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맥추감사절
본문
맥추절을 지키는 이유는 성경이 맥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출 23:16a)고 하였습니다. 말 그대로, 맥추절이란 보리를 거두는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본래 성경에서의 뜻은 ‘첫 열매를 거두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실절이라고도 하였습니다(출 34:22). 이스라엘에서는 주로 밀을 농사지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가을에 벼를 거두기 이전인 먼저 여름에 보리를 거두기 때문에 맥추절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맥추절은 해방 기념절인 유월절, 추수감사절인 수장절과 함께 3대 절기의 하나입니다. 유월절 둘째 날에 시작하여 7주째 즉 제 50일째에 밀의 첫 이삭을 드리는 절기입니다(신 16:9-12). 이를 오십 일째에 지킨다고 해서 오순절이라도 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이 날을 시내산에서 율법 받은 날로 기념합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유대 국민의 탄생일로, 칠칠절을 그들의 종교의 탄생일로 중시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농업적 축제일이었는데, 율법 부여라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게 되어, 중요한 절기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 시대 이후에는 오순절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맥추절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실 것입니다. 더욱이 보리농사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또한 오늘 교회는 유월절 후 50일인 오순절을 성령 강림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매년 7월 첫 주일에 지키는 맥추절은 전혀 다른 의미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맥추절을 율법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바꾸어 지키는 것처럼, 오늘의 교회는 한 해의 절반을 지내며 감사하고, 후반기를 시작하며 은혜를 구하는 절기로 지키고 있습니다.
7월 첫 주일은 한 해의 절반을 지나고 후반절을 시작하는 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주실 은혜를 구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여러분에게 감사와 희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2010년 전반기를 보내고 후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 우리가 감사하여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해야 할 은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기 때문입니까
I. 예수님은 31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31a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여기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위에서 오시는 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자신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근본적으로 출신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위로부터 오시는 분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땅에서 난 자신과 대조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비롯하여 모든 인간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하늘에서 오시어 하늘에 속하고 하늘에 속한 것을 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매년 성탄절을 맞을 때마다 기억하고 축하하는 것은 아기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하여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성장기를 걸쳐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을 위로부터 오셨다고 말하는 이유는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근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하루살이와 매미가 함께 놀았습니다. 저녁때가 되자 매미는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또 놀자. ”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살이는 “얘, 매미야, 내일이 뭐니”하고 물었습니다. 매미는 “내일이란 캄캄한 밤을 지나면 다시 오늘 같이 밝은 날이 오는데, 그것이 바로 내일이야!”하고 일러주었습니다. 하지만 하루살이는 내일을 이해할 수 가 없었습니다.
하루살이가 떠난 후 매미는 개구리와 어울려 놀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개구리가 매미에게 말했습니다. “얘! 그만 놀자, 날씨가 추워지니 내년에 만나자. ”고. 매미는 내년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개구리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이 오고, 얼음이 얼고, 다시 봄이 온다고 했으나 매미는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하루살이는 내일을 사는 매미와 다릅니다. 한 철을 사는 매미는 다음 해를 사는 개구리와도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이들은 하늘로부터 와서 하늘에 속하여 하늘에 속한 것을 말하는 이와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와는 달리 죄는 없으십니다(히 4:15).
예수님은 우리와는 차원이 전혀 다르시기에 그래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또 어떤 분이십니까
31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31b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앞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위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위가 어디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위는 하늘입니다.
2.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하늘은 무엇입니까
윤극영 선생이 지은 반달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 마리 /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누군가 ‘반달’을 영어로 ‘Blue Sky Galaxy Song’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푸른 하늘에는 달이 뜨고 집니다. 그러나 계수나무가 심겨져 있고, 토끼가 살고, 돛대도 없이 삿대도 없이, 은하수에 띄워져, 서쪽 나라로 가는 반달은 푸른 하늘(blue sky)에는 없습니다. 이런 배를 띄울 수 있는 하늘은 오직 마음속에만 있습니다. 샛별을 등대삼아 갈 수 있는 나라는 이미 푸른 하늘(sky)아니라 마음속의 하늘(heaven)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하늘은, 그리고 다시 올라가신 하늘은 푸른 하늘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하늘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하늘은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셨다는 것은 모든 위에 계셔서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예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그 손에 맡기셨습니다(:35). 세상을 구원하고 심판하시는 권세가 예수님께 있습니다.
하루살이와 매미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루살이와 매미가 만나서 친하게 잘 놀았습니다. 그런데 매미가 하루살이에게 실수하였습니다. 화가 난 하루살이가 친구 하루살이 이만 마리를 데리고 몰려들어왔습니다. 아무리 매미라도 하루살이 이만 마리가 함께 달려드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매미가 한 마디를 하자 하루살이 이만 마리가 한꺼번에 기절하였습니다. 매미가 한 말은 딱 한 마디였답니다.
“내일 싸우자!”
아무리 숫자 많아도 차원이 다르면 비교할 수 없습니다. 땅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하늘의 가장 적은 것보다도 적습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시는 분으로 우리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시는 분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능력에 제한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또 어떤 분이십니까
34절 말씀입니다.
:34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땅에서 난 사람과는 전혀 다른 분을, 세상 만물을 지배하는 분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이 세상에 오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3.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분이시자, 세상을 지배하는 분이시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시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가리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여 하늘로 가는 길을 모릅니다. 세례 요한 조차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나신 분은 하늘에 속하여 하늘로 가는 길을 아시고 사람들을 하늘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 예수님을 단지 위대한 스승으로 아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신 분으로 우리와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시는 분으로 세상을 지배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 믿음을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분으로, 세상을 지배하시고, 세상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이 사람들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런 분이시니 그래서 그것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2. 그래서 36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36a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예수님은 세상 위에서 오신 분이시기에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구원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세상을 구원할 능력이 없기에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로 하늘로부터 오셨기에 세상을 구원할 능력이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되 세상을 사랑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독생자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1.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 들어갔다가 함께 물에서 나오자 못하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하려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한 아버지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해내기에는 힘이 부족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물에서 구해줄 수 있다고 해도, 자신의 죄를 가진 사람이 죄에 빠진 다른 사람을 구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에 빠진 자들을 구해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들을 향하여 던지는 구명 튜브는 단지 그 이름을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미국의 어떤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평생을 신앙으로 살아오던 한 어머니가 네 명의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게 됐습니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들을 쳐다보며 작별인사를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첫째, 둘째, 셋째 아들에게는 차례로 “얘야, 엄마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다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내아들 엔디에게 만은 “엔디야, 엄마에게 굿바이 키스를 해다오”하였습니다.
미국인들에게 굿나잇 키스는 잠자기 전에 하는 인사이고, 굿바이 키스는 헤어지기 전에는 하는 인사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굿나잇 키스를 하자는 것은 죽음의 잠을 자고 깨어나 다시 만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굿바이는 영원한 이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뜻을 알고 있는 막내아들은 이상해서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 왜 형들에게는 굿나잇 키스를 하게하고 나에게는 굿바이 키스를 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어머니는 가슴속 깊이 묻어뒀던 말을 했습니다.
“엔디야, 너희 형들은 이제 머지않아 저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제 너와는 영원한 이별을 하는구나. 이 엄마는 너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진리를 여러 번 간곡히 가르쳤지만 너는 끝내 거절하고 말았어. 다시는 천국에서 너를 만날 수 없기에 너와는 굿바이 키스를 하는 거란다!”
어머니의 이 유언 같은 말은 결국 엔디로 하여금 굿나잇 키스를 하도록 만들었고 구원의 길인 예수님을 영접하게 했습니다.
얼마 전, 저도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 다음에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
어머님의 장례식이 있던 아침 이른 시간에, 어머님의 자녀손들이 영정 앞에 모여서 소망에 대한 찬송을 여러 곡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22장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를 불렀습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셔 / 훈계로써 인도하며 도와주시기를 바라네 /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 때까지 계심 바라네 (222장 1절)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셔 / 사망권세 이기도록 지켜 주시기를 바라네 /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 때까지 계심 바라네 (222장 4절)
죽어도 다시 만날 소망이 있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 땅에서 숨이 멈추고, 정들었던 몸을 아쉽지만 땅에 모시고 돌아서는 슬픔이 있지만, 머지않아 천국에서 만날 것을 확신하는 것이 영생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에게 이미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확신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습니까
36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36b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위로부터 하늘에서 오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있습니까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 아래 있습니다.
2.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 진노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고 안 믿는 사람들은 그냥 두시면 안 될까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 또는 진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차마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것을 당혹스러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배타적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대한 다른 말씀을 찾을 수 없습니다. 끝까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다른 말을 하고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영국의 작가 아더 포릿은 무신론자였던 찰스 브래들로라는 사람의 장례식에서 있었던 가슴 아팠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무덤 앞에서 한마디의 기도도 없었다. 사람들은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가벼운 관에 넣어진 시신은 아무런 예식도 없이 구덩이 안으로 내려졌다. 그것은 마치 무슨 상한 고기를 눈에 보이지 않게 서둘러 치우는 것처럼 보였다. ”
포릿은 이어서 말하기를 “죽음 후에도 생명이 이어진다는 믿음을 우리가 상실할 때 죽음은 엄청난 승리를 거둔다. ”고. 그리고 또 말하기를 ‘가슴이 얼어붙는 심정’으로 그곳을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하기 좋은 말로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저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죽음을 가볍게 여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실제를 직면한다면 결코 가볍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란 타오르던 촛불이 꺼져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죽음은 단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없는 죽음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입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없이 죽음을 맞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는 지옥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하시는 말을 듣지 않으면 바른 가르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으면 바르게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사회에서 법을 지키지 않으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위로부터 하늘에서 오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학생이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을 무시하고, 자녀가 가정에서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고, 시민이 교묘하게 법을 무시하며 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는 것, 그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진 것을 믿습니다. 다만 여전히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전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감사하여야 할 가장 큰 조건은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는 세상을 살아갈 가장 큰 능력은 영생을 이미 얻었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에 의하면 인생이란 인생은 B와 D 사이의 C입니다. 즉 인생은 출생(Birth)과 사망(Death) 사이의 선택(Choice)입니다. 인생은 출생해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공식은 다릅니다. 우리의 B(Birth)와 D(Death)사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C, Christ를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출생하여(B) 그리스도ⓒ를 선택한 자에게는 누구든지 D가 사라지고, E(Eternal life·영생)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거듭난 새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 순종하든지, 아니면 죄의 힘에 끌려가는 옛 사람으로 살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마음에 성령님이 내주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생 동안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더욱 더 영적으로 성숙해져 갑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순종하면 성령님은 우리를 더욱 더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영생을 얻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이미 그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었음을 감사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영생 얻은 자로 살아가는 지혜와 용기가 넘치시기를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본래 성경에서의 뜻은 ‘첫 열매를 거두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실절이라고도 하였습니다(출 34:22). 이스라엘에서는 주로 밀을 농사지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가을에 벼를 거두기 이전인 먼저 여름에 보리를 거두기 때문에 맥추절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맥추절은 해방 기념절인 유월절, 추수감사절인 수장절과 함께 3대 절기의 하나입니다. 유월절 둘째 날에 시작하여 7주째 즉 제 50일째에 밀의 첫 이삭을 드리는 절기입니다(신 16:9-12). 이를 오십 일째에 지킨다고 해서 오순절이라도 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이 날을 시내산에서 율법 받은 날로 기념합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유대 국민의 탄생일로, 칠칠절을 그들의 종교의 탄생일로 중시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농업적 축제일이었는데, 율법 부여라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게 되어, 중요한 절기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 시대 이후에는 오순절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맥추절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실 것입니다. 더욱이 보리농사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또한 오늘 교회는 유월절 후 50일인 오순절을 성령 강림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매년 7월 첫 주일에 지키는 맥추절은 전혀 다른 의미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맥추절을 율법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바꾸어 지키는 것처럼, 오늘의 교회는 한 해의 절반을 지내며 감사하고, 후반기를 시작하며 은혜를 구하는 절기로 지키고 있습니다.
7월 첫 주일은 한 해의 절반을 지나고 후반절을 시작하는 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주실 은혜를 구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여러분에게 감사와 희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2010년 전반기를 보내고 후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 우리가 감사하여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해야 할 은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기 때문입니까
I. 예수님은 31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31a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여기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위에서 오시는 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자신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근본적으로 출신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위로부터 오시는 분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땅에서 난 자신과 대조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비롯하여 모든 인간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하늘에서 오시어 하늘에 속하고 하늘에 속한 것을 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매년 성탄절을 맞을 때마다 기억하고 축하하는 것은 아기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하여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성장기를 걸쳐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을 위로부터 오셨다고 말하는 이유는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근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하루살이와 매미가 함께 놀았습니다. 저녁때가 되자 매미는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또 놀자. ”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살이는 “얘, 매미야, 내일이 뭐니”하고 물었습니다. 매미는 “내일이란 캄캄한 밤을 지나면 다시 오늘 같이 밝은 날이 오는데, 그것이 바로 내일이야!”하고 일러주었습니다. 하지만 하루살이는 내일을 이해할 수 가 없었습니다.
하루살이가 떠난 후 매미는 개구리와 어울려 놀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개구리가 매미에게 말했습니다. “얘! 그만 놀자, 날씨가 추워지니 내년에 만나자. ”고. 매미는 내년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개구리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이 오고, 얼음이 얼고, 다시 봄이 온다고 했으나 매미는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하루살이는 내일을 사는 매미와 다릅니다. 한 철을 사는 매미는 다음 해를 사는 개구리와도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이들은 하늘로부터 와서 하늘에 속하여 하늘에 속한 것을 말하는 이와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와는 달리 죄는 없으십니다(히 4:15).
예수님은 우리와는 차원이 전혀 다르시기에 그래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또 어떤 분이십니까
31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31b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앞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위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위가 어디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위는 하늘입니다.
2.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하늘은 무엇입니까
윤극영 선생이 지은 반달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 마리 /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누군가 ‘반달’을 영어로 ‘Blue Sky Galaxy Song’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푸른 하늘에는 달이 뜨고 집니다. 그러나 계수나무가 심겨져 있고, 토끼가 살고, 돛대도 없이 삿대도 없이, 은하수에 띄워져, 서쪽 나라로 가는 반달은 푸른 하늘(blue sky)에는 없습니다. 이런 배를 띄울 수 있는 하늘은 오직 마음속에만 있습니다. 샛별을 등대삼아 갈 수 있는 나라는 이미 푸른 하늘(sky)아니라 마음속의 하늘(heaven)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하늘은, 그리고 다시 올라가신 하늘은 푸른 하늘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하늘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하늘은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셨다는 것은 모든 위에 계셔서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예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그 손에 맡기셨습니다(:35). 세상을 구원하고 심판하시는 권세가 예수님께 있습니다.
하루살이와 매미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루살이와 매미가 만나서 친하게 잘 놀았습니다. 그런데 매미가 하루살이에게 실수하였습니다. 화가 난 하루살이가 친구 하루살이 이만 마리를 데리고 몰려들어왔습니다. 아무리 매미라도 하루살이 이만 마리가 함께 달려드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매미가 한 마디를 하자 하루살이 이만 마리가 한꺼번에 기절하였습니다. 매미가 한 말은 딱 한 마디였답니다.
“내일 싸우자!”
아무리 숫자 많아도 차원이 다르면 비교할 수 없습니다. 땅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하늘의 가장 적은 것보다도 적습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시는 분으로 우리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시는 분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능력에 제한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또 어떤 분이십니까
34절 말씀입니다.
:34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땅에서 난 사람과는 전혀 다른 분을, 세상 만물을 지배하는 분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이 세상에 오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3.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분이시자, 세상을 지배하는 분이시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시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가리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여 하늘로 가는 길을 모릅니다. 세례 요한 조차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나신 분은 하늘에 속하여 하늘로 가는 길을 아시고 사람들을 하늘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 예수님을 단지 위대한 스승으로 아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신 분으로 우리와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시는 분으로 세상을 지배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 믿음을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분으로, 세상을 지배하시고, 세상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이 사람들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런 분이시니 그래서 그것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2. 그래서 36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36a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예수님은 세상 위에서 오신 분이시기에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구원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세상을 구원할 능력이 없기에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로 하늘로부터 오셨기에 세상을 구원할 능력이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되 세상을 사랑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독생자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1.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 들어갔다가 함께 물에서 나오자 못하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하려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한 아버지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해내기에는 힘이 부족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물에서 구해줄 수 있다고 해도, 자신의 죄를 가진 사람이 죄에 빠진 다른 사람을 구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에 빠진 자들을 구해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들을 향하여 던지는 구명 튜브는 단지 그 이름을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미국의 어떤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평생을 신앙으로 살아오던 한 어머니가 네 명의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게 됐습니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들을 쳐다보며 작별인사를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첫째, 둘째, 셋째 아들에게는 차례로 “얘야, 엄마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다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내아들 엔디에게 만은 “엔디야, 엄마에게 굿바이 키스를 해다오”하였습니다.
미국인들에게 굿나잇 키스는 잠자기 전에 하는 인사이고, 굿바이 키스는 헤어지기 전에는 하는 인사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굿나잇 키스를 하자는 것은 죽음의 잠을 자고 깨어나 다시 만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굿바이는 영원한 이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뜻을 알고 있는 막내아들은 이상해서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 왜 형들에게는 굿나잇 키스를 하게하고 나에게는 굿바이 키스를 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어머니는 가슴속 깊이 묻어뒀던 말을 했습니다.
“엔디야, 너희 형들은 이제 머지않아 저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제 너와는 영원한 이별을 하는구나. 이 엄마는 너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진리를 여러 번 간곡히 가르쳤지만 너는 끝내 거절하고 말았어. 다시는 천국에서 너를 만날 수 없기에 너와는 굿바이 키스를 하는 거란다!”
어머니의 이 유언 같은 말은 결국 엔디로 하여금 굿나잇 키스를 하도록 만들었고 구원의 길인 예수님을 영접하게 했습니다.
얼마 전, 저도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 다음에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
어머님의 장례식이 있던 아침 이른 시간에, 어머님의 자녀손들이 영정 앞에 모여서 소망에 대한 찬송을 여러 곡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22장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를 불렀습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셔 / 훈계로써 인도하며 도와주시기를 바라네 /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 때까지 계심 바라네 (222장 1절)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셔 / 사망권세 이기도록 지켜 주시기를 바라네 /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 때까지 계심 바라네 (222장 4절)
죽어도 다시 만날 소망이 있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 땅에서 숨이 멈추고, 정들었던 몸을 아쉽지만 땅에 모시고 돌아서는 슬픔이 있지만, 머지않아 천국에서 만날 것을 확신하는 것이 영생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에게 이미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확신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습니까
36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36b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위로부터 하늘에서 오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있습니까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 아래 있습니다.
2.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 진노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고 안 믿는 사람들은 그냥 두시면 안 될까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 또는 진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차마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것을 당혹스러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배타적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대한 다른 말씀을 찾을 수 없습니다. 끝까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다른 말을 하고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영국의 작가 아더 포릿은 무신론자였던 찰스 브래들로라는 사람의 장례식에서 있었던 가슴 아팠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무덤 앞에서 한마디의 기도도 없었다. 사람들은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가벼운 관에 넣어진 시신은 아무런 예식도 없이 구덩이 안으로 내려졌다. 그것은 마치 무슨 상한 고기를 눈에 보이지 않게 서둘러 치우는 것처럼 보였다. ”
포릿은 이어서 말하기를 “죽음 후에도 생명이 이어진다는 믿음을 우리가 상실할 때 죽음은 엄청난 승리를 거둔다. ”고. 그리고 또 말하기를 ‘가슴이 얼어붙는 심정’으로 그곳을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하기 좋은 말로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저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죽음을 가볍게 여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실제를 직면한다면 결코 가볍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란 타오르던 촛불이 꺼져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죽음은 단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없는 죽음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입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없이 죽음을 맞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는 지옥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하시는 말을 듣지 않으면 바른 가르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으면 바르게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사회에서 법을 지키지 않으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위로부터 하늘에서 오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학생이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을 무시하고, 자녀가 가정에서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고, 시민이 교묘하게 법을 무시하며 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는 것, 그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진 것을 믿습니다. 다만 여전히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전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감사하여야 할 가장 큰 조건은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는 세상을 살아갈 가장 큰 능력은 영생을 이미 얻었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에 의하면 인생이란 인생은 B와 D 사이의 C입니다. 즉 인생은 출생(Birth)과 사망(Death) 사이의 선택(Choice)입니다. 인생은 출생해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공식은 다릅니다. 우리의 B(Birth)와 D(Death)사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C, Christ를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출생하여(B) 그리스도ⓒ를 선택한 자에게는 누구든지 D가 사라지고, E(Eternal life·영생)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거듭난 새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 순종하든지, 아니면 죄의 힘에 끌려가는 옛 사람으로 살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마음에 성령님이 내주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생 동안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더욱 더 영적으로 성숙해져 갑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순종하면 성령님은 우리를 더욱 더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영생을 얻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이미 그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었음을 감사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영생 얻은 자로 살아가는 지혜와 용기가 넘치시기를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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