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성탄의 기쁜 소식
본문
성탄절을 맞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위에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해마다 성탄절을 맞이하지만 금년도 성탄절을 맞이하게 될 때 더욱 더 감회가 깊다. 그것은 금년 들어 인류가 그 어느 때보다도 테러와 전쟁의 위기, 중동의 분쟁과 피 흘림, 많은 재난들 그리고 경제적 불황으로 허덕여 온 까닭이다.
이러한 불안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맞는 크리스마스이기에 우리는 평화의 왕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그래도 우리 민족에게는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월드컵과 4강 진출로 온 국민의 사기가 충천했으며 온 국민이 하나로 묶어지는 큰 기쁨을 경험했다. 뿐 만 아니라 새 대통령이 탄생되는 뜻깊은 해였다. 감사한 것은 지금 세계 도처에서 기독교 복음이 잘 전파되고 있다. 특별히 아프리카에서는 놀랄 정도로 기독교 복음이 급파되고 있다. 매해 600백 만 명씩 기독교 인구가 늘고 있다. 즉 시대적 불안과 인간들의 내적 갈등이 물질 문명 속에서 찾아오는 정신적 허탈감과 잘 결합되어 더욱 더 강렬하게 종교로 귀의하는 현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할리우드의 명배우들도 마음의 평온을 찾아 최근 종교로 귀의하는 숫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언뜻 보기에는 할리우드의 명우들은 모두 모자라는 것이 없을 만큼 호화판 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그들의 내면적인 삶은 그처럼 빈곤하고 허탈스러울 수가 없다. 그래서 술과 성과 마약으로 마음을 가라앉혀 보려고 하지만 알코올의 약기가 다하는 순간 찾아오는 공허함은 더욱 더 큰 것이다. 약 기운이 다 끝난 때 찾아오는 무력감은 더 견딜 수 없는 절망적인 것이다.
스탠포드 대학의 정신의학자인 윌리엄 프라이 교수는 그들이 종교로 돌아오게 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할리우드는 놀라우리 만큼 비현실적인 세계로 전통적인 교회나 가정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배우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는 방법을 스스로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많은 수가 약물이나 알코올, 섹스로 자신들의 공허감을 메우려 하였으나 그것으로 문제의 해결이 어려웠던 것이다. 이 같은 결과로 그들은 결국 종교에 귀의하게 된 것이다. '
지금 소련에서는 알코올 중독자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소련의 1인당 술값은 미국사람의 2배가 된다고 한다. 공산주의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도 안정되지 않은 그들은 술로 써 자신들의 불만과 문제를 해소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알코올 중독자가 생기게 되는 것이라고 풀이된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선교적인 차원에서 볼 때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사회 속에서 또 하나의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좀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이런 상황 속에서 성탄절이 갖다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성탄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를 물어보아야 하겠다. 오래 예수를 믿는 이들이 범하기 쉬운 과오가 하나의 형식적인 행사로 이 성탄절을 맞이하기 쉬운 점이다. 그렇게 될 때 금년 성탄절은 나에게 별 의미가 없는 날이 될 것이고 아무런 새 사건이나 축복의 사건도 일으키지 못하는 평범한 날이 되고 말 것이다. 이 날이 참으로 나에게 의미 있고 축복된 날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이 날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언제인가 일본에서는 여자중학교 2학년 학생이 수석을 다투던 동급학생을 칼로 찔러 죽였다. 그 어린이 생각에는 그 놈만 죽이면 자기가 수석을 독차지 할 수 있을 것이란 경쟁심 때문에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이것은 경쟁사회가 갖다주는 비극을 잘 설명해준다. 그런가 하면 지금 세계 도처에선 굶주려 죽어 가는 가난한 백성이 수없이 많다. 아시아와 남미와 아프리카에서는 억압과 착취로 유린된 생명의 아우성 소리가 점점 더 높아간다. 이러한 경쟁과 갈등이 격심한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탄생이 갖는 뜻이 무엇인가 이 질문을 우리가 던져 봄으로 금년도 성탄절을 맞이해야겠다.
본문을 읽어보면 성탄절은 한 마디로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 주신 날"이다. 성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신 날이다. 그 이유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요한복음의 요절이라 할 수도 있지만 어떤 점에서 성경 전체의 요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구절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 구절을 가리켜 작은 복음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이 구절 속에 복음의 전 내용이 요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구절만큼 예수님의 오신 목적을 간단명료하게 요약해 주는 구절이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게 된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신 때문이었다. 이 세상은 아름답고 선한 세상이 못되었다. 죄로 물들고 반역과 타락으로 병들었으며 부도덕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갈등과 착취와 억압으로 멍든 세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세상을 구원키 위해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의 손길을 뻗치셨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사랑이었다. 인간들의 사랑은 끼리끼리의 사랑이라 친한 사람들끼리만 사랑한다. 조금만 이해관계가 틀리고 손해가 나도 담을 쌓는다. 조금만 억울한 일을 당해도 원수가 되고 만다. 인간들의 사랑은 출세하고 성공하며 잘 될 때의 사랑이다. 실패하고 병들고 낮아질 때 되돌아서고 만다. 성탄절은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구체화된 날이요 사건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역사 속에 나타내 보이신 날이다. 특별히 이 사랑으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 인간들에게 세 가지 축복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첫째는 속죄의 길이다.
인간들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다.
죄짓고는 못사는 것이다. 이것이 많은 죄수들의 고백이다. 죄를 범하게 될 때 기쁨이 사라지게 된다. 자유와 평화가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만다. 우리를 죄의 노예가 되게 한다. 이 죄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는 길은 이제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의 죄를 대신 져줄 수 있는 죄 없는 분이 오셔야 했고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어떤 능력자가 필요했다. 우리가 성경에 보는 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와 사랑으로 표현되어있다. 구약이 공의를 강조한데 비해 신약은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에서 집약되었다. 어떤 이가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지만 한 가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죄지은 인간들 앞에서 하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셨다. 공의로 심판한다면 인간을 멸망시켜야 하겠지만 또 사랑으로 보실 때 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셔야만 했다.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아픔이 있었다. 그대로 용서 하려니 공의에 위배되고 공의로 심판하려니 사랑에 갈등을 가져 오게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의 죽으심이다.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교차점이었고 동시에 또한 완성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둘째로 성탄은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축복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예수란 이름이 그리스도의 속죄사업을 말해 주는 대명사라면 임마누엘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된 축복을 말해준다. 사랑은 함께 사는 즐거움을 갖다준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사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서 그를 아바 아바지라 부르며 살아가는 기쁨과 은총처럼 큰 축복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곳에 높은 산이 낮아지고 낮은 산이 높아지며 불의의 계곡이 공의의 대로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의 찬송이 울려 퍼지고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의 노래가 불리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겼고 내리면 졌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축복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히브리 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내가 두려워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고 했다. 바울도 로마서 8장에서 "만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외쳤다.
셋째로 성탄은 우리에게 영생의 삶을 축복해 주셨다.
영생이란 영원히 산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영원히 살 수 있을까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나눠 가지며 그의 영원한 생명에 접붙임을 받을 때 가능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 거하게 되었고 그의 영원한 생명에 접붙임을 받게 되었다.
시인 괴테는 '죽어도 산다는 이 진리를 알기까지에는 아무래도 우수한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영생의 진리를 찾기까지 인간에겐 참 평안이나 행복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이 세상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에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고 말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요 18:36)고 선언하셨다. 이 말씀은 결코 현실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 속에는 현실로 끝나지 않는 영원한 삶이 있고 영원한 나라가 있음을 지적해 주는 말이다. 최근 죽음 뒤의 세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연구단체도 생기고 책도 나오고 심지어는 영화도 나왔다. '국제 생명 뒤의 생명 경험 협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일단 사경을 경험한 사람들은 되살아난 후에 ① 내세관을 믿게 되고 ②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며 ③ 융통성이 커지고 ④ 신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며 ⑤ 성격과 행동이 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모두 우리 인간의 삶은 현실적인 것 이상으로 내세로 연결되는 삶이 있음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그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로서 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통하여 허락해 주신 이 세 가지 속죄의 은총과 함께 하시는 고통과 영생의 축복을 어떻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인가
본문에 보면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 이 세 가지 축복이 임할 것을 말씀했다. 그럼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쉽게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신앙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시고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허락하시며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믿는다는 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에 대해 나도 사랑으로 응답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바울도 우리가 구원 얻는 것은 할례나 무할례나 문제가 아니라 사랑으로써 역사 하는 믿음뿐이라고 했다. (갈 5:6)
레미제라불과 노틀담의 곱추 등 명작을 통해 유명해 진 빅토 유고는 사생활은 깨끗하지 못했다. 그는 가정을 돌보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자 사랑하는 딸 레오풀디느가 아버지의 회개를 호소하는 편지를 써놓고 세느강에 투신 자살을 하였다. 이 일로 유고는 큰 충격을 받았고 새 사람이 되었다. 그는 그후 후생국에 취직하여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열심히 사랑으로 섬겼다. 그의 이러한 인격과 섬김이 인정을 받아 프랑스의 교육부 장관으로 발탁되어 섬기게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내 딸은 천사였으며, 내 딸을 통해 예수님이 나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불러주셨다'고 고백했다.
미국의 한 병사는 전쟁에서 자기 대신 친구가 보초를 서다가 적군에게 사살되자 자기가 죽을 터인데 친구가 자기 대신에 죽었다고 생각되어 평생 동안 그 친구를 잊을 수 없었고 그 친구를 기념하기 위해 학교를 세운 일이 있다.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사랑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의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러한 사랑의 충동이 없고 사랑의 응답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죽은 것이요 가짜이다.
십 몇 년 전 12월 10일 인권기념일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대통령에게 표창을 받은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최남순이란 수녀였다. 그녀는 15년 동안 감옥에 있는 수 천명에게 참으로 따뜻한 어머니의 사랑을 베풀어주는 봉사를 해왔다. 그녀가 예수를 믿고 영세를 받게 한 수만도 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녀는 표창을 받으면서 세 사형수(이베드로, 김요한, 이유리아나)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푼의 돈 때문에 그리고 타락한 남편이 미워서 순간의 살인을 저질렀던 그들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여호와 하나님 곁으로 돌아갈 때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형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자신들의 눈과 신장을 그에게 맡겨 다른 사람의 눈과 건강을 밝혔다.
이 얼마나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이야기인가 사형수들의 회개도 훌륭하지만 일생을 주님을 위해 몸 바치며 살아가는 그 수녀의 삶은 얼마나 더 아름다운가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했는가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에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 그 주님의 사랑이 그녀로 하여금 그러한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 그 주님의 사랑이 그녀로 하여금 그러한 사랑의 봉사를 가능케 했다.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 어리석은 것이다. 사랑은 이기적이 아니며 주는 것이다.
파리의 어느 조그마한 2층 다락방에서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되어진 이야기이다. 한 조각가가 굶주리고 추위에 떨면서 몇 달 동안 밤새도록 진흙덩어리를 앞에 놓고 자기 머리 속의 영상을 거기에 새기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었다. 오래 동안 노력한 끝에 그 작품이 거의 다 완성되었다. 그 순간 천장으로 난 창문의 깨어진 유리사이로 눈보라가 휘몰아쳐 들어왔다. 그때야 그 조각가는 바깥날씨가 춥다는 것을 깨닫고 이 추위에 자기의 작품이 얼어 터질까봐 염려가 되어 자기가 입고 있던 남루한 겉옷을 벗어 그 조각에 입혔다. 얼마 후 날이 밝았을 때 그 조각가는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어 있었다.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말해주지만 그 한 가지가 이 조각가의 자기 작품에 대한 어리석은 사랑이다.
사랑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불란서 영화 중에 벌거벗은 사랑이란 영화가 굉장히 인기를 끈 적이 있다. 내용은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에서 통역사로 일하는 미모의 젊은 여성 '클레어'가 젊고 멋있는 청년 해양학자인 '시몽'을 알게되어 사랑에 빠지게된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 때부터 꿈같이 진행되어 절정에 오르고 서로 장래를 약속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클레어에게 뜻밖의 불행이 찾아온다. 그녀의 한쪽 유방에서 심상치 않은 징후가 발견된 것이다. 유방암이었다. 그녀는 암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면서 모든 아름답던 행복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만다.
그는 시몽 몰래 한쪽 유방을 떼어내는 수술을 하고 시몽의 사랑을 잃을 것이 두려워 그냥 말없이 시몽을 떠나가 버린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들의 사랑이 끝나지는 않았다. 클레어의 진실을 안 시몽은 그녀를 더 할 수 없이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참 사랑은 상대방의 약점과 걸림까지도 사랑 할 수 있는 사랑이다.
제가 캐나다에서 목회할 때이다. 성탄절에 교회가 어떤 어려움을 겪는 가정에 얼마의 돈을 전해 준 일이 있다. 그런데 그 분은 자기보다 더 어렵고 고생하는 분에게 그것을 전달해 달라고 해서 그것을 전달한 일이 있다.
성탄절이 될 때마다 가끔 그 교우의 아름다운 사랑이 생각난다. 참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 어리석은 것이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상대방의 유익을 구한다. 아니 상대방의 약점이나 걸림돌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금년 성탄절에는 이러한 사랑의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계절이 되었으면 한다. 특별히 기쁜 성탄의 소식이 제일 먼저 가난하고 연약하며 불쌍한 목자들에게 전해졌듯이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외롭고 병든 이웃을 찾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계절이 될 때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줄 믿는다.
이러한 불안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맞는 크리스마스이기에 우리는 평화의 왕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그래도 우리 민족에게는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월드컵과 4강 진출로 온 국민의 사기가 충천했으며 온 국민이 하나로 묶어지는 큰 기쁨을 경험했다. 뿐 만 아니라 새 대통령이 탄생되는 뜻깊은 해였다. 감사한 것은 지금 세계 도처에서 기독교 복음이 잘 전파되고 있다. 특별히 아프리카에서는 놀랄 정도로 기독교 복음이 급파되고 있다. 매해 600백 만 명씩 기독교 인구가 늘고 있다. 즉 시대적 불안과 인간들의 내적 갈등이 물질 문명 속에서 찾아오는 정신적 허탈감과 잘 결합되어 더욱 더 강렬하게 종교로 귀의하는 현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할리우드의 명배우들도 마음의 평온을 찾아 최근 종교로 귀의하는 숫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언뜻 보기에는 할리우드의 명우들은 모두 모자라는 것이 없을 만큼 호화판 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그들의 내면적인 삶은 그처럼 빈곤하고 허탈스러울 수가 없다. 그래서 술과 성과 마약으로 마음을 가라앉혀 보려고 하지만 알코올의 약기가 다하는 순간 찾아오는 공허함은 더욱 더 큰 것이다. 약 기운이 다 끝난 때 찾아오는 무력감은 더 견딜 수 없는 절망적인 것이다.
스탠포드 대학의 정신의학자인 윌리엄 프라이 교수는 그들이 종교로 돌아오게 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할리우드는 놀라우리 만큼 비현실적인 세계로 전통적인 교회나 가정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배우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는 방법을 스스로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많은 수가 약물이나 알코올, 섹스로 자신들의 공허감을 메우려 하였으나 그것으로 문제의 해결이 어려웠던 것이다. 이 같은 결과로 그들은 결국 종교에 귀의하게 된 것이다. '
지금 소련에서는 알코올 중독자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소련의 1인당 술값은 미국사람의 2배가 된다고 한다. 공산주의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도 안정되지 않은 그들은 술로 써 자신들의 불만과 문제를 해소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알코올 중독자가 생기게 되는 것이라고 풀이된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선교적인 차원에서 볼 때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사회 속에서 또 하나의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좀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이런 상황 속에서 성탄절이 갖다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성탄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를 물어보아야 하겠다. 오래 예수를 믿는 이들이 범하기 쉬운 과오가 하나의 형식적인 행사로 이 성탄절을 맞이하기 쉬운 점이다. 그렇게 될 때 금년 성탄절은 나에게 별 의미가 없는 날이 될 것이고 아무런 새 사건이나 축복의 사건도 일으키지 못하는 평범한 날이 되고 말 것이다. 이 날이 참으로 나에게 의미 있고 축복된 날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이 날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언제인가 일본에서는 여자중학교 2학년 학생이 수석을 다투던 동급학생을 칼로 찔러 죽였다. 그 어린이 생각에는 그 놈만 죽이면 자기가 수석을 독차지 할 수 있을 것이란 경쟁심 때문에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이것은 경쟁사회가 갖다주는 비극을 잘 설명해준다. 그런가 하면 지금 세계 도처에선 굶주려 죽어 가는 가난한 백성이 수없이 많다. 아시아와 남미와 아프리카에서는 억압과 착취로 유린된 생명의 아우성 소리가 점점 더 높아간다. 이러한 경쟁과 갈등이 격심한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탄생이 갖는 뜻이 무엇인가 이 질문을 우리가 던져 봄으로 금년도 성탄절을 맞이해야겠다.
본문을 읽어보면 성탄절은 한 마디로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 주신 날"이다. 성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신 날이다. 그 이유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요한복음의 요절이라 할 수도 있지만 어떤 점에서 성경 전체의 요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구절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 구절을 가리켜 작은 복음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이 구절 속에 복음의 전 내용이 요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구절만큼 예수님의 오신 목적을 간단명료하게 요약해 주는 구절이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게 된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신 때문이었다. 이 세상은 아름답고 선한 세상이 못되었다. 죄로 물들고 반역과 타락으로 병들었으며 부도덕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갈등과 착취와 억압으로 멍든 세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세상을 구원키 위해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의 손길을 뻗치셨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사랑이었다. 인간들의 사랑은 끼리끼리의 사랑이라 친한 사람들끼리만 사랑한다. 조금만 이해관계가 틀리고 손해가 나도 담을 쌓는다. 조금만 억울한 일을 당해도 원수가 되고 만다. 인간들의 사랑은 출세하고 성공하며 잘 될 때의 사랑이다. 실패하고 병들고 낮아질 때 되돌아서고 만다. 성탄절은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구체화된 날이요 사건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역사 속에 나타내 보이신 날이다. 특별히 이 사랑으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 인간들에게 세 가지 축복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첫째는 속죄의 길이다.
인간들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다.
죄짓고는 못사는 것이다. 이것이 많은 죄수들의 고백이다. 죄를 범하게 될 때 기쁨이 사라지게 된다. 자유와 평화가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만다. 우리를 죄의 노예가 되게 한다. 이 죄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는 길은 이제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의 죄를 대신 져줄 수 있는 죄 없는 분이 오셔야 했고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어떤 능력자가 필요했다. 우리가 성경에 보는 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와 사랑으로 표현되어있다. 구약이 공의를 강조한데 비해 신약은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에서 집약되었다. 어떤 이가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지만 한 가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죄지은 인간들 앞에서 하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셨다. 공의로 심판한다면 인간을 멸망시켜야 하겠지만 또 사랑으로 보실 때 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셔야만 했다.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아픔이 있었다. 그대로 용서 하려니 공의에 위배되고 공의로 심판하려니 사랑에 갈등을 가져 오게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의 죽으심이다.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교차점이었고 동시에 또한 완성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둘째로 성탄은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축복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예수란 이름이 그리스도의 속죄사업을 말해 주는 대명사라면 임마누엘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된 축복을 말해준다. 사랑은 함께 사는 즐거움을 갖다준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사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서 그를 아바 아바지라 부르며 살아가는 기쁨과 은총처럼 큰 축복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곳에 높은 산이 낮아지고 낮은 산이 높아지며 불의의 계곡이 공의의 대로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의 찬송이 울려 퍼지고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의 노래가 불리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겼고 내리면 졌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축복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히브리 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내가 두려워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고 했다. 바울도 로마서 8장에서 "만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외쳤다.
셋째로 성탄은 우리에게 영생의 삶을 축복해 주셨다.
영생이란 영원히 산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영원히 살 수 있을까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나눠 가지며 그의 영원한 생명에 접붙임을 받을 때 가능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 거하게 되었고 그의 영원한 생명에 접붙임을 받게 되었다.
시인 괴테는 '죽어도 산다는 이 진리를 알기까지에는 아무래도 우수한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영생의 진리를 찾기까지 인간에겐 참 평안이나 행복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이 세상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에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고 말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요 18:36)고 선언하셨다. 이 말씀은 결코 현실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 속에는 현실로 끝나지 않는 영원한 삶이 있고 영원한 나라가 있음을 지적해 주는 말이다. 최근 죽음 뒤의 세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연구단체도 생기고 책도 나오고 심지어는 영화도 나왔다. '국제 생명 뒤의 생명 경험 협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일단 사경을 경험한 사람들은 되살아난 후에 ① 내세관을 믿게 되고 ②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며 ③ 융통성이 커지고 ④ 신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며 ⑤ 성격과 행동이 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모두 우리 인간의 삶은 현실적인 것 이상으로 내세로 연결되는 삶이 있음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그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로서 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통하여 허락해 주신 이 세 가지 속죄의 은총과 함께 하시는 고통과 영생의 축복을 어떻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인가
본문에 보면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 이 세 가지 축복이 임할 것을 말씀했다. 그럼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쉽게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신앙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시고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허락하시며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믿는다는 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에 대해 나도 사랑으로 응답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바울도 우리가 구원 얻는 것은 할례나 무할례나 문제가 아니라 사랑으로써 역사 하는 믿음뿐이라고 했다. (갈 5:6)
레미제라불과 노틀담의 곱추 등 명작을 통해 유명해 진 빅토 유고는 사생활은 깨끗하지 못했다. 그는 가정을 돌보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자 사랑하는 딸 레오풀디느가 아버지의 회개를 호소하는 편지를 써놓고 세느강에 투신 자살을 하였다. 이 일로 유고는 큰 충격을 받았고 새 사람이 되었다. 그는 그후 후생국에 취직하여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열심히 사랑으로 섬겼다. 그의 이러한 인격과 섬김이 인정을 받아 프랑스의 교육부 장관으로 발탁되어 섬기게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내 딸은 천사였으며, 내 딸을 통해 예수님이 나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불러주셨다'고 고백했다.
미국의 한 병사는 전쟁에서 자기 대신 친구가 보초를 서다가 적군에게 사살되자 자기가 죽을 터인데 친구가 자기 대신에 죽었다고 생각되어 평생 동안 그 친구를 잊을 수 없었고 그 친구를 기념하기 위해 학교를 세운 일이 있다.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사랑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의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러한 사랑의 충동이 없고 사랑의 응답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죽은 것이요 가짜이다.
십 몇 년 전 12월 10일 인권기념일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대통령에게 표창을 받은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최남순이란 수녀였다. 그녀는 15년 동안 감옥에 있는 수 천명에게 참으로 따뜻한 어머니의 사랑을 베풀어주는 봉사를 해왔다. 그녀가 예수를 믿고 영세를 받게 한 수만도 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녀는 표창을 받으면서 세 사형수(이베드로, 김요한, 이유리아나)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푼의 돈 때문에 그리고 타락한 남편이 미워서 순간의 살인을 저질렀던 그들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여호와 하나님 곁으로 돌아갈 때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형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자신들의 눈과 신장을 그에게 맡겨 다른 사람의 눈과 건강을 밝혔다.
이 얼마나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이야기인가 사형수들의 회개도 훌륭하지만 일생을 주님을 위해 몸 바치며 살아가는 그 수녀의 삶은 얼마나 더 아름다운가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했는가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에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 그 주님의 사랑이 그녀로 하여금 그러한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 그 주님의 사랑이 그녀로 하여금 그러한 사랑의 봉사를 가능케 했다.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 어리석은 것이다. 사랑은 이기적이 아니며 주는 것이다.
파리의 어느 조그마한 2층 다락방에서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되어진 이야기이다. 한 조각가가 굶주리고 추위에 떨면서 몇 달 동안 밤새도록 진흙덩어리를 앞에 놓고 자기 머리 속의 영상을 거기에 새기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었다. 오래 동안 노력한 끝에 그 작품이 거의 다 완성되었다. 그 순간 천장으로 난 창문의 깨어진 유리사이로 눈보라가 휘몰아쳐 들어왔다. 그때야 그 조각가는 바깥날씨가 춥다는 것을 깨닫고 이 추위에 자기의 작품이 얼어 터질까봐 염려가 되어 자기가 입고 있던 남루한 겉옷을 벗어 그 조각에 입혔다. 얼마 후 날이 밝았을 때 그 조각가는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어 있었다.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말해주지만 그 한 가지가 이 조각가의 자기 작품에 대한 어리석은 사랑이다.
사랑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불란서 영화 중에 벌거벗은 사랑이란 영화가 굉장히 인기를 끈 적이 있다. 내용은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에서 통역사로 일하는 미모의 젊은 여성 '클레어'가 젊고 멋있는 청년 해양학자인 '시몽'을 알게되어 사랑에 빠지게된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 때부터 꿈같이 진행되어 절정에 오르고 서로 장래를 약속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클레어에게 뜻밖의 불행이 찾아온다. 그녀의 한쪽 유방에서 심상치 않은 징후가 발견된 것이다. 유방암이었다. 그녀는 암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면서 모든 아름답던 행복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만다.
그는 시몽 몰래 한쪽 유방을 떼어내는 수술을 하고 시몽의 사랑을 잃을 것이 두려워 그냥 말없이 시몽을 떠나가 버린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들의 사랑이 끝나지는 않았다. 클레어의 진실을 안 시몽은 그녀를 더 할 수 없이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참 사랑은 상대방의 약점과 걸림까지도 사랑 할 수 있는 사랑이다.
제가 캐나다에서 목회할 때이다. 성탄절에 교회가 어떤 어려움을 겪는 가정에 얼마의 돈을 전해 준 일이 있다. 그런데 그 분은 자기보다 더 어렵고 고생하는 분에게 그것을 전달해 달라고 해서 그것을 전달한 일이 있다.
성탄절이 될 때마다 가끔 그 교우의 아름다운 사랑이 생각난다. 참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 어리석은 것이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상대방의 유익을 구한다. 아니 상대방의 약점이나 걸림돌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금년 성탄절에는 이러한 사랑의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계절이 되었으면 한다. 특별히 기쁜 성탄의 소식이 제일 먼저 가난하고 연약하며 불쌍한 목자들에게 전해졌듯이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외롭고 병든 이웃을 찾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계절이 될 때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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