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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

본문

이번 성탄절은 우리가 어떤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맞이할 것인가를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흑인들의 연가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아무리 겸손하여도 예수님보다 겸손할 수 없네"
"아무리 가난하여도 예수님보다 가난할 수 없네"
여러분께서는 이 구절을 생각하면서 어떤 감동을 받으십니까
2000여 년 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그 때에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우선 정치적으로 로마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경제적으로 부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전 세계를 다스리는 우월한 민족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오실 메시아는 적어도 좋은 환경에서 모든 사람이 부러워 할 만한 왕의 왕으로 세상에 오실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하며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와 반대로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출생과 삶을 우리와 비교하여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태어날 때에 짐승의 우리에게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에도 옷 한 벌 입지 못하고 다 벗은 모양으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리 가난하여도 값싼 수의라도 입고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도 말구유에서 나셨고 세상을 떠나실 때에도 로마군병들이 제비뽑아 예수님의 옷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본문(고후8:9)을 보면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가난한 자로 오신 것은 우리를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믿은 후 모두가 많은 것을 소유한 부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부요라고 하는 말과 부자라고 하는 말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부자라고 하는 말은 소유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양적으로 많이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부요라고 하는 말은 소유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존재와 가치의 의미입니다.
많이 소유하였어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더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부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현재 가진 것으로 만족하게 여기며 예수 한 분만으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은 부요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받은 은혜 중 가장 큰 은혜는 그리스도안에서 부요한 자가 된 것입니다.
영국 어느 귀족의 집 하인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 하인이 탄식을 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마침 주인이 지나다가 보게되어 "너는 무슨 일로 그렇게 탄식을 하고 있는고"하며 주인이 하인에게 물었습니다.
하인은 "예. 저에게 일만 파운드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그 만한 돈이 없으므로 이렇게 하인이 되어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난 마음이 넉넉한 주인은 "그래 그 돈으로 행복하여 진다면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라고 하인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돌아서기 무섭게 하인은 다시 탄식을 하였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10만 파운드만 있으면 행복하여 질 수 있다고 말할 것을 일만 파운드 밖에 못 받았네"라고 탄식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이처럼 한량이 없습니다.
가져도 가져도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욕심입니다.
셋방살이하는 사람이 전세라도 있으면 좋겠지 하며 전세 사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전세를 얻을 만큼 돈이 모아지면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저 단칸방이라도 내 집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방 하나라도 내 집을 가진 후에도 더욱 위를 바라보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부족하다고 사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나를 비교할 때에 나는 부요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땅위에서 가지고 계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여우도 굴이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잠자리 하나 내 것이라고 마련하신 것이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얼마나 부요한 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어떠한 자세로 바라 보느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부자 예수님을 생각하면 "내가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왜 부자가 되지 못하는 것인가. 그리고 왜 성공을 하지 못하는가" 고민하며 세상사람들만 바라보며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요케 하시려고 가난해 지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던 화려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 서지도 못할 것입니다.
아마도 권력이 있는 사람이나 돈이 많은 사람들이 제일먼저 예수님을 차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친구가 되셨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비천한 사람, 세상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같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부자나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족하는 부요함이 없이 탐심으로 가득하여 소유만 늘이려하면 그것은 진정한 복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많이 가졌던 그렇지 않든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부요한 자라고 하는 존재의 가치에 의미를 두는 사람은 어떠한 처지에도 만족하게 됩니다.
교회가 구제사업에 역점을 두어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주고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세주로서 오신 것이 단지 가난에 지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만족을 누리며 살도록 모든 것을 가지고 오셔서 넉넉히 먹여주고 입혀주기 위한 목적으로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함 속에서도 부요케 됨을 얻는 비결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난한 형제를 돌보고 그들이 잘 살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네가 먼저 가난해 져야 한다. "고 하십니다.
저는 오늘날 민중을 위한다고 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가난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에 민중은 희망을 가지고 부요한 마음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요케 하시려고 가난해 지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은혜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어느 회사의 사장님이 계셨습니다.
회사는 노사분규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근로자의 임금인상 요구에 따라 매년 20%이상을 올려주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장님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어떻게 하여야 노사분규가 없고 사업체를 잘 운영하겠습니까"를 물었습니다.
사장님의 마음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가난하여져라!"하는 응답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그는 그 때부터 가난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부요한 자로서의 마음을 가지고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노사분규가 사라지고 회사는 잘 운영되게 되었다고 하는 간증입니다.
민족의 살길도 같은 이치입니다.
정치하는 사람이나 백성이나 똑 같이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자족하는 마음은 가난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보다 더 가난하여 질 수 없네. 예수님께서는 인류역사상 가장 가난한 분이셨네. "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부요한 자가 됩니다.
그래야만 희망이 있습니다. 거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어떤 재미있는 실험결과가 있습니다.
음식을 과하게 섭취하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돼지같이 먹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돼지에게 음식물을 많이 먹게 하여 가장 많이 먹었을 때 잡아 위를 열어 보았더니 음식물이 위장의 80%밖에 차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가장 많이 음식을 섭취하였을 때를 측정하여보니 위장의 120%나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위가 늘어나고 늘어나서 더 이상 터지기 직전까지 먹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120%를 먹어도 만족이 없이 더 먹을 것을 찾는 것이 사람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빌2:6)에는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시되 종처럼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을 침상으로 삼으시고 낙엽을 이불 삼아 하늘을 지붕 삼고 사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가난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능력으로 우리를 부자가 되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난하게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영화로운 영광의 옷을 벗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벗어버린 인간은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만족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의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값비싼 밍크 코트를 입고 가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갈 때에는 우리는 새 마포 옷을 입어야합니다.
땅위에서는 무엇을 먹어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먹고 또 먹어도 인간은 끊임없이 배고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4:13)이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하셨고,
(요6:35)...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이 되셔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거할 처소가 되시기를 원하셔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14: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씀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천국으로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죽으시려 가신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처소에 거하는 사람이 됩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처소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없는 나라와 예수님이 없는 심령들은 결코 만족할 줄 모릅니다.
끊임없이 달라고 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비도 흙으로 집을 짓고, 여우도 자기가 잠자고 숨을 쉴 수 있는 굴 하나 만들어 놓고 지낼 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과욕을 부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마6: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마음을 비우면 평안이 옵니다.
(히12:2) 말씀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게 되면 너희가 부요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가난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만족이 있습니다.
가난한 중에서도 남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요한 자입니다.
그러한 성탄절을 맞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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