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성육신 속에서 보아야 할 것은?
본문
버스를 타고 가는데 할머니가 버스에 타셨습니다. 뒤에 앉은 남자는 자는 척하고 있었습니다. 앞에 있는 학생은 주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양보를 하였습니다. 할머니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대학생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 참 착한 학생이구면, 얼굴도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게 생겼어!"
뒤를 돌아보신 할머니는 자는 척하다 눈을 뜬 남자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자네는 무엇을 하는 젊은인가" 그러나 그 젊은 청년은 어깨를 딱 펴고 자신있게 " 카이스트 (KAIST)에 다니고 있습니다. " "그게 뭔데" " 한국 과학 기술원입니다"라고 하자, "쯧쯧! 공부를 못하면 기술이라도 배워야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한 가난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유난히도 서로를 사랑하는 부부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고민에 빠집니다. 선물을 살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시계를 팔아 부인에게 고급 머리빗을 선물합니다. 한편 부인은 자신의 탐스러운 머리칼을 팔아 남편에게 시곗줄을 선물합니다.
그러나 집안에서 부부가 만나는 순간,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머리칼을 자른 부인에게는 머리빗이 소용없고, 시계를 팔아 버린 남편에게는 시계줄이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울부짖는 부인을 향하여 곧 머리칼이 자랄 것이라고 남편을 위로하고, 남편 또한 조촐하나마 크리스마스 잔치나 벌이자고 말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학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선물이 문제가 아니라 따뚯한 마음의 자세가 있으면 행복하고 아름다운 날을 만들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자세가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성탄에 주님의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자세를 살펴보면 되는 것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신앙적 바른 자세는 어떤 것입니까
본론
1 주님을 바로 알고 합당한 영접을 하여야 합니다. ( 正知 ) (10, 11절)
"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들 알지 못하 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온 세상으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니 영접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영접할 것인가 행사를 할 것인가에 많은 관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분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을 제대로 영접할 수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선거에 당선되자 예우가 달라진 것을 보았습니다. 청와대에서 경호원들이 경호를 하는 것입니다. 자가용이 달라졌습니다. 필요하다면 방탄 차량도 공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면 청와대 외교관련 실무자를 붙여서 유창하게 통역을 하도록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영접하게 한 것입니까 바로 그 분이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국가원수가 되었기에 그 신분에 맞게 대접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누구십니까
1절 말씀에 영원 전부터 계셨던 성자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었다거나 그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과 같았다'가 아니라 그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10:30절에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즉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요14:9-11절에 '예수님을 본 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주장에 다음과 같은 2가지 경우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는 주님의 주장은 거짓이었거나, 아니면 주님의 주장은 사실이었다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주장은 거짓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 고의로 거짓주장을 했다고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은 거짓말 장이 일 것입니다. 또한 위선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거짓 속에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정직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혹 주님은 자신의 주장이 거짓임을 모르고 그렇게 주장했다고 하면 그분은 확실히 과대 망상에 사로잡힌 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분으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거짓말쟁이가 삶의 첫째 목적으로써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나 관심을 갖지는 않을 것입니다. 거짓말쟁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거나 악용하지 다른 사람을 도와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삶은 모두 우리를 사랑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아니 당신 전체를 갈보리에서 우리를 위하여 주셨습니다.
산상수훈과 비유와 그분의 모든 말씀이 정신병자에게서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결코 거짓말쟁이거나 정신병자도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주장이 거짓이 아니고 사실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그렇게 의심하던 도마가 나중에 요20:28절에 " 나의 주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됨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그림언어로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5병이어로 5천명의 무리를 먹이시면서 죄로 주려 죽을 수 밖에 없는 세상을 향하여 "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6장) 그리고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소경을 고쳐주시면서 "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9장) 길 잃은 양과 같은 사람들을 향하여 " 나는 선한 목자이다" (요10장)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의 문제 속에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요11장)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건을 일으키신 후에 스스로 " 나는 ……. 이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 에고 에이미"라는 용어는 출3:14절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 I AM who I AM )이란 곳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호와 하나님 됨을 주님 안에서 우리의 영적인 갈급함이 해결되어지고, 방황이 풀리고, 죄문제가 풀리는 것을 우리가 경험함으로 우리가 주님은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되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 시간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이 확신되어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분을 아는 계시의 정신이 여러분 가운데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과 깊이 있는 교제와 앎이 있기를 바랍니다.
동박박사들은 '그 아기 예수를 믿음의 눈으로 보고' 당시 왕이나 신에게 경배하듯이 엎드려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마 2:11)
여러분! 주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누구이십니까
어떤 분이 결혼 문제로 서울에서 오는 사돈 될 분들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사하구 어느 음식점이 좋다고 해서 가봤더니 너무 혼잡스럽고 분위기가 좋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바닷가가 보이고 조용한 곳을 찾아서 그곳에서 음식을 대접하여 드렸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그렇구나 귀한 분에게 신경을 쓰고 귀하게 영접을 해야 하는구나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정말로 귀한 분이십니까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까 여러분의 왕이십니까 먼저 그분을 바로 아시고 그리고 그 격에 합당한 경배를 드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지존하신 주님 이름 앞에 모든 무릎꿇고 경배해, 거룩하신 주님 보좌 앞에 얻드려 절하세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주 여호와 하나님의 영으로 경배 드리네"
2 성육신하신 예수님에게서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正見)( 14절)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본다"는 데아오마이( theaomai) 는 믿음의 눈, 영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2:14절에 " 육에 속한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잠이 오시는 분이 있으면 "저의 영적인 눈이 뜨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이 수면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영적소경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착실하게 다니시는 어떤 분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집에 집 초대를 하였습니다. 정말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서 대접을 하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고백하기를 "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성경책과 가방을 닫아놓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 때 외에는 한번 본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설교를 듣다가 눈이 열렸습니다.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제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원할 줄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성경을 닫고 다니는 게 아니라 열고 다니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성육신 속에서 믿음의 공동체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가시적인 임재를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본 것입니다.
16절에도 "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은혜와 율법
17절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 라"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율법이 보이는 것은 잘못 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보입니다. 어디에 인쇄되어 있지는 않지만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어떤 분들은 목사님 이것 해야 되요 말아야 되요 계속하여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신앙은 부정접근 방식이 아닙니다. 아주 자기 어떤 틀에 맞추어서 그 선과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였을 때면 너무 위축되고 자기를 학대하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여러 가지 자신의 부족함을 보면서 늘 포기합니다. 자기를 정죄합니다. 어쩌나 조금 나으면 자기 자랑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은혜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세계적인 신학자인 아언사이드 박사가 교회에서 회의를 진행하는 데 갑자기 청년 하나가 손을 들더니 큰 소리로 " 법대로 합시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언사이드박사가 " 여보게 젊은이 업대로 하기를 원하는 가 만약 여호와 하나님께서 법대로 자네를 다루었다면 자네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자네는 벌써 지옥에 가 있어야 마땅할 것일세"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법도다 위대한 원리에 의해 살아야 합니다. 은혜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며칠 있으면 약혼할 어떤 자매가 목회자를 만나 상담을 했답니다. 반듯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는데 사실은 자신은 옛날 시골에서 철없던 시절 남자를 만나 동거가지 했던 흠이 있는 사람이라는 애기였습니다. 이 자매는 결혼할 사람에게 고백하고 파혼을 당하는 것이 평생 죄짐을 지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낫지 않겠냐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목회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서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선포를 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했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미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감사함으로 결혼하여 잘 사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분명한 뜻입니다"
로마서 8: 1절에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보지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아야 할 줄 믿습니다.
2) 공감의 은혜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낮고 천한 동물의 밥통인 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왜 그렇게 낮아지신 것입니까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연약함과 삶의 무게를 동일하게 경험하고 이해하고자 낮아지신 것입니다.
"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18)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처지와 마음을 오직 주님께서 이해하시기 위해 그 낮은 곳으로 오신 은혜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성육신하신 주님을 볼 때마다 " 나는 너희 삶의 아픔을 안다!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나는 너를 이해한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구속의 은혜
성육신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분의 십자가와 그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속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하거나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개념을 구약성경에서 다윗에게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절음발이 사울가의 므비보셋을 자신과 같이 식사하도록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9: 7절에 "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라는 구절을 읽을 수 있습니다.
줄리 마틴이란 분이 이 사건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으며 " 황무한 땅에 은혜를"이란 시를 썼습니다.
" 나는 그 므비보셋이었습니다. 뒤틀린 자존심으로 절고 있었고, 황무한 곳으로 당신이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피해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찾았습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당신이 왜 내게 주시는 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황량한 나의 인생을 구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당신의 식탁에까지 나를 초대하셨습니다. 당신께 감사하리, 나의 왕께...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개같은 존재입니다. 죄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혜로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이 구속의 은혜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안의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3 겸손한 십자가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 正行 (15절)
"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 겸손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등장했을 때 얼마나 많은 관심의 초점이 되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인기가 있었습니까 그래서 네가 엘리야냐 네가 그 선지자 즉 네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냐(신18:15)하는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은 숨기지 아니하고 " 나는 아니라"라고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 주님은 로고스, 말씀이지만 나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분은 선재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세례요한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고백과 겸손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의 여호와 하나님됨과 그 영광을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세례요한처럼 철저하게 자기를 가리우는 삶, 겸손의 삶을 살아야 될 줄 믿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낯설고 물서른 곳 이국 땅 한국에 들어 왔을 때는 1885년입니다. 정말 나라가 개화되지 않은 미개한 상태였고, 삶도 참 어려울 때였습니다. 이국인에게는 풍토병의 위협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사람처럼 입고 조선사람처럼 먹고 마시면서 벽촌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당시 김치와 된장국 등 조선 음식을 서양인이 먹기에는 너무 어려운 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골 주막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긴 서양 사람이 밥을 먹고 있으니까 마음 사람들이 거의 다 몰려와 구경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버릇이 없는 청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 하, 그것이 밥을 다 먹을 줄 아네" 그 말을 들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웃으면서 " 예, 국도 먹을 줄 압니다" 그러자 청년이 놀란 표정으로 " 야. 이것봐라, 그것이 말도 할 줄 아네" 그러자 선교사님이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 예 글도 쓸 줄 압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마치 동물원의 동물을 구경하듯 하고, 물건처럼 " 그것"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하였지만 복음을 위해서 낮아진 것입니다. 결국 복음을 위하여, 주님 앞에서 이런 겸손과 낮아짐을 가지자 이 청년이 그러한 모습에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조금 하면 서서히 내가 뭔가를 아는 것처럼 나를 드러내는 사람들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나를 주목하라고 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복음 역사에 둘러리에 불과하고, 주인공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나는 조연 아니 엑스트라입니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겸손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뭐가 더 필요한 것입니까)
2) 십자가의 예수를 증거해야 합니다. (29절)
" 이튿날 요한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
구길순집사 간증
지난 금요일에 교회 내 사역팀들이 모여서 간증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전도팀 중에 구길순 집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분은 성품이 내성적이신 분이십니다. 그래도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 까 마음속에 그런 열정이 가득한 분이 십니다.
한번은 애완견을 늘 들고 다니는 남자 분을 만났습니다. 몇번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한번은 풀이 죽어있고 애완견을 들고 있지 않아서 어찌 되었느냐고 묻자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 속에 예수님을 전해야지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사람이 아파트에서 자살을 하였다는 소식을 들고, 구집사님은 너무 충격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내가 그때 예수님을 전하지 못했는가 교회 올 때마다 예배 드릴 때마다 눈물이 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운 마음 뿐이라는 것을 간증하였습니다.
저는 그 간증을 들으면서 참 그래도 그 마음 가운데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을 증거하고자 하는 아타까운 그런 증인으로 살고자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미라 브룩스 웰치의 명인의 손의 어루만짐이란 글이 있습니다.
그 바이올린은 낡고 흠집 투성이어서/경매인이 많은 시간을 낭비할 만큼/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것을 들어 올렸습니다. " 얼마에 사겠습니까 여러분"하고 그는 소리쳤습니다. " 누가 먼저 값을 매기겠습니까" " 일 달러요, 일달러, 이달러, 겨우 이 달러 이 달러, 삼 달러에는 / 삼 달런 하번 삼 달런, 두 번/ 삼 달러에 없습니까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 뒤에서 백발의 신사가 앞으로 나와 활을 집어들고는 오래된 바이올린의 먼지를 닦아내고, 늘어진 줄을 단단히 조이고, 천사가 부르는 듯한 캐롤을 깨끗하고도 달콤한 멜로디로 연주했습니다.
음악이 끝나고, 경매인은 나고도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얼마에 사시겠습니까" 활과 함께 바이올린을 높이 쳐들었습니다. " 일천달러, 이천달어 있습니까 이천! 삼천이요" 삼천, 한번, 삼천 두 번, 팔렸습니다"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환호를 보냈고, 몇몇은 말했습니다. " 이해할 수 없군요, 왜 그렇게 값이 바뀌었는지" 누군가가 금방 대답했습니다. " 명인의 손으로 만진 값이오"
음정이 맞지 않고, 낡고 초라하며 죄로 흠이 난 인생을 살아온 많은 사람들, 생각 없는 군중들에게 싼 값으로 경매에 붙여진, 오래된 바이올린처럼 ... 이제 거의 갈 때가 되었다가 명인이 오고, 명인의 손으로 만져진 영혼의 가치와 삶의 변화를 어리석은 군중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렇습니다. 오직 명인 되신 주님이 보혈로 우리를 씻겨 주시고, 우리를 만질 때 우리 인생은 값진 인생, 가치가 있는 삶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직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웃들에게 나눌 것이 많이 있습니다. 물질도 나누고 어려운 분들을 돕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을 증거했습니다. 즉 오직 십자가의 복음, 예수님을 증거하고 나누는 것이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면서 우리가 정말로 무엇을 준비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행사입니까 여러 가지 선물입니까 아닙니다. 바른 자세입니다. 정지, 정견, 정행의 자세입니다.
주님이 누구신지를 깊이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과 교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육신하신 주님 속에서 우리를 향하신 은혜를 깊이 있게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으로 기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보다 그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뒤를 돌아보신 할머니는 자는 척하다 눈을 뜬 남자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자네는 무엇을 하는 젊은인가" 그러나 그 젊은 청년은 어깨를 딱 펴고 자신있게 " 카이스트 (KAIST)에 다니고 있습니다. " "그게 뭔데" " 한국 과학 기술원입니다"라고 하자, "쯧쯧! 공부를 못하면 기술이라도 배워야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한 가난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유난히도 서로를 사랑하는 부부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고민에 빠집니다. 선물을 살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시계를 팔아 부인에게 고급 머리빗을 선물합니다. 한편 부인은 자신의 탐스러운 머리칼을 팔아 남편에게 시곗줄을 선물합니다.
그러나 집안에서 부부가 만나는 순간,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머리칼을 자른 부인에게는 머리빗이 소용없고, 시계를 팔아 버린 남편에게는 시계줄이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울부짖는 부인을 향하여 곧 머리칼이 자랄 것이라고 남편을 위로하고, 남편 또한 조촐하나마 크리스마스 잔치나 벌이자고 말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학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선물이 문제가 아니라 따뚯한 마음의 자세가 있으면 행복하고 아름다운 날을 만들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자세가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성탄에 주님의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자세를 살펴보면 되는 것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신앙적 바른 자세는 어떤 것입니까
본론
1 주님을 바로 알고 합당한 영접을 하여야 합니다. ( 正知 ) (10, 11절)
"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들 알지 못하 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온 세상으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니 영접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영접할 것인가 행사를 할 것인가에 많은 관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분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을 제대로 영접할 수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선거에 당선되자 예우가 달라진 것을 보았습니다. 청와대에서 경호원들이 경호를 하는 것입니다. 자가용이 달라졌습니다. 필요하다면 방탄 차량도 공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면 청와대 외교관련 실무자를 붙여서 유창하게 통역을 하도록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영접하게 한 것입니까 바로 그 분이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국가원수가 되었기에 그 신분에 맞게 대접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누구십니까
1절 말씀에 영원 전부터 계셨던 성자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었다거나 그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과 같았다'가 아니라 그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10:30절에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즉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요14:9-11절에 '예수님을 본 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주장에 다음과 같은 2가지 경우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는 주님의 주장은 거짓이었거나, 아니면 주님의 주장은 사실이었다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주장은 거짓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 고의로 거짓주장을 했다고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은 거짓말 장이 일 것입니다. 또한 위선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거짓 속에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정직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혹 주님은 자신의 주장이 거짓임을 모르고 그렇게 주장했다고 하면 그분은 확실히 과대 망상에 사로잡힌 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분으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거짓말쟁이가 삶의 첫째 목적으로써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나 관심을 갖지는 않을 것입니다. 거짓말쟁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거나 악용하지 다른 사람을 도와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삶은 모두 우리를 사랑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아니 당신 전체를 갈보리에서 우리를 위하여 주셨습니다.
산상수훈과 비유와 그분의 모든 말씀이 정신병자에게서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결코 거짓말쟁이거나 정신병자도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주장이 거짓이 아니고 사실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그렇게 의심하던 도마가 나중에 요20:28절에 " 나의 주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됨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그림언어로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5병이어로 5천명의 무리를 먹이시면서 죄로 주려 죽을 수 밖에 없는 세상을 향하여 "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6장) 그리고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소경을 고쳐주시면서 "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9장) 길 잃은 양과 같은 사람들을 향하여 " 나는 선한 목자이다" (요10장)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의 문제 속에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요11장)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건을 일으키신 후에 스스로 " 나는 ……. 이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 에고 에이미"라는 용어는 출3:14절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 I AM who I AM )이란 곳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호와 하나님 됨을 주님 안에서 우리의 영적인 갈급함이 해결되어지고, 방황이 풀리고, 죄문제가 풀리는 것을 우리가 경험함으로 우리가 주님은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되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 시간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이 확신되어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분을 아는 계시의 정신이 여러분 가운데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과 깊이 있는 교제와 앎이 있기를 바랍니다.
동박박사들은 '그 아기 예수를 믿음의 눈으로 보고' 당시 왕이나 신에게 경배하듯이 엎드려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마 2:11)
여러분! 주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누구이십니까
어떤 분이 결혼 문제로 서울에서 오는 사돈 될 분들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사하구 어느 음식점이 좋다고 해서 가봤더니 너무 혼잡스럽고 분위기가 좋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바닷가가 보이고 조용한 곳을 찾아서 그곳에서 음식을 대접하여 드렸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그렇구나 귀한 분에게 신경을 쓰고 귀하게 영접을 해야 하는구나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정말로 귀한 분이십니까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까 여러분의 왕이십니까 먼저 그분을 바로 아시고 그리고 그 격에 합당한 경배를 드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지존하신 주님 이름 앞에 모든 무릎꿇고 경배해, 거룩하신 주님 보좌 앞에 얻드려 절하세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주 여호와 하나님의 영으로 경배 드리네"
2 성육신하신 예수님에게서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正見)( 14절)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본다"는 데아오마이( theaomai) 는 믿음의 눈, 영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2:14절에 " 육에 속한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잠이 오시는 분이 있으면 "저의 영적인 눈이 뜨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이 수면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영적소경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착실하게 다니시는 어떤 분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집에 집 초대를 하였습니다. 정말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서 대접을 하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고백하기를 "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성경책과 가방을 닫아놓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 때 외에는 한번 본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설교를 듣다가 눈이 열렸습니다.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제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원할 줄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성경을 닫고 다니는 게 아니라 열고 다니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성육신 속에서 믿음의 공동체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가시적인 임재를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본 것입니다.
16절에도 "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은혜와 율법
17절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 라"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율법이 보이는 것은 잘못 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보입니다. 어디에 인쇄되어 있지는 않지만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어떤 분들은 목사님 이것 해야 되요 말아야 되요 계속하여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신앙은 부정접근 방식이 아닙니다. 아주 자기 어떤 틀에 맞추어서 그 선과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였을 때면 너무 위축되고 자기를 학대하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여러 가지 자신의 부족함을 보면서 늘 포기합니다. 자기를 정죄합니다. 어쩌나 조금 나으면 자기 자랑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은혜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세계적인 신학자인 아언사이드 박사가 교회에서 회의를 진행하는 데 갑자기 청년 하나가 손을 들더니 큰 소리로 " 법대로 합시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언사이드박사가 " 여보게 젊은이 업대로 하기를 원하는 가 만약 여호와 하나님께서 법대로 자네를 다루었다면 자네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자네는 벌써 지옥에 가 있어야 마땅할 것일세"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법도다 위대한 원리에 의해 살아야 합니다. 은혜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며칠 있으면 약혼할 어떤 자매가 목회자를 만나 상담을 했답니다. 반듯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는데 사실은 자신은 옛날 시골에서 철없던 시절 남자를 만나 동거가지 했던 흠이 있는 사람이라는 애기였습니다. 이 자매는 결혼할 사람에게 고백하고 파혼을 당하는 것이 평생 죄짐을 지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낫지 않겠냐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목회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서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선포를 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했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미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감사함으로 결혼하여 잘 사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분명한 뜻입니다"
로마서 8: 1절에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보지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아야 할 줄 믿습니다.
2) 공감의 은혜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낮고 천한 동물의 밥통인 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왜 그렇게 낮아지신 것입니까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연약함과 삶의 무게를 동일하게 경험하고 이해하고자 낮아지신 것입니다.
"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18)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처지와 마음을 오직 주님께서 이해하시기 위해 그 낮은 곳으로 오신 은혜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성육신하신 주님을 볼 때마다 " 나는 너희 삶의 아픔을 안다!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나는 너를 이해한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구속의 은혜
성육신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분의 십자가와 그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속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하거나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개념을 구약성경에서 다윗에게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절음발이 사울가의 므비보셋을 자신과 같이 식사하도록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9: 7절에 "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라는 구절을 읽을 수 있습니다.
줄리 마틴이란 분이 이 사건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으며 " 황무한 땅에 은혜를"이란 시를 썼습니다.
" 나는 그 므비보셋이었습니다. 뒤틀린 자존심으로 절고 있었고, 황무한 곳으로 당신이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피해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찾았습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당신이 왜 내게 주시는 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황량한 나의 인생을 구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당신의 식탁에까지 나를 초대하셨습니다. 당신께 감사하리, 나의 왕께...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개같은 존재입니다. 죄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혜로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이 구속의 은혜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안의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3 겸손한 십자가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 正行 (15절)
"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 겸손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등장했을 때 얼마나 많은 관심의 초점이 되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인기가 있었습니까 그래서 네가 엘리야냐 네가 그 선지자 즉 네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냐(신18:15)하는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은 숨기지 아니하고 " 나는 아니라"라고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 주님은 로고스, 말씀이지만 나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분은 선재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세례요한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고백과 겸손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의 여호와 하나님됨과 그 영광을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세례요한처럼 철저하게 자기를 가리우는 삶, 겸손의 삶을 살아야 될 줄 믿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낯설고 물서른 곳 이국 땅 한국에 들어 왔을 때는 1885년입니다. 정말 나라가 개화되지 않은 미개한 상태였고, 삶도 참 어려울 때였습니다. 이국인에게는 풍토병의 위협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사람처럼 입고 조선사람처럼 먹고 마시면서 벽촌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당시 김치와 된장국 등 조선 음식을 서양인이 먹기에는 너무 어려운 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골 주막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긴 서양 사람이 밥을 먹고 있으니까 마음 사람들이 거의 다 몰려와 구경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버릇이 없는 청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 하, 그것이 밥을 다 먹을 줄 아네" 그 말을 들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웃으면서 " 예, 국도 먹을 줄 압니다" 그러자 청년이 놀란 표정으로 " 야. 이것봐라, 그것이 말도 할 줄 아네" 그러자 선교사님이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 예 글도 쓸 줄 압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마치 동물원의 동물을 구경하듯 하고, 물건처럼 " 그것"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하였지만 복음을 위해서 낮아진 것입니다. 결국 복음을 위하여, 주님 앞에서 이런 겸손과 낮아짐을 가지자 이 청년이 그러한 모습에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조금 하면 서서히 내가 뭔가를 아는 것처럼 나를 드러내는 사람들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나를 주목하라고 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복음 역사에 둘러리에 불과하고, 주인공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나는 조연 아니 엑스트라입니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겸손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뭐가 더 필요한 것입니까)
2) 십자가의 예수를 증거해야 합니다. (29절)
" 이튿날 요한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
구길순집사 간증
지난 금요일에 교회 내 사역팀들이 모여서 간증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전도팀 중에 구길순 집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분은 성품이 내성적이신 분이십니다. 그래도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 까 마음속에 그런 열정이 가득한 분이 십니다.
한번은 애완견을 늘 들고 다니는 남자 분을 만났습니다. 몇번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한번은 풀이 죽어있고 애완견을 들고 있지 않아서 어찌 되었느냐고 묻자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 속에 예수님을 전해야지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사람이 아파트에서 자살을 하였다는 소식을 들고, 구집사님은 너무 충격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내가 그때 예수님을 전하지 못했는가 교회 올 때마다 예배 드릴 때마다 눈물이 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운 마음 뿐이라는 것을 간증하였습니다.
저는 그 간증을 들으면서 참 그래도 그 마음 가운데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을 증거하고자 하는 아타까운 그런 증인으로 살고자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미라 브룩스 웰치의 명인의 손의 어루만짐이란 글이 있습니다.
그 바이올린은 낡고 흠집 투성이어서/경매인이 많은 시간을 낭비할 만큼/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것을 들어 올렸습니다. " 얼마에 사겠습니까 여러분"하고 그는 소리쳤습니다. " 누가 먼저 값을 매기겠습니까" " 일 달러요, 일달러, 이달러, 겨우 이 달러 이 달러, 삼 달러에는 / 삼 달런 하번 삼 달런, 두 번/ 삼 달러에 없습니까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 뒤에서 백발의 신사가 앞으로 나와 활을 집어들고는 오래된 바이올린의 먼지를 닦아내고, 늘어진 줄을 단단히 조이고, 천사가 부르는 듯한 캐롤을 깨끗하고도 달콤한 멜로디로 연주했습니다.
음악이 끝나고, 경매인은 나고도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얼마에 사시겠습니까" 활과 함께 바이올린을 높이 쳐들었습니다. " 일천달러, 이천달어 있습니까 이천! 삼천이요" 삼천, 한번, 삼천 두 번, 팔렸습니다"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환호를 보냈고, 몇몇은 말했습니다. " 이해할 수 없군요, 왜 그렇게 값이 바뀌었는지" 누군가가 금방 대답했습니다. " 명인의 손으로 만진 값이오"
음정이 맞지 않고, 낡고 초라하며 죄로 흠이 난 인생을 살아온 많은 사람들, 생각 없는 군중들에게 싼 값으로 경매에 붙여진, 오래된 바이올린처럼 ... 이제 거의 갈 때가 되었다가 명인이 오고, 명인의 손으로 만져진 영혼의 가치와 삶의 변화를 어리석은 군중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렇습니다. 오직 명인 되신 주님이 보혈로 우리를 씻겨 주시고, 우리를 만질 때 우리 인생은 값진 인생, 가치가 있는 삶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직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웃들에게 나눌 것이 많이 있습니다. 물질도 나누고 어려운 분들을 돕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을 증거했습니다. 즉 오직 십자가의 복음, 예수님을 증거하고 나누는 것이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면서 우리가 정말로 무엇을 준비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행사입니까 여러 가지 선물입니까 아닙니다. 바른 자세입니다. 정지, 정견, 정행의 자세입니다.
주님이 누구신지를 깊이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과 교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육신하신 주님 속에서 우리를 향하신 은혜를 깊이 있게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으로 기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보다 그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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