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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말씀의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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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어떤 신문 칼럼에서, 한 여교수가 ‘미지의 궁극’(The unknown ultimate)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저의 눈길을 끌었다.
이 표현은 아마, 온 인류가 지금까지 어떤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해왔는데, 사실 그게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알려지지 않고 밝혀지지 않았는데 정말 그런 게 있다면, 저도 한땐 나름대로 그것을 찾아 헤맸던 사람이었다. 대학 다닐 때 잘하진 못했지만, 문학, 미술, 음악 세 분야를 골고루 섭렵했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교내 잔디밭에 앉아서 시 쓰고 있고, 가끔 화판 들고 들로 산으로 그림 그리러 나가고, 음악회라는 음악회는 다 쫓아다녔다. 그러면서 “난 예술의 삼두체제를 구축해서 뭔가 궁극적인 것을 발견하고 말거야”라는 다소 용감한 생각과 발언을 하고 다녔던 때가 있었다. 마치 위기철 씨 소설 ‘아홉 살 인생’에 나오는 골방철학자처럼 괜히 인상 쓰고 폼 잡고 다니고 그랬다.
글쎄! 그렇게 해서 그 미지의 궁극을 지금 찾았다면 모르겠다.
아직도 전 못 찾았고, 저만 못 찾은 게 아니라, 저보다 공부 더 많이 하고 더 똑똑한 신문 칼럼의 주인공, 그 여 교수님도 저와 같이 못 찾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분도 ‘미지의 궁극’이라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그 ‘궁극’이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그것이 꼭 ‘미지의 것’이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또 미지라는 말이, 정말 있긴 있는데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그런 것일까 아니면 노력해도 어차피 알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뜻일까
그래서 저는 생각해보았다: “만약 그것이 있긴 있는데 영원한 미지의 것이라면 우리가 굳이 그렇게 평생을 소진해가며 찾아가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
그래놓고 봤더니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들이 대개 그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중에서도 불교는 대표적이다.
불교는 마지막에 가면 결론이 나올 것이라고 여기고 한번 쫓아가보자는 방식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결론이 쉽게 나질 않다.
얼마 전 불교계의 거목 숭산 스님이 타계하셨는데, 그 제자들이 그분의 결론에 모두들 귀를 세우고 있다. 또 몇 년 전에는 다른 유명한 스님이 한분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남긴 결론 같은 법어가 대충 이런 것이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 글쎄… 이게 결론인가 이게 정말 궁극일까
이에 반해 기독교는 다르다.
기독교만이 이미 내려진 결론을 따라가는 유일한 종교다.
기독교는 미지의 궁극에 대한 추구가 아니고, 이미 밝혀진 궁극에 반응하는 종교다.
불교는 석가가 구원자라고 말하지 않다.
석가는 구원자보다는 탁월한 구도자(An excellent seeker)라고 해야 더 맞다.
그러기 때문에 석가 자신도 미지의 궁극을 향해 쫓아갔던, 우리 같은 존재였다.
제가 목사가 된 것은 사실 그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대학 때 이젤판 메고 들로 산으로 그림 그리러 다니고, 음악회 가서 눈물도 흘려보고, 글 쓰면서 남모르는 self-catharsis에 취해봤지만 찾지 못한 미지의 궁극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궁극이 미지의 것이 아니라 이미 밝혀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여호와 하나님께 항복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이 있다면 그것은 ‘미지의 궁극’이 아니라 ‘밝혀진 궁극, 이미 알려진 궁극’(The Known Ultimate)인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저를 옭아맸던 생각의 족쇄들이 풀리면서 해방감이 몰려왔고, 결국 지금 목사가 되어 그 밝혀진 궁극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오늘도 여러분 앞에 이렇게 서 있는 것이다.
이제 여러분들에게도 묻고 싶다: “그 궁극을 찾으셨나 아니면 아직 찾고 계시나”
찾으셨다면 정말 다행이다.
그러나 아직 못 찾았거나 또 여전히 찾아가고 계신다면, 오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그럼 이제부터,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이 빈 말이 아님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증명해보이도록 하겠다.
베드로전서는 글자 그대로 베드로 사도가 썼다.
이 책은 자기가 한때 목회했던 로마교회에게 썼던 편지로 보인다.
로마교회는 그 당시 네로 황제의 핍박 아래 있었다.
목숨 걸고 예수 믿고 목숨 걸고 예수를 전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한때 목숨 걸었던 자신의 신앙고백을 포기해야 될 일도 생겼다.
잡아가두고 죽이겠다는데, 그 신앙고백을 지킨다는 게 보통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그들에게는 사도의 격려가 필요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영원한 거다.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복음이 너희에게 있다. 무너지지 말고 잘 견뎌내자. ”, 이런 격려였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이 등장한 것이다. 23-24절
농작물 씨앗도 보면 그렇지 않나 아무 데나 심어도 잘 자라주는 식물이 있는가 하면깻잎이나 장미처럼, 반면 연약한 품종도 있다. 그러나 씨앗이 좋다고 해서 다 잘 자라는 것도 아니다. 환경도 중요하다. 저는 워낙 그쪽으로 소질이 없으니까(오월의 보리를 보고 벼라고 말한 사람) 어떤 씨앗이든 아무 땅에 심으면 다 잘 자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저희 집 화단 구석에 깻잎을 심었는데 햇볕이 쬐는 쪽 하고 안 쬐는 쪽 하고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씨앗에 비유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아무리 깻잎 같이 강한 품종이어도 자연의 씨앗은 언젠가는 죽는 것이다.
수천 년의 고목도 언젠가는 죽는다.
자연의 모든 것에는 다 수명이 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이사야 40장 6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가: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이게 자연의 이치인 것이다.
그러나 죽어야 할 씨앗인데 절대로 죽지 않는 씨앗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 그게 뭔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 말씀’이라는 씨앗이다.
그 씨앗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고 절대적인, 사라지지 않는, 이미 알려진 씨앗이다.
그럼 그 여호와 하나님 말씀이라는 씨앗이 어느 정도 영원하고 궁극적인 것인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니라. ”
여호와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신데, 그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형태로 이미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호와 하나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영원히 말씀하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또 다가오실 분이시다.
말씀으로 당신의 궁극성을 우리에게 이미 충분하게 밝혀주셨다. 예: 창조, 섭리, 구원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미지의 궁극이 아니라 알려진 궁극이다.
An ultimate이 아니라 The Ultimate이시다.
A truth가 아니라 The Truth이시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이 모든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셨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모든 내용들을 한꺼번에, 압축해서, 다 몰아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방식으로 알려주셨다.
그럼 그게 무엇인가 그게 무슨 방법이었는가
요한복음 1장 14절로 가보자. 요 1:14
바로 그리스도라는 분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계시의 말씀이 그리스도라는 분에 압축되어서 밝혀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 말씀의 총체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궁극성을 알리는 가장 결정적인 통로였다.
저는 농구시합은 마지막 5분만 본다. 마지막에 어떻게 뒤집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0. 1초를 남겨 놓고 던진 볼이 대역전 드라마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앞에 것 아무리 중요해도 마지막 결정을 내리는 그 대목이 그 경기의 총체다. 음식도 그렇다. 제 아무리 갖은 재료, 갖은 양념을 다 집어넣고 찌개를 끓여내도, 간 맞추는 어머니의 마지막 손길이 없으면 안 된다. 그 마지막 손길, 간 맞추는 그 마지막 숟가락이 그 음식의 결정적인 통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 한 판이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
구약의 그 장구한 구원의 역사도 그리스도의 오심 하나에 다 귀결된다.
그래서 신약시대가 복된 시대인 것이다.
신약시대는 총체적으로, 결정판으로 오신 예수께서 베푸신 그 은혜의 그늘 아래서, 그 은혜의 손길을 되돌아 보면서 살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말씀이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궁극성을 예수라는 육신의 몸에 똘똘 말아 집어 넣으신 다음에, 그 분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오심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한판에 다 해결되었다.
더 이상의 계시도 필요 없다.
다른 선지자가 와야 할 필요도 없다.
이슬람교가 그렇다: “예수도 중간 선지자다. 마호멧의 코란 계시가 진짜다. ”
몰몬교도 그렇다: “요셉 스미스가 보여준 계시(몰몬경)가 진짜 계시다. 이걸 봐라!”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 하나님 계시의 결정판이다.
예수 한 분의 오심과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는 이미 충분하다.
더 이상 다른 게 필요 없다.
이게 바로 기독교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도 예수의 오심을 축하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이 절기에 모두들 흥분하고 들떠있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말한다25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
그리스도의 말씀은 ‘복음’, good news였다.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의 탄생을 보고서, 천사들은 물론이고, 목동들, 메시아를 대망했던 시므온, 안나 같은 사람들이 정말 흥분하면서 같이 기뻐했다.
안나 같은 여 선지자는 아기 예수를 보고는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84년
이처럼 그의 탄생이 정말 기쁜 소식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기뻐한다.
성탄절 시즌만 되면, 그래서 지금도 우리 모두 기뻐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기쁨의 본질적인 의미가 많이 희석되고 있다.
영원무궁의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나 같이 부족하고 약한 자에게 침입하여 나를 점령할 수 있도록 그 기초석을 놓았던 예수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분의 오심이 나에게 기쁜 소식일 수밖에 없었고, 그 기쁜 소식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서라도 그분을 환영하였고, 안나처럼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절대절명의 삶의 근원적인 고백을 했던 우리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지금은 그 기뻐해야 될 마땅한 이유마저도 의식하지 못한 채, 주인공이신 예수는 우리의 세속적인 기쁨의 잔치에 들러리 정도밖에 안 되고 있다.
요즘의 성탄절 풍속도가 그렇다는 얘기다.
물론 미국이라는 나라가 근본적으로 청교도적 기독교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추수감사절, 성탄절이 하나의 자연스런 기쁨의 절기인 것은 부인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현재 미국인 대부분이 맞이하는 성탄절 분위기에는 분명히 많은 문제가 있다.
영화 “Forest Gump”에 보면 월남전에서 돌아온 주인공 Forest가 어떤 계기로 미 전국을 달리는 마라톤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그냥 달렸을 뿐이다. Forest는 약간 retard하기 때문에 그냥 좋다 싶으면 무조건 시행하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나선다. 이유 없이 그냥 따라나서서 같이 달린다. 그게 한두 사람이더니 나중에는 수많은 인파가 그를 쫓아 같이 달린다.
어쩌면 지금의 성탄절 분위기가 이런 분위기가 아닌가 싶다.
주인공은 사라진 상태에서, 목적도 없이 이유도 없이 마냥 잔치 벌이는 분위기다.
그런 가운데 있는 우리로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놓고 생각해봐야 한다.
혹시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은 아닌지 혹시 내 자신도 목적과 이유도 없이 마냥 미국 땅을 달리고 있는 Forest Gump의 마라톤 일행 중 한 사람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성탄절은 왜 기쁜 날인가 왜 즐거운 날인가
오늘 말씀은 그 답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총체였기 때문이다.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이신 그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가치와 마음과 삶 속에 헝클어진 여러 가지 혼돈과 갈등과 죄의 족쇄로부터 풀려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날이 기쁘고 즐거운 날인 것이다.
저한테는 “이것 없으면 못 살겠다”는 게 몇 개 있다. 아마 다 비슷할 것이다. 전 저희 가족 없으면 못 산다. 아내와 제 아이들 없으면 못 산다. 그 다음으로는 교회 없으면 못 산다. 교회 없는 세상은 꿈도 꾸기 싫은 세상이다. 좋아도 교회는 있어야 하고 싫어도 제게 교회는 있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전 김치 없으면 못 살 것 같다. 그런 노래도 있다. “김치 없이는 못 살아. 나는 못 살아... 이 세상에 김치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갈까. ” 어쩜 제 맘을 그렇게 잘 대변해주는 노랜지 모르겠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 더하고 싶다. 아니 더하는 게 아니고, 이제는 다른 거 없어도 이것만은 없으면 절대로 안 되는 거 하나가 생겼다. 그게 무엇인가 여호와 하나님 말씀이다. 성경이다. 이제는 성경 없으면 못 살 것 같다. 하루에도 제 맘은 수도 없이 변한다. 하루에 수십 번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저를 진정시키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말씀, 성경이다. 어떤 신학자가 그랬다. “교회 없는 성경은 가능하나 성경 없는 교회는 그 존재가 불가능하다. ” 저도 동의하다. 성경 없는 ‘김숭’이는 생각도 하기 싫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길 원한다.
성경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총체로 오신 예수에 대한 설명이요 이야기다.
예수에 관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가 이 성경에 다 집약되어 있다.
우리의 삶의 정수가, 우리의 삶의 근본과 원칙과 방식이, 여기에 다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 없는 여러분은 없다.
성경 없는 여러분은 그 존재의 의미가 사라진다.
정처 없이 구도만 하고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구도자의 마지막 정답은 ‘미지의 궁극’일 뿐이다.
그렇게 답을 내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경 속의 예수를 못 만났기 때문이다.
복음의 복된 소식을 아직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분, 성경을 사랑하시기 바란다.
그 안에서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으로 여러분의 복잡한 감정과 생각을 고쳐나가시기를 바란다.
매일 매일 말씀을 통해서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를 만나시기 바란다.
이번 성탄절도 말씀이 주관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그 만남 때문에 정말 이유 있이 기뻐하는 성탄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안테우스(Antaeus)라는 거인이 나온다. 그에게 땅은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땅에서 그의 힘의 근원이 나온다. 그래서 그는 항상 맨땅에 누워서 잠을 잤다. 그가 땅에 몸을 댈 때마다 그의 힘은 되살아났다. 헤라클레스(Hercules)는 안테우스와 레슬링 경기를 하다가,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그를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그러면 오히려 안테우스의 근육은 부풀어 오르고 건강한 살이 그의 뼈를 둘러쌌다. 그래서 그 이유를 안 헤라클레스는 그를 더 이상 땅에 매치지 않고 공중으로 높이 들어올려 그가 죽을 때까지 뼈를 하나씩 부러뜨렸다.
저는 이 신화에서 우리네 모습을 보게 되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의 에너지의 근원을 잃어버리거나, 또 그 근원을 잘못 찾아가게 되면, 이런 종류의 패배가 우리의 삶 속에 언제든지 찾아올지도 모를 것이라는 경고다.
말씀이 우리의 삶의 활력소인데, 그 활력소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치 사단에게 공중전법 당하면서 계속 뼈가 하나씩 부러지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마치 피자 만드는 사람이 피자 판 빙글빙글 돌리듯이 말이다.
정말 꼴사나운 모습일 것 같다.
저 어렸을 때 많이 먹었던 영양제가 에비오제다. 국산말로는 원기소라고도 불렀다. 그거 하나면 밥 먹는 거 빼고 모든 영양이 다 보충되는 듯 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원기소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의 영적 원기소다.
성경 안 보는데 힘나는 신앙생활을 기대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성경 없이 활력 있는 삶은 어렵다.
그러므로 이번 성탄절에는,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말씀으로 오신 예수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서, 그 말씀의 주인공이신 예수에 관한 말씀 모음인 성경을 더욱더 사랑해야 하겠고, 더욱더 성경을 가까이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이번 크리스마스의 주제는 ‘말씀의 크리스마스’다.
말씀의 크리스마스와 함께 많은 은혜와 축복을 받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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