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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성탄절의 심장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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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여호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 1:26-3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11)
오늘은 대강절 넷째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이면 성탄절이 됩니다. 금년에는 성탄절이 주일이어서 좋기도 하고 조금은 서운하기도 합니다. 휴무일이 줄어들어서 서운해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성탄절이 주일이든, 아니든, 휴무일이든, 정상근무일이든 상관없습니다. 성탄절의 의미가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성탄절’은 아기 예수님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감사하며,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날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또다시 이 땅에 재림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만일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 어떤 마음으로 맞이할 것인가를 결심하고 점검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탄절 전 4주간을 ‘대강절’(Advent)로 지키며 성탄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오늘이 그 마지막 주간입니다.
먼저 어떤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 탄생을 축하할까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마음으로 아기 예수 탄생일을 맞이하기를 원하고 계실까요 여호와 하나님의 입장에서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기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실 때의 마음은 어떤 것들이었나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탄절이 오면 늘 봉독하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 예고”의 말씀이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입니다. 다윗의 후손인 요셉과 약혼을 한 처녀 마리아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천사인 가브리엘이 나타나서 예수님 탄생을 예고합니다.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여호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28-33)
아기 예수님이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이 땅에 탄생하신 목적은 32절-33절에 있습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로 일컬어질 것이며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기” 위해서입니다. 천사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종합해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영원히 왕으로 다스리실 분인데 그 이름이 예수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이 땅을 다스릴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이 역사 위에 가장 크신 분이요, 가장 큰 일을 하시는 분이요, 가장 높은 찬양을 받으실 분입니다.
여기 “예수”라는 이름은 “임마누엘”이라는 말이며 그 뜻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입니다. 하늘에서 가장 크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탄생하신 날이 성탄절입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피조물 가운데 인간을 가장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사랑하신 것만큼 인간에 대한 기대도 크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고 이방신을 따랐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음을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있는 말씀하나만 예로 들어봅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5-7)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그들을 지면에서 쓸어버리실 마음을 가질 만큼 실망하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너무 크시기에 인간을 구원하시고 그 생명을 파멸에서 다시 살려내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이 직접 세상에 오시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늘보좌를 버리고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빌2:5-11에서 바울 사도는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11)
인간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절절히 묻어난 말씀이 이 구절들입니다.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한 곳이 없습니다.
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자기를 비우고”(made himself nothing)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됨을 거부하고 사람으로 오시되 종의 형체로 오시기 위해 말구유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종의 형체”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성육’(incarnation)의 사건이 곧 예수님이 자기를 비우는데서 시작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 “비운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케노센’(κνωσεν)이라고 하는데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합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大權的(대권적) 권능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창조주의 존엄성과 주권의 표지를 포기하는 것은 물론 여호와 하나님의 3대 속성, 즉 무소부재하시고 전지, 전능하신 독립적 권능을 포기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다양한 견해들을 함축하는 것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으로서의 절대존엄과 권능을 포기하고, 인간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시는 것을 ‘자신을 비웠다’(에케노센)는 말로 표현했다고 봄이 좋을 것입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권리나 존엄성이나 특권을 모두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셔서 오직 인간을 보살피고 구원하고, 살리시려는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에 주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하기 위해서는 우리 성도들도 마음을 비우고 주님께 나아가야 된다는 잠정적결론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신을 비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또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을 비우는 것인지도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탐욕을 버려라. 욕망을 버려라. 미움과 증오심을 버려라. 성공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등등으로 자기 비움의 상태를 나타내고 요구하지만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무엇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봉독한 것처럼 바울은 빌 2: 5-11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신 내용이 무엇이며 목적이 어디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되는 모든 주권과 존엄성과 특권을 버리셨습니다.
 둘째는 종의 형체로 인간이 되셨습니다.
 셋째는 자신을 낮춰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자기를 비우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되는 모든 주권, 존엄성, 특권을 버리고 종의 형체로 인간이 되셨으며 자신을 완전히 낮추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시는 목적은 죽기까지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 복종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순교자적 마음으로 죽기까지 복종하기 위해서 자기 모든 것을 비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자, 주님의 마음을 본받으려는 성도들은 다음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자신을 비우는 결단입니다.
 둘째는 내게 있는 모든 특권, 명예, 권세, 물질적 소유욕, 성공에 대한 욕망까지 주님을 위해서라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웃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넷째는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순교자의 정신으로 죽기까지 순종하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나 자신을 비운다는 말은 내 삶의 목표가 내 욕망을 성취시키는데 두지 아니하고, 나를 만들어 이 세상에 보내시고, 자기생명까지 희생시켜 나를 살리시려는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그 우선순위를 둔다는 말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신문(2005. 12. 17. 조선일보)에서 서강대학교 장영희 교수가 쓴 매우 감동적인 칼럼을 읽었습니다. ‘마음의 항아리’라는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어느 대학의 유명한 교수가 시간 쓰는 법을 특강했답니다. 탁자 위에 항아리 하나를 올려놓고 주먹만한 돌들을 항아리 위까지 채워 넣고는 가득 찼느냐고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네”하고 대답하는 학생들 앞에서 조그만 자갈을 항아리에 흔들며 넣었다. 가득 찼느냐고 묻자 학생들을 또 “네”라고 대답합니다. 교수는 모래를 사이사이에 가득 붓고 다 찼느냐고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보여준 것이 무슨 의미냐고 묻자 아무리 스케줄이 꽉 찼다 해도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한 학생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교수는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모래나 자갈을 먼저 가득 넣고 큰 돌을 넣으려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 속의 큰 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먼저 항아리에 넣으라는 의미였다고 가르친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장교수는 죽음과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소감을 적었습니다.
사람들이 항아리에 각자의 생각과 의지를 넣고 다닌다면 그 항아리에 제일 크게 차지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공에 대한 의지, 행복, 돈 또는 사랑 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영희 교수는 죽음과 연결시켜 봅니다. 그는 암으로 두 번이나 큰 수술을 받고 입원을 했습니다. 폐렴으로 긴급 입원하여 사경을 헤매기도 했답니다. 지금도 항암치료를 받으며 병원을 들락거린답니다. 그녀는 병원에 들어가며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하는 생각을 해보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는 것입니다.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을 살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죽음을 바라볼 때는 강단에서 가르친 대로 잘 살아야겠다는 결심의 큰 돌맹이가 항아리를 채웠는데, 병원밖에 나와서 생활하다보면 다시 큰 돌은 없어지고 모래와 자갈로 채워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간사함이요, 나약함이요, 탐욕입니다. 췌장암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았던 애플컴퓨터 설립자 스티브 잡스는 “죽음은 삶을 리모델 한다”고 했답니다. 병과 죽음은 인생 자체를 리모델링하게 만드는 기회가 된다는 말입니다. 헛된 일에 삶을 소진시키지 아니하고 참으로 뜻있는 삶을 하루라도 살려는 의지를 갖게 한다는 말입니다. 별것 아닌 자갈이나 모래로 내 인생의 항아리를 채울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가장 큰 돌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우리의 인생을 채워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것을 신앙적으로 재해석하면 나를 지으셔서 세상에 보내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참뜻을 찾아서 그 뜻을 따라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읽은 성탄절 예고 기사의결론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그녀에게 임하여 잉태하게 될 것이고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가 곧 세상을 구원하여 다스릴 가장 큰 자가 될 것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마리아가 당황합니다.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며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이런 일이 어찌 일어나겠느냐”며 반문합니다. 그러나 천사의 설명을 다 듣고 난 마리아는 순종하기로 합니다. 그것이 비록 처녀의 몸으로 엄청난 수모와 고통을 당한다 해도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면 순종하기로 결심합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May it be to me as you have said) 마리아의 이 대답은 비장한 각오가 곁들여 있는 자기 선언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종의 형체로 사람이 되사(성육: incarnation) 이 세상에 오신 것(성탄)은 사람을 돌보고(to care about people), 사람을 살려내기(to redeem people)위해서우리 곁으로 오신 것이니(to be with us),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God's mission)에 함께 하자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찾아가시고 싶은 곳에 우리가 찾아 가라는 것입니다. 성탄절의 메시지 중심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고 살리는 길은 여호와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들 속으로 오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God came down to where we are Evidently there was no other way to lifts us upthan for God to come come down). 오셔서 우리를 살리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처음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실 때의 그 인간, 그 사람답게 높이시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심장입니다(God came down to lift us up).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심장을 크리스마스의 심장으로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심장을 바꾸어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기 위해 지금도 우리 곁을 찾아오십니다. 우리도 그 예수님의 심장을 갖고 마음을 비우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에 찾아가는 성탄절이 됩시다. 불우한 이웃들을 찾아가고 우리의 것을 나누는 실천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찾아갈 곳은 꼭 불우한 이웃들에게 구제금이나 구제품을 들고 가는 곳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 가까이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오실 가치가 있는 곳이어서 오신 것 아닙니다. 오실 가치가 없는 추한 죄인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것이 성탄의 심장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도 성탄의 심장을 갖고 찾아갈 곳이 있습니다. 남편이 용서되지 않는 곳, 외면하고픈 곳이 있습니까 아내 속에 용서할 수 없는 곳이 있습니까 자식들이나 동료, 친구들에게도 그런 곳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를 내 마음이 찾아가서 이해하고, 용서하고, 돌보고, 사랑하는 것이 성탄절의 심장입니다.
뉴욕에 존 로즌 박사(Dr. John Rosen)라는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있었습니다. 긴장으로 인한 정신분열증 환자들을 치료하는 세계적 전문가였습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보통 환자들로부터 멀리 분리되어 있으면서 치료합니다. 그러나 로즌 박사는 그의 침대를 그들의 병실로 옮겼습니다. 그들 곁에 침대를 놓고 그들과 함께 행동을 했습니다. 그는 그들을 정말로 사랑하며 그들의 생활 패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말하면 말하고, 그들이 말이 없으면 자신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며 삶을 나누고 뜻을 통했더니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그는 팔을 뻗어 그들을 감싸 안고 포옹을 했습니다. 정말 사랑할 수도, 흥미를 느낄 수도 없는 그들이었지만 그들 속으로 찾아가서 사랑했더니 그들의 입에서 “고마워요!”(Thank you!)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치료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탄절의 심장으로 성탄절을 맞이합시다. 먼저 자기를 비우는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욕망, 부귀영화, 명예, 탐욕을 향한 마음을 아기 예수님으로 오시는 예수님 앞에서 비우도록 합시다. 생명의 탄생을 죽음과 연결시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의 문을 통과하는 심정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마음을 비울 수가 있습니다. 무작정 비우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비우는 것입니다. 종의 형체로 자기를 끝까지 낮춰 죽기까지 순종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십니다. 온 우주를 우리 앞에 무릎 꿇게 합니다.
이 세상에는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극단적인 예는 네로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로는 AD66년에 올림픽 같은 국제경기대회를 열었습니다. 입장식 때 4000명의 근육질 좋은 장정들을 행렬에 내세웠습니다. 그렇게 열어 놓고 네로는 4개의 금메달을 걸머쥐었습니다. 운동경기라고 볼 수 없는 종목들을 내걸고 제 자신이 우승했습니다. 하프연주, 비극연기, 수레경기, 헤럴드경기(마라톤처럼 소식을 빨리 전하는 운동)를 하면서 모든 선수들은 자기 뒤에서 자기를 호위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네로는 최우수 선수로 4개의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낚시와 굴렁쇠 종목도 넣어서 금메달 2개를 추가하려 했으나 체면상 4개만 차지했습니다. 부인이었던 폼페이가 황제나 로마를 위해서 명예롭지 못했다고 충고하자 발길로 걷어차서 결국 죽게 했습니다. 유명해지기를 좋아하는 사람, 스스로 높아지려고 자기광고를 열심히 하는 사람, TV에 얼굴 내미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들, 그러나 그렇다고 높아지는 것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높여주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종의 형체로 낮아지셔서 죽기까지 복종했으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셔서 온 세상을 그의 앞에 무릎 꿇게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빌2:9-10)
여호와 하나님이 높여야 진정으로 높아집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마리아도 보십시오. 평범한 시골처녀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위대한 결단이 그녀를 성모 마리아로 만들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면 그것이 가장 성공적인 신앙의 삶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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