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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누구에게나 복된 성탄

본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성탄절은 곧 새 인류의 생일이다. 이 땅에 주님이 오신 것은 지옥에 구세주가 방문한 것과 같다. 우리 인간에게 유일한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2천년 전에 예수가 처음 오셨을 때 이와 같이 모두 예수님을 반갑게 환영하고 영접한 것은 아니었다. 첫 번째 성탄절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나 지금이나 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땅에 처음 오신 그리스도는 갓난아기로 오셨다. 그러므로 어린 아기였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영접하라고 강권할 힘이 없었다. 그는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고 내동댕이치는 사람에게서는 땅에 던져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포근히 안겨서 사랑과 평화를 전했다. 오늘은 본문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의 예수님을 대하는 모습을 나쁜 점을 들추어보면서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까지 생각키로 한다.
1. 헤롯왕이 있다.
그는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는 메시야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방박사를 통해 메시야를 찾아 죽이고자 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로 인하여 헤롯은 그 일이 실패하자 베들레헴의 어린아이들을 수 없이 무참하게 학살했다. 그는 자신의 왕위에 부귀영화를 지키기 위해 오신 메시야를 죽이고자 했기 때문에 가장 저주스러운 성탄절을 맞이했던 것이다. 과연 나의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서라도 예수님을 영접할 자세가 되어 있는지 나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 보자.
헤롯에 대하여 배울 점은 세상적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열심이었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점이 나온다.
(마 2:1-3)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는 말을 동방박사에게서 듣고 곧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묻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헤롯은 쉽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와 메이샤이신 `그리스도`를 연결시켰는데 성경에 `그리스도`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된 것이다. 동방박사를 통하여 유대인의 왕이란 말이 들려졌지만 헤롯에 의하여 그리스도란 말이 처음 소개되었다는 것은 세상 사람을 통하여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가 있다. 그리고 헤롯까지 그리스도란 말을 알았다면 당시 유대인들에게서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메시야의 오심을 사모하는 이는 많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예루살렘에 사는 시므온만이 영접하였는데 이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로 성령이 그 위에 계셨다.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고 기다리던 중 아기 예수를 만나 안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까지 하였다. 그리고 아셀 지파 임마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는 매우 늙었는데 그가 성전(헤롯이 짓고 있는 성전으로 예수님도 여기에서 할례를 받으셨다. 비록 깨끗하지 못한 성전이요 경건하지 못한 처소였지만 이곳을 통해서도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가 드리어졌고, 또 예배를 받으셨다)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을 하였다.
2.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있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종교의 전문가들이요 예배를 집례하는 사람들이었으나 실상 그리스도와는 무관한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의 예배는 경건한 모습은 있으나 형식에만 치우친 모습이었다. 오히려 이들은 현실에 만족하고 정치 권력에 아부하여 종교를 빙자한 기득권으로 안정을 누리려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구유에 나셔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이들은 비단이불에서 나서 황금 의자가 목적이었다. 이들은 성경을 잘 알아서 메시야 탄생에 대한 지식은 정확했으나 행동은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지식의 눈은 열렸지만 영안이 열리지 않아서 믿음과 행함이 일치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이 오시리라는 분명한 지식이 있었다. 누구에게라도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다. 시간과 형편이 없었겠지만 그래도 틈을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최소한 남이 신앙적인 상담이 왔을 때 어느 정도 답변할 지식은 갖추고 있음이 매우 유익하다.
눅 2장에서 12살 때에 소년 예수님은 성정에서 선생들과 함께 앉아 성경을 토론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물론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혜를 더하셨다는 기록이 증거하듯이 이 땅에 오신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을 갖추셨겠지만 보통사람보다 더 열심히 성경을 상고하고 묵상하셨을 것이다.
3. 베들레헴 사관 주인들이 있다.
이들은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에 따라 호적하러 온 사람들로부터 돈을 버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물론 대목에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하여 신앙까지 잃어버리고 장사에 치중한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은 그들 머리 바로 위에 떠있는 별도 보지 못했고, 그렇다고 하여 당장 눈앞에 보이는 해산하여야 하는 위급한 산모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애원하는 소리도 못들은 척하였다. 그들 눈에는 오직 돈만 보였다. 그들은 후일 돈을 택하고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사람들과 같다.
기회가 왔을 때 영접할 수 있는 준비를 하라. 내 집을 두드리실 때 영접하라.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의인의 집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의 집문이라도 두드리시며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기를 원한다는 말씀을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던 것이다.
구중궁궐은 아닐지라도 부자의 안방은 아닐지라도, 비록 누추한 집이지만 아기 예수님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마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고 하신 예수님께 우리들의 누추한 곳이라면 어떠하겠느냐
4. 동방의 박사들과 들에서 양치던 목자들이 있다.
동방이라는 머나먼 곳으로부터 달려온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예물을 들고 와서 아기 메시야께 경배했고, 메시야의 오심을 베들레헴 들녘에서라도 사모하고 있던 양치던 목자들은 천사들이 전해준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경배했다. 예물을 손에 든 귀한 박사들이나 지팡이 밖에 없는 목자들이나 아기 예수께 중심으로 경배하는 그들은 복된 기쁜 성탄이 된 것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방법 혹은 저런 방법으로라도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불러 더욱 깊은 은혜 속에 들어가시게 하신다. 당시에 예수님을 보온 동방박사나 양치던 목자들, 시므온이나 안나 모두는 대단히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들이야말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최초의 전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머나먼 곳이기는 하지만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어야 한다. 양치는 목자 또는 삭개오처럼 동네에 오신 예수님을 찾아가 뵐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내 집의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성탄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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