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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성탄이 필요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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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여름 때의 일입니다.
빵집에 들어갔다가 빙수를 광고하는 포스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먹음직스런 빙수가 한가운데 크게 자리 잡고 있고 그 배경으로는 보기에도 시원하게 스키를 타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 포스터였습니다.
그리고 큰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 ‘팥빙수가 있어서 시원한 여름’
그 광고 문구가 제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팥빙수가 있어서 시원한 여름’이라는 얘기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팥빙수를 한 입 가득 입에 물어서 입안이 얼얼할 만큼 시원하다는 느낌이 드십니까, 아니면 몸에 땀이 끈적끈적 배는 여름의 무더위가 생각나십니까
‘와, 시원하겠다!’라는 느낌보다는 ‘여름은 역시 덥지’라는 느낌이 먼저 들지 않습니까
물론 빙수가 시원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빙수가 필요하다는 얘기만으로 이미 날씨가 덥다는 뜻입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만 되면 사람들은 흥청거립니다.
교회보다 백화점이나 호텔에서 크리스마스를 훨씬 더 많이 얘기합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으면서 대체 왜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랬던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믿지 않는 친구로부터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를 받았습니다.
모처럼 통화를 했는데 마침 연말이어서 그 친구가 저한테 그런 말을 한 모양이었는데, 짐짓 퉁명하게 쏘아붙였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야, 넌 교회도 안 다니면서 크리스마스하고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메리 크리스마스냐”
“왜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은 크리스마스하고 상관없는 거냐”
“그럼, 일단 교회를 다녀야 크리스마스하고 관계가 생기지. ”
“그런 법이 어디 있냐”
“크리스마스는 말 그대로 예수님이 오신 것을 기념해서 만든 날인데, 크리스마스 인사를 하려면 최소한 예수는 믿어야 할 거 아냐”
그 친구는 제 얘기를 농담으로 받아들였습니다만 저는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도 믿지 않으면서 대체 크리스마스는 왜 찾는 것입니까
사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시비 걸 마음이 없습니다.
문제는 믿는 사람들마저 크리스마스가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는 사실입니다.
12월만 되면 어느 교회에서나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는 표어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물론 기쁜 날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라는 이유로 자기들끼리 히히덕거리며 노는 것을 즐깁니다만 우리는 주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뻐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 이전에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주님이 오시는 것이 필요한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오늘 본문 말씀은 신구약 성경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요3:16 말씀에 아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가 필요한 세상이라는 사실에 수긍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독생자가 왜 필요합니까
독생자가 왜 필요한지를 알려면 독생자가 없으면 어느 만큼 큰일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멸망할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나마 예수가 있으면 멸망하지 않을 기회를 얻게 되는데, 예수가 없으면 아예 그 기회조차도 박탈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구주가 오시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기쁨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아닌게아니라 이 내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를 믿지 않으면 ‘본전’인데 예수를 믿었으니까 믿은 만큼 자기에게 좋은 일이 있어야 하는 줄 압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제대로 모릅니다.
부교역자 시절의 일입니다.
청년부와 중고등부를 맡아서 지도했었는데, 청년부 때문에 상당히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부임해서 첫 번째로 토요 청년예배를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예배 시간이 6시였는데, 그 시간이 되도록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예배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두 명이 왔습니다.
그 다음 예배 시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청년예배 시간에는 늘 두 명이나 세 명이었습니다.
가끔은 맨투맨으로 예배를 드리기도 했고, 심지어는 청년이 아무도 없어서 혼자 거울을 갖다 놓고 예배를 드렸던 적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청년이 없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주일예배 때는 이십 여명에 가까운 청년이 모이곤 했었는데, 청년예배 때는 아무도 안 나오는 분위기였습니다.
궁여지책으로 청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청년들이 매주 예배드리러 와야 정상인데 아무도 오지 않으니 일주일에 한 번 편지라도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그 편지를 받은 청년들은 어떤 생각을 해야 합니까
‘새로 온 전도사는 굉장히 극성맞은 사람이구나’가 아닙니다.
‘새로 온 전도사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니 우리가 무지하게 안 모이는 모양이로구나’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모르면 편지를 아무리 받아도 자기들의 신앙 유익으로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단지 편지만 읽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가 전부가 아닙니다.
대체 우리의 형편이 어떻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는 일이 필요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흔히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상태에서 처해 있는 형편은 굉장히 심각한 형편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이라는 말을 쓸 수 있으려면 먼저 구원이 필요한 상황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이 난 건물에서 빠져나오든지, 침몰해 가는 배에서 빠져나와야 구원 얻었다고 하지, 잔디밭에서 놀다가 나와서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실감할 수 있으려면, 예수님이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사실을 모르면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백 날 얘기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사건을 놓고 복음이라고 합니다.
Good News,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본래 복음은 전쟁 용어입니다.
지금은 통신이 발달해서 전쟁 상황도 TV로 지켜봅니다만 전에는 사람이 일일이 직접 가서 소식을 전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라톤의 기원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주전 490년에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세계 최강대국이었습니다.
전쟁에 동원된 페르시아 군대는 보병 10만에 기갑 1만이었는데 그리스 군대는 고작해야 기갑 1만 명뿐이었습니다.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진 곳이 마라톤 평야였는데, 젊은 사람들은 죄다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노인과 여자, 어린아이뿐입니다.
그들은 자나 깨나 전쟁터에서 오는 소식만 기다릴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자기네가 이기면 다행입니다만 만일 진다면 자기들은 전부 포로로 끌려가야 합니다.
이제나 저제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어느 날 멀리서 뛰어오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입니다.
그때 소식을 전한 사람이 필리피데스인데, 필리피데스 입에서 어떤 소식이 나오느냐에 따라서 자기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입니다.
드디어 필리피데스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외칩니다.
“우리가 이겼다!” -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이겼다!”는 그 한 마디에 그 성은 완전히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자기들이 들을 수 있는 소식 중에 가장 반가운 소식을 들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졌다”라는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자기들은 조만간 노예로 전락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쁘다 구주 오셨네’는 주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얼마나 큰일 날 뻔했는지에 대한 자각이 먼저 있은 연후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하면 안 됩니다.
어린 시절에 삼촌이나 이모가 집에 찾아오면 괜히 신났습니다.
갈 적에 용돈을 주고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촌이나 이모가 안 왔다고 해서 특별히 불편한 것은 없습니다.
세 끼 밥 먹는 데도 지장 없고, 학교 다니는 데도 지장 없습니다.
그러니 ‘삼촌이나 이모가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는데, 와서 다행이다’가 아닙니다.
단지 ‘모처럼 공돈이 생겨서 신난다’입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는 그런 식의 기쁨은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지 않았어도 우리끼리 대충 살 수 있는데 주님이 오셨으니까 보너스로 더 잘 살 수 있겠다’가 아닙니다.
이런 사실을 알았으면 적어도 성탄은 좀 더 차분하게 맞을 필요가 있습니다.
대체 우리가 얼마나 한심하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시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그 아들을 직접 보내셨는지를 심각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부터 우리의 신앙이 시작됩니다.
공부를 하려면 자기가 어느 만큼 실력이 없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자기가 어느 만큼 심각하게 죄에 오염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고작해야 로또복권 당첨되는 것 말고는 소원할 것이 없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생각에 이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이 예수였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나에게는 예수가 필요합니다’라는 얘기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마냥 들뜬 분위기로 보낼 것이 아니라 마치 학생들이 시험 성적표를 받아든 것처럼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들을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에 더욱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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