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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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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들이 밤에 자기 양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천사가 갑자기 나타났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누가2:10-11) 구주의 탄생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목자들이 들은 것은이렇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 2:14)
구주의 탄생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된 사건이요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되는사건이라는 것이다.
옛날 예언자 이사야가 들은 메시야의 도래에 관한 멧세지도 이와 비슷하다.
”이새의 구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 싹이 돋아난다.
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
그는 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고
그는 겉만 보고 판결하지 아니하고
그는 말만 듣고 시비를 가리지 아니하리라.
그는 가난한 자들의 재판을 정당하게 해 주고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이고 늑대가 새끼양과 어울리고표범이 수염소와함께 딩굴리라”(이사야 11:1- /공동번역)성탄멧세지의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는데 있다.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태어나는구주”의 존재이유이다. 이 일이 오늘 우리 가운데서 성취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네 일상생활 주변에서 있었던 일들 몇가지에서 그 지혜와 길을 찾고저 한다.
(1)우리 나라 대기업의 한 노동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노사간에 임금교섭 때문에 첨예한 대립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20%의 인상을 요구하는 노조측과 경영악화로 응할 수 없다는 경영자측은 논의를 거듭하다 결렬되고 말았다. 이제 자리를 뜨려던 바로 그 순간 소나기가 쏟아졌다. 양측은 부득이거북하게도 비가 멈추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회의장 지붕으로부터 비가 새기 시작했다. 비는 공교롭게도 기업주의 머리와 온 몸에 쏟아져 내렸다. 이를 옆에서 지켜 보던 노조위원장은 선뜻 자신의 잠바를 벗어 사장의 몸에 덮어 주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사장님 죄송합니다. 저희들 때문에 이런 봉변을 당하게 돼서 - ” 사장은 이 말을 받아 ”아니오. 정말 고맙소. 나는 당신들이 회사와 나를 적으로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당신들의 진심을 알았으니 요구한 것을 그대로 응해 주리다”면서 협약서에 날인하려고 했다. 노조위원장은 ”사장님 아직 도장을 찍지 마십시오. 저희들도 내심으로 양보하려던 선이 있습니다”고 당부하였다. 15%의 임금인상으로 이 아름다운 노사협의는 끝맺음되었다. (”낮은 울타리”에서)
근로자들의 진심을 알게 된 기업주는 그들의 인격과 최소한의 요구의타당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에 기업주는 서슴없이 양보함으로써 양극적대립이 아니라 서로가 아껴주고 도와주려는 모습을 남겨 놓은 것이다. 하느
님께 영광, 인류에게 평화라는 성탄의 멧세지는 상호신뢰와 양보를 통해서역사화(역사화)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례야말로 우리사회의 근간이 되고규감이 된다고 생각한다.
(2)1984년 4월 13일 미국의 한 병원에서 신체장애아가 태어났다. 몸은 하나인데 머리는 둘인 기형아였다. 37세의 현직교사인 산모 마르린 캐디의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짐작하고도 남는다. 공포와 저주의 나날을 보내며머리 분리 수술도 시도해 보고, 빨리 죽기를 염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슨일이든 뜻과 같이 되지를 않았다.
실의와 좌절의 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어린 아기의 옷을 갈아입히던캐디는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필이면 이런 아이를 나에게 주신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을 품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러다가 얻은결론은 ”그렇다. 내가 할 일은 이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사랑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날부터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동네출입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둘이어서 한편아이는 먹고 싶어서 보채고 다른 한편아이는 잠들고 싶어서 보채니 키우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서로다른 요구만을 일삼던 두 머리는 몸이 자람과 함께 각기 다른 머리의 요구를 도와가며 양보해 가는 것이었다. 양보와 협조의 지혜와 능력으로 자신의 생존을 유지해 가는 것이었다. (최효섭 목사 ”지각생 예수”에서)사람은여호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사람은 부자로 살고, 어떤사람은 가난하게 산다. 어떤 사람은 힘세고 어떤 사람은 약하다. 어떤 사람은 총명해 보이고 어떤 사람은 어리숙해 보인다. 따라서 사람들은 제각기요구가 다르다.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남는 길은 자기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요구를 묵살하거나 억제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요구를 양보해 가며 서로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도와가는데서 생존의 혜택을누릴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인류에게 평화가 되는 성탄사건은 오늘의 우리에게 양보와 협조의 삶을 요청하고 있다. 그것만이 사람들이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사는 길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길이다. 요새 MBC TV 드라마”사랑이 뭐길래”는 성탄을 맞은 우리들에게 많은 암시를 주고 있다. 세 자매 할머니들 가운데 큰 언니는 그리스도교인, 둘째는 불교도, 셋째는 적당히 세상 돌아가는대로 사는 여인이다. 그런데 큰 언니 할머니는 기도와찬송은 입에서 떠나지 않는데 며느리에게 야박하고 형제 간에 우애를 도모하지 못하는 자기 중심의 할머니로 묘사되어 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의 실상이바로 이런 것은 아닌가 양보와 협조를 모르고 모든 일을 자기중심으로살아가는 인색하고 독선적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아닌가 어린 아이들의성탄극 가운데 등장한 한 거지소년의 눈에 비친 성탄절은 시끄럽고 분주하기만 하지 결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뮤지컬 ”기쁨을 입은 자들”의 대사중에서)
(3)이 이야기는 우리 나라의 한 달동네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엄마와어린 아들은 성탄선물을 주고 받기로 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선물을 안겨준 엄마가 ”너는 나에게 무엇을 주겠느냐”고 물었다. 어린 아들에게, 가난한 집 어린 아이에게 엄마를 위한 선물이 있을리 없었다. 계면쩍게 된 어린 아들은 엄마의 손을 살며시 잡으면서 ”엄마 나는 나를 드리겠어요”라며엄마의 품에 안기더라는 이야기이다.
요한복음의 성탄 멧세지를 되새겨 볼 때가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영생을 얻으리로다”(요한 3:16) 성탄이란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사실을 보여 주신 날이다. 그 사랑의 실천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보여진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과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1:14)
성탄절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동방박사들과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이다. 동방박사들은 그 머나 먼 길을 떠나면서도 아기 예수에게 드릴 예물을 잊지 않았다. 너무나 인상적이요 감동적인 모습이다. 박사들이 어린 아기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며 귀한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너무나 많을 것 같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들은 그 본을 따라서 성탄 예물을 드림으로써 아기 예수의 특수성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이 행한 또 하나의 귀중한 일을 잊어 버리고 있다.
그들은 헤롯 왕의 명령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늘의 명령에 따라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외국인으로서 주재국의 임금의 명을 어긴다는 것은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위협받는 모험이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요새지성인들과는 달리 왕의 명이 아니라 하늘의 명을 존중하고 그에 복종했다.
”신앙이란 증명서가 아니라 전적인 헌신이다. ” 아낌없이 주는 것, 생명의모험을 결단하는 것이다.
만일 그때의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의 명령대로 처신했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 아닐까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일이다. 오늘의 박사들, 소위 진리를 탐구한다는 지성인들, 인류의 구원에몸바친다는 종교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권세냐 여호와 하나님이냐 어느 편에 서고 있는가 진리냐 불의냐 어느 편에 설 것인가지금은 성탄절기, 이 절기는 나를 사랑하여 여호와 하나님 스스로 그 자신을주신 일을 기념하는 시간이다. 나는 이 놀랍고 감격적인 사실을 얼마짜리선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깊이, 아니 겸허히 스스로에게 물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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