절, 또한 아이들은 밥만 먹으면 손에서 빠져 나간 미꾸라지처럼 집에서 튀여 나가 노래방, 께임방, 영화관으로 달려가는 명절, 그리고 며느리들은 또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므로 결국 기억되는 것은 주방일 밖에 없으며, 그 동안 찜질방 다니며 겨우 다스린 허리디스크가 재발하는 씁쓸한 명절이 아니라, 며느리를 포함하여 다같이 즐거워하며 기쁨을 공유할 수 있는 기독교적인 놀이문화를 만들어 가는 선구자들이 각 가정에 있어 야 합니다.
그 역할은 젊은 식구들이 할 수 없습니다. 가부장적인 흐름을 거역할 수 없는 우리 현실을 감안할 때 집안 어르신들이 내리면 좋을 결단이요, 개혁일 것입니다.
중추절 감사 예배.
1)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교회가 준비한 추석절을 위한 "감사예배 예식서"를 활용하는데 적극적인 마음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 예식서야 말로 비기독교인 가족에게도 지참한 성경과 찬송가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초점을 맞춘 예식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에서 예배는 불가능하다고 늘 단정하듯이, 올해도 그렇게 넘기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로 준비한 후, 성령이 인도하심을 믿고 감사예배를 말씀하셔야도 좋습니다. 즉 "참으로 쉽고, 좋은 중추절 예식서가 있는데 함께 참석해 보시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만일 예배를 드릴 수만 있다면 놀라운 일이 생길 것입니다. 그 예배가 회목제물이 되어 가족간에 예상치 못한 화합 및 하나됨을 맛볼 수 있도록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단은 결국 그 가정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지키심을 배나 더하게 하여 복받는 가정으로 만들어져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아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어무리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고, 땀을 흘려도 헛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127:1-
2) 만일 우리 가정에 여호와 하나님이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지 않으시면 말입니다.
올해는 우리 교회 가정 중에 "그 예배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구먼!"이라는 말을 불신 일가친척들에게서 들어볼 수 있는 은총이 계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결코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성도님의 결단을 귀히 여기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이 굳세게 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들의 신앙적 도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참으로 의로운 오른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41:10) 그리고 말씀대로 이루어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고 보혈의 권세로 축원드립니다.
젊은 목사라고 너무 며느리 편만 드시는 것이 아닌지요?
모르긴 몰라도 그런 마음으로 지금 이 자리에 계신 교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매월 마지막 주일, 가정주일이 있는 우리 교회이기에 가끔 가정을 주제로 하는 설교를 하는 저로서는 이 문제가 가장 곤란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해인가 심방 후, 점심을 먹고 있는 저에게 어느 권사님이 조심스럽게, 그리고 저의 마음에 상처가 없게끔 지혜로운 말투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목사님, 지난 가정주일 설교내용은 너무 젊은 사람 편에서 말씀하신 것 아니신지요?"
저는 그 말씀을 하시는 권사님께 미안함 마음을 전하면서 이렇게 대답을 드렸습니다. "권사님, 그랬어요? 그런데 어느 가정주일 설교가 끝난 후 어느 댁을 심방하였더니 그때 젊은 여집사님이 투정이 썩인 목소리로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구만요. "
목사님, 우리 교회에 년세 많은 분들이 많이 계신다고 너무 연세 드신 분들 중심으로 말씀을 증거하시는 것 같아요, 저희 젊은 것들도 생각해 주세요, 예?" 좌우간 이 가정주일을 다시 폐지할 수도 없고, 그저 저의 멍에라고 생각하며 감사히 그런 말씀들을 참고로 하여 다시 설교를 준비하곤 합니다.
왜 그런 말씀들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마도 우리 믿는이들도 설교 말씀을 받을 때 자아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굴레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신은 늘 "상대 방의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정신"이였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된 우리의 입장, 그 죄의 값으로 영벌과 지옥을 면하지 못할 우리들 입장에서 문제를 보셨기에 이 땅에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부활, 승천의 승리셨습니다. 또한 그 결과가 우리들에게도 엄청난 유익이였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도 가정의 "이해와 용서의 두기둥"은, 서로의 입장에서 해석할 때 견고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의 삶이 오늘 이순간에 확 바뀔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력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시어머님이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며느리의 입장에서 범사를 이해하고자 하신다면 며느리를 향한 "책망보다 칭찬"이, 그리고 "오해보다는 이해"가 우선 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어르신이셨던 사도바울도 그의 서신을 통하여 초대교인들에게 일관적으로 보여주는 한가지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교회, 교인을 향한 목회서신이든지 항상 책망보다 칭찬을 먼저 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칭찬이 바로 나중에 권면의 약효를 배나 더 하게 하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또한 며느리가 작은 예수님의 심정을 가지고 시어머님 입장에서 범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생각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저 분이 과거 얼마나 힘든 세상을 사신 분인데, 그 때의 자신이 맞이 할 수 밖에 없었던 시집살이에 비교해 보실 때, 지금 내가 하는 것은 시집살이로 보실 수도 없을 것이야! 그래, 나 젊어서 너였고 너 늙어서 나된다라고 말씀하시고 싶으실 것이야, 자, 사셔야 얼마를 더 사신다고, 살아 계실 때 잘해드려야지 돌아가신 다음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라는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새로운 삶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명절 때 만 아니라 평소에도 남편으로서, 혹은 아들로서 "역할 혼란"을 반복하고 있는 나의 남편, 아들의 입장에서 현실을 해석하는 작은 예수요, 예수님 정신이 생활 속에 적용과 응용이 될 수 있는 아내, 그리고 어머님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그 "센드위치 신세"를 아들이 되지 않고는, 또는 남편이 되어보지 않고는 이론적으로 설명 을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
따라합시다. "그럴 수도 있지!"
한번 더 따라합시다.
이제는 며느리들만 따라합시다.
시어머님들만 따라합시다.
그리고 아들들만 따라합시다.
시아버님들도 따라합시다.
"그럴 수도 있지!"
그렇습니다.
20대는 꿈을 먹고 삽니다.
30대는 모든 것이 삼삼해서 살고,
40대는 사생결단으로 삽니다.
그리고 50대는 오기로 살며
60대 이상은 과거를 먹고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대차이가 바로 오해와 갈등을 가지고 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분의 삶의 정신이 우리 가운데 이미 스며들어 있기에 그런 갈등을 제거할 능력이 이미 임재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력하면 계발될 수 있는 은사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피차 좋은 관계를 만들어 후손에게 귀한 유산으로 물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노력 중 하나가 섭섭한 일을 당할 때 마다 마음에 쌓아두지 않고 이렇게 말하여 표출해 내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
왜냐하면 며느리, 시부모님, 남편, 그리고 내 아내가 "나와 다른 것은 다를 뿐이지,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번 명절에는 우리 교회 가족들 가운데 시어머님을 친정 어머니로, 또한 며느리는 내 딸처럼 여기는 말과 사랑스러운 보살핌이 넘치는 은총을 피차 체험하시기를, 인류의 공동체 중에 최초로 가정을 창조하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손꼽아 기다린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특히 추석 닥아옴이 마치 돈없는 사람에게 할부값 지불날짜가 닥아오는 것보다 더 부담이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짝믿음"을 가진 성도들일 것입니다.
이 "나 홀로 믿는 성도"는 일가친척이 모이는 특별한 날이면 더욱 외롭고 힘이 듭니다. 그래서 때로, 예수님 믿는 것이 자신의 가정적 삶의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차례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는 일로 시작하여 절하는 문제, 술 담배 및 놀이문화까지 수학공식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복병처럼 숨어있기 때문에 차라리 고향가기 전날, 심한 감기 몸살로 몸져 눕기를 원하는 교인도 만나 보았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이미 인가귀도가 된 성도들은 진심으로 중보기도하시는 사랑이 필요한 시간이 닥아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올해는 그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시기 위하여 말입니다. 특히 교회의 제직이 되신 분들 만큼 이라도 패배하지 않고, 만복의 근원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만 경배 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가정 식구들 중, 명절에 제일 미운 사람은?
또 명절이 그리 달갑지 않는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마는 실상은 그리 마음이 여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성들인데, 특히 일부 가정의 며느리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며느리들이 "명절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음을 몇몇 통계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충청북도 여성 민우회가 2000년 청주지역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명절에 대한 앙케이트 결과를 보면 조사대상 여성 158명 중 54명(34,2%)은 "명절이란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대답을 하였으며, 심지어 27명은(17,2%)는 "명절이 없었으면 좋겠다. "라고 응답을 하였습니다.
또 제일제당 사내보의 "CJ 패밀리"가 주부사원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명절기간 중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이런 응답을 하였습니다.
30명은 시어머니, 26명은 남편, 24명이 동서, 그리고 10명이 시누이가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통계결과가 기독교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결과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엄청난 차이는 없을 것이라 생각듭니다.
며느리가 하는 일이 마음에 차지 아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참 많은 것을 요구하는 시어머니와, 명절의 그 많은 일들과, 시어머니와 시누이로 인하여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 몰라라 하고 있는 남편이 밉기만 한 명절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명절 끝에 잠시라도 자신의 딸과 사위는 함께 찾아와 인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도, 거리가 가능해 친정 어머니를 찾아 뵈올 수 있는 며느리에게는 계속 집안일만 시키며 결국 보내기 싫어 하시거나, 심지어 보내지 않으시는 시어머니를 향한 며느리들의 소리없는 반란과 한숨이 남편을 향한 섭섭함으로 이어지는 현실을 우리 기독교인 들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겠습니까?
명절을 가족축제로 만드는 사람들.
분명한 것은 요즘처럼 핵가족화된 상황에서 맞이하는 추석은, 대가족제도 당시의 그것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과거의 농경사회에서 조상을 향한 감사차례가 중심이 되었던 추석의 성격을, 이제는 흩어졌던 가족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지난 한해를 함께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조상의 건덕을 이야기하며, 가족사랑을 확인하는 자리로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즉 추석은 온 가족이 함께 기쁨을 나누는 가족축제로 바뀌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며느리가 가족축제의 희생 어린양이 되지 않도록, 며느리의 "고통지수"를 서로 나누어 가지는 결단과 지혜, 그리고 실천이 필요할 것입니다.
즉 며느리만의 고통지수가 아니요, 모든 가족들이 함께 그 지수를 "평등지수"로 만드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추석을 그런 가족축제로 만드는데는 집안 어르신의 결단이 제일 중요합니다. 먼저 찾아 올 자식들에게 한 두가지 씩 음식을 만들어 오게 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지혜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안 어르신께서, 자녀들이 정성으로 만들어 온 음식을 맛보며 시상품까지 준비할 수만 있다면 "신세대노인"이라는 칭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부엌일의 일부분을 제비뽑기를 해서 며느리들 외에 다른 남자들 및 모든 식구들이 끼니 때마다 맡아하는 새로운 모습은 참으로 신선한 가정 분위기를 만들어 줄 것이며 평등지수를 높이는 좋은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식사 후, 집안의 어른들과 남자들은 방에 앉아 멍하니 테레비를 보는 명절, 또는 연휴 내내 고스톱만 쳐서 결국 파스를 어깨와 팔목에 붙이며 집으로 돌아오는 명절, 또한 아이들은 밥만 먹으면 손에서 빠져 나간 미꾸라지처럼 집에서 튀여 나가 노래방, 께임방, 영화관으로 달려가는 명절, 그리고 며느리들은 또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므로 결국 기억되는 것은 주방일 밖에 없으며, 그 동안 찜질방 다니며 겨우 다스린 허리디스크가 재발하는 씁쓸한 명절이 아니라, 며느리를 포함하여 다같이 즐거워하며 기쁨을 공유할 수 있는 기독교적인 놀이문화를 만들어 가는 선구자들이 각 가정에 있어 야 합니다.
그 역할은 젊은 식구들이 할 수 없습니다. 가부장적인 흐름을 거역할 수 없는 우리 현실을 감안할 때 집안 어르신들이 내리면 좋을 결단이요, 개혁일 것입니다.
중추절 감사 예배.
1)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교회가 준비한 추석절을 위한 "감사예배 예식서"를 활용하는데 적극적인 마음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 예식서야 말로 비기독교인 가족에게도 지참한 성경과 찬송가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초점을 맞춘 예식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에서 예배는 불가능하다고 늘 단정하듯이, 올해도 그렇게 넘기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로 준비한 후, 성령이 인도하심을 믿고 감사예배를 말씀하셔야도 좋습니다. 즉 "참으로 쉽고, 좋은 중추절 예식서가 있는데 함께 참석해 보시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만일 예배를 드릴 수만 있다면 놀라운 일이 생길 것입니다. 그 예배가 회목제물이 되어 가족간에 예상치 못한 화합 및 하나됨을 맛볼 수 있도록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단은 결국 그 가정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지키심을 배나 더하게 하여 복받는 가정으로 만들어져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아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어무리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고, 땀을 흘려도 헛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127:1-
2) 만일 우리 가정에 여호와 하나님이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지 않으시면 말입니다.
올해는 우리 교회 가정 중에 "그 예배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구먼!"이라는 말을 불신 일가친척들에게서 들어볼 수 있는 은총이 계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결코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성도님의 결단을 귀히 여기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이 굳세게 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들의 신앙적 도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참으로 의로운 오른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41:10) 그리고 말씀대로 이루어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고 보혈의 권세로 축원드립니다.
젊은 목사라고 너무 며느리 편만 드시는 것이 아닌지요?
모르긴 몰라도 그런 마음으로 지금 이 자리에 계신 교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매월 마지막 주일, 가정주일이 있는 우리 교회이기에 가끔 가정을 주제로 하는 설교를 하는 저로서는 이 문제가 가장 곤란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해인가 심방 후, 점심을 먹고 있는 저에게 어느 권사님이 조심스럽게, 그리고 저의 마음에 상처가 없게끔 지혜로운 말투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목사님, 지난 가정주일 설교내용은 너무 젊은 사람 편에서 말씀하신 것 아니신지요?"
저는 그 말씀을 하시는 권사님께 미안함 마음을 전하면서 이렇게 대답을 드렸습니다. "권사님, 그랬어요? 그런데 어느 가정주일 설교가 끝난 후 어느 댁을 심방하였더니 그때 젊은 여집사님이 투정이 썩인 목소리로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구만요. "
목사님, 우리 교회에 년세 많은 분들이 많이 계신다고 너무 연세 드신 분들 중심으로 말씀을 증거하시는 것 같아요, 저희 젊은 것들도 생각해 주세요, 예?" 좌우간 이 가정주일을 다시 폐지할 수도 없고, 그저 저의 멍에라고 생각하며 감사히 그런 말씀들을 참고로 하여 다시 설교를 준비하곤 합니다.
왜 그런 말씀들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마도 우리 믿는이들도 설교 말씀을 받을 때 자아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굴레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신은 늘 "상대 방의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정신"이였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된 우리의 입장, 그 죄의 값으로 영벌과 지옥을 면하지 못할 우리들 입장에서 문제를 보셨기에 이 땅에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부활, 승천의 승리셨습니다. 또한 그 결과가 우리들에게도 엄청난 유익이였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도 가정의 "이해와 용서의 두기둥"은, 서로의 입장에서 해석할 때 견고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의 삶이 오늘 이순간에 확 바뀔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력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시어머님이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며느리의 입장에서 범사를 이해하고자 하신다면 며느리를 향한 "책망보다 칭찬"이, 그리고 "오해보다는 이해"가 우선 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어르신이셨던 사도바울도 그의 서신을 통하여 초대교인들에게 일관적으로 보여주는 한가지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교회, 교인을 향한 목회서신이든지 항상 책망보다 칭찬을 먼저 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칭찬이 바로 나중에 권면의 약효를 배나 더 하게 하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또한 며느리가 작은 예수님의 심정을 가지고 시어머님 입장에서 범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생각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저 분이 과거 얼마나 힘든 세상을 사신 분인데, 그 때의 자신이 맞이 할 수 밖에 없었던 시집살이에 비교해 보실 때, 지금 내가 하는 것은 시집살이로 보실 수도 없을 것이야! 그래, 나 젊어서 너였고 너 늙어서 나된다라고 말씀하시고 싶으실 것이야, 자, 사셔야 얼마를 더 사신다고, 살아 계실 때 잘해드려야지 돌아가신 다음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라는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새로운 삶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명절 때 만 아니라 평소에도 남편으로서, 혹은 아들로서 "역할 혼란"을 반복하고 있는 나의 남편, 아들의 입장에서 현실을 해석하는 작은 예수요, 예수님 정신이 생활 속에 적용과 응용이 될 수 있는 아내, 그리고 어머님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그 "센드위치 신세"를 아들이 되지 않고는, 또는 남편이 되어보지 않고는 이론적으로 설명 을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
따라합시다. "그럴 수도 있지!"
한번 더 따라합시다.
이제는 며느리들만 따라합시다.
시어머님들만 따라합시다.
그리고 아들들만 따라합시다.
시아버님들도 따라합시다.
"그럴 수도 있지!"
그렇습니다.
20대는 꿈을 먹고 삽니다.
30대는 모든 것이 삼삼해서 살고,
40대는 사생결단으로 삽니다.
그리고 50대는 오기로 살며
60대 이상은 과거를 먹고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대차이가 바로 오해와 갈등을 가지고 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분의 삶의 정신이 우리 가운데 이미 스며들어 있기에 그런 갈등을 제거할 능력이 이미 임재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력하면 계발될 수 있는 은사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피차 좋은 관계를 만들어 후손에게 귀한 유산으로 물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노력 중 하나가 섭섭한 일을 당할 때 마다 마음에 쌓아두지 않고 이렇게 말하여 표출해 내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
왜냐하면 며느리, 시부모님, 남편, 그리고 내 아내가 "나와 다른 것은 다를 뿐이지,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번 명절에는 우리 교회 가족들 가운데 시어머님을 친정 어머니로, 또한 며느리는 내 딸처럼 여기는 말과 사랑스러운 보살핌이 넘치는 은총을 피차 체험하시기를, 인류의 공동체 중에 최초로 가정을 창조하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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