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맥추감사는 명령이다
본문
보리 추수철이 지나가고 있는데요. 제게는 보리에 대한 몇 가지 추억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마루 위 천정에 달아놓은 ‘삶은 보리쌀’에 얽힌 추억입니다. 어릴 적 시골에서 살 때, 어머니는 매일 보리쌀을 삶아서 대나무 바구니에 넣고 그것에 뚜껑을 덮어서 마루 위 천정에 달아 놓았다가 다음 끼니 떼에 그것으로 밥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매달아 놓은 보리쌀을 노리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쥐들이 그것을 노렸는데, 천정에 매달린 밧줄을 타고 바구니까지는 간신히 가지만 뚜껑 때문에 성공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것을 노렸습니다.
특별한 간식이 없는 때라 한 움큼 쥐어먹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키가 닿지 않았습니다. 보리 혹은 보리밥에 대한 또 다른 추억은 보리쌀 90%와 쌀 10%의 비율로 어머니께서 밥을 지으셨는데, 밥솥 가운데에 조금 넣은 그 쌀이 나중에 밥이 다 되어서 밥솥뚜껑을 열면 신기하게도 전체로 퍼지지 않고 넣은 그대로 한 가운데 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은 그 쌀밥을 항상 ‘나한테는 너거들 밖에 없다’하시던 우리들에게는 한 번도 주시지 않으면서, 늘 ‘원수 같은 인간’ 하시면서 ‘밉다 밉다’ 하시던 아버지에게만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왜 보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오늘이 맥추감사절 아닙니까 ‘보리 맥(麥)’자에 ‘추수할 추(秋)’자해서 말 그대로 ‘보리추수를 감사하는 날’입니다. 따라서 ‘맥추감사절’은 ‘보리를 수확하여 그것을 감사하여 지키는 주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보리추수감사절’ 혹은 ‘보리감사주일’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난 금요일 신문에 보니까,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어느 농촌에 가서 풍년을 기원하자 그 뒤에 있던 산하 공무원들이 씁쓸해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쌀이 남아도는 형편에 풍년을 기원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따라서 지금은 “쌀에 대한 감사”조차도 일어나지 않는 때입니다. 이런 시대에 “보리감사”가 적절합니까 게다가 요즘 우리 농촌에서 보리농사를 짓는 사람도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교계 일각에서는 맥추감사절에 대한 이견을 제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시고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 설교에서 보았습니다. 교역자 회의 시간에 한 부목사님이 담임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삼대 절기를 지켰지만, 삼대 절기 가운데 하나인 유월절도 지키지 않는 우리의 현실에서 굳이 맥추절을 지켜야하는 의미를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그러자 그 담임 목사님은 출애굽기 23장 14절부터 17절과 신명기 16장 1절부터 17절을 인용하면서 자세히 대답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년 세 번의 절기를 지키라. ”고 하시면서, 그 세 절기는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고, ‘맥추절’은 밀이나 보리 수확을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며, ‘수장절’은 가을에 거두어들인 수확을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 시피, ‘수장절’은 우리가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인류의 모든 문제와 그 핵심인 죄 문제를 해결하신 날이며, 3일 만에 부활하신 날입니다.
따라서 굳이 유월절이라는 이름으로는 지키지 않지만 釘死日과 부활절 등으로 이미 지키고 있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수장절이나 유월절에 대해서는 이견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맥추절에 대한 이견이 있고 그 이견이 타당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현대 사회가 농경사회도 아니고, 또 보리농사를 많이 짓는 것도 아니고, 거기다가 쌀이 남아돌아 쌀 감사도 어려운 판에 보리에 대한 감사까지 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왜 우리가 맥추감사절을 지켜야 하는 지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임금님이 어느 날 맛이 기막히게 좋은 요리를 잡수신 후 감격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먹어 본 요리 중에서 최고였다. 이렇게 훌륭한 요리를 만든 요리사는 세계 제일의 요리사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그 요리사에게 상을 주어야겠다. ” 그래서 요리사를 불렀습니다. 임금님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들은 요리사는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임금님, 그렇게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요리는 제 기술이 좋아서 만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신선하고 좋은 야채를 파는 사람이 없었다면 제가 어떻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칭찬하시려거든 좋은 야채를 판 그 채소 장수를 칭찬해 주십시오. ” 임금님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되어 요리사가 말한 채소 장수를 불렀습니다. 왕궁으로 불려가서 자신이 불려온 이유를 들은 채소 장수는 깜짝 놀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임금님, 그건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그저 야채를 팔았을 뿐이며, 정작 칭찬받을 사람은 제가 아니라 그 야채를 키운 농부들입니다. ” 임금은 그 말 역시 옳다고 여겨 이번에는 농부를 불렀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왕궁으로 불려간 농부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을까 해서 두려워하며 임금님 앞에 섰습니다. 임금이 농부에게 부른 이유를 설명하자 농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임금님, 그것은 잘못된 말씀입니다. 조상적부터 대대로 농사꾼인 저는 씨를 뿌리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어 제 시기에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만 한 뿐입니다. 제가 땅을 갈아 씨를 심어도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햇볕을 주시는 분이 없으면 저는 잎사귀 하나, 열매하나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니 감사의 인사는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 무슨 말입니까 이 임금처럼, 여러분이 직접적으로 농사를 짓지 않아도 땅과 바다의 모든 소산을 제 때에 수확하게 하셔서 여러분으로 먹게 하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기에 그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농촌에 살건 도시에 살건, 보리와 관계가 있든 없든,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것 역시 마땅한 일이지요.
2.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
1) 감사하라, 모든 것에!
자, 이제 본문을 보실까요 오늘 본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두 번째 선교 여행 때 설립한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칭찬했고,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의 본을 보인 것을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칭찬을 많이 받은 데살로니가 교회도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감사의 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凡事”라는 말은 한자로 ‘모두 범(凡), 일 사(事)’, 즉 “모든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 원어로 보면, 조금 다릅니다. “범사”는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이란 ‘온갖 것’, ‘어떤 것이든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그리고 ‘어떤 상황이든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시간적인 의미도 있어 “항상, 언제든지”라는 의미가 그 속에 있습니다(행10:14, 11:8). 따라서 오늘 본문이 말하는 범사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상황, 모든 환경, 모든 사람, 과거와 현재와 미래, 좋은 것 만 아니라 좋지 않은 것, 그리고 불행 슬픔 고난 사고 질병’ 등 모든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 즉 어떤 상황, 어떤 형편에서든지, 항상, 언제든지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모든 것에 감사하기가 쉽습니까 좋은 일에 대한 감사야 쉽지만 좋지 않은 일, 불행과 슬픔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기가 쉽습니까 감사할 때도 있지만 우울할 때 괴로울 때 슬플 때가 있는 것이 우리 삶이지 않습니까
1988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미국 전역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주 중요한 이슈가 된 것이 ‘사형 폐지론’이었습니다.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마이클 듀카키스’ 후보는 사형 폐지론을 주장했습니다. 사형제도는 없애야 된다며 전국을 누비면서 유세를 했습니다. 그가 어느 날 CNN의 토크쇼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듀카키스에게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사형 제도를 폐지하라고 주장하신다죠” “예, 그렇습니다. ” “참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그러면 제가 하나 묻겠습니다. 만약에 당신의 아름다운 부인이 괴한에게 끌려가서 강간을 당한 후 살해당했다고 합시다.
나중에 그 범인이 잡혔을 때 당신은 여전히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듀카키스는 당황했습니다. 말을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수천만 명의 시청자들이 받은 인상은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그는 자기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했지만,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될 경우에는 절대로 ‘사형 폐지’ 어쩌고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듀카키스는 바로 이 토크쇼 때문에 대선에서 패배했습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까 남의 이야기 하기는 쉽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하는 것은 쉽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에 대해, 그리고 항상 감사하십시오. ” 이것은 쉬운 말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이 말은 결코 쉽지 않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몇 년 째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있는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가 감사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오랜 지병 때문에 부르짖어 기도했지만 나아지기는커녕 도리어 병이 점점 더 심해져가는 사람이나 그 가족의 입에서 과연 감사가 쉽게 나올 수 있을까요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 평생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될 처지에 있는 그 부모의 입에서 감사가 쉽게 나올 수 있을까요
지금 돈이 없어 부도 직전에 있는 사업가가 감사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부부싸움이 심해서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을까요 자녀나 가족들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이 쉽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지금 말씀드린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여러분은 그때도 “모든 것에 대해 감사, 항상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말하면 “모든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하라. ”는 말씀은 현실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저 이상적인 말일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말씀이 현실적이지 못하고 이상적이라고 해서 듣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2) 감사는 명령이다!
오늘 본문이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뜻”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바란다, 소원한다’는 의미와, 그 바라는 것이 너무나 강하여 ‘욕망한다’는 뜻, 그리고 종종 변할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뜻합니다. 따라서 감사는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김두식 목사님이 지은 전도는 御命이다라는 책이 있지 않습니까 전도는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이죠. 그렇지만 성경에는 전도가 어명, 즉 임금님의 명령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어명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 직접적인 표현입니다.
감사는 왕의 명령,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맥추절을 지키라”고 하신 것 역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3장에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 맥추절을 지키라. … 수장절을 지키라. …(출23:14~19). ”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은 성도가 반드시 순종해야 되는 것이므로, 감사 역시 성도가 모든 삶 속에서 항상 지켜야 하는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요즘 6·25에 대한 드라마나 영화들이 많이 방영 내지 상영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 보면, 戰時에 지휘관에게는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면 그 자리에서 사살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명령불복종은 목숨과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일반 시민 사회에서도 시민의 의무에 불복종하면 여러 가지 불이익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습니까 사실 이 질문은 여러분에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불순종해 보십시오! 매사에 불평과 원망과 짜증으로 살아보십시오. 그리고 감사에 순종해 보십시오. 그 둘의 차이를 여러분 스스로 비교해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사회학자 ‘스탠디’라는 사람은 “요즘 시대는 암보다 더 무서운 질병을 앓고 있는데 그것은 감사 불감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칼뱅은 “감사생활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이라고 하면서 “만일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배은망덕”이라고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감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적”이라 했고,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R. A. Torry는 “성령 충만은 감사 충만”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감사 불감증”이라고 하는 무서운 병에 걸려 있지는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감사는 명령입니다. 감사는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어명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모든 것에, 그리고 항상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무엇을 감사할까
그렇다면 여러분,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요 어느덧 금년도의 절반이 지나간 시점에서, 그리고 올 한 해가 꼭 절반이 남은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감사를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야 할까요 어느 목사님이 감사를 교의 신학적으로 설명했는데, 아주 은혜로워서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일반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으로 나누는 데, 그 목사님은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성도가 감사할 것 역시 ‘일반적인 은혜들과 특별한 은혜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감사해야 할 일반적인 것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그것은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주어지는 은혜로서, 햇빛, 공기, 비 같은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 중에서도 먼저 지금까지 살아온 것, 그리고 지금 숨을 쉬면서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가족들에게 “건강”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병원마다, 병실마다 가득 차 있는 환자들과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분들을 보신다면, 이 시간 여러분이 건강한 몸으로 주님 殿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와 평화로 인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자유를 잃었던 시절이 우리 최근세사에 두 번이나 있었고, 지금도 북한 동포들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이유와 사정으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마음의 평안이 없는 사람, 가정에 평안이 없는 사람, 일에 평안이 없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렇게 마음껏 신앙 생활할 수 있는 자유, 여러분의 마음에 평안이 넘쳐나는 것으로 인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정과 가족으로 인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부모, 배우자, 자녀들! 이들이 없다면 내가 이렇게 살아 숨 쉬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느껴질 때가 얼마나 많을까요 또 일용할 양식, 필요한 옷가지, 살 집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지구촌 도처에서 굶주리는 이들, 입지 못하는 이들, 살 집이 없는 homeless people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갖가지 사고와 재난이 많은 세상에서 여러분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 일로 인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127편 1,2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 여러분, 이 말씀이 정말 동의가 되지 않습니까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여호와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외에도 우리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는 이루 다 헤아릴 수없이 많습니다. 이렇게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수많은 감사의 조건들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여러분이 성도이기에 감사해야 할 특별한 제목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믿는 여러분들에게만 주어진 은혜, 일반 은총보다 훨씬 더 크고 특별하고 귀중한 은혜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먼저,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 받은 일, 성령을 주신 일,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인 성경을 믿게 하신 일, 또 하나의 가족으로서 교회를 주신 일, 영생을 주시고 천국을 소망하게 하신 일, …. 생각해 보면 우리가 성도이기에 받은 특별한 감사의 제목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믿는 자이기에 감사하기 어려운 것들도 감사하는 사람이 된 것도 감사 제목 가운데 하나지요. 어느 성도가 새롭게 발견한 감사의 조건들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습니다. “ 첫째,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가끔 고독의 수렁에 버려진 채로 살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계획한 일들이 틀어져 안 된 것도 감사합니다. 저의 교만이 꺾이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넷째, 아들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아내와 남편이 힘들어 질 때도 있게 하시고, 부모와 형제가 짐으로 느껴 질 때가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어려움의 골짜기를 지날 때마다 인간된 보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먹고 사는 것이 힘겹게 느껴지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눈물로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고 영원한 삶을 사모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 이 성도는 불만을 가지고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오히려 ‘그것은 나에게 고마움이요 감사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기 어려운 것조차 주 안에서 감사하는 것, 이것이 신앙이고 신앙인의 특별한 감사입니다.
영국의 성경 주석가 메튜 헨리(Matthew Henry, 1662~1714)는 말했습니다. “감사는 더하기와 같아서 모든 것에 감사하면 거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진다. 어떤 일이든지, 어디서든지 감사하면 플러스의 축복이 주어진다. 그러나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빼기와 같아서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없어진다. ” 칼 힐티라는 사람 역시 “감사하라. 그러면 젊어진다. 감사하라. 그러면 발전이 있다. 감사하라. 그러면 기쁨이 있다. ”고 말했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빼앗기는 미련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계속 더해가는 비결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언제나 더하기의 삶이 되기 원하신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주에 제가 “오늘 드리는 맥추감사헌금 봉투에 감사제목도 함께 넣어달라”고 부탁드렸지요 아마 지난 한 주간 여러분들은 감사거리를 찾기 위하여 여러 생각을 해보셨을 것이고, 감사 제목을 직접 적어보면서 감동도 받았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감사할 것이 없다’, ‘감사거리가 없다’는 분들은 없습니까 누군가 말했습니다. “감사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사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할 마음만 가지면 감사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성도는 감사의 조건을 가지고 있어서 감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리어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감사는 신앙의 척도요 완성!
말씀을 맺겠습니다. 감사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그가 얼마나 감사하느냐를 보면 그의 신앙이 어떤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에 대해, 언제든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감사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사람, 성숙한 성도일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감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르웨이에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 사탄이 노르웨이에다가 창고를 하나 지었습니다. 그 사탄의 창고에는 미움, 슬픔, 눈물 등의 씨앗들이 저장되어 있었고, 그 씨앗들은 주변 동네로 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씨앗들은 어떤 동네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금방 싹을 잘 내었는데요. 오직 한 동네에서만은 효력이 없었습니다. 그 동네의 이름은 감사였는데, 어떤 슬픈 상황과 절망적인 처지에서도 그 마을 사람들은 언제나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에서 “감사하는 마음에는 사탄이 씨앗을 뿌릴 수 없다”는 노르웨이 속담이 나왔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는 신앙의 표현이고 성숙을 나타내는 것일 뿐 아니라 사탄의 궤계를 물리칠 수 있는 무기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감사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감사는 성경원어로 “유카리스테오”입니다. 이것은 ‘은혜입은 것이나 기쁨이나 감사를 말로써 표현한다’는 뜻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도로 표현하는 감사의 말’, ‘찬양으로 표현하는 감사의 말’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이 말하는 감사는 구체적인 행동이라는 것이죠.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듯이, 표현하지 않은 감사는 감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그리고 앞으로 주님을 향하여 여러분의 감사의 마음을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설교 중에 인용했던 메튜 헨리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하면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감사는 더하기와 같아서 모든 것에 감사하면 거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진다. 어떤 일이든지, 어디서든지 감사하면 플러스의 축복이 주어진다. ” 이 말을 그대로 경험하면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한 간식이 없는 때라 한 움큼 쥐어먹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키가 닿지 않았습니다. 보리 혹은 보리밥에 대한 또 다른 추억은 보리쌀 90%와 쌀 10%의 비율로 어머니께서 밥을 지으셨는데, 밥솥 가운데에 조금 넣은 그 쌀이 나중에 밥이 다 되어서 밥솥뚜껑을 열면 신기하게도 전체로 퍼지지 않고 넣은 그대로 한 가운데 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은 그 쌀밥을 항상 ‘나한테는 너거들 밖에 없다’하시던 우리들에게는 한 번도 주시지 않으면서, 늘 ‘원수 같은 인간’ 하시면서 ‘밉다 밉다’ 하시던 아버지에게만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왜 보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오늘이 맥추감사절 아닙니까 ‘보리 맥(麥)’자에 ‘추수할 추(秋)’자해서 말 그대로 ‘보리추수를 감사하는 날’입니다. 따라서 ‘맥추감사절’은 ‘보리를 수확하여 그것을 감사하여 지키는 주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보리추수감사절’ 혹은 ‘보리감사주일’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난 금요일 신문에 보니까,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어느 농촌에 가서 풍년을 기원하자 그 뒤에 있던 산하 공무원들이 씁쓸해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쌀이 남아도는 형편에 풍년을 기원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따라서 지금은 “쌀에 대한 감사”조차도 일어나지 않는 때입니다. 이런 시대에 “보리감사”가 적절합니까 게다가 요즘 우리 농촌에서 보리농사를 짓는 사람도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교계 일각에서는 맥추감사절에 대한 이견을 제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시고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 설교에서 보았습니다. 교역자 회의 시간에 한 부목사님이 담임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삼대 절기를 지켰지만, 삼대 절기 가운데 하나인 유월절도 지키지 않는 우리의 현실에서 굳이 맥추절을 지켜야하는 의미를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그러자 그 담임 목사님은 출애굽기 23장 14절부터 17절과 신명기 16장 1절부터 17절을 인용하면서 자세히 대답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년 세 번의 절기를 지키라. ”고 하시면서, 그 세 절기는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고, ‘맥추절’은 밀이나 보리 수확을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며, ‘수장절’은 가을에 거두어들인 수확을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 시피, ‘수장절’은 우리가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인류의 모든 문제와 그 핵심인 죄 문제를 해결하신 날이며, 3일 만에 부활하신 날입니다.
따라서 굳이 유월절이라는 이름으로는 지키지 않지만 釘死日과 부활절 등으로 이미 지키고 있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수장절이나 유월절에 대해서는 이견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맥추절에 대한 이견이 있고 그 이견이 타당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현대 사회가 농경사회도 아니고, 또 보리농사를 많이 짓는 것도 아니고, 거기다가 쌀이 남아돌아 쌀 감사도 어려운 판에 보리에 대한 감사까지 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왜 우리가 맥추감사절을 지켜야 하는 지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임금님이 어느 날 맛이 기막히게 좋은 요리를 잡수신 후 감격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먹어 본 요리 중에서 최고였다. 이렇게 훌륭한 요리를 만든 요리사는 세계 제일의 요리사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그 요리사에게 상을 주어야겠다. ” 그래서 요리사를 불렀습니다. 임금님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들은 요리사는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임금님, 그렇게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요리는 제 기술이 좋아서 만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신선하고 좋은 야채를 파는 사람이 없었다면 제가 어떻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칭찬하시려거든 좋은 야채를 판 그 채소 장수를 칭찬해 주십시오. ” 임금님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되어 요리사가 말한 채소 장수를 불렀습니다. 왕궁으로 불려가서 자신이 불려온 이유를 들은 채소 장수는 깜짝 놀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임금님, 그건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그저 야채를 팔았을 뿐이며, 정작 칭찬받을 사람은 제가 아니라 그 야채를 키운 농부들입니다. ” 임금은 그 말 역시 옳다고 여겨 이번에는 농부를 불렀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왕궁으로 불려간 농부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을까 해서 두려워하며 임금님 앞에 섰습니다. 임금이 농부에게 부른 이유를 설명하자 농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임금님, 그것은 잘못된 말씀입니다. 조상적부터 대대로 농사꾼인 저는 씨를 뿌리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어 제 시기에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만 한 뿐입니다. 제가 땅을 갈아 씨를 심어도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햇볕을 주시는 분이 없으면 저는 잎사귀 하나, 열매하나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니 감사의 인사는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 무슨 말입니까 이 임금처럼, 여러분이 직접적으로 농사를 짓지 않아도 땅과 바다의 모든 소산을 제 때에 수확하게 하셔서 여러분으로 먹게 하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기에 그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농촌에 살건 도시에 살건, 보리와 관계가 있든 없든,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것 역시 마땅한 일이지요.
2.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
1) 감사하라, 모든 것에!
자, 이제 본문을 보실까요 오늘 본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두 번째 선교 여행 때 설립한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칭찬했고,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의 본을 보인 것을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칭찬을 많이 받은 데살로니가 교회도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감사의 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凡事”라는 말은 한자로 ‘모두 범(凡), 일 사(事)’, 즉 “모든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 원어로 보면, 조금 다릅니다. “범사”는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이란 ‘온갖 것’, ‘어떤 것이든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그리고 ‘어떤 상황이든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시간적인 의미도 있어 “항상, 언제든지”라는 의미가 그 속에 있습니다(행10:14, 11:8). 따라서 오늘 본문이 말하는 범사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상황, 모든 환경, 모든 사람, 과거와 현재와 미래, 좋은 것 만 아니라 좋지 않은 것, 그리고 불행 슬픔 고난 사고 질병’ 등 모든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 즉 어떤 상황, 어떤 형편에서든지, 항상, 언제든지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모든 것에 감사하기가 쉽습니까 좋은 일에 대한 감사야 쉽지만 좋지 않은 일, 불행과 슬픔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기가 쉽습니까 감사할 때도 있지만 우울할 때 괴로울 때 슬플 때가 있는 것이 우리 삶이지 않습니까
1988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미국 전역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주 중요한 이슈가 된 것이 ‘사형 폐지론’이었습니다.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마이클 듀카키스’ 후보는 사형 폐지론을 주장했습니다. 사형제도는 없애야 된다며 전국을 누비면서 유세를 했습니다. 그가 어느 날 CNN의 토크쇼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듀카키스에게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사형 제도를 폐지하라고 주장하신다죠” “예, 그렇습니다. ” “참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그러면 제가 하나 묻겠습니다. 만약에 당신의 아름다운 부인이 괴한에게 끌려가서 강간을 당한 후 살해당했다고 합시다.
나중에 그 범인이 잡혔을 때 당신은 여전히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듀카키스는 당황했습니다. 말을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수천만 명의 시청자들이 받은 인상은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그는 자기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했지만,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될 경우에는 절대로 ‘사형 폐지’ 어쩌고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듀카키스는 바로 이 토크쇼 때문에 대선에서 패배했습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까 남의 이야기 하기는 쉽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하는 것은 쉽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에 대해, 그리고 항상 감사하십시오. ” 이것은 쉬운 말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이 말은 결코 쉽지 않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몇 년 째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있는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가 감사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오랜 지병 때문에 부르짖어 기도했지만 나아지기는커녕 도리어 병이 점점 더 심해져가는 사람이나 그 가족의 입에서 과연 감사가 쉽게 나올 수 있을까요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 평생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될 처지에 있는 그 부모의 입에서 감사가 쉽게 나올 수 있을까요
지금 돈이 없어 부도 직전에 있는 사업가가 감사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부부싸움이 심해서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을까요 자녀나 가족들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이 쉽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지금 말씀드린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여러분은 그때도 “모든 것에 대해 감사, 항상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말하면 “모든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하라. ”는 말씀은 현실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저 이상적인 말일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말씀이 현실적이지 못하고 이상적이라고 해서 듣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2) 감사는 명령이다!
오늘 본문이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뜻”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바란다, 소원한다’는 의미와, 그 바라는 것이 너무나 강하여 ‘욕망한다’는 뜻, 그리고 종종 변할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뜻합니다. 따라서 감사는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김두식 목사님이 지은 전도는 御命이다라는 책이 있지 않습니까 전도는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이죠. 그렇지만 성경에는 전도가 어명, 즉 임금님의 명령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어명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 직접적인 표현입니다.
감사는 왕의 명령,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맥추절을 지키라”고 하신 것 역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3장에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 맥추절을 지키라. … 수장절을 지키라. …(출23:14~19). ”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은 성도가 반드시 순종해야 되는 것이므로, 감사 역시 성도가 모든 삶 속에서 항상 지켜야 하는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요즘 6·25에 대한 드라마나 영화들이 많이 방영 내지 상영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 보면, 戰時에 지휘관에게는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면 그 자리에서 사살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명령불복종은 목숨과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일반 시민 사회에서도 시민의 의무에 불복종하면 여러 가지 불이익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습니까 사실 이 질문은 여러분에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불순종해 보십시오! 매사에 불평과 원망과 짜증으로 살아보십시오. 그리고 감사에 순종해 보십시오. 그 둘의 차이를 여러분 스스로 비교해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사회학자 ‘스탠디’라는 사람은 “요즘 시대는 암보다 더 무서운 질병을 앓고 있는데 그것은 감사 불감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칼뱅은 “감사생활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이라고 하면서 “만일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배은망덕”이라고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감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적”이라 했고,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R. A. Torry는 “성령 충만은 감사 충만”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감사 불감증”이라고 하는 무서운 병에 걸려 있지는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감사는 명령입니다. 감사는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어명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모든 것에, 그리고 항상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무엇을 감사할까
그렇다면 여러분,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요 어느덧 금년도의 절반이 지나간 시점에서, 그리고 올 한 해가 꼭 절반이 남은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감사를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야 할까요 어느 목사님이 감사를 교의 신학적으로 설명했는데, 아주 은혜로워서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일반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으로 나누는 데, 그 목사님은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성도가 감사할 것 역시 ‘일반적인 은혜들과 특별한 은혜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감사해야 할 일반적인 것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그것은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주어지는 은혜로서, 햇빛, 공기, 비 같은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 중에서도 먼저 지금까지 살아온 것, 그리고 지금 숨을 쉬면서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가족들에게 “건강”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병원마다, 병실마다 가득 차 있는 환자들과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분들을 보신다면, 이 시간 여러분이 건강한 몸으로 주님 殿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와 평화로 인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자유를 잃었던 시절이 우리 최근세사에 두 번이나 있었고, 지금도 북한 동포들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이유와 사정으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마음의 평안이 없는 사람, 가정에 평안이 없는 사람, 일에 평안이 없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렇게 마음껏 신앙 생활할 수 있는 자유, 여러분의 마음에 평안이 넘쳐나는 것으로 인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정과 가족으로 인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부모, 배우자, 자녀들! 이들이 없다면 내가 이렇게 살아 숨 쉬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느껴질 때가 얼마나 많을까요 또 일용할 양식, 필요한 옷가지, 살 집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지구촌 도처에서 굶주리는 이들, 입지 못하는 이들, 살 집이 없는 homeless people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갖가지 사고와 재난이 많은 세상에서 여러분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 일로 인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127편 1,2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 여러분, 이 말씀이 정말 동의가 되지 않습니까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여호와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외에도 우리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는 이루 다 헤아릴 수없이 많습니다. 이렇게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수많은 감사의 조건들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여러분이 성도이기에 감사해야 할 특별한 제목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믿는 여러분들에게만 주어진 은혜, 일반 은총보다 훨씬 더 크고 특별하고 귀중한 은혜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먼저,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 받은 일, 성령을 주신 일,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인 성경을 믿게 하신 일, 또 하나의 가족으로서 교회를 주신 일, 영생을 주시고 천국을 소망하게 하신 일, …. 생각해 보면 우리가 성도이기에 받은 특별한 감사의 제목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믿는 자이기에 감사하기 어려운 것들도 감사하는 사람이 된 것도 감사 제목 가운데 하나지요. 어느 성도가 새롭게 발견한 감사의 조건들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습니다. “ 첫째,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가끔 고독의 수렁에 버려진 채로 살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계획한 일들이 틀어져 안 된 것도 감사합니다. 저의 교만이 꺾이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넷째, 아들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아내와 남편이 힘들어 질 때도 있게 하시고, 부모와 형제가 짐으로 느껴 질 때가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어려움의 골짜기를 지날 때마다 인간된 보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먹고 사는 것이 힘겹게 느껴지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눈물로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고 영원한 삶을 사모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 이 성도는 불만을 가지고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오히려 ‘그것은 나에게 고마움이요 감사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기 어려운 것조차 주 안에서 감사하는 것, 이것이 신앙이고 신앙인의 특별한 감사입니다.
영국의 성경 주석가 메튜 헨리(Matthew Henry, 1662~1714)는 말했습니다. “감사는 더하기와 같아서 모든 것에 감사하면 거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진다. 어떤 일이든지, 어디서든지 감사하면 플러스의 축복이 주어진다. 그러나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빼기와 같아서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없어진다. ” 칼 힐티라는 사람 역시 “감사하라. 그러면 젊어진다. 감사하라. 그러면 발전이 있다. 감사하라. 그러면 기쁨이 있다. ”고 말했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빼앗기는 미련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계속 더해가는 비결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언제나 더하기의 삶이 되기 원하신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주에 제가 “오늘 드리는 맥추감사헌금 봉투에 감사제목도 함께 넣어달라”고 부탁드렸지요 아마 지난 한 주간 여러분들은 감사거리를 찾기 위하여 여러 생각을 해보셨을 것이고, 감사 제목을 직접 적어보면서 감동도 받았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감사할 것이 없다’, ‘감사거리가 없다’는 분들은 없습니까 누군가 말했습니다. “감사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사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할 마음만 가지면 감사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성도는 감사의 조건을 가지고 있어서 감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리어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감사는 신앙의 척도요 완성!
말씀을 맺겠습니다. 감사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그가 얼마나 감사하느냐를 보면 그의 신앙이 어떤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에 대해, 언제든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감사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사람, 성숙한 성도일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감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르웨이에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 사탄이 노르웨이에다가 창고를 하나 지었습니다. 그 사탄의 창고에는 미움, 슬픔, 눈물 등의 씨앗들이 저장되어 있었고, 그 씨앗들은 주변 동네로 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씨앗들은 어떤 동네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금방 싹을 잘 내었는데요. 오직 한 동네에서만은 효력이 없었습니다. 그 동네의 이름은 감사였는데, 어떤 슬픈 상황과 절망적인 처지에서도 그 마을 사람들은 언제나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에서 “감사하는 마음에는 사탄이 씨앗을 뿌릴 수 없다”는 노르웨이 속담이 나왔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는 신앙의 표현이고 성숙을 나타내는 것일 뿐 아니라 사탄의 궤계를 물리칠 수 있는 무기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감사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감사는 성경원어로 “유카리스테오”입니다. 이것은 ‘은혜입은 것이나 기쁨이나 감사를 말로써 표현한다’는 뜻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도로 표현하는 감사의 말’, ‘찬양으로 표현하는 감사의 말’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이 말하는 감사는 구체적인 행동이라는 것이죠.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듯이, 표현하지 않은 감사는 감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그리고 앞으로 주님을 향하여 여러분의 감사의 마음을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설교 중에 인용했던 메튜 헨리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하면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감사는 더하기와 같아서 모든 것에 감사하면 거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진다. 어떤 일이든지, 어디서든지 감사하면 플러스의 축복이 주어진다. ” 이 말을 그대로 경험하면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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