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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맥추감사로 제사드리라

본문

한신 교회 이중표(李重表)목사는 담관암 수술을 14시간에 걸쳐 받고 난 후 깨달은 사실을 간증하였습니다. 병들면 먼저 떠남의 신비를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누구나 사람, 물질, 명예, 소유를 떠납니다. 애인도 떠나고 심지어 가족도 떠납니다. 다 떠나게 됩니다. 저들이 떠나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면 병든 인간의 비참함을 슬퍼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먼저 떠나면 떠남의 신비를 체험케 됩니다. " 그들이 나를 떠나기 전에 내가 먼저 세상의 모든 것을 떠나면 오히려 기쁨과 평안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이중표 목사는 전라도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예수를 영접한 후 인생이 달라졌다고 회고합니다. 기독교장로회에서 가장 큰 교회를 이룩했고 유명한 설교가요, 목회자로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별세의 목회' 라는 목회철학으로 많은 목회자들에게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는 젊어서 성자가 되고 싶어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고 보니 성자가 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목사에게도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욕망이 너무 많아 억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앞에 놓고 나니 성자가 되는 길이 보였답니다. 죽음을 맞는 사람은 성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면 모든 것을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강조합니다. "흔히 죽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요, 심판의 결과라고 합니다.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 사탄의 사자요, 죽음을 지배하는 것은 악의 세력이라고 여깁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인생의 끝이요 종말로 생각하며 두려워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를 동정했습니다. 65세의 나이에 죽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살아온 날들이 행복했고 앞으로 더 사는 것에 자신이 없습니다. 도리어 죽음의 행복을 꿈꾸었습니다. 생각하면 죽음도 감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데려가시는 그 순간이 가장 적당한 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보다 더 좋은 것이 죽복(죽음의 행복)입니다. 죽음도 행복이며 죽음 앞에서 감사를 고백해야 합니다. " 이 목사는 2005년 7월 67세의 나이로 소천하면서 각막을 기증해 두 명의 시각장애인에게 빛을 전했습니다.
왜 불안합니까 왜 두려워합니까 세상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왜 불평합니까 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까 세상에 대한 욕심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떠나면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마음에 평안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서야 모든 것이 감사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본문 23절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 여기의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 는 감사의 제물을 드린다는 의미보다 찬양으로 제사를 드린다는 뜻이 더 강합니다. 즉 억지가 아닌 기쁨, 찬양의 감격이 있는 제사를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감사가 빠져 있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리면,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자동차 왕이라 불리는 헨리 포드(Henry Ford)가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을 방문하여 고아원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원장은 원아들을 위해 강당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고아들을 측은히 여긴 포드는 강당을 짓는데 필요한 2천 파운드를 기부하기로 약정하였습니다. 다음날 신문에 헨리 포드의 기증소식이 머릿기사로 실렸습니다. '헨리 포드 회장이 고아원을 위해 2만 파운드를 기부하기로 약속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부한 2천파운드가 2만 파운드로 잘못 기재된 것입니다.
고아원 측에서 포드 회장을 찾아가 사과하며 정정 기사를 내겠다고 하자 포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냥 두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기사에 실린 대로 2만 파운드를 내겠습니다. 대신 고아원 강당 입구에 이런 글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헨리 포드의 뜻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지어진 강당' 이라고요. "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감사로 살았던 포드였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23절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감사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을 통해 영광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에는 이러한 감사의 특성이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니 예수께서 일어날 일에 대하여 미리 감사 하신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 기도를 들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영화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미리 감사하는 모습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며 삶의 목적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각자가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를지라도 목적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만이 이를 가능케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이 보입니다
아킵바(Akiba)라는 유대의 랍비가 있었습니다. 로마의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게 되었는데 가지고 나온 것은 성경책과 읽을 때 필요한 등불, 새벽을 깨우는 수탉 한 마리와 타고 갈 당나귀가 전부였습니다. 날이 저물어 묵을 곳을 찾았지만 유대인을 재워줄 가정이 없었습니다. 그는 뒷산으로 올라가 나무 밑에 자리를 펴고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잠이 오지 않아 등불을 켜고 성경을 읽으려는데 바람에 등불이 자꾸 꺼집니다. 일찍 잠에 들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수탉은 이리가 잡아먹었습니다. 나귀도 사자가 물어갔습니다.
졸지에 가진 것을 다 잃어버렸지만 모든 것을 좋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유익이 되게 하실 거라 믿으며 감사했습니다. 아침에 마을로 내려가 보니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밤사이 산적이 쳐들어와 마을 주민들을 모두 죽이고 약탈해 간 것입니다. 아킵바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만약 마을에서 잠을 잤다면 자신도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산에서 등불이 켜졌다거나, 수탉이 새벽에 울고 당나귀가 소리를 내었다면 발각되어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감사했습니다.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면 구원의 역사를 보게 하십니다.
본문 23절입니다.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여기 '그 행위' 란 감사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드리는 감사입니다. 마지못해 드리는 형식적 감사가 아닙니다. 구원은 영혼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의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으며 구원은 전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구원은 세상을 살아가며 겪게 되는 온갖 어려움에서 건져주시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 감사할 때도 있지만 원망과 불평을 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족스럽지 못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불평대신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때 반드시 구원의 날이 이르게 하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원망과 불평을 일삼는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혼란이 옵니다. 실패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맴돌다 죽어간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적극적으로 감사하면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게 하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는 인기와 부, 명성을 다 누렸지만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입버릇처럼 일주일 동안만 평안을 준다면 백 만불을 기꺼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한번은 네바다의 주유소에서 당시 유명한 가수였던 팻 분(Pat Boone)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이, 팻, 어디로 가나”팻 분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복음성가를 부르면서 주님을 증거 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반갑네, 나는 동부에 교회 연합집회가 있어 가고 있다네.
자네는 어디로 가나" "아니, 동부에 뭐가 있다고 가나 나는 라스베가스로 간다네. 내가 보기에 자네는 언제나 영양가 없는 잘못된 방향으로만 가는구먼. " 얼마 안 있어 엘비스 프레슬리는 마약 남용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 어디에서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주님, 우리가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영혼에는 참 평안이 없습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며 여호와 하나님 안에 거할 때 평안을 얻게 됩니다. 감사의 이유를 발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4장 6절과 7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바울은 기도할 때 간구보다 감사를 먼저 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감사를 먼저 하되 많이 할 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기도 초반에 간구부터 하면 온통 문제만 기도하게 되고 결국 문제에 짓눌려 기도까지 막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시작을 감사로 시작하는 것이 기도자의 지혜입니다. 감사를 먼저 하면 감사 검색기능이 작동되어 감사로 충만하게 됩니다. 감사로 힘이 생기고 문제를 풀어갈 길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닥치면 '왜(Why)' 가 아니라 '어떻게(How)' 라고 물어야 합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의 자세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해결될까' 라며 여호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이 아닌 감사의 태도로 물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하신 김용기(金容基)장로에게 물었습니다. "장로님, 행복하십니까" 논두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 장로는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감사합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순간 우리는 불행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은총이며 선물임을 자각하는 사람은 감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흐린 날도 있고 맑은 날도 있습니다. 행복한 날도 있고 슬픈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것입니다. 오직 감사할 따름입니다. "
'연작안지홍곡지지(燕雀安知鴻鵠之志)' 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제비나 참새 따위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겠느냐' 는 뜻입니다. 하물며 미물 같은 인간이 어찌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를 다 알겠습니까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감사한 만큼 행복해집니다. 감사한 만큼 강건합니다. 감사한 만큼 축복이 있습니다.
감사한 만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되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로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감사만이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감사를 통해 험한 세파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평강을 허락하십니다. 부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리며 감사로 제사 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고후 9:10-15(
두 주일 전 주일예배 시간에 제가 목이 많이 쉬어서 설교를 하는 저도 힘들었지만 듣는 여러분도 상당히 거북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3부 예배까지 마치고 나니 여러 성도님들께서 제가 심한 감기에 걸려서 그렇게 된 줄 아시고 걱정해 주시고 또 목캔디 같은 것을 보내 주기도 하셨는데, 사실 저는 속으로 굉장히 쑥스럽고 미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제 목청이 상하게 된 실제 이유는 감기 때문이 아니고 바로 그 전날 토요일 저녁에 잠실 경기장에 프로야구시합을 보러 갔다가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의 임마누엘 청년회원들 중에 야구광으로 자처하는 26명의 롯데 팬들과 2명의 엘지 팬들과 함께 그 시합의 입장권을 한 달 전부터 예약을 해 놓고 기다리다가 드디어 우리가 소위 '6. 19 잠실 대첩'이라 명명한 '롯데 자이언츠 대(對) 엘지 트윈스'의 게임에 갔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야구장에만 가면 목이 터져라 홈팀을 응원하고 상대팀에게 야지를 놓는 것이 팬으로서의 지극히 당연한 기본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날 경기를 'MBC Life 채널'에서 생중계를 했는데, 제가 롯데 응원 피켓을 높이 치켜들고 흔들면서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있는 장면이 완전히 '단독 샷'으로 몇 초 동안 화면에 잡히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바로 다음날 설교해야 할 것을 의식하고 제 딴에는 극도로 자제한다고 했는데도 그만 그렇게 목이 쉬고 말았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토요일에 경건하게 주일 준비를 하지 않고 오락을 즐기는 목사를 벌주시려고() 그러셨는지 그날 게임은 롯데가 이대호의 만루홈런으로 8대4까지 이기고 있다가 8회말에 가서 8대9로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통한의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비록 지기는 했지만 하여튼 제가 경향교회에 부임한 이래 처음으로 우리 교회 청년들과 사적인 교제를 나누고 돌아왔는데, 주일이 지나니까 임마누엘 청년회의 인터넷 카페에 저에 대한 감사의 인사와 댓글들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날 야구장 회동을 위하여 제가 참석하는 청년들을 좀 더 좋은 좌석에 앉혀 주고 싶어서 부가되는 입장료를 찬조했으며 또 햄버거와 간식을 대접했었는데, 덕분에 정말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는 감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밑에다 "과찬의 말씀에 송구스러울 따름"이라고 한 후에 "(이럴 경우 영어로는 그냥 'my pleasure'라고만 하면 간단충분한데, 우리나라말의 문화는 조금 어색복잡함)"이라고 첨부 댓글을 달아 놓았습니다.
그 'my pleasure'라는 말은 직역하자면 '나의 기쁨'인데, 그렇게 대접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자신에게 큰 즐거움이었다는 뜻으로서, 미국 사람들이 감사 인사를 받게 될 때 흔히 쓰는 표현입니다.
비슷한 말로서 'the privilege is mine'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그렇게 대접해 드릴 기회를 얻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받게 된 쪽에서만 고마운 것이 아니라 주게 된 쪽에서도 진정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기독신자들이 '남을 위해 섬기고 여호와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오히려 '더 많고 큰 감사'가 넘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사명을 위해 뿌리는' 신자는 '반드시 더해 주시는 열매'의 풍성한 축복을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본문 10절부터 12절에 기록하기를 "10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식을 하시리니 11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 하는 것이라 12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은 고린도교회를 비롯한 이방 지역의 교회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교인들을 위하여 특별구제헌금을 보내려고 작정하게 되었을 때에 사도 바울이 이에 대하여 권면하며 격려하는 내용입니다.
12절에서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다는 말씀이 바로 그 일을 가리키는데, 바울은 그것을 두고 "이 봉사의 직무"라고 말했습니다.
즉 그것은 단순히 어떤 '인간적인 선행'의 차원을 넘어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선한 봉사'이며 또한 신자라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의무의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너그럽게 연보"를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저희'란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을 가리키며 '우리'란 지금 예루살렘교회에 구제헌금을 보내는 이방 지역의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그 예루살렘교회가 그 연보를 받게 되면 그 교회 교인들은 그렇게 자기네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준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헌금을 보내 준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지만, 사실은 이렇게 하는 것이 기독신자로서는 바른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이방 지역의 성도들에게 그런 '착한 마음'을 주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돌리는 감사가 오로지 구제헌금을 받게 되는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에게만 넘치고, 그것을 보내어 준 고린도교회 교인들 쪽에서는 아무 감사할 일이 없는 것이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10절에 나타나 있는 대로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농사를 짓고 곡식을 거두는 일이 농부 혼자 다 하는 일 같지만 사실은 농부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일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선 아무리 훌륭한 농부라 해도 '씨'를 손수 만들 재주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10절 하반절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 심을 것을 주사"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먹을 양식" 즉 '곡식'을 거둘 수 있게 되는 일도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씨가 자라게 하시고 열매가 바로 그것을 두고 10절 하반절에서 그처럼 농부가 씨 뿌린 것을 "더하게 해" 주시는 분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실 뿐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처럼 선한 일을 위하여 열심히 '씨를 뿌렸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교회를 도울 수 있는 "의의 열매를 더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11절에 있는 대로 그들로 하여금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할 수 있는 축복을 더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특별히 '돈이 많아서' 그처럼 '너그러운 연보'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선한 봉사의 직무'를 섬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 '부요'하여 그 일을 시작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 필요한 '씨'를 제공해 주시고 풍성한 '열매'까지 거두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고린도교회 성도들 역시 어찌 감사가 없을 수 있었겠습니까
12절 하반절에서 사도 바울이 "사람들의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비단 예루살렘교회뿐 아니라 고린도교회를 위시하여 그 구제헌금을 보내는 쪽의 교회들에서도 그야말로 '넘쳐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도와 교회가 밖으로 나누어 주고 섬기는 '봉사의 직무'에 열심을 내면, 그 결과는 다른 성도의 부족한 것만 보충하게 될 뿐 아니라 스스로도 '많은 감사'가 더욱 충만하게 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열심히 충성하는 신자는 절로 '감사'드릴 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제게 많이 주시면 많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것이 대부분의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감사 개념'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한결 더 차원 높은 신자는 '제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더 크게 쓰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실 선한 일을 위하여 더 많이 바치고 싶습니다. '라고 서원하면서 '열심히 씨를 뿌리면 뿌릴수록' 더 많은 감사가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섬기고자 노력하는 자신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6월 25일 금요일 저녁에 '선교대회 환영만찬'의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개회예배를 드릴 때에 우리 교단의 총무이신 강구원 목사님께서는 "여기에 모인 자들 중에 혹시 단 한 명이라도 자기 자신의 공로를 생각하거나 내세우는 자가 없게 해 주옵소서. "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 교단의 총회선교부와 우리 경향선교회는 전 세계 방방곡곡에 실로 '많은 씨들을 부지런히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 이런 엄청난 '의의 열매'들을 거두게 되었지만, 이 엄청난 세계선교의 비전을 받아 첫 삽을 뜨신 이래 지금까지 진두지휘하고 계시는 원로목사님을 비롯하여 온갖 환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제일선에서 선전분투하고 계시는 선교사님들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내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이 100퍼센트 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자라게 하시고 거두게 해 주신 열매'인 줄로만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원로목사님의 비전을 통하여 그런 '세계선교의 씨'를 제공해 주신 분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아는 까닭에 우리의 감사는 그야말로 단 하나도 남김없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께만 돌려질 따름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희생과 봉사로 인하여 자신이 '얻어먹게' 된 것만 가지고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받아 부지런히 뿌리는 일꾼이 되었다는 사실과 자신의 섬김은 부족한 것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것을 30배, 60배, 100배로 거두게 해 주신 사실을 두고 감사드리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쪽의 감사가 더 차원 높고 훨씬 더 감동스러운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많이 받게' 되어서 예의상 감사하는 것만이 감사가 아니라 '많이 드리려고' 하면 오히려 감사의 제목도 더욱 많아지게 되어 있음을 깨닫고, 우리에게 맡겨 주신 선한 봉사의 직무를 시작할 때에 '뿌릴 씨'부터 주시며 그 결과 반드시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더욱 '많은 감사'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행일치의 삶을 사는' 신자는 '성도의 교통과 교회의 연합'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큰 감사를 돌리게 됩니다.
13절 이하 15절의 말씀에 "13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14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15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기록했습니다.
13절의 말씀을 좀 더 알기 쉽게 번역하자면 '너희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너희의 이 봉사가 너희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고 있음을 증거해 주기 때문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지금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구제헌금을 보내는 "봉사"라는 행위가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있는 '믿음'에 대한 "증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복음에 대한 믿음'은 "복종"이라는 신행일치로 나타나게 될 때에 비로소 그 진실성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실 역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제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어지는 14절의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라는 말씀은 그처럼 '복음을 믿고 복종함'으로써 "후한 연보"를 보내어 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 기도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런 너그럽고 풍성한 헌금을 자기들에게 보내어 줄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를 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아주 흠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서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인데 그저 예수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는 그 이유만으로 그처럼 고마운 헌금을 보내어 왔으니, 그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겠습니까
그러니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 헌금을 한 번 보내어 줌으로써 수많은 기도 후원자를 얻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교회라는 초대교회의 모교회로부터 오히려 존경을 받고 귀감이 되는 위치에 훌쩍 올라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 역시 놀라운 결과가 아니었겠습니까
고린도교회와 예루살렘교회는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으며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예루살렘교회 성도들 역시 대부분 서로 한 번도 얼굴조차 마주친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처럼 자신의 '믿음'에 대한 '신행일치'의 복종을 나타내었을 때에 그 결과 '성도 간의 영적 교통'과 '이방인 교회들과 예루살렘교회 사이의 연합'이라는 정말 엄청난 결과가 따라오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것을 생각하면서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습니다.
즉 그 헌금의 결과 여호와 하나님께 많은 감사와 영광이 돌려지고 참된 신앙을 진실한 행위로 증거하는 신자들이 드러나며 더 나아가서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 간의 유대 관계와 영적 교통이 더욱 깊어지게 될 것들을 생각하니, 사도 바울로서는 그야말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충만한 은사'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신행일치'의 삶을 살아갈 때 그 결과를 이처럼 폭발적으로 확장시켜 주시는 놀라운 사실을 보고서 그저 감격적인 감사와 영광을 다시 한 번 여호와 하나님께 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라고 했는데, 성도는 자신의 참된 신앙을 마땅히 헌금생활을 통하여서도 증거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진짜 속마음은 아무도 알 길 없고 물론 판단할 길도 없습니다.
하지만 주일성수하는 것을 보면 그래도 기본 신앙은 갖춘 신자임을 알 수 있으며, 헌금생활은 더 나아가서 그 신앙이 얼마나 진실하고 열심 있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자식이 똑똑하고 행실이 바르면 그 자체가 부모에게 영광이 되는 것처럼, 어떤 성도가 진리에 바로 서고 충성스러운 봉사를 발휘하면 바로 그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리고 헌금생활은 바로 그 사실,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만큼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대표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신행일치'는 우선 개인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해 주는 참된 신앙을 소유하고 있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지만,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더욱 부흥시키는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믿는 사람이 그 '믿음'대로 봉사 희생 충성하는 '행동'을 보이게 될 때에 그것은 본인 한 명의 구원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사를 완성해 가는 위대한 일에 쓰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처럼 신행일치의 삶을 사는 신자는 그 결과가 주님의 교회를 통하여 엄청나게 크게 나타나게 되는 것을 목도하고 체험함으로써 더욱 큰 감사가 넘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경향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인'이 될 뿐 아니라 '사명인'이 됨으로써 얼마나 놀라운 결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개척교회를 지원하면 그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우리 경향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는 후원자가 됩니다.
우리가 고려신학교를 위해 헌금하고 돕는 일 때문에 그 귀한 선지생도들이 새벽마다 우리 경향교회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온 세계를 향한 선교사업을 후원하는 '보내는 자'가 될 때에 우리는 얼굴도 모르는 수천수만 명의 선교지 교회 교인들이 우리 경향교회를 위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 역시 경향교회 교인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사모'하면서 모범으로 삼게 됩니다.
개척교회가 자라면 그들 역시 똑같이 다른 교회를 후원하게 될 것이고, 신학생들이 나중에 교회를 세우게 되면 그들 역시 경향교회가 그들에게 해 주었던 그대로 신학교를 후원하게 될 것입니다.
선교지의 교회들도 자립하면 그들이 경향교회가 하는 것을 보고 흠모하던 그대로 그들 역시 자기 민족들에게 전도하며 개척교회를 세우고 또는 다른 나라 선교까지 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만 해도 정말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겠습니까
실로 '말로 다할 수 없는 은사들'이 우리 경향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신행일치'를 통하여 온 세계에 충만한 것입니다.
겨우 자기 혼자 믿고 '숯을 머리에 얹은 듯한'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사람은 이런 뜨거운 감사를 체험할 길이 없습니다.
'세계를 받은 교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몫'을 감당하는 신자만이 자기라는 존재가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사에 주역으로 쓰이게 되는 놀라운 결과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든 경향교회 교인들이 각자의 신행일치의 삶을 이처럼 '복음에 대한 복종', '직무에 대한 증거'를 통하여 나타냄으로써 우리 교단의 화합과 결속, 선교지의 성도들과의 영적 교통, 조국의 개혁주의 신앙을 지키는 교회들과의 연합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폭발적인 결과를 목도하는 가운데 더욱 큰 감사를 여호와 하나님께 돌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게 되어야만 감사하게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은 그저 맡겨 주신 사명을 위해 부지런히 씨를 뿌리며 노력하는 가운데 그것이 놀라운 열매들로 나타나게 되는 것을 체험함으로써 실로 '많은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자신의 인격 속에 뜨겁고도 강력하게 인쳐 주신 '믿음'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충성된 '행위'로써 증거를 나타내면 그 결과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교회가 왕성하게 되기까지 하는 정말 놀라운 결과를 목도함으로써 더욱 '큰 감사'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의 '감사 수준'은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받은 것 없으니 감사드릴 것도 없다. ' - 물론 이것은 이미 신자도 아닙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을 주셔서 오늘까지 살게 해 주셨다는 사실 하나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데, '받은 것이 없다'는 것이 말이나 될 수 있겠습니까
'더 많이 받게 되면 그때 가서 감사드리겠다. ' - 이것은 아주 수준 낮은 신자입니다.
그런 정도의 감사는 그야말로 '이방인들도 할 줄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받은 은사가 넘치고 있으니 더욱 많이 베풀고 바침으로써 나의 감사를 더욱 풍성하게 해야겠다. ' - 바로 이것이 진정한 '감사 신앙'입니다.
'대접을 받게 되는' 교인도 물론 감사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성도를 대접하기 위하여 자신은 '섬기고 희생하는' 신자에게 넘치는 감사의 양은 따라올 수 없습니다.
'도움을 받게 되는' 교회 역시 도와 준 교회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 감사는 개척교회를 하나 세우고 선교지의 교회를 돕기 위하여 '베풀고 보내는' 교회만 체험할 수 있는 감사의 수준과는 정말 비교조차 될 수 없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은 결코 '받게 될' 때뿐 아니라 오히려 '베풀고 섬기는' 가운데 훨씬 더 충만함을 깨닫고 이 '세계를 받은 교회'의 자랑스러운 '경향인'으로서 더더욱 '보내는 자'의 사명에 충성을 다함으로써 자신의 삶 속에 더 '크고도 많은 감사'가 넘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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