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성탄을 준비하신 성자
본문
작은 판잣집을 짓는 일은 어렵거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걸쳐 단번에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높고 커다란 빌딩을 건축하는 일은 부지를 선정하고, 설계를 하고, 시공 업체를 발주하여, 완공하기까지 많은 인력과 재정과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급히 서두르게 되면 오히려 부실공사가 되기가 쉽습니다.
중세 시대에 건축된 대 성당 가운데 수 십 년은 보통이고 자그만 치 몇 백 년에 걸쳐서 완공된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1996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독일에 있는 퀼른 대 성당을 꼽을 수 있습니다.
쾰른 대성당의 건설 기간은 주후 1248~1880년으로, 완성되기까지 걸린 무려 632년이라는 기나긴 공사 기간 중에 282년의 중단 기간이 있었다고는 해도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 문화유산이 될 만큼 장엄한 건축물도 소중하지만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소중한 일은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일일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위대한 건축물을 만들 수 있다고 해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할 수 없으며, 하실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오로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뿐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그 일이 바로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 오래 동안 계획하시고 진행하신 성탄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는 일을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 동역하신 것처럼 사람을 살리는 성탄의 역사도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 동역하셨습니다.
1) 성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시고
2) 성령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아기 예수를 잉태케 하셨다면
3)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탄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셨을까요
1. 예수님은 누구신가-선재하신 여호와 하나님
우리 기독교는 윤회설이나 전생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칠팝십을 사는 인간의 한 평생은 마치 그림자와 같이 유한한 존재임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욥 8: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시 144:4)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그러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들과 같은 피조물이 아니시기 때문에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느 9:5)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시 10:16) 여호와께서는 영원 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물론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함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 다 영원하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자되신 예수님도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존재하신 분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살아계신 분임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말씀’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자로서의 말씀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여호와 하나님이 맨 첫날 빛을 창조하실 때 “(창 1:3)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라는 개역 성경을 개정한 번역판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라는 번역에 ‘말씀’이 곧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임을 오늘 성경이 입중하고 있습니다.
(요 1:2) 그가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 되심을 믿지만, 예수님이 창조의 주역이셨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시작이 아기 예수의 몸으로 탄생하신 성탄 때부터라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육 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쌍둥이도 먼저 촌각을 두고 먼저 태어난 아이가 형이라는 소리를 듣는 다면 예수님 보다 육 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 요한이 당연히 형님이어야 하는데도 세례 요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여기서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육신 적인 순서요,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는 말은 영적인 순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선재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의 선재성에 대해서 당신 자신이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다고 말씀하심으로 바리새인들에게 돌 세례를 받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요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요 8: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그렇다면 아브라함보다 먼저부터 계셨던 예수님이라는 말은 다윗보다도 먼저 계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육신적인 관점으로 보는 사람은 예수님의 육신이 삼십대인데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다고 하니 누가 그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도 그와 같은 관점으로 성탄을 이해하게 되면 예수님은 한낱 성자나 도덕군자 정도 밖에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공자나 석가나 마호메트와 같은 수준의 사람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들 중에 한 분이 아니라 그 들과 전혀 다른 유일한 구세주가 되시는 까닭은 그들의 시작은 태어날 때부터 이지만 예수님은 영원 전에 선재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브라함이나 다윗보다 먼저 계신 분이었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아브람과 다윗 자신이 자기보다 뒤에 오실 메시아를 내어다 보면서 주라고 호칭하였기 때문입니다.
(눅 20:42)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눅 20:43)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눅 20:44)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시편 110:1 에서 다윗이 장차 태어나실 메시아를 가리켜 ‘내 주’라고 말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선재하셨기 때문에 구약 성경을 통해서 당신에 대한 예언들도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가정에서 태어나셔서, 어떤 고난을 받으셔야 하는지를 미리 다 알고 계셨습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2. 예수님은 왜 오셨나-성육신의 목적
세상에 어느 누구도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미리 알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죄와 허물로 인해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고난을 당하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다면 어떤 멸시와 천대와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으며, 또한 하시고자 하면 얼마든지 피하실 수 있음에도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예수님 당신 자신에게는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니라 고난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거절하지 않으시고 성탄의 주님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1)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전폭적으로 순종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그의 자손된 우리를 죄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장본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인류를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물론 그 일은 즐겁고 유쾌한 일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날이 바로 성탄절인 것입니다.
(롬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가지가지 고난을 다 당하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피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결단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지라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원치 않으시는 일을 억지로 강요하실 만큼 비인격적인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신 것이 아니라 복종하신 것이며, 그 동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무엇을 결정하셨든지 그 뜻에 기꺼이 순종하실 만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에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와
뜻을 같이 하셨기 때문에 기꺼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일방적인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동반되어졌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 3:16)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 인간을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롬 6:23). 세상에 태어난 아담의 자손인 인간이 누구를 막론하고 결국은 죽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가) 인간이 아무리 젊고 건강하고 부요할지라도 만일 그와 같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궁극적인 구원인 것입니다.
나)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로지 죽음으로 죄 값을 치루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냥 봐주고 넘어갈 수 없는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다) 인간이 죄 값을 치루기 위해 죽으면 결국은 끝이기 때문에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죄 없는 누군가가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시기 위해 죽어주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짐승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제물이 되어 준 것이 바로 제사 제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사 제도는 누군가 짐승처럼 인간을 대신하여 속죄의 죽음을 죽게 될 것을 예표하는 그림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죄 없는 분이 구약의 제물처럼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주어야 할 대속자가 요청되었습니다. 과연 세상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 줄 사람이 누구입니까
인간은 죄인이면서도 다른 죄인을 위해 고난을 받거나 대신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물론 선을 위해서 영광스런 일을 위해서 죽으려는 사람들은 간혹 있습니다.
(롬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오로지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는 자격 조건을 갖추신 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성령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영원하신 생명이시며, 죄와 같은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빛이시기 때문에 죽음과 무관하신 분이었습니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와 같은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마지못해 억지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예수님도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자원하여 세상에 오신 것이 바로 성탄인 것입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이 정치나 경제나 지식이나 선행으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그와 같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이 바로 성탄인 것입니다.
(갈 4:4) 때가 차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3.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나-십자가를 지심
성탄하시기 전 예수님은 존귀하신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오로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정도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그 모습 그대로 세상에 오신 다면 아무런 준비나 문제가 있을 수 없고 또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외적 권위에 눌려 아무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후하게 대접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모습으로는 인간들과 교제할 수 없고,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 없기 때문에 인간들과 같은 모습으로 당신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야 하는 준비가 필요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문제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다고 해서 인간들처럼 죄인이 아니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다고 해서 인간들처럼 무능력한 존재로 오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고, 무능력한 자가 무능력한 자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시지만 그 내면의 본성은 이전과 하나도 차이가 없이 영원하고 거룩하고 전능하신 분으로 오셔야만 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재가 되실 수 있는 자격 조건을 다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두 가지 성품을 가지시고 세상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보통 사람과 달리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심히 좋은 모습이었습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렇다면 그와 같은 신성과 인성의 양면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무엇을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1) 몸소 인간의 모든 고통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가난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배가 고픈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고픈 경험이 없는 사람은 밥이 없어 못 먹었다고 하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지 왜 밥을 안 먹었느냐 고 반문하게 됩니다.
본래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데는 여러 해 여러 주간 여러 날 여러 시간이 필요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단 몇 시간만 고난을 받으시다가 죽으시면 다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열방 가운데 작은 나라, 다윗의 고향 촌 동네 베들레헴 말구유 위에서 태어나심으로 시작하여 30 평생을 가난한 나사렛 목수의 가정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들이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을 친히 눈으로 보시고 손으로 만지시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 인생들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입니다.
2)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치료하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마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사람들은 성인이 되면 도시에 가서 많은 학문을 닦아 출세를 하고 돈을 벌어 부자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도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시지 않고 갈릴리 주변을 맴도시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친히 찾아다니시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 든 자를 찾아 다시면서 병의 근원인 죄를 사하시며 병을 고쳐주시고, 인간의 힘으로 물리칠 수 없는 귀신을 쫓아내어 구원하여 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 결과 가난하고 무식하고 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천국 복음을 가르침 받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현대 의학으로도 고치기 어려운 선천성 난치병자들이 돈 없이 값없이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래 동안 귀신에게 눌려 집을 떠나고 동네 사람들을 떠나 소외를 받던 사람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그러한 역사를 하실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이 바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며, 이사야 예언대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3)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구원을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여기서 ‘다 이루었다’는 말은 더 이상의 다른 방법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삼년 동안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할지라도 세상에는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 불치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귀신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세상에 오셔서 예수님이 하신 사역은 마치 아카시아 나무의 가지를 치는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아카시아 나무를 온전히 제거하려면 뿌리까지 뽑아내야 하는 것처럼 인간을 그처럼 영적으로 무지하게 하고, 육신적으로 고통을 가져다주는 근본 뿌리인 죄를 뿌리 뽑는 일이 최우선적인 과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사야의 예언대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길만이 최선의 길임을 아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준비하신대로 여자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고 하신 말씀처럼 사단을 이기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준비하신대로 사람들에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화목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두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목적이 예수 믿음으로 덕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 믿다가 자기에게 손해가 난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 아무런 고난도 수고도 희생도 원치 않습니다.
또 하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예수님의 마음과 삶을 그대로 닮고 배우겠다는 제자의 심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많은 고난과 수고와 희생이 따르지만 도리어 그것을 기쁘고 감사하게 여기며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그 두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며, 과연 어떤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어야 할까요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만일 예수님의 성탄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태어나 살다가 영원히 죽었을 죄인들입니다. 성탄의 주님 때문에 우리가 살게 되었고, 구원을 얻게 되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성탄을 준비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우리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크고 작은 일에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사랑하는 이웃에게 성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며, 그 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낮아지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높고 커다란 빌딩을 건축하는 일은 부지를 선정하고, 설계를 하고, 시공 업체를 발주하여, 완공하기까지 많은 인력과 재정과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급히 서두르게 되면 오히려 부실공사가 되기가 쉽습니다.
중세 시대에 건축된 대 성당 가운데 수 십 년은 보통이고 자그만 치 몇 백 년에 걸쳐서 완공된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1996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독일에 있는 퀼른 대 성당을 꼽을 수 있습니다.
쾰른 대성당의 건설 기간은 주후 1248~1880년으로, 완성되기까지 걸린 무려 632년이라는 기나긴 공사 기간 중에 282년의 중단 기간이 있었다고는 해도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 문화유산이 될 만큼 장엄한 건축물도 소중하지만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소중한 일은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일일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위대한 건축물을 만들 수 있다고 해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할 수 없으며, 하실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오로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뿐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그 일이 바로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 오래 동안 계획하시고 진행하신 성탄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는 일을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 동역하신 것처럼 사람을 살리는 성탄의 역사도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 동역하셨습니다.
1) 성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시고
2) 성령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아기 예수를 잉태케 하셨다면
3)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탄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셨을까요
1. 예수님은 누구신가-선재하신 여호와 하나님
우리 기독교는 윤회설이나 전생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칠팝십을 사는 인간의 한 평생은 마치 그림자와 같이 유한한 존재임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욥 8: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시 144:4)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그러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들과 같은 피조물이 아니시기 때문에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느 9:5)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시 10:16) 여호와께서는 영원 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물론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함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 다 영원하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자되신 예수님도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존재하신 분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살아계신 분임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말씀’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자로서의 말씀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여호와 하나님이 맨 첫날 빛을 창조하실 때 “(창 1:3)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라는 개역 성경을 개정한 번역판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라는 번역에 ‘말씀’이 곧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임을 오늘 성경이 입중하고 있습니다.
(요 1:2) 그가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 되심을 믿지만, 예수님이 창조의 주역이셨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시작이 아기 예수의 몸으로 탄생하신 성탄 때부터라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육 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쌍둥이도 먼저 촌각을 두고 먼저 태어난 아이가 형이라는 소리를 듣는 다면 예수님 보다 육 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 요한이 당연히 형님이어야 하는데도 세례 요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여기서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육신 적인 순서요,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는 말은 영적인 순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선재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의 선재성에 대해서 당신 자신이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다고 말씀하심으로 바리새인들에게 돌 세례를 받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요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요 8: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그렇다면 아브라함보다 먼저부터 계셨던 예수님이라는 말은 다윗보다도 먼저 계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육신적인 관점으로 보는 사람은 예수님의 육신이 삼십대인데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다고 하니 누가 그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도 그와 같은 관점으로 성탄을 이해하게 되면 예수님은 한낱 성자나 도덕군자 정도 밖에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공자나 석가나 마호메트와 같은 수준의 사람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들 중에 한 분이 아니라 그 들과 전혀 다른 유일한 구세주가 되시는 까닭은 그들의 시작은 태어날 때부터 이지만 예수님은 영원 전에 선재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브라함이나 다윗보다 먼저 계신 분이었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아브람과 다윗 자신이 자기보다 뒤에 오실 메시아를 내어다 보면서 주라고 호칭하였기 때문입니다.
(눅 20:42)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눅 20:43)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눅 20:44)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시편 110:1 에서 다윗이 장차 태어나실 메시아를 가리켜 ‘내 주’라고 말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선재하셨기 때문에 구약 성경을 통해서 당신에 대한 예언들도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가정에서 태어나셔서, 어떤 고난을 받으셔야 하는지를 미리 다 알고 계셨습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2. 예수님은 왜 오셨나-성육신의 목적
세상에 어느 누구도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미리 알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죄와 허물로 인해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고난을 당하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다면 어떤 멸시와 천대와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으며, 또한 하시고자 하면 얼마든지 피하실 수 있음에도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예수님 당신 자신에게는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니라 고난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거절하지 않으시고 성탄의 주님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1)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전폭적으로 순종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그의 자손된 우리를 죄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장본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인류를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물론 그 일은 즐겁고 유쾌한 일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날이 바로 성탄절인 것입니다.
(롬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가지가지 고난을 다 당하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피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결단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지라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원치 않으시는 일을 억지로 강요하실 만큼 비인격적인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신 것이 아니라 복종하신 것이며, 그 동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무엇을 결정하셨든지 그 뜻에 기꺼이 순종하실 만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에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와
뜻을 같이 하셨기 때문에 기꺼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일방적인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동반되어졌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 3:16)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 인간을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롬 6:23). 세상에 태어난 아담의 자손인 인간이 누구를 막론하고 결국은 죽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가) 인간이 아무리 젊고 건강하고 부요할지라도 만일 그와 같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궁극적인 구원인 것입니다.
나)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로지 죽음으로 죄 값을 치루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냥 봐주고 넘어갈 수 없는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다) 인간이 죄 값을 치루기 위해 죽으면 결국은 끝이기 때문에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죄 없는 누군가가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시기 위해 죽어주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짐승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제물이 되어 준 것이 바로 제사 제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사 제도는 누군가 짐승처럼 인간을 대신하여 속죄의 죽음을 죽게 될 것을 예표하는 그림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죄 없는 분이 구약의 제물처럼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주어야 할 대속자가 요청되었습니다. 과연 세상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 줄 사람이 누구입니까
인간은 죄인이면서도 다른 죄인을 위해 고난을 받거나 대신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물론 선을 위해서 영광스런 일을 위해서 죽으려는 사람들은 간혹 있습니다.
(롬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오로지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는 자격 조건을 갖추신 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성령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영원하신 생명이시며, 죄와 같은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빛이시기 때문에 죽음과 무관하신 분이었습니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와 같은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마지못해 억지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예수님도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자원하여 세상에 오신 것이 바로 성탄인 것입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이 정치나 경제나 지식이나 선행으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그와 같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이 바로 성탄인 것입니다.
(갈 4:4) 때가 차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3.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나-십자가를 지심
성탄하시기 전 예수님은 존귀하신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오로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정도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그 모습 그대로 세상에 오신 다면 아무런 준비나 문제가 있을 수 없고 또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외적 권위에 눌려 아무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후하게 대접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모습으로는 인간들과 교제할 수 없고,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 없기 때문에 인간들과 같은 모습으로 당신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야 하는 준비가 필요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문제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다고 해서 인간들처럼 죄인이 아니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다고 해서 인간들처럼 무능력한 존재로 오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고, 무능력한 자가 무능력한 자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시지만 그 내면의 본성은 이전과 하나도 차이가 없이 영원하고 거룩하고 전능하신 분으로 오셔야만 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재가 되실 수 있는 자격 조건을 다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두 가지 성품을 가지시고 세상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보통 사람과 달리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심히 좋은 모습이었습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렇다면 그와 같은 신성과 인성의 양면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무엇을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1) 몸소 인간의 모든 고통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가난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배가 고픈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고픈 경험이 없는 사람은 밥이 없어 못 먹었다고 하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지 왜 밥을 안 먹었느냐 고 반문하게 됩니다.
본래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데는 여러 해 여러 주간 여러 날 여러 시간이 필요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단 몇 시간만 고난을 받으시다가 죽으시면 다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열방 가운데 작은 나라, 다윗의 고향 촌 동네 베들레헴 말구유 위에서 태어나심으로 시작하여 30 평생을 가난한 나사렛 목수의 가정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들이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을 친히 눈으로 보시고 손으로 만지시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 인생들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입니다.
2)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치료하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마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사람들은 성인이 되면 도시에 가서 많은 학문을 닦아 출세를 하고 돈을 벌어 부자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도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시지 않고 갈릴리 주변을 맴도시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친히 찾아다니시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 든 자를 찾아 다시면서 병의 근원인 죄를 사하시며 병을 고쳐주시고, 인간의 힘으로 물리칠 수 없는 귀신을 쫓아내어 구원하여 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 결과 가난하고 무식하고 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천국 복음을 가르침 받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현대 의학으로도 고치기 어려운 선천성 난치병자들이 돈 없이 값없이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래 동안 귀신에게 눌려 집을 떠나고 동네 사람들을 떠나 소외를 받던 사람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그러한 역사를 하실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이 바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며, 이사야 예언대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3)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구원을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여기서 ‘다 이루었다’는 말은 더 이상의 다른 방법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삼년 동안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할지라도 세상에는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 불치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귀신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세상에 오셔서 예수님이 하신 사역은 마치 아카시아 나무의 가지를 치는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아카시아 나무를 온전히 제거하려면 뿌리까지 뽑아내야 하는 것처럼 인간을 그처럼 영적으로 무지하게 하고, 육신적으로 고통을 가져다주는 근본 뿌리인 죄를 뿌리 뽑는 일이 최우선적인 과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사야의 예언대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길만이 최선의 길임을 아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준비하신대로 여자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고 하신 말씀처럼 사단을 이기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준비하신대로 사람들에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화목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두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목적이 예수 믿음으로 덕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 믿다가 자기에게 손해가 난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 아무런 고난도 수고도 희생도 원치 않습니다.
또 하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예수님의 마음과 삶을 그대로 닮고 배우겠다는 제자의 심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많은 고난과 수고와 희생이 따르지만 도리어 그것을 기쁘고 감사하게 여기며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그 두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며, 과연 어떤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어야 할까요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만일 예수님의 성탄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태어나 살다가 영원히 죽었을 죄인들입니다. 성탄의 주님 때문에 우리가 살게 되었고, 구원을 얻게 되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성탄을 준비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우리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크고 작은 일에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사랑하는 이웃에게 성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며, 그 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낮아지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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