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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성탄절에 받은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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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성탄을 맞이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성탄절에 받은 선 물’입니다. 옆의 분에게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 리에게 성탄절을 통해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주 셨습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할 때 마다 여호와 하나님께 너무나 큰 선물을 받았음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뇌졸중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에 브라운이라는 간호사가 있습 니다. 그런데 이간호사는 친절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환자를 자신의 부모나 형제처럼 대하며 너무나 잘 치료해 주어 많은 사람들이 그 간호사를 칭찬했습니다. 이 간호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한 노인을 친절하게 잘 보살폈는데 결국 그 노인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죽기 전에 유언 을 통해 자신이 가진 엄청난 재산을 이 간호사에게 물려 주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큰 선물을 받았습니까 얼마전 신문을 보니까 어떤 사람이 천만원을 가지고 증권에 투자해서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 러나 천만원을 투자해서 수십억을 번 그 사람보다도, 우리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더 큰 것을 받은 사람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 리가 추구하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것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에 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한해가 지나감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시 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새로운 시작은 다만 다시 오신 예 수님을 통해서만이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탄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의 선물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새날이나 새 것도 없고 새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성탄절은 하루의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그 귀한 선 물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셨습니까 그 이유를 말 씀을 통해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전에 이미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구약에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 명기 다섯 권을 율법(토라), 혹은 모세 오경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탄절에 오신 예수는 말씀이 육신되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이미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왜 말씀을 이땅에 육신되게 하셔서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예수님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요 말씀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 님이십니다. 우리가 받은 성탄의 선물은 예수요, 그분은 곧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의 말씀은 말씀이 아니고 신약성경의 말씀만이 말씀인 것이 아닙니다. 구약과 신약 은 똑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약의 성경이 없어도 구약의 성경으로 충분히 하 나님의 자녀되는 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구약을 우리에게 먼저 주셨습니까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때가 차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구약의 창세기 3장 15절부터 보면, 인간 타락에서부터 시작해서 예언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 시 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이것은 타락된 인간에게 첫 번 째로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된 언약입니다. 그리고 율법아래 나게 하셨다라고 말씀하 십니다. 이미 구약성경이 이땅에 있는 가운데서 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말은 한 인간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5절에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오늘 이부분을 중점으로 말씀을 나 누고자 합니다.
성탄의 선물로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신 목적은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 ’속량’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노예에게 자유를 주려고 노 예의 주인에게 지불하던 몸값을 의미합니다.
지난여름에 북한의’옥주’라는 아이의 이야기를 한적이 있습니다. 옥주가 배가 고파 서 중국에 갔다가 7000원에 팔렸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는 몇백 만원됩니다. 그 아이를 산사람이 그 아이를 노예로 데리고 있는 것입니다. 돈으로 샀기 때문에 자 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구미에 있는 강목사님이 중국에 갔다가 노예의 상태에 있는 옥주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산댓가의 돈을 지불하고 그 아이를 자 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지난 여름 제가 갔을 때 옥주는 그를 속량해 준 그 목사님 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 목사님의 뜻을 빨리 파악하고 그 뜻을 따르기 로 노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뜻은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참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 그를 속령해 준 자의 뜻입니다.
우리가 율법아래 났다는 것은 바로 죄 아래 이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옥주로 서는 자기의 어떤 것으로도 속량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떠한 방법 으로도, 우리의 것으로는 속량될 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런 우리들을 구원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특히 율법이라는 것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 율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않고는 주님의 속량의 가치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제가 경험했던 바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때문에 좌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에서 평안히 살아가다가 설교말씀을 듣고 좌절감에 빠져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힘있게 살아 가다 가도 힘을 잃고 비틀거리면서 나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관점에서 말씀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목적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 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말씀을 읽다가 좌절감에 빠지게 됩니까 그것은 아무도 이 말씀을 지킬 자가 없 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말씀들을 모두다 지킨다면 좌절감에 빠 질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며, 실망에 빠질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더나아가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킨다면 율법은 우리를 거룩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보 면 이 말씀을 지켜서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해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이 말씀을 다 지킬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율법아래 태어난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곧 죄 아래서 태어난 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물에 걸린 고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물에 걸린 고기들이 자신들이 노력할수록 빠져 나가기 보다는 오히려 더 깊히 죄게됩니다. 이런 상태에 서 우리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무섭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을 보십시오. 1계명부터 10계명까지 다 지킬 수 있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다 지킨다면 여러분은 거룩하게 될 수 있습니다. 수요일 밤에 직분자의 자격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만 제직의 자격을 보면 거기에 합당한 자가 누가 있습 니까 말씀에 비추어진 모습, 거기에 비추어서 온전한 사람을 선택한다면 한 사람 도 직분자가 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은 이처럼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왜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율법을 성 경에는 ’몽학선생’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바른 곳으로 인도해 주는 자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목적은 율법에 비추어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보고 깨닫고 구원자가 절대로 필요한 것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주셨 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분명 내가 죄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질 것입니다.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에 우리를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 질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내 스스로는 도저히 구원의 길에 이를 수 없음을 알고, 나를 구원의 자리에 이끌어 줄 어떤 분 을 간절히 사모하는 그 마음가짐. 그것이 곧 심령이 가난한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자가 되어질 때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되어질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이르도록 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말씀에 비추어진 우리의 모 습을 보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구속자이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는 곧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율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율법을 통해 스스로 무엇인가를 지켜 갈려고 합니다. 그리고 율법 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할 수 없 는 일들을 계속 붙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어 질 수가 없습 니다.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어떤 특정한 종교들은 할 수 없는 일들을 붙들고 한평생 그것을 가지고 씨름합니다. 이 율법을 주신 목적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오신 예수에 대한 이해를 할 수가 없으며 진정 그를 나의 구 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영원한 구원의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많은 때에 우리는 ’내가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혹은 ’내가 선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행동을 하려고 생각하고 늘 선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또한 우리의 자녀들에 게도 늘 ’착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기준이 잘못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착함의 기준을 어디에 둡니까 공부를 잘하면 착한 아이며, 공부를 못하면 나쁜 아이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렇 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수학이나 기타 과목을 열심히 합니다. 목적이 수학을 위한 수학이 아니라 착함을 이루기 위한 수학이 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엉터리입니까 나는 좋은 아내가 되어 야지. 나는 좋은 남편이 되어야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살아 보니 그렇게 되어 집니까 그렇게 안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죄아래 태어났다는 것이며 율법아래 태어났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을 지키려고 계속 노력해 간다면 어떻게 되어 지겠습니까
3장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나니. ’ 율 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데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들이요. ’ 율법행위에 속한다는 것은 율법을 하나하나 지키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일치 시켜 간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습 니다. 그러므로 행하지 아니하는 율법을 붙들고 살아간다면 스스로 저주아래 있을 수밖에 없으며 모든 일에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으로 은혜를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곧 율법에 붙들려서 굳어져 가는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가려고 육신적인 노력을 한다면, 아무리 좋은 것도 피 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치고 실망하고 결국 파멸할 것입니다.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앞에 부름받은 사람은 그분과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 을 깨닫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만이 택함 받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노력이라고 고백하는 자입니다.
제가 성지순례를 다녀온 것에 대해 많은 분들이 기대를 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장 로님 기도를 하시면서도 ’사랑과 은혜가 있었던 주님의 발자취를 걸어온 목사님’ 이라고 하시는데 좀 답답합니다. 실제로 그곳에 가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 기보다는 실망을 많이 하고 왔습니다. 지나여름에 중국을 방문했을 때는 얼마나 고 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잠자리와 음식, 기타 여러가지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 러나 그때는 제가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얼마나 많이 체험했는지 모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가서는 율법에서 구속된 자를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 가서는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몇몇 되지는 않았지만 율법의 저주 아 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바로 이 차이입니다.
유대인하면 세계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이 미국에 600만명이 있다고 하는데 이유대인들이 미국을 경제적, 정치적으로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하며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도 유 대인들이 4~500만명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그들은 택함 받은 자들입니다.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 이 아닙니다. 이번에 가서 유대인들을 만나보니 유대인처럼 굳어있는 자들이 없습 니다. 유대인들은 웃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은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분명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 들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땅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임 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강우량이 적어도 우리 땅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해를 죽은 바다라고 하지만 사해 바다는 엄청난 자원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 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국경을 넘을 때부터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환경은 이집트에 비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습니다. 그러나 초라하고 형편 없는 환경에 사는 이집트인 보다도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묵상하고, 읽고, 붙들 고 다닙니다. 그리고 말씀을 항상 아낍니다. 그러나 율법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이 율법을 지키려 고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 하나님이 사역하시도록 내어 놓지 않고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 을 사역시키려 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역사하도록 하지 않고 그들이 하나 님의 말씀을 역사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다 하나 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바른 것을 깨달아 가야 합니다. 교회가서 율법적인 설교를 듣고 세상에 나간다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유대인처럼 종교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왜 바리세인들을 그렇게 지적하고 책 망하시는지 이번에 가서 확인을 했습니다. 인종차별이 얼마나 심한지 모릅니다. 유 대인이 아니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히틀러를 통해서 학살된 자기 민족을 위해서는 기념관을 짓고 굉장한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다른 사람을 죽인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들만이 위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쳤다는 광야를 가보았습니다. 깊은 계곡입니다. 지산 범물 만큼 넓은 지역에 많은 집터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곳에 사는 아랍족을 단지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집터를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뜨리고 그곳의 아이까지 다 죽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알고 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때 문에 그들이 우리를 만나면 ’아.. 형제여’ 할줄 압니다. 그러나 오히려 사람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미국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 아졌지만 그들은 돈밖에 모릅니다. 이스라엘에 가서 ’당신 여호와 하나님 알죠 나도 하나 님을 압니다. 예수를 구주로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다. 당신도 예수 믿 으십시오. ’ 이렇게 전도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추방도 아니고 3년 징역입 니다. 심지어 중국은 공산국가라도 그렇게 엄하지는 않습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 습니다. 적발되더라도 추방이나 벌금을 내면됩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세 상에 물질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참된 선물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면 절대로 수용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 면 17번이나 다른 나라에 의해서 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예언하셨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 그 예언들이 그대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평지가 계속 공격되고 부셔져서 그 위에 집을 짓고 집을 지어서 산이 다 되었습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인간이 율법을 지키면서 의로와 질려고 하는 것 은 절대로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집니다. 분명히 허물어지고 맙니다. 안되 는 것을 붙들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2000년전에 예수님을 그 땅에 보내주시고 그 땅에 오셔서 그것을 가르쳐 주시고 보여주셨지만 아직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 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주신 말씀은 율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다 걸리는 자들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세상에 태어날 때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 곧 언약의 은혜가 들어 있습니다. 율법으로 우리 의 죄를 보게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고 깨닫고 구원의 길을 깨닫게 하시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되어 우리의 주님으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언약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법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로 지키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 말씀에 비추어진 우리의 모습을 보고 심령이 가난한자 가 되고, 정말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구원함을 얻기 위하는 마음으로 주셨습니다. 이 땅에 이미 오신 예수, 앞으로 다시 재림하실 예수, 언제나 찾기만 하면 내 가운 데 오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 우리의 구주가 되어져야 합니다. 유대인처럼 말 씀을 붙들고 살아가지 말고 예수님께로부터 책망받고 지적받는 종교인이 아니라 신 앙인으로 바뀌어져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한해가 끝나고 새해가 올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 도를 통해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행복은 우리의 새로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 로 해서 시작할 때 새로움이 옵니다. 새 천년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대림절 기간을 통해서 이미 준비해 왔습니다.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 구주가 되신 예수가 누구인지를 다시 깊이 생각해 보시고 왜 오셨는지 깨달을 때 새 천년은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성탄의 큰 선물인 예수를 바르게 이해하고 신앙인으로써 은혜를 입고 나누어 주면서 하늘을 이 땅에 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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